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내리지 않고 뜨거운 열만 대지에 내리면 땅은 건조해진다. 우리가 그렇다. 속으로 뜨겁게 사랑하고 울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건조한 연애를 한다. 연애에 비는 불필요한 존재라고, 적어도 우린 그렇게 생각한다. 오고가는 무미건조한 대화 속에도 얼굴을 쓰다듬는 네 손길이 느껴지고, 이성과 네가 대화를 나누고 있어도 내 손을 잡아오는 네가 느껴진다. 뜨겁게 사랑하되, 건조한 연애는 지속된다. 나의 대지는 뜨겁게 마른다.
1 관계의 서막
우리의 시작은 조금 특이했다. 아니, 애초에 남남이라는 관계 자체가 특이할지도 모른다. 정갈한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둘러매고 찬 교실에 앉으면 종 울리기 5분 전에 그 아이가 들어온다. 시끌벅적한 무리 속에 어울려 들어와 내 옆자리에 앉아 교과서를 꺼내어 그 위로 머리를 뉘였다. 이름은 변백현. 옆 여고 여신이라던 애랑 사귀다가 얼마 가지 않아 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난 그 아이를 좋아했다. 내 성정체성은 중3 때 확립됐다. 위로 김준면이라는 사촌 형이 있었다. 형이 남자를 집에 데려오기 전까지 내가 여자보다 남자에 더 관심이 가는 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극히 평범했던 준면이 형이 추석에 애인이라고 아주 큰, 크리스라는 이름을 가진, 직장 상사로 만났던 그 형을 데려오고 나는 그날을 터닝 포인트로 나의 성정체성을 확립했다. 나는 변백현의 일상을 관찰하는 데에 관심을 쏟았다 잠과 대화의 연속인 변백현의 일상이 일관되지만 매우 흥미로워 보였다. 그 아이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망설였다. 준면이 형은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형과 나의 성정체성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체육시간, 아무도 나를 깨우지 않고 나갔다. 변백현을 지켜보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깨자마자 마주친 건 나와 같이 스윽 눈을 뜨고 있는 변백현이었다. 나는 깜짝 놀래 다시 눈을 감고 자는 척 했지만 변백현이 작게 웃으며 ' 나 체육복 갈아 입을 테니까 그 눈 뜨지 마'라고 말했다. 지금 발갛게 달아오르는 건 과연 누구의 볼일까. 나는 부끄러움에 두 눈을 꼭 감고 변백현이 다 갈아입길 기다렸고 변백현은 어어 진짜 꼭 감으라고 감네? 친구사이에 뭐가 부끄럽다고 꼭 감냐 하고 내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친구,친구,친구 그이상을 욕심 내고 싶었다. 변백현은 이동수업이 있을 때마다 나를 기다렸다. 야 도경수 나와 빨리 이 말이 변백현이 자주 하는 말이 되었다. 그럼 나는 굼뜬 행동으로 슬금슬금 교실을 나갔고 변백현 뒤가 아닌 옆을 따랐다. 우리는 그렇게 가까워졌다. 고2 수학여행, 강원도 산골에 꽤 넓은 리조트로 갔다. 때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란 격언이 지금 쓰는 게 맞는 건가 독감에 걸려 숙소 안에서 아무런 활동도 못하고 끙끙 앓아 누웠다. 그 옆을 변백현이 지켰다. 놀기에 바쁠 변백현이 내 옆을 지켰다. 그나마 있는 친구인 변백현이 내 옆을 지키고 있다. 감기 때문인지 저 아이 때문인지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는다. 간호에 젬병인 변백현은 채 짜지 않은 물이 뚝뚝 흐르는 수건을 내 이마에 올려놓아서 이불과 옷깃이 축축하게 젖었다. 땀인지 물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내가 아픈 신음을 흘리자 변백현이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는 계속 친구라는 단어를 되새겼다. 그러다가 스윽 잠이 들 때 나는 꿈 속에 들어가서 변백현의 사랑 고백을 들었다. 경수야 사랑해. 아아, 꿈이 아니었으면 하고 꿈에서 나는 엉엉 울었다. 눈을 뜨고 보이는 건 천장이었고 아직까지 변백현이 내 옆에 누워 내 손을 붙잡고 있었다. 내 옆에 자고있는 변백현 꿈에 들어가 나도 그 꿈 속에서 백현아 사랑해라고 말해 주고 오고 싶었다.
"백현아"
"사랑해"
사랑해라고 말한 건, 사랑고백을 건넨 건 눈을 뜬 변백현이었다. 나는 두 눈이 커졌다. 변백현은 내가 곰돌이 같았다며 간혹 놀리기도 한다.
"깨면 꼭 말하고 싶었어. 경수야 사랑해."
노멀인 변백현이 내게 고백을 했고 나는 말없이 변백현 손을 꽉 쥐고 아직은 아픈 몸을 변백현 품 속에 뉘여 다시 부드러운 잠을 청했다. 우리의 관계는 연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