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나는 텔레비전 속에 있는 분홍색 입술을 하고 있는 언니나, 아니면 머리 끝에 펌이 들어가 웨이브가 져 있는 언니를 동경했던 것도 같다. 엄마의 가슴이라든지, 들어간 허리, 넓은 골반. 뭐 그런 것들을 보면서 ‘나는 언제 엄마처럼 돼?’ 라는 질문을 해 본 것 같기도 하고, 학교가 끝나자 교복을 입고 하교하던 학생들을 가리키며 ‘나도 저거 입고 싶어!’ 라고 외쳐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나의 어렸을 때는 나보다 어른인 사람을 언제나 동경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데도, 어떤 접속사를 붙여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 내가 엄마처럼,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보던 언니들처럼 될 거라는 생각을 눈곱만큼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사립초등학교를 다녔던 터라 교복을 입은 것 빼고는, 나는 정말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처럼 언제나 나를 놀리는 남자애들의 등짝을 찰싹찰싹 내려치고, 성별 상관없이 함께 뒤엉켜 흙먼지 풍기며 놀고, 여자애들과 함께 쎄쎄쎄를 하면서, 남은 일생을 그렇게 보낼 줄로만 알았다, 나는.
또한 나의 어린 모습을 빠짐없이 공유한 유방친구 혹은 불알친구, 그러니까 바른 말로 소꿉친구인 전정국은 그런 나의 생각에 힘을 실어 주었다. 안 그래도 땡글땡글한 눈 때문에 울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드는 전정국의 어린 시절은, 굳이 떠올려 보지 않아도 항상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성격 자체도 소심한 게, 마음까지 여려서 사람들이 ‘애가 참 예쁘네요.’ 하고 쓰다듬으려 할 때면 그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한가득 고여 웅앵 울음을 터뜨렸다. 우는 것도 제 성격대로 으아앙 소리 내어 우는 것이 아니라 순정만화처럼 눈물만 뚝뚝 흘리다가 코를 몇 번 쿨적이는 게 다였다. 그런 전정국을 나는 챙겨야 했고, 전정국은 나를 잘 따랐고, 전정국과 나는 늘 그래왔듯 함께였으니, 그렇게 나는 전정국과 다른 아이들의 관계성을 항상 똑같이 지키며 평생 살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말도 안 되는 ―고등학생 때 말도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소리였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쯤에 전정국은 내 손을 떠나더니 중학교를 들어가자 전정국은 전정국대로, 나는 나대로 신세계를 경험 중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우리 둘은 눈이 돌아가 정신을 못 차렸다. 각자 나름 논다는 무리에 위치해 이성도 사귀어 보고, 밖으로 나도는 일이 많아지고, C와 D가 줄지은 성적표 은폐도 했다. 우리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무엇보다 제일 많이 바뀐 것은, 우리 둘의 관계였다.
중학교를 들어오자마자 전정국은 토끼도 아니고 토깽이의 탈을 벗고 웬 늑대의 탈을 썼다. 울망울망 크던 눈에는 쌍꺼풀이 진하게 졌고, 사람들 앞에 나가 뭘 한다는 것 자체에 부담을 느끼던 애가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게 익숙해지더니, 운동을 미친 듯이 하기 시작했다. 다른 애들은 하고 나면 목에서 피맛이 나고, 머리가 핑핑 돌고, 흙구덩이인지 먼지구덩이인지 모를 운동장 바닥에 쓰러져 있다는 오래달리기도 전정국은 하고 나면 멀쩡히 땀을 닦더니 제멋대로 몇 바퀴 더 돌 정도로, 전정국은 날이 갈수록 몸에 붙는 근육과 체력이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전정국은 그 남아도는 기운의 반을 나와 으르렁대는 데에 썼다. 그건 고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초중고를 배정받은 우리는 서로의 얼굴만 보면 짐승이라도 된 듯 매서운 눈빛과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전정국과 나의 사이는 전교생과 선생님들도 알 정도로 앙숙이었다.
“안 비키냐?”
“뭐?”
“안 비키냐고.”
“네가 깡패야, 뭐야. 재수 없게 사람은 또 왜 내려다 봐?”
“너는 키가 작고. 나는 키가 너보다 크고. 큰 사람이 작은 걸 내려다보는 건 당연한 거고.”
“야야, 비켜 줬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갈 길 가.”
“어딜 가.”
“왜 이래, 진짜. 좀 그냥 가, 아는 척하지 말고.”
야야, 쟤네 또 붙었다. 말려. 전정국의 친구가 살벌한 눈빛을 교환하던 나와 전정국 사이를 갈라놓았다. 중학교 때보다 고등학생인 지금이 훨씬 더 과도기에 놓아져 있었다. 전정국은 날 보기만 하면 시비를 걸지 못해 안달이었다. 중학교 때는 그래, 너도 나도 사춘기니까, 하는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영 이상했다. 아직도 사춘기냐? 하는 마음. 제발. 넌 언제까지 사춘기일래? 나는 이미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사춘기의 열이 확 식어 버렸는데, 전정국은 오히려 더 뜨거워져 있었다. 너무 높은 전정국의 온도에 옆에 같이 있다 보면 덩달아 나도 열을 받게 되고, 그럼 우리 사이를 그저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애들 중 하나가 나서서 말리는 것이다. 이번에는 전정국의 친구였다. 나는 다 마신 사과주스의 빨대를 잘근잘근 씹다가 매점에서 나왔다. 전정국의 사춘기가 길어져도 너무 길어지고 있었다.
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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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上>
아침에는 정말 괜찮았다. 아침까지는 말이다. 내가 친히 입에 물려 준 토스트에도 전정국은 군말 없이 우물우물 잘 받아먹었고, 손에 기름이 묻었다는 나에게 자신의 가방을 친히 열어 물티슈를 꺼내 주기도 했다. 학교까지 전정국이 툴툴대지 않고 등교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나는 그 사실이 놀라워 우리 집 야옹이 꾸꾸처럼 전정국을 쓰다듬을 뻔했다.
이질감이 드는 평화로움은 곧 깨지기 마련이다. 폭풍전야였다.
늘 그렇듯, 사건은 언제나 사소한 시비에서 시작했다.
“너지?”
“뭐가.”
“내 체육복 가져간 거.”
“네 땀내가 진동하는 걸 내가 왜.”
“빨리 내놔. 장난하지 말고.”
“얘 진짜 왜 이러지? 나 아니라고. 괜히 시비 걸지 말고 다른 애 의심해.”
“체육복 안 입고 갈굼 겁나 당하는 거 몰라, 알아. 빨리 가져와.”
“야. 시비 걸지 말라고 했지, 미친놈아.”
전정국과 내가 다툴 때 암묵적으로 지키는 것 하나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서로에게 욕은 하지 않기였다. 전정국은 나에게 이년, 저년 하지 않았고 나도 전정국에게 이 새끼, 저 새끼 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지켜온 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내 입에서는 미친놈이라는 말이 나왔고, 그 말을 들은 전정국은 얼굴이 딱 굳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미친놈이라고 했는데. 왜. 틀려?”
“야.”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의심하고 시비 거는 게 미친놈 아니면 뭔데. 네가 애새끼냐? 네가 간수 못한 체육복을 나한테 찾게.”
“000, 그만해.”
“시작은 네가 해놓고 뭘 그만해. 짜증 나, 진짜.”
예민해진 나는 그대로 내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집어던졌고, 그 책은 그대로 전정국에게로 날아갔다. 이미 빡침 게이지가 얼굴선에 다다라 있어 보이던 전정국은 책이 자신의 몸을 맞고 떨어지자 반사적으로 내 어깨를 잡고 밀쳤다.
순식간이었다. 내 몸이 붕 떠 벽에 처박힌 것은. 교과서를 빌리러 다른 반에 있다가 돌아온 친구들은 하나같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휴대 전화를 하던 전정국의 친구들도 놀라 전정국의 어깨를 잡았다. 그 소리들이 하나같이 먹먹하게,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전정국이 날 밀친 강도는 억셌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미동 없이 가만히 있었다. 부딪힌 등과 목 등, 온몸이 욱신거렸다. 일어설 수가 없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만 몰랐구나, 하는. 전정국과 나만 몰랐다. 우리의 다툼이 조금이라도 과열되면 그것을 막으려 했던 친구들의 움직임의 이유를. 우리가 달라졌다는 것을. 우리는 여태 모르고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 내가 동경하던 그 언니들이 되어 있었다. 가슴이 나오고, 허리가 들어가고, 골반이 넓어지고, 교복을 입었으며 화장을 하는 방법 또한 익숙했다. 전정국도 마찬가지였다. 맨둥맨둥하던 얼굴은 턱이 갈라져 있었고, 골격이 커지고, 근육과 체력이 붙고, 교복을 입었으며 매일 아침 면도를 하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우리는 성장했다. 초등학생 때처럼 더 이상 성별 관계없이 때리면서, 뒤엉켜 놀 수 없다는 소리였다. 우리는 성장했으므로 달라져 있었다. 그 사실을 전정국과 나만 모르고 있었다.
내 곁에 와 나를 살피는 전정국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원래 까맣다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유독 하얘져 있었다. 전정국은 겁에 질린 것처럼 얼굴이 딱 굳어서는,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나를 살피고 있었다.
“야, 000….”
“…….”
“미안… 아, 그러니까, 나는 이러려던 게…….”
“…….”
“미안, 미안해……. 어떡, 아… 괜찮아? 미안해, 진짜 미안…….”
전정국은 울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막힌 숨이 트여 잔기침을 하면서도, 전정국의 눈물이 우스워 웃었다. 야, 전정국. 우리는 이제 다르대. 그거, 우리만 몰랐다. 전정국은 콧대만 높고 콧볼은 둥글어 울면 눈물이 늘 둥근 콧볼에 매달리고는 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대롱대롱 떨어질락 말락 하는 눈물을 보고 다시 웃었다. 그냥 계속 웃음이 났다. 나는 뒤에 벽에 머리를 기댔다. 전정국은 내 상태가 더 걱정되었는지 조심조심 내 몸을 잡아끌었다. 뭐 해, 나 안 도와주고! 전정국의 다급한 외침에 친구들이 내가 등에 업히도록 도왔다. 전정국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 다리를 바치지도 못했다. 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으로 애써 전정국의 목을 졸랐다. 그런데도 전정국은 목이 졸린다는 불평 하나 없이 여전히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보건실로 뛰었다. 아, 우습다. 왜인지 모르게 다 웃겼다. 핏줄이 가득 선 손이 떨리는 것도, 눈물자국이 선명한 얼굴도.
“어디가 아픈 거야? 많이 아프니?”
“그게 아니라…… 저… 제가 밀쳐서 벽에 부딪혔는데…….”
“어쩌다가? 많이 세게 그랬어?”
“숨도 못 쉬었고, 움직이지도 못했고 그래서…….”
“일단 침대에 눕혀. 몇 학년 몇 반이야? 이름.”
“2학년 1반 000이요.”
전정국은 선생님의 지시대로 나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데려다 주었다. 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밀칠 땐 언제고. 허. 이제 와 그런 표정을 해, 왜?
“아팠지……. 미안해.”
“…….”
“왜 아무 말이 없어? 말 못하겠어? …아직도 숨 쉬는 거 어려워?”
“…그 정돈 아니야.”
드디어 들은 내 목소리에 전정국이 안도 섞인 한숨을 쉬었다. 나는 가만 누워 그 얼굴을 쳐다보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영 괘씸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내 시야에 전정국이 들어오지 못하게, 또 전정국이 내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게.
“있잖아, 나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정국이 나에게 이불을 덮어 주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는, 네가 이렇게 가벼울 줄 몰랐어…….”
“…….”
“나는 네가 이렇게 쉽게 들릴 정도로, 그렇게… 약할 줄 몰랐어.”
나는 정말, 진짜로…… 하나도 몰랐어.
전정국의 목소리가 꿈을 꾸는 것처럼 붕붕 떠올랐다.
아까 네가 이렇게 떠서 벽에 부딪혔을 때, 진짜 나는 너무 아찔한 거야. 네 손이 창백하고, 얼굴도 숙인 채 가만히 있으니까, 나는 네가… 어떻게 된 줄 알았어. 업었을 때도, 나는 네가 그렇게 작고 가벼울 줄 몰랐어…….
바보 같은 얼굴로 바보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전정국의 얼굴을 거칠게 잡아 눈물 자국을 엄지로 꾹꾹 눌렀다.
“그만 울어. 너 이러는 거 적응 안 돼.”
“안 울어.”
“속눈썹 다 젖어서 눈도 안 떠지는 게.”
나는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너 이제 안 아파?”
전정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을 허공에 들었다가, 내렸다가를 반복하면서 안절부절 못했다.
“아파. 죽을 것 같아. 욱신거려. 뼈가 부러진 것 같기도 해.”
“미안해…….”
“나 봐봐.”
전정국은 순순히 고개를 들었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내 얼굴에 움찔거리다가도 곧 눈을 마주쳤다. 야, 전정국. 너도 그랬지. 너도 나랑 평생 으르렁대면서, 어렸을 때처럼 그렇게 놀 줄 알았지. 너랑 나랑 다르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지. 너는 아직도 내가 옛날에 네 등을 차지게 내려치던 그때 나인 줄 알았지. 나도 그랬다. 나는 네가 나를 이렇게 쉽게 밀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 안 했어. 나는 네가 이렇게 나보다 셀 줄도, 단단할 줄도 몰랐어. 근데 그거 우리만 몰랐다. 바보같이 우리만 몰랐어, 그거.
우리는 그렇게, 보건실 선생님과 벽 하나를 마주본 채로 서로의 얼굴만 눈에 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도 모르고, 계속.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변화를 인지했다. 너와 나는 달라, 하고.
고등학교 2학년, 벚꽃이 만개해 바람을 미끄럼틀 삼아 날아다니고, 외투를 입을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게 만드는 그 시점에서, 우리는.
<열여덟 中>
“왜 니들끼리만 와? 전정국은?”
“너는 전정국한테 그르케 무시를 당하고도 뭐가 예쁘다고 찾냐?”
“000이 설마 전정국을 예쁘다고 찾겠냐. 조지려고 찾는 거지.”
분명 같이 올 줄 알았는데. 전정국의 반 수업이 체육이라는 걸 듣고 쉬는 시간이 다 끝나갈 때쯤 오겠구나 싶어 일부러 느릿느릿 온 게 전정국의 반이었다. 이제 슬슬 더워지는지 체육을 마친 아이들은 입고 나간 체육복의 저지를 벗어 어깨에 걸치고 오거나 허리춤에 매고 계단을 올랐다. 김태형과 박지민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열성적으로 뛰놀기라도 했는지 김태형은 콧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박지민은 벌건 얼굴로 턱에 맺힌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혹시나 해 그들의 뒤를 바라봤지만 휑할 뿐이었다. 나는 뭐가 좋다고 전정국을 찾냐는 김태형의 입을 엄지와 검지로 콱 잡아 다물게 했다.
전정국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런 것처럼 보였다. 예전처럼 시비를 걸듯 나를 무시하기 시작했으니까. 전과 같이 등교도 하교도 함께였지만 전정국은 더 이상 등굣길에 4교시 때 빨리 급식을 받기 위해서 뛰어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하굣길에 야식으로 무엇을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하는 고민을 하지 않았다. 서로의 사이에 투명한 벽이 가로막고 있는 기분이었다. 남이 내쳐진 꼴을 못 보는 김태형은 옆에서 ‘지가 엘사야, 뭐야?’를 연발하면서 전정국의 심기를 건드렸지만 전정국은 한기를 뚝뚝 떨어뜨리면 떨어뜨렸지 절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에게만 엘사처럼 구냐, 그건 또 아니었다. 전정국은 요즘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차갑게 대했다. 우리 집 꾸꾸에게도 한 번 보고 쌩 지나갔으니 말 다했지.
요 며칠 전정국의 행동이 그럼에도 내가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역시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다’에 있었다. 목소리 한 번 들을까 말까지만 전정국은 예전과 다를 것 없이 급식을 받아올 때 내 몫의 수저와 물을 챙겼다. 신발 끈을 묶을 줄 모르는 내 운동화의 끈을 대신 묶어 주기도 했다.
“그래서, 전정국 어디 있는데?”
“근육돼지가 뻔하지. 몇 바퀴 돌고 온대.”
“걍 놔둬. 짱나. 때되면 지가 입 열겠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게 언제가 될지 몰라서 문제지, 인마. 운동장이 한눈에 보이는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정국의 검은색 무지 티셔츠가 척척하게 젖어들었다는 걸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건지, 제 몸이 힘든 게 좋은 건지, 아직도 사춘기여서 저러는 건지. 나는 전정국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았다. 전정국과 그 누구보다 오래 봤어도, 전정국의 아랫집에 살아도, 전정국과 등하교를 같이 해도, 나는 전정국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지금 저 행동이 나를 알아 달라는 건지, 아니면 숨기고 싶다는 건지 하나도 모른다는 얘기다. 원래부터 몰랐던 건지, 달라진 이후부터 몰랐던 건지. 나만 널 모르는 건지, 너조차 널 모르는 건지. 알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보고 있어 봤자 답이 나오나. 내게 남은 건 오기밖에 없었다. 내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듯한 전정국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돌려 반으로 들어갔다. 네가 날 무시하면 나도 널 무시할래.
<열여덟 下>
군대를 가 있던 전정국의 형, 나한테는 오빠가 휴가를 나왔다. 새까매진 얼굴로 내 앞에 선 오빠는 내 어깨를 덥썩 잡고선 말했다. 넌 군대 면제지? 뭐래. 오랜만에 봤는데 그게 할 말이냐. 나는 평소대로 대하려 했으나 오랜만에 본 오빠의 얼굴이 말라 있어서 차마 그러진 못했다. 내 어깨를 단단히 얽매고 있는 손을 일일이 풀어내며 군인 냄새, 하고 오빠를 저쪽으로 약하게 미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없던 사이에도 세상은 참 잘 돌아갔구나.”
“지금 그거 〈원피스〉 보고 하는 말이야?”
“내가 마지막으로 본 화는 상디가 빅맘 해적단한테 끌려간 거였는데…….”
“오빠, 다리 좀 내놔 봐. 베개 꺼내기 귀찮다.”
휴가 기념 저녁을 같이 하자고 했으니, 전정국과 나의 부모님이 오실 때까지는 아직도 몇 시간이 남아 있었다. 전정국은 아까 박지민의 손에 끌려가 서점을 들른다고 했다. 그렇게 안 보여도 박지민은 꽤 제 공부를 중요시 여겼다. 양손에 반지를 하나씩 중무장하고 있는 것도 공부할 때 손이 무거우면 기분이 좋다는 게 이유였다. 아무튼 족히 한 시간 정도는 오빠와 내가 둘이 있어야 한단 뜻이었는데, 우리 둘이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저 드러누워 만화책과 애니 보기. 오빠는 방에서 잠들어 있던 자신의 노트북을 꺼내와 이어폰을 연결해 애니를 보기 시작했고, 나는 오빠의 다리를 베고 누워 만화책을 펼쳤다.
그렇게 한창 집중하고 있었을 때였다. 다섯 장만 더 넘기면 다음 권을 볼 수 있는, 긴장감이 최고조를 찍은, 딱 그때. 도어락이 소란스럽게 열리더니 문도 성급히 닫혔다. 발소리 또한 신경질적이게 들렸다. 나는 종이를 넘기던 것을 멈추고 현관을 바라보았다. 가쁜 숨이 들렸다. 그것들의 주인은 전정국이었다.
“왜, 왜 이러고 있어?!”
“어, 전정국이. 형 올만에 보는데 안 보고 싶었냐?”
“둘이 왜 이러고 있냐니까?!”
…뭐가. 왜. 우리가 뭘 하고 있었는데.
전정국은 마치 불륜의 한 장면을 잡은 것 마냥 역정을 내고 있었다. 오빠는 몇 개월 만에 얼굴을 보는 동생의 첫 마디가 짜증이라는 사실에 조금 충격인지 그대로 굳었다. 나는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 앉았다. 전정국은 그 땡글하고 큰 눈으로 원망을 담아 나를 보는 중이었다. ……왜 그렇게 보는데?
“너, 너….”
“…왜.”
“너희 집 가 있어.”
“뭐? 귀찮게 왜? 저녁 어차피 너희 집에서 먹을 건데?”
“얄미운 계집애.”
“언제적 계집애야, 이 새끼가. 조선시대냐?”
“넌 말버릇도 너무 안 좋아. 내가 이 새끼, 저 새끼 하지 말라고 했는데.”
“내 말버릇을 왜 네가 관리해. 그럼 네 손버릇은. 너 나 밀친 거 기억 안 나? 네가 무지해서 그런 거지 알고 그랬으면 폭행죄로 처넣어도 된다고.”
“야!”
“왜!”
전정국과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서로를 노려봤다. 오빠는 갑자기 이러는 우리가 당황스럽기만 한지 정지도 해놓지 못한 애니가 틀어진 노트북을 옆으로 내팽개치고 우리만 빤히 바라본 채 머리를 긁적였다. 오빠의 떨리는 동공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뭐가 문제니, 너희. 내가 문제니? 여기서 내가 사라지면 좀 괜찮겠니?
“형. 나 얘랑 할 얘기 있어.”
“그래 보인다, 인마….”
“오빠, 나도 얘랑 할 얘기 있어.”
“어, 너도 그래 보여…. 나가 있을 테니까 후딱 얘기하고 끝내.”
오빠는 냉큼 불편한 자리를 피했다. 나가 있을 필요까진 없었는데. 휴가 나온 군인 대접이 영 시원찮았다. 전정국은 나가 버린 제 형을 신경 쓰지 않고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거실 소파를 두고 바닥에 마주 앉은 우리는 누구 하나 쉽사리 입을 열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할 말은 많았으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뭘 말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탓이다. 나는 습관처럼 얼굴에 있는 솜털을 고르는 전정국을 빤히 바라보다가 결국 말문을 뗐다.
“갑자기 왜 나 아는 척해? 언제는 반나절 동안 목소리 안 들려 줬잖아.”
“…….”
“할 말 없지? 그래, 넌 입이 열 개 있어도 말 못할걸.”
“왜 그랬냐고 안 물어봤잖아.”
뭐? 나는 전정국을 몰아붙이려던 걸 뚝 멈췄다. 전정국은 물기 어린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왜 그랬냐고 물어봤어? 안 물어봤잖아. 너 나 왜 무시해? 이렇게 물어봤어, 네가? 무시할까 봐 못 물어봤다는 소리는 하지 마. 네가 정말 나한테 왜 그랬냐고 묻고 싶었으면, 너도 날 무시하지 말았어야 해. 전정국의 목소리는 원망이 섞인 것 같기도 했다.
“나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았던 거잖아, 너.”
“그런 거 아냐.”
“또 때 되면 자기가 알아서 말하겠지 하고 넘어갔잖아. 나를 모르면, 네가 좀 물어봐 주면 안 돼?”
전정국은 그 큰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미안해, 갑자기 이래서.”
“…….”
“그때 네가 그랬지. 너랑 나랑 이제 다르다고. 이해할 수 있어. 당연한 거고. 다른 사람들은 다 알았던 거, 우리만 몰랐던 거니까.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어.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거니까.”
전정국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한결 안정을 찾았다.
“근데, 원래 이런 거야? 난 널 예전처럼 볼 수가 없어.”
“…….”
“몸만 커진 거. 난 그것만 생각했어. 우리 관계에 대해선 생각 안 해 봤다는 말이야. 옛날처럼 때리고, 뒤엉키고, 언제나 같이 다닐 수 없다는 건 알아. 그래도 우린 옛날처럼 친구고, 나는 전처럼 너한테 시비 걸고, 너는 내 시비에 적당히 받아치면서, 나는 그럴 줄 알았어. 육체적으로 대하는 게 조심스러워지면 되는 거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런데?”
“나는 지금 네 자체를 대하는 게 어려워. 네 눈을 볼 수가 없어. 너랑 대화하는 게 껄끄러워. 이상해. 네가 싫다는 게 아니야. 그냥 좀, 달라. 예전이랑은. 보건실에서 네 얼굴을 자세히 보기 전이랑, 많이 달라. 널 보면 며칠 전까지 아무 생각 없이 했던 말이 안 나와. 그러니까, 너랑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들이 날아간 기분이야. 너 보면 귀가 뜨거워져. 말을 하려고 하면 목이 뜨거워지고, 네가 다른 사람이랑 있을 때는 화가 난 것처럼 온몸이 이상해.”
“…….”
“난 정말,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네가 말해 줘.”
전정국의 음성이 어디론가 자꾸 가라앉았다. 구석에 박혀 있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지난번 전정국이 운동장을 돌고 있을 때, 그때처럼 나는 전정국의 시선을 외면할 수 있을까.
“원래 다 이런 거야?”
정답은 절대 아니, 였다.
<열여덟 後>
“니들은 왜 달라진 것 같은데 달라진 게 없지.”
“뭐가.”
“서로 시비 걸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고, 분위기도 좀 달라졌고. 다 달라졌는데 막상 관계는 변한 게 없잖아.”
“변하면 네가 뭐 어쩔 건데.”
전정국은 나에게 소시지 두 개를 젓가락으로 쿡 찍어 건넸다. 김태형이 호들갑을 떨었다. 이 봐, 이 봐! 네가 예전에 000한테 소시지를 준 적이 있었냐? 도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시끄러운 김태형에 손을 휘휘 저었다. 김태형은 평소 때엔 얌전하게 무게를 잡고 있다가도 간혹 흥분하면 목소리가 지나치게 커지는 부분이 있었다.
“끼어들지 말고 가, 좀. 밥 먹고 있잖아.”
“치사해.”
“대체 뭐가?”
“끼어들지 말고 가란 말은 서운할 만도 했어.”
“그래! 내 마음은 작고 소중해서, 말을 할 때도 조심해 줘야 한다고. 알아?”
옆에서 김태형 편을 드는 나를 보고 전정국이 황당하단 표정을 했다. 딱히 김태형 편은 아니었지만, 전정국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김태형뿐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저렇게 말하면 상처받는다는 걸 전정국은 모른다. 분주히 젓가락을 움직이는 내 동선을 따라 전정국의 시선이 진득하게 따라붙었다. 김태형은 이미 박지민이 남긴 소시지를 따라 다른 테이블로 떠났음에도.
“왜 김태형 편이야?”
“객관적으로 봐야지.”
“그러니까, 왜?”
“네가 유치원생이냐? 그렇게 물고 늘어지지 마. 김태형도 갔는데.”
전정국은 꽤 집요했다. 그 날도, 지금도. 전정국의 솔직한 말들이 이어지던 그 다음날, 전정국은 등교하면서 간결하게 말했다. 나 너 좋아해. 그런 것 같아. 밤에 잠도 안 자고 고민했어. 그랬더니 나오는 게 이거야. 너 좋아한다는 거. 그 말에 당황한 나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지만 역시 수긍은 하지 못했다. 내년에 우리는 고삼이고, 인생에서 중요한 수능과 입시가 있다. 연애할 환경이 받쳐 주지도 않는다는 소리다. 아니, 그 전에.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던 우리가 한순간에 연애 감정이 생길 수가 있나. 나는 일단 내 마음을 몰랐다. 전정국을 향한 감정은 엉킨 실타래같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좀 많이 복잡했다. 결국 나는 전정국에게 ‘잘 모르겠다’는 답변을 남겼다. 전정국은 나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을 했는지는, 역시 모르겠지만.
“오늘 나온 급식에서 먹을 만한 건 소시지밖에 없었는데 내가 너한테 소시지를 다 줬어. 근데도 기분이 하나도 안 나빠. 그럼 이거 뭘까?”
“……모르겠는데.”
“……넌 아는 게 뭐냐?”
글쎄. 네가 소시지를 줘서 밥을 두 숟가락 정도 더 먹을 수 있다는 거?
“너 진짜 나 좋아해?”
나는 밥을 한가득 입에 담고 소시지를 반으로 잘라 입에 넣었다. 밥은 있는 대로 퍼 주면서 반찬을 줄 때에는 쩨쩨하게 구는 우리 학교의 특성에 적응된 행동이었다. 나는 밥을 몇 번 씹고는 그리 물었다. 너 진짜 나 좋아해? 하고. 전정국은 나를 보고 있다가 내 얼굴 어딘가에 묻은 뭉개진 밥풀 하나를 떼 제 입으로 가져갔다.
“그럼 가짜로 좋아하겠냐.”
“난 잘 모르겠어.”
“그래. 알아.”
“우리 내년에 고삼이야.”
“그것도 알고, 인마.”
“난 내년에 연애는 안 할 거야.”
“그거 너 작년부터 말했던 것 같은데.”
“난 멀티가 안 돼서 연애하면 망한다고.”
내 말에 전정국이 눈이 감기도록 웃었다.
“너 그거 알아? 너 지금 나한테 고백했다?”
“…어째서?”
“내년에 우리가 고삼만 아니었으면 연애할 거란 소리잖아, 지금.”
“…나는 내 마음을 모르는데?”
“이미 나한테 연애 얘기를 꺼낸 거면 적어도 싫지는 않은 거잖아. 지금 알았네, 네 마음.”
“말도 안 돼.”
“잘 생각해 봐. 나는 연애 감정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원래 있었던 연애 감정이 우정이란 것보다 크기가 커지면 그게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해. 연애 감정보다 우정이 크면 친구 사이고, 연애 감정이 더 크면 연인 사이고.”
“…….”
“내년에는 아무 말 안 하고 있을게. 너한테도 나한테도 중요한 시기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수긍할 수 있었다. 전정국은 그런 나를 보며 다시 웃었다. 나는 따라 웃지 못했다. 전정국한테 말려든 느낌을 묘하게 지울 수 없어서였다.
<스물>
“그래. 고삼 때는 괜찮았어. 왜냐, 걔가 날 좋아하는 티를 겁나 냈으니까!”
“어우씨, 목소리 큰 거 봐. 깜짝 놀랐네.”
“근데 지금은 아니라고!”
“알았으니까 목소리 좀 줄여 봐. 너 술 마셨다고 광고하냐. 여기 가게도 아니고 편의점이거든?”
“호석아. 내가 그 많은 동기들 중에서도 너를 불러낸 이유를 모르겠니. 네가 남자니까 뭔가 좀 알 거 아냐.”
“모르겠.”
“모르겠다고 하기만 해 봐, 이 망할 자식아.”
금방이라도 마시던 맥주를 얼굴이 끼얹을 제스처를 취하자 정호석이 허허허 웃으면서 내 손을 저지했다. 한 번만 다시 말해 봐.
열여덟,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전정국과의 관계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던 그때 이후, 우리에겐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대의 제국들이 전성기를 이룬 다음 바로 쇠퇴하는 것처럼, 제일 큰 변화를 느끼고 난 뒤 아무런 변화나 일들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작년의 나는 몰랐다. 훗날 내가 조용하게 지냈던 열아홉 시절 때문에 이렇게 불안해질 줄이야.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전정국에 대한 자신이 있었다. 고삼 때는 연애하지 않을 거란 내 말에 전정국은 정말 나에게 아무런,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나는 전정국의 눈에서 나에 대한 애정을 찾아볼 수가 있었다. 눈에서 꿀 떨어진다는 말, 그거 안 믿었는데 실제로 있더라고. 그게 전정국이었다. 내가 독서실에서 처박혀 문제집에 코 박고 있을 때면 여름엔 아이스크림, 겨울엔 핫초코를 손에 쥐어 주었고, 컨디션이 저조해 보인다 싶을 때는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며 장난치면서 웃겨 주다가 내 웃음이 터지면 그제야 꽉 잡은 손을 풀어 주고는 했다. 나는 그러한 것들에 불안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전정국의 배려라고 할 수 있는 그러한 행동들 덕분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고, 지금은 생각했다. 그때는 충격을 받았지만. 모든 입시가 끝난 날, 나는 욕심을 품고 있었다. 전정국과 내가 뭔가 좀, 바뀌지 않을까 하는. 친구라는 명목적 관계를 탈피하는 날이 오늘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입시도 끝났겠다, 잔뜩 들뜨는 마음은 바람을 한껏 들이마셔 자기 멋대로 부풀어 있었고, 전정국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친구들과 헤어져 어둑어둑한 하늘을 한 시점에, 같은 아파트에서,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별로 차이나지 않는 다른 층수에서 내릴 때. 그것도 내가 먼저 내릴 때. 나는 그 순간이 그렇게 떨릴 수가 없었다.
‘나 간다.’
‘엉. 연락하고.’
‘나 진짜 가?’
‘그럼 가짜로 가냐. 얼른 들어가서 자. 피곤할 텐데.’
전정국은 그대로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곤두박질한 줄로만 알았다. 사실 아래로 곤두박질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람이 빠져 버린 내 심장이었는데.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도 우리는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서로 다른 대학에 들어가, 서로가 같이 있는 시간이 줄어들어 서로가 모르는 다른 면들과 모습이 생겨, 내가 전정국에 대한 자신은 사라진 것, 그거 하나. 나는 이제 전정국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하나도.
“울어?”
“우울한 거지 우는 거 아냐.”
“왜 우울해? 걔가 고백을 안 해서?”
“…그렇게 물어보면 어떻게 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답할지 모르겠는 게 아니라, 왜 우울한지 모르는 거겠지. 사춘기냐, 네가 널 모르게.”
“내가 아니라 걔가 사춘기야. 걔는 늘 그랬어. 중학교 때부터 그랬어, 걘.”
“그렇게 걜 잘 알면서 그 날 왜 아무 말 없이 간 건지는 모르네.”
대답 없이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는 정호석을 노려봤다. 정호석은 악의가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일침을 날리는 게 특기였다. 나는 땀 때문에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에 들러붙은 팔을 주욱 떼어내고 땅콩을 던졌다. 짜증 나, 정호석. 오징어도 씹지 마. 내가 샀어. 아까 가게에서 먹은 치킨도 뱉어내. 맥주도 마시지 마. 내 말에 정호석은 얄미운 얼굴로 대꾸했다. 이미 다 마셨는데?
“너는 표현해 줬어? 전정, 그 뭐시기 좋아한다고.”
“전정국.”
“그니까. 너는 어떻게 했는데? 걔가 너한테 아이스크림이랑 음료수 사 바칠 때, 걔가 너 웃기려고 별짓을 다했을 때. 넌 어떻게 했어?”
“…….”
“모르겠지. 기억 안 나지. 안 봐도 뻔해. 고맙다는 말도 없이 걔가 해 주는 거 슥 받고 말았지? 우리가 안 지 몇 년인데 그런 말이 필요해, 하면서 그냥 넘어갔지?”
“…….”
“너는 자신 있었겠지, 걔한테. 걔는 너한테 자신이 없었고.”
“지금은?”
정호석은 오징어의 다리를 다 씹어 먹고 이제 몸통을 일정한 간격으로 쫙쫙 찢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묻냐. 알면서 묻지 좀 마. 고약한 버릇이다, 그거.”
“…….”
“걔도 너도 똑같네, 자신 없는 거. 영 대 영. 페어플레이해. 가서 좋아한다고 말하면 되잖아.”
“입만 살아선.”
“야. 나 오늘 네가 달리자고 해서 강의도 뺐어.”
“고마워 죽겠어, 우리 호발이. 예뻐, 예뻐. 오징어 맘껏 먹어. 배 터질 때까지.”
정호석은 내 억센 손길을 뿌리치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야. 티 안 나게 뒤 돌아 봐.”
“왜.”
“아니, 어떤 남자가 너 쳐다보고 있어서. 너 스토커 같은 거 있냐?”
“없는 것 같은데 가능성 있는 말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그래. 집 데려다 줄게. 일어나.”
“몇 신데?”
“한 시 반. 얼마 안 돼서 아깝네. 오늘 000 다 털어먹으려고 했는데. 쓰읍.”
먹고 남은 쓰레기들을 정리하는 정호석을 놔두고 나는 조심히 뒤를 돌아 봤다. 아무리 정호석과 함께라고 해도 묘하게 공포심이 들었다. 나는 긴장감에 목 뒤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하필이면 계절도 초여름인데다 시간도 한 시 반이야. 스릴러 찍기 딱 좋은 때다.
“아, 뭐야.”
삐그덕대는 목으로 돌아본 뒤에는 다름 아닌 전정국이 짝다리를 짚고 서 있었다. 혀로 사탕을 만들어 볼을 찌르는 중이었으니, 필시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확실했다.
“왜. 뭐가.”
“쟤가 걔야. 전정국.”
“…나 휴대 전화로 112 찍어놓은 거 실화냐.”
“야, 전정국! 너 거기서 뭐 해?”
동글이 안경을 쓴 채 대충 후드집업만 걸친 전정국은 내 부름에 내가 앉아 있는 편의점 테이블로 슬리퍼를 죽죽 끌며 다가왔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너 때문에 우리 둘 다 놀랐잖아. 전정국은 말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상대적으로 낯을 덜 가리는 정호석이 먼저 인사를 하고, 전정국이 뒤이어 인사를 했다. 으음. 나는 미묘한 분위기에 눈을 가늘게 떴다가, 씻고 나온 건지 조금 홍조가 있는 전정국의 뺨을 톡톡 쳤다. 전정국은 여전히 뭐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전 이만 가 볼게요. 000, 들어가면 연락하고.”
“그냥 이렇게 가?”
“그럼 뭐. 나랑 뭘 더 하고 싶어.”
“됐다, 됐어. 오늘 고마웠다. 조심히 가.”
“어. 간다. 내일 일어나자마자 전화해. 해장하러 가게.”
깔끔한 성격답게 순식간에 테이블을 정리한 다음 정호석은 홀연히 휙 가 버렸다. 호시기, 내 맘 알지! 등 뒤로 외친 내 말에도 팔을 휘적휘적 젓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아까 우울했던 기분이 훨씬 나아져 있었다. 이게 정호석 때문인지, 딱 좋게 올라온 취기 때문인지, 내 앞에 뿅 나타난 전정국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집 앞에 있던 편의점이었던지라 집까지 가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전정국은 날 일으켜 세우고는 내 걸음걸이가 정상인 것을 확인하고는 가자,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취했어?”
“아니이. 그냥 기분 좋은데?”
“늦어서 걱정했어. 전화해도 안 받고. 휴대 전화는 폼이냐. 그 비싼 거 왜 들고 다녀.”
“웬일이냐, 내 걱정도 하고 인마.”
“오랜만에 너희 집 가서 있었는데 아줌마한테 얘 왜 이렇게 안 와요? 하니까 모르겠는데, 하시대. 깜짝 놀라서 여기저기 다 가 봤는데 없고.”
“그 여기저기가 어딘데.”
“너희 학교 애들이랑 우리 학교 애들이 자주 가는 데 있잖아. 쩌어기 있는 호프집이랑, 포장마차에도 가고 그랬는데 없더라고.”
“아, 전정국 무섭네.”
“네 나와바리나 내 나와바리나.”
내 어깨를 툭 치는 전정국에 그냥 킥킥 웃었다. 초여름의 새벽공기는 기분이 좋았다. 내 고민덩어리인 전정국이 나와 딱 붙어 있어도 아무 생각이 안 들 만큼.
“야, 000.”
잘만 다리를 움직이던 전정국이 문득 우뚝 멈춰 섰다. 나도 따라 발걸음을 옮기던 것을 멈추고 전정국을 바라보았다. 안경 뒤에 숨겨진 눈은 도시의 보이지 않는 별보다 훨씬 빛나고 예뻤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저 사람 누구냐고 물어봐도 되나.”
“어?”
“저 사람 누구야?”
너 야외에 있는 거 싫어하잖아, 여름에. 살 들러붙어서 플라스틱 의자에 앉는 것도 싫어하잖아. 모기 때문에 밖에 있는 거 싫어하면서, 이렇게 늦게까지 저기 앉아 있었던 거 괜찮았어? 싫어하는 거 모두 괜찮을 만큼, 즐거웠어?
“누군데 내 전화도 안 받고 늦게까지 저기 단둘이 있었어?”
“…야, 전정국.”
“집에 들어가면 연락할 거야? 내일 일어나자마자 전화해서 해장하러 같이, 갈 거야?”
“…….”
“너희 집 모기 내가 다 잡아놨는데.”
“…….”
“네가 싫어해서 잡은 건데. 누군 기다려도 안 오고.”
그렇게 쏟아내던 전정국은, 한 번 더 나와 눈을 마주하고 볼이 패이도록 웃었다.
“나 너무 많이 기다린 것 같지 않냐.”
입안이 메마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괜히 혀를 입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내가 지금 입을 열면 어떤 단어가, 어떤 음성이 튀어나갈까. 나는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결국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술이 들어가 뺨에 열이 올랐고, 초여름의 청량한 공기는 기분 좋게 뺨을 매만지고 지나갔다. 초여름 적당한 음주와 새벽은, 사람을 솔직하게 만들기 딱 알맞았다.
“지쳤어?”
전정국은 내 말에 하, 하고 웃으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
“걔랑 아무 사이 아니야. 좀 친해. 편하고. 쟤 되게 웃겨. 그리고 고민상담도 잘해. 짱이야.”
“…….”
“1차는 호프집이었어. 치킨도 사 줬어, 내가. 네가 조금만 일찍 왔어도 나랑 만났겠다. 2차로 여기 온 이유는 그냥 걔가 나 배려해 줬어. 어차피 편의점이 내 집이랑도 가깝겠다, 사람도 없겠다 해서 테이블에 무작정 앉은 거야. 기분 하나도 안 나빴어. 모기 생각도 안 났고 더운 거 생각도 안 났어.”
“……그랬구나.”
“응. 근데 나 무슨 얘기했게. 네 얘기했어, 오늘 하루 종일. 질리도록. 네 얘기 안 하려고 해도 나오더라. 내가 너 불안해서 그랬어. 이제 자신 없어졌거든, 너한테. 입시 끝난 날 넌 나한테 왜 아무 말 안 했는지도 궁금하고. 우린 뭘까 생각도 해 보고. 네가 나 이제 안 좋아하나, 아니 진짜로 좋아하긴 했나 싶기도 하고.”
“…….”
“그래서 결론이 뭘 것 같아, 정국아.”
응? 정국아. 뭘 것 같아, 넌. ‘전정국’이 아닌 ‘정국이’를 올리는 게 영 낯설어 자꾸만 혀로 입안을 헤집어놓았다. 나는 미약한 열기가 있는 전정국의 볼에 손바닥을 가져다대고 그대로 감쌌다. 복숭아 같은 게. 앙앙 물어 버리고 싶네.
“나 너 좋아해. 이걸 네가 날 좋아한다는 것보다 늦게 알아채서 미안해.”
“아, 000…….”
뜨거운 열기가 어깨에 쏟아져 내렸다. 전정국은 다른 사람보다 체온이 늘 높은 편이었다. 옛날에는 그게 그렇게 싫었는데…… 이제는 그게 그렇게 좋고. 나는 제 몸을 내게 무작정 기대오는 전정국에 의해 몸이 기울면서도, 전정국의 등을 가만히 감쌌다. 너 정말 우리 집에 있는 모기 다 잡아놨어? 안 잡아놨으면 어떡할래.
“다 잡아놨다니까 글쎄.”
“한 마리라도 날아다니면?”
“그럼 별수 없지. 혼나야지, 입술로. 뽀뽀 당할게, 내가.”
“뭐? 야.”
“내가 뽀뽀 당해 줘야지 어쩌겠어? 아, 어쩔 수 없네, 정말.”
전정국의 목소리가 나비처럼 팔랑거렸다. 나는 나비를 잡으려는 것처럼 전정국의 단단한 팔을 꾹 쥐었다. 전정국은 그런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손을 감쌌다. 모르는 척해 보려 해도 손을 얽는 행동이 은근해서,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아, 나 아무래도 울 것 같은데.”
“너무 좋아서?”
“애들이 그랬어. 난 영영 사춘기일 것 같대. 내가 애 같아?”
“말 돌리긴. 김태형이나 박지민이 그랬겠지.”
소름. 전정국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괜히 내 머리를 헝클였다. 넌 나에 대해 너무 잘 알아. 그러니 이만 날 예뻐해 줘야겠어. 전정국은 내 손을 붙들고 무릎을 굽히더니 스스로 쓰담쓰담했다. 나는 또 푸스스 웃었다. 술 마신 건 난데, 왜 네가 다른 사람 같아져? 전정국은 대답 대신 코를 찡긋찡긋했다.
“있잖아, 사춘기의 사는 사랑의 사야?”
“……너 그거 진심이면 그 머리로 대학 어떻게 들어갔냐?”
“하씨. 백치미, 백치미. 넌 그것도 몰라? 이런 거 물어보면 귀엽다고 하던데.”
“웃기시네. 빡대가리라고 하겠지.”
“애가 낭만이 없어!”
“몇 신데 소리를 질러? 이 봐. 사춘기네, 아직도.”
전정국이 전투적이게 나를 휙 돌아봤다. 아, 알았어. 너 사춘기 아니야. 나는 아까처럼 손을 길게 뻗어 전정국의 머리를 자발적으로 쓰다듬었다. 우린 변했으니까, 사춘기도 변할걸. 사춘기가 아니라, 이제 청춘이라고 부를 거야, 그거. 아마도.
오늘도 고생했어요!
이 글은 특별히 열아홉이 얼마 남지 않았을 분들을 위할게요! 이번 수능은 다른 수능과 조금 달랐는데, 잘 버텨 줘서 고맙습니다.
사춘기의 연장선이 청춘이라는 제 생각을 녹여낸 글이에요. 오늘 수능을 끝마치신 분들 이외에도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계시거나 성인을 앞두고 계신 분들 모두 다 청춘을 예쁘게 즐기셨으면 좋겠어요. 좋은 날만 있을 수는 없겠지만, 좋은 날이 앞으로 많으시길 빌게요!
오늘의 결과가 어떻건 고생했다는 사실은 변치 않습니다. 모두모두 고생하셨어요. 오늘 새벽이 너무 긴 새벽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반짝반짝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