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93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10월 15일(임신) 3번째기사
경상 우병사 김응서의 건의대로 권양·조응인·박광선을 포상하기로 하다
“신이 항복한 왜인을 불러서 보살펴 준 뜻은 왜적을 방어하는 데 쓰려고 한 것이었으나,
혹 범을 길러 화를 끼침과 같다 하여 늘 죽이고자 하니,
항복한 왜인들이 이러한 기미를 알고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신이 늘 그렇지 않다고 개유해서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죽음을 각오하며 싸우되 한 사람도 배반할 뜻이 없으니 그 정성을 알 수 있는데,
도내의 유식한 무리들도 범을 기름과 같다고 해서 만나는 대로 꾸짖으니
항복한 왜인들의 의혹이 전보다 심해졌습니다.
신도 접대할 물자가 없어서 적이 도발한 후 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우는 것을
보고서도 위안하고 기쁘게 해준 것이 없어 항상 민망하던 차
단성(丹城)의 적과 싸워 이길 때에는 그들이 6명이나 죽어 더욱 생기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합천(陜川) 지방의 전 별좌 권양(權瀁)과 유학 조응인(曺應仁) 등이
술과 고기를 성대하게 갖추어 직접 위로하며 의복을 주고 그들의 마음을 살펴보니
항복한 왜인들이 의혹을 풀고 와서 말하기를
‘전에는 사람들이 모두 원수로 대하기 때문에 차라리 일찍 죽을까 했는데,
지금은 높은 선비께서 대우함이 이와 같으니,
다른 소인들의 말을 생각치 않겠으며
이제부터는 즐거운 마음으로 나가서 싸우겠습니다.’ 하니,
이 항복한 왜인들이 의혹을 푼 것은 오로지
이 사람들이 한 차례 먹여주고 타일렀기 때문입니다.
전 참군(參軍) 박광선(朴光先)은 항복한 왜인이 힘껏 싸웠다는 말을 듣고
자기가 타고 다니던 좋은 말을 주었으니, 이러한 선비들은 상을 바라는 마음은 없지만
나라를 위한 마음은 매우 아름다우니, 조정에서 포상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니, 회계하기를,
“김응서의 진중에 있는 왜인들이 전후로 힘껏 싸워 적의 머리를 벤 것이 매우 많았고,
죽고 부상당하기까지 하면서도 후회함이 없었다 하니 박대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의 의리로 향하는 마음에 대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원대한 소견이 없기 때문에
늘 항복한 왜인은 쓸 수 없다고 하므로 저들은 의구심이 생기어 힘껏 싸우지 않게 되니 참으로 부당합니다.
권양과 조응인이 베푼 것은 비록 작으나 혜택은 커서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었습니다.
박광선의 경우는 말을 아끼지 않고 차라리 도보로 걸어다닐지언정
왜인의 힘껏 싸운 성의를 권장하려 했으니 그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박광선은 우선 복직시키되 해당 관사로 하여금 상고해서 거행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윤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