향기성애자 권순영 10 권순영은 순간 당황해 어쩔줄을 몰라한다. 잠시 몸이 굳는가 싶더니, 천천히 마주 안는다. 나를 달래듯 살며시 등을 토닥인다. 난 더 서럽게 운다. 권순영은 그저 나를 안고 있는다. "무서운 꿈 꿨어?" 목소리가 참 부드럽다. 난 고개를 젓는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대답을 하고 싶지만 흐느낌밖에 나오지 않아서 입을 꾹 다문다. "울어, 괜찮아." 권순영이 나직히 말한다. 참았던 아픔이 터져나온다. 밖으로, 권순영에게로 숨김 없이 흘러나온다. 떨리는 울음을 뱉는다. 권순영의 품 안에서 모든걸 쏟아낸다. 마침내 나는 끅끅대며 울기 시작한다. 그제서야 참아왔던 말들을 서럽게 꺼낸다. 부르고 싶었다. 그 이름을. 권순영, 순영아. 계속해서 부른다. 행여라도 떠나갈까봐. 이 손을 놓치면 또 다시 그 해 겨울이 돌아올까봐. 가지말라고 온 힘을 다해 붙잡는다. "순영아..." "응," 권순영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너도...너도 그럴거지." "...뭘?" 너도 떠날거지. 쓰디쓴 뒷말을 속삭인다. 권순영의 어깨는 긴장감 없이 편안하다. 난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애초에 답을 바라지 않았기에. 난 훌쩍인다. 눈물이 권순영의 어깨를 적신다. "아니, 안가. 여기 있어." 고개를 살짝 든다. 권순영은 나를 안심시키듯 눈을 맞춘다. 바보.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밑도 끝도 없이 다정하기만 하지. 눈물에 가려 권순영이 흐려진다. 눈을 꾹 감는다. 눈을 감아도 권순영이 보인다. 따뜻하게 나를 보며 웃어주는 얼굴. 이제 알겠다. 난, 네가 필요하다. 권순영은 내 머리를 조심스레 받치고는 눈물을 닦아준다. 아직도 빠른 숨을 고르다 눈을 뜬다. 시선이 마주친다. 권순영은 옅게 미소짓는다. 눈물이 천천히 멎는다. 말없이 권순영을 바라보다가 문득 정신이 든다. 갑작스레 권순영에게 안겼다는 사실이 머리를 스친다. 민망함에 슬쩍 몸을 뒤로 뺀다. 주위를 둘러싼 공기가 어색해진다. "왜 그래." "아, 아니. 그냥." 권순영은 눈썹을 들어 올린다. 난 말을 더듬다 고개를 푹 숙인다.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권순영은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마주친다. 나는 얼굴을 옆으로 돌린다. 권순영은 웃음을 터트린다. "먼저 안은게 누구였더라," 목소리가 장난스럽다. 귀를 타고 내려오는 말이 간지럽다. 대답하지 않는다. 권순영은 양 볼을 감싸고 눈을 마주치게 한다. 지금 엄청 흉할텐데. 손을 들어올려 얼굴을 가린다. 손틈새로 권순영의 웃는 얼굴이 보인다. 볼을 감싸던 손을 내리더니 팔을 벌린다. 난 살며시 손을 내린다. "아까처럼, 안겨봐." 얼굴이 확 붉어진다. 고개를 돌릴 정신도 없어서 멍하니 눈만 깜빡인다. 권순영이 환하게 웃는다. 싫으면 내가 안고. 권순영의 말을 알아듣기도 전에 나를 안아 온다. 정신이 아득하다. 난 꼼짝없이 권순영의 품에 갇힌다. 숨을 쉬긴 쉬는데, 이게 잘 쉬고 있는건지 모르겠고. 심장이 뛰긴 뛰는데, 이게 똑바로 뛰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눈만 겨우시 뜨고 있다 정신을 차린다. 버둥거리며 권순영을 밀어내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결국 포기한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권순영에게서 기분좋은 향기가 난다. 은은한 샴푸향. 뭔가 생각나려 한다. 샴푸향...그래, 그래. 같이 매점에 갔던 날. 무슨 향이 좋냐고 물었었지. 이제서야 떠오른다. 이상하게 자꾸 웃음이 터져 나온다. 눈을 감는다.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아. 권순영의 품은 너무 따뜻하다. 차가운 겨울을 다 녹여버릴 만큼. "여주야." "응?" "점심시간도 늦었는데 오늘은 나가서 먹을까?" "좀 있다 종 치잖아." "뭐 어때." "그럼 5교시는..." "째자." 못됐어. 뒤로 물러나 권순영을 째려본다. 권순영은 날 바라보다 풉, 웃음을 터트린다. "무슨 째려보는 것도 이렇게..." "그만." 뒷말은 안들어도 뻔하다. 더 눈을 매섭게 뜨고 다시 한번 째려본다. 가만히 권순영을 쳐다보다 풉, 못참겠다. 이번엔 내가 웃음을 터트린다. 함께 한참을 웃는다. 학교 앞 편의점에 도착한다. 얼마만에 오는 곳이냐. 권순영의 뒤를 따라가며 편의점을 둘러본다. 권순영은 오는 길에 물어 알아낸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골라 집고 있다. 벌써 양손 가득이다. 말려도 내려놓지 않을 걸 알기에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다. 권순영은 자기가 생각한 것 한가지만 집중하는 성격이다. 표정이 어울리지 않게 심각하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온다. 뭐가 저렇게 진지해. 계산대 앞으로 향하기 전 마지막으로 권순영은 초코빵과 초코우유를 집어든다. 오늘은 내가 계산해야되는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 권순영이 물건을 내려놓는 사이 재빨리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빨리. 손을 빼려는데 쓰읍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돈 꺼낼 생각도 하지마." 깜짝이야. 어떻게 알았대. 권순영은 뒤도 안 돌아보고 말한다. 노란 뒷통수를 바라보며 심장을 가라 앉힌다. 참 나. 누구는 못내는 줄 알고. "오늘은 내가 낼거야." "너 계속 그러면 한번 더 안아줄거야." 말문이 막힌다. 점원이 들었을텐데. 슬쩍 점원의 얼굴을 살핀다. 흐뭇한 표정이다. 아 진짜. 그런거 아닌데. 얼굴에 열이 오른다. 안절부절하며 주위를 살핀다. 돈 낼 생각은 잊은지 오래다. 권순영은 뒤를 돌아본다. 난 씩씩대며 권순영을 째려본다. 권순영은 입모양으로 왜, 하며 묻는다. 그걸 몰라서 물어. 근데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사온 것들을 하나둘 뜯는다. "권순영." "응." "그런 소리 하지마." "어떤 소리?" "막 아까처럼 안아준다는 소리. 우리가 무슨 사귀는 사이야?" "그럼 무슨 사인데?" "..." 권순영은 흘러가듯 말한다. 난 흘러가듯 넘기지 못한다. 우리가 무슨 사이일까. 권순영은 나에게 필요한 존재지만. 그걸 따로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리고 난 권순영에게 어떤 존재일까. 궁금하다기보단 알고 싶다. 사실 같은 말이다. 난 너한테 어떤 존재일까.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우린 어떤 사이일까. 권순영의 목소리가 문득 생각을 가로막는다. "대답 못하겠으면, 그냥 이런 사이 해." "어떤 사이?" 이번엔 내가 묻는다. 알고 싶어서. "이런 사이." 이런 사이. 이런 사이가 뭘까. 궁금한 내가 인상을 찌푸린다. 권순영은 씩 웃는다. "네가 맞춰 봐. 우리가 무슨 사인지." 말을 끝낸 권순영은 마저 포장을 뜯는다. 권순영의 목소리가 계속 머리를 어지럽힌다. 이런 사이. 여러번 되새겨 생각해본다. 아무래도 모르겠다. 우리 무슨 사이야. 머리가 슬슬 아파지려 해 생각을 그만둔다. 권순영이 사온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떡볶이. 삼각김밥. 그리고, 초코맛 과자. 초코맛 아이스크림. 초코빵. 초코우유. 초코맛 사탕. "야." 눈이 휘둥그레해져 묻는다. 이게 다 뭐야. 많이 담는줄은 알았지만 그게 다 내가 먹을거였을 줄이야. "넌 뭐 먹어." "같이 먹으면 되지." "너 초코 싫어하잖아." "네가 좋아하는건 좋아하는데?" "웃기지 말고, 빨리 갖다 놔." 권순영은 들은체도 안한다. 삼각김밥을 까서 내 입에 넣는다. 나는 얼떨결에 삼각김밥을 씹어 먹는다. 권순영은 한 입 주고는 자기가 들고가서 또 한 입 먹는다. 쟤 지금 뭐하는 거야. 괜한 부끄러움에 입을 닦는 척 고개를 돌린다. 권순영은 다시 삼각김밥을 내민다. 난 주저한다. 권순영은 입을 오물거리며 가만히 지켜본다. "권순영...좀..." "좀?" "조금, 좀 그래서 그런데..." "뭐가." "이거. 같이 먹기 좀 그렇지 않아?" "아, 난 또 뭐라고." 권순영은 또다시 크게 웃는다. 웃음이 그칠때쯤 한번 더 손을 내밀며 말한다. "허튼 소리 말고 먹어. 뽀뽀해서 건네주기 전에." 미쳤어. 얘는 진짜 뭐 있다. 난 화들짝 놀라 삼각김밥을 베어 문다. 권순영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실실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난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낸다. 권순영한테 이길 방법 어디 없나. 아무래도 억울하다. 권순영은 다시 삼각김밥을 먹으며 몸을 뒤로 젖혀 의자에 기댄다. 오른쪽 주머니에서 폰을 꺼낸다. 쟤 폰도 안냈어? 반장한테 다말려야지. 반장 폰 안내면 엄청 화내는데. "여주야. 우리 사이에 말이야." "..." "아직 번호가 없네?" 권순영은 폰을 내민다. 누가 마음대로 가르쳐 줄 줄 알고. 옳지, 드디어 내가 이겨먹을 기회가 왔다. 난 폰을 낚아채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안 줄건데." "뭐라고?" "안 줄거라고. 번호." "그래. 그럼 주지 마." 어. 권순영의 반응이 생각과 다르다. 이게 아닌데. 난 조바심이 나 다급하게 말한다. "내 번호 안 필요해?" "글쎄..." "진짜 안 필요해?" "굳이 알아낼 필요까진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야..." 난 울상을 짓는다. 권순영은 또 이 상황을 즐기는게 틀림없다. 난 맨날 권순영한테 지지. 갑자기 오기가 생긴다. 오늘은 여기서 못 멈춰. "내가 밤마다 전화할건데?" "..." "카톡으로 사진도 막 보내줄건데?" "..." "수업시간에도 너랑 카톡하고 놀건데? 효과가 있다. 권순영이 멍한 표정을 짓는다. 난 웃으며 어깨를 으쓱 한다. 오늘은 내가 이겼다. "이래도 안 궁금..." "여주야. 번호좀." "..." "알려줘, 응?" 이겼긴 한데...당황한건 내 쪽이다. 권순영의 표정이 갑자기 달라졌다. 사실 생각해보면 내 번호 주는건데 이긴게 아닌것 같기고 하고. "방금 말한거. 다 지켜." "응?" "꼭." 망했어. 또 졌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한거야. 내가 바보지. 내가 제일 멍청한거지. 권순영은 항상 나보다 한 수 위다. * 집에 와 찌뿌둥한 몸을 씻고 나온다. 쏟아지는 잠에 빨리 머리를 말리고 자려고 화장대로 향한다. 충전기에 꽃혀있던 폰에서 진동이 울린다. 모르는 번호다. 하지만 누군지 이미 알고 있다.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폰을 집어든다. -여보세요 -응. 나야 -나야라고 하면 누가 알아 -이미 아는 것 같은데? 권순영은 차분하게 말한다. 밤에 권순영의 목소리를 듣는건. 생각보다 편안하다. -맞아 -씻고 나왔어? -응 -이제 자려고? -응 -그럼 불 끄고 누워. 자자 머리 말려야 되는데. 난 수건으로 대충 머리를 감싸고 침대에 눕는다. 손을 뻗어 형광등도 끈다. 이불을 푹 뒤집어쓴다. -됐어? -응 -그럼 잘자 -너도 -여주야, -으응 -오늘은 좋은 꿈 꿔 응. 순영아. 너도. 대답을 해야 되는데 잠이 쏟아진다. 온 몸이 간질간질한데 이유를 모르겠다. 눈을 감았는데 노란 머리칼이 보인다. 어디선가 맡아본 샴푸 향기도. 오늘따라 침대가 참 포근하다. 항상 불안했던 밤인데 오늘은 편안하다. 그냥, 오늘 밤은 잠이 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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