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리데린 박지훈 -> ♥ <- 후플푸프 김여주
1. 나와 지훈이 사이에는 적막감밖에 돌지 않았다. 지훈이는 금방이라도 누구 하나 반 죽일 기세였고, 나는 그런 지훈이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어, 나 저거 어떤 표정인지 알 것 같아. 내가 생각했을 때 지금 지훈이의 표정을 봐서는, 자세히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거하게 뭘 잘못했나보다.
"얘기해." "응? 뭘 얘기해?" "어제, 너, 이민형이랑 같이 있었다며."
그냥 말해도 될 걸 굳이 끊어 말하는 박지훈 때문에 사실 더 쫄았다. 등에는 곧 식은땀이 흐를 것 같았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박지훈은 무서우리만큼 덤덤했다.
2. 왜 같이 있었는데? 얘기해, 얼른. 아니면 내가 이민형한테 가서 물어보고. 고개를 푹 숙이고 애꿎은 손톱만 만지작 거리자 지훈이 대답을 재촉했다. 내가 이럴까봐 너한테 얘기를 안 했던 건데, 결국은 그게 독이 돼서 돌아왔다.
"어제 마법의 역사 수업 끝나고 교수님이 과제를 내 주셨는데 민형이가 같이 과제하자고 해서 있었던 거야. 우리 진짜 과제밖에 안 했어." "우리?"
지훈이는 내 말에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아, 내가 또 단어 선택을 잘못했구나. 나는 점점 더 상황이 꼬여감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정말로 어제 민형이가 같이 숙제를 하자고 해서 같이 숙제한 게 다인데 저렇게 예민하게 구는 지훈이가 이해가 안 되기도 하고, 저렇게 구는 지훈이 때문에 이제는 정말로 내가 잘못을 한 건가 싶기도 하다.
"여주야, 우리는 너랑 나지. 너랑 이민형이 아니고." "…지훈아." "이민형이 너한테 왜 과제를 같이 하자고 했을까. 기숙사도 다른데 굳이. 이해가 안 돼, 여주야. 정말 과제를 같이 해야 될 상황이었으면 같은 기숙사 애한테 부탁했겠지."
지훈이는 여전히 담담했고 나는 그런 지훈이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항상 이런 식이지. 결국엔 또 내가 먼저 백기를 든다. "미안해, 지훈아. 내가 잘못했어." 그러면 넌 늘 지금처럼 예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겠지. "예쁘다, 우리 여주." 그런 너의 손길에 나도 모르게 웃게 되는 걸 보면 나는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너한테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다.
3. 다들 후플푸프라고 하면 무난하고 착해 빠진 캐릭터를 떠올릴 것 같다. 사실은 용기, 지혜, 관용, 야망을 고루 갖춰야 선택 받을 수 있는 기숙산데. 그래서 나도 마냥 그렇게 유한 성격은 아니다. 정말 이기적일 때는 한없이 이기적이기도 하고, 화도 불 같이 낼 때도 자주 있고. 그런데 지훈이 앞에서는 그런 성격도 온순해진다. 왜 그런 건진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지훈이 앞에 있으면, 지훈이를 볼 때면 나도 모르게 그냥 그렇게 되어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될 뿐이다.
4. 지훈이랑 사귀면서 친구들한테 많이 들었던 질문 중 하나는, 지훈이가 무섭지 않냐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훈이는 차갑고, 냉정하고, 무자비하기로 소문이 나서 교내에선 지훈이를 디멘터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나는 내 옆에서 책에 집중한 지훈이를 턱을 괴고 쳐다봤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눈꼬리 휘어지게 예쁘게 웃어 주는데 대체 그런 지훈이의 어디가 그렇게 차갑고 냉정하며 무자비한 것인지.
"지훈아." "응, 여주야." "있잖아, 애들은 네가 무섭대. 나한테는 전혀 아닌데."
물론 한 명도 아니고 전교생이 다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지훈이한테 그런 부분도 있긴 하겠지. 근데 중요한 사실은, 내 앞에선 안 그런다는 것이다.
"…애들이 그래?" "응. 그렇대. 근데 난 잘 모르겠어." "여주만 그렇게 생각 안 해주면 됐지, 뭐." 우리 산책하러 갈까? 햇살이 좋네. 지훈이 책을 덮고는 내 손을 잡아 일으켰다. 정말, 햇살은 밝게 지훈이를 비추고 있었다.
5. 요즘 학교 교칙이 엄격해져서 모든 학생들은 저녁 식사 후에 본인들의 기숙사에서만 생활해야 했다. 그렇게 나는 기숙사 방 안에서 예림이와 얘기는 하고 있지만 지훈이를 생각하고 있던 중에, 방 안으로 지훈이의 고양이가 들어왔다. 고양이를 안고 조심스럽게 기숙사 문을 열자 어두운 복도 앞에 후드집업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나를 기다리는 지훈이가 있었다.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 너 그러다 교수님한테 걸리면 어떡하려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지훈이에게 저런 말들을 하자 지훈이는 고개만 대충 끄덕이더니 곧 나를 안았다. 그냥, 너무 보고 싶어서. 잠깐만 이러고 있자. 진짜 잠깐만. 벽에서 액자 속 사람들이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나 또한 지훈이의 허리에 손을 감쌌고,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제목에 숫자를 달고 싶지만 달게 될 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달게 된다면 수능 끝난 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독서실에 있으면서 예전부터 제 깊은 곳에 묵혀둔 소재가 생각나서 급하게나마 적어봤어요 :)
지훈이는 저런 분위기랑도 넘 찰떡이라고 생각하는 건 저 뿐인가요 ㅠ ㅠ 넘넘넘 소재가 마음에 들어벌이네요 ㅠ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