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우 (29)
이름만 대면 한국 사람 모두가 안다는 대기업 회장 둘째 아들. 야망이 넘치는 형과 칠렐레 팔렐레 놀러다니는 여동생 사이에서 껴서 어떻게 보면 가장 평범한 인물.
회사는 대부분 형이 물려받을 것이란 걸 알고 있고 원우는 이에 대해 크게 반발하지 않음. 형이 자신보다 더 잘 할거란 걸 알고 있고 욕심도 없기 때문에. 그러다보니 형은 안심하고 원우에게 계열사 중 엔터 쪽을 넘겨줌.
태생부터 나른하고 느긋한 성격. 사람들이 많은 것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 공식석상에 얼굴을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아 스무살 이후 공식석상에서 원우를 본 사람은 매우 드뭄. 정말 회사에서 일만 함. 특기는 여동생 사고 뒷처리 하기.
김칠봉 (17)
술을 마시던 마시지 않던 욕을 하는 아버지와 점점 지쳐가 지나친 말도 스스럼없이 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온 여고생. 부모님은 허구한 날 싸우고 그걸 지켜만 보던 칠봉이는 점점 스스로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욕설의 수위가 올라가자 가출을 하기로 결심을 함. 신고를 하고 싶지만 그래도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이란 생각에 차마 신고를 하지 못하고 방학식 날 짐을 싸서 집을 나오게 됨.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집에 계시는 시간이 적고, 있었다 한들 술에 취한 아버지 밖에 없었기에 집안일을 매우 잘함. 장보기에 스쿨뱅킹까지 스스로 관리하는 터라 경제관념도 잘 잡혀있음.
0.
원우와 준휘가 처음 만난 건 그 둘이 열다섯 살 때, 사업가들의 사교 파티에서 만남. 아버지를 따라 몇 번이고 와 봤지만 이런 모임이 어색하기만 한 원우는 형과 여동생을 놔두고 파티장을 빠져나와 테라스로 향함. 그런데 그 테라스에는 이미 준휘가 있었음. 준휘 역시 아버지를 따라 왔지만 재미도, 감동도 없는 이 파티에 실증이 난 상태였기에 테라스로 피신한 거. 우연찮게 마주친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둘이 코드가 통한다는 걸 알게 됨. 단 시간에 몇 년지기 친구 마냥 친해져 서로 연락처도 교환한 후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짐. 그 이후로도 쭉 연락을 함.
십대 마지막 겨울의 어느 날, 준휘는 아버지에게 말함.
"저 한국 갈래요."
공부를 하겠다는 이유였음. 물론 속으로는 한국에 가서 원우와 놀 생각을 더 많이 했지만. 준휘의 아버지는 쿨하게 오케이를 외치셨고 집 하나 구해줄까? 라는 아버지의 물음에 준휘는 원우와 함께 살 예정이라고 말함. 가만히 있던 원우 어리둥절. 하지만 어차피 자신도 스무살이 되면 독립하려고 했기 때문에 원우는 준휘와 함께 살기로 함.
1.
잠들기 전, 엄마에게는 욕을 먹고 아빠에게는 맞던 칠봉이 침대 위에 누워 멍하니 생각함.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눈물이 차오르면서도 다행인 건 곧 있으면 여름 방학이었음. 학교에 다닐 땐 자신이 이렇게 산다는 걸 숨겨야만 했음. 아무리 미워도 자신의 부모님이기도 했고, 신고를 했다고 해도 그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가 불안하기 때문에. 아침 일찍 등교에 동복 체육복 바지로 갈아입고 한 여름에도 얇은 가디건을 입고 다녀야 한다는 수고스러움에서 해방 된다고 생각하니 그것만으로도 칠봉이는 다행이었음.
그렇게 방학만을 기다리던 어느 날, 유난히 강도 높은 폭력에 시달리며 나가 죽으라는 부모님의 말을 들은 칠봉이는 내가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됨. 그리고 그 생각의 끝은
'가출을 하자.'
였음. 칠봉이는 굳게 다짐함. 방학식 날, 집을 나오겠다고. 그렇게 방학식 전날 칠봉이는 캐리어에 교복, 옷, 지갑, 충전기, 통장, 필통, 참고서 등의 책들을 챙기고 지퍼를 굳게 닫음. 교과서는 어차피 학교에 두고 다니니 문제 될 게 없었음. 칠봉이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생각함. 빨리 아침이 오기를.
2.
칠봉이 방학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술에 취한 채 대자로 뻗어 잠에 든 아빠의 모습이 보임. 엄마는 일 때문에 늦게 들어오기 일수였기에 집에 계시지 않았음. 칠봉이는 마지막이겠구나 싶어 아빠의 뒷모습을 보다 조용히 캐리어를 들고 집 밖으로 나옴.
칠봉은 우선 이 동네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을 함. 무작정 아무런 버스를 타고 멀리 멀리 나감. 버스를 두어번 정도 갈아타자 어딘지 모르는 동네에 도착해 있었음. 사실 그리 먼 곳은 아니었지만, 자기 동네에서만 살아왔던 칠봉이에게는 그저 새로울 뿐임.
이리저리 돌아다닐 힘도, 돈도 없는 칠봉이는 주변 찜질방으로 들어감. 상처로 가득한 몸을 수건으로 가려가며 빠르게 몸을 씻은 칠봉은 찜질복을 입고 찜질방 안으로 들어감. 반팔, 반바지인 찜질복 탓에 사람들의 시선이 걱정 됐지만 평일이라서 그런지 다행스럽게도 찜질방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음.
연락 올 곳이 없어 있어봤자 쓸모가 없는 휴대폰을 끄고 칠봉이는 잠에 빠짐. 한참 자고 일어나보니 어느새 시간은 저녁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음. 스피커에서 10시 이후 보호자가 없는 미성년자는 퇴장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칠봉이는 초조해지기 시작함. 칠봉이의 선택은, 에라 모르겠다. 눈을 감고 벽으로 몸을 틀어 눕는 거였음. 다시 잠에 들지 못하고 예민해진 청각 탓에 누군가 제게 걸어오는 게 느껴짐. 칠봉이 입술을 꾹 깨무는 순간 웬 두툼한 손이 칠봉이의 팔 위에 올라옴.
"아이고, 우리 딸, 아빠 온 줄도 잘 자네."
분명히 자신이 아는 아빠의 목소리가 아니었음. 하지만 칠봉이는 이 손을 내칠 수가 없었음.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기 때문임.
"저기, 따님이신가요?"
"아, 얘는 내 딸이니까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직원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이 들리고 칠봉이는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킴. 어떻게든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려고 했음. 그런데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하자 칠봉이는 순식간에 소름이 돋음. 50대 정도 되어보이는 남자가 칠봉을 보며 음흉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임.
"... 저기, 그... 감사, 합니다."
"됐고, 몇 살이야? 이런 시간에 혼자 있어도 되나?"
남자는 말하는 내내 칠봉이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 슬슬 쓰다듬음. 발끝에서부터 머리 끝까지 소름이 돋은 칠봉이지만 남자를 내칠 수가 없었음. 누군가를 부르면 자신이 쫓겨날테고, 이 전에 이런 상황은 성교육 시간에 싫어요, 안 돼요, 라고 말하라는 것만 배웠지 직접 마주하니 몸도 입도 움직이지 않았음.
"위험하니까 아저씨랑 같이 갈까? 아저씨가 돈도 줄게. 응?"
"싫어요, 하지, 마세요..."
"어른이 말하는 데 말대꾸 하고 그럼 안 되지. 쫓겨나고 싶어?"
남자가 말을 하며 찜질복 바지 안으로 점점 손을 넣자 칠봉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뚝뚝 흘림. 그런데 그 순간 찰칵 하는 카메라 소리가 들렸음. 찰칵. 찰칵찰칵. 차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를칵. 남자는 놀라서 손을 빼며 뒤돌아봤고 칠봉이는 눈물이 맺힌 눈을 하고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림.
거기엔 양머리를 하고 썩어가는 표정으로 남자를 내려다보는 흑발의 남자와 양손에 하나씩 휴대폰을 들고 있는 금발의 남자가 있었음.
3.
원우는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음. 준휘의 손에 이끌려 반강제로 찜질방에 왔기 때문임. 갑자기 웬 찜질방이냐 묻자 "그냥" 이라고 대답하는 준휘에 원우는 한숨을 쉬면서도 찜질방에 따라옴.
원우는 준휘와 함께 탕도 들어가고, 등도 밀어주고, 계란도 머리로 깨먹음. 양머리를 해주고 싶다는 준휘의 말에 원우는 격하게 거절했지만 결국 양머리를 하게 됨. 그때 쯤부터 원우는 정신을 놓기 시작함.
10시가 가까워지자 넋을 놓은 원우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누워 수건으로 제 눈을 가리고 있었음.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말이 없는 준휘에 원우는 수건을 들고 슬쩍 준휘를 쳐다봄. 준휘는 한쪽 구석을 유심히 보고 있었음.
"뭐해?"
"원우, 핸드폰 좀 줘 봐."
원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달라니까 휴대폰을 건네줌. 자기 핸드폰으로는 동영상을 원우의 핸드폰으로는 일반 카메라를 켜놓은 준휘는 조심스럽게 자기가 보고 있던 구석으로 감. 원우도 무슨 일인가 싶어 준휘를 뒤따라 감. 그리고 그 곳에서 둘은 아주 엿같은 광경을 보게 됨.
여자애는 고개를 떨구고 있고 웬 아저씨는 그 여자애의 몸을 훑고 있었음. 원우는 그 손이 벌레 같다고 생각하다 벌레는 무슨 죄야, 라는 생각이 들음. 뉴스에서만 봤는데 이런 쓰레기가 진짜 있구나. 원우의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동안 준휘는 동영상을 찍고 있었음. 그리고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리자 남자는 놀랐는지 뒤를 돌아보고 여자애 역시 고개를 들어 둘을 올려다 봄. 그 여자애는 자신들이 예상한 것 보다 훨씬 어려보였음.
"뭐, 뭐야 당신들!"
"됐고, 얘기는 서에 가서 합시다."
준휘는 원우의 핸드폰으로 112를 눌러 신고를 함. 한 손으로 도망가려는 남자를 붙잡고 아무렇지 않게 신고를 하는 준휘의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쳐져있었음.
경찰이 오기 직전, 준휘는 원우에게 휴대폰을 돌려주고 동영상을 보냄. 그리고 그대로 원우와 남자, 여자애를 두고 어디론 가 가버림. 틈을 타 남자가 도망치려는 찰나 경찰이 와 남자를 데려가고 신고자라는 이유로 원우와 여자애 역시 경찰서로 향함.
반응속도가 느린 원우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깨달음.
아, 문준휘 이 새끼. 일 벌여놓고 토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