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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좀아포 : 후타쿠치

우리는 말없이 계단을 밟았다. 찐득한 핏물이 실내화 밑창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3층 복도는 요란할거라는 예상과 달리 고요했다. 시멘트가 갈라진 벽에 기대어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자, 후타쿠치가 긴장한 나를 보며 장난스레 미소 짓는다.

“무섭냐?”

뒤엉킨 머리카락과 짙어진 눈 밑, 거칠어진 뺨은 피가 말라붙어 웃을 때면 상처가 벌어졌다. 친한 친구를 셋이나 잃고 우환이 가득한 주제에 상쾌한 척하기는.

정작 친구도 없이 외톨이로 지냈던 나는 그의 선택으로 살아남았다.

“나는 이 앞을 살펴볼 테니까 너는 저쪽 보고 있어.”

후타쿠치의 길게 뻗은 손가락이 유리가 박살 난 창문을 향했다. 군데군데 살점이 붙은 파편이 남아 언뜻 보기엔 역했지만, 그 위로 낭창한 하늘이 구름을 펼쳐놓고 있었다. 우습게도 햇살 좋은 여름의 낭만을 자아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예전엔 네가 정말 멀게만 느껴졌는데.”

그는 손에 쥔 야구 배트를 몇 번이고 만지작거렸다.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고 있어 표정을 살필 순 없었다.

“나는, 늘 꿈에서만 너랑 이야길 했으니까.”

그는 작게 키득대더니 다급하게 덧붙였다. 아, 이상한 꿈은 아니었다? 오해하진 말아줘.

서서히 그의 시선이 지독한 현실로부터 멀어져 나에게로 향했다.

“크흠, 아무튼...”

“...”

“환상이 아니잖아. 더 이상.”

“...”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지켜줄게.”

숨을 헐떡이며 우리를 향해 달려들던 주검들과 고약한 악취를 덮어쓴 피투성이의 교실에서, 너는 수많은 죄책감을 뿌리치며 나의 팔을 쥐고 달렸지.

나를 바라보는 정직한 그의 눈동자로부터 그 감각을 기억해낸다.

“내가 살린 목숨이니까. 절대 죽게 하지 않을 거야.”

2. 오펀 : 사쿠사

더러운 걸 누구보다 끔찍이 싫어하던 너에게, 나는 개중 가장 더러운 것이었다.

도련님답게 윤기 나는 곱슬머리와 뽀얀 피부, 잘 다려진 셔츠에 모직 반바지를 입고 있던 어린 소년은 예고 없이 입양된 나를 혐오스레 내려다보았다. 당시에 나는 최대한 깨끗이 빨아 투박한 비누 냄새를 풍기던 얇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한겨울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나마 가장 덜 낡았고, 꽤 아끼던 것이었기에. 그러나 도련님 눈에는 그조차 못나 보였던 것인지 부엌으로 달려가 사모님이 마시다 남겨둔 홍차를 내게 부어버렸다.

“더러워, 당장 나가.”

“키요. 뭐 하는 짓이냐.”

“...아버지. 이 애는 뭐예요? 왜 천한 것을 집에 들이시냐고요.”

나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주인님은 무뚝뚝하지만 어딘가 고양된 음성으로 그의 아들을 향해 웃었다.

“이 애는 원석이야. 조만간 내가 직접 바이올린을 가르칠거다.”

그때의 소년은 분노로 몸을 떨었고, 몇 달 내내 악착같이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그가 밉지 않았다. 무턱대고 내게 쏟아내는 폭언도 골탕 먹이려는 몸짓도 잊게 만들만큼 아름다운 음률이 그의 손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쉽게 매료되어 동경할 수 밖에 없었다.

타고나길, 아름다운 것에 취약했다.

“도련님이 좋아요.”

“...뭐?”

“바이올린 켜실 때는 정말 멋져요. 저도 언젠가 그런 선율을 낼 수 있을까요?”

“웃기는 소리.”

마당에 핀 꽃을 뿌리째 뽑아 얼기설기 엮은 미숙한 꽃다발을 처음으로 건넸을 때 그는 당연히 받지 않았지만, 흙투성이가 된 손 위로 손수건을 던졌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

“비켜.”

그러나 그는 열다섯 번째 생일을 맞이한 기점으로 더 이상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레슨 시간이 늘어나 마주칠 일도 적었거니와 어쩌다 한번 마주쳐도 그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무시하고 지나갈 뿐이었다.

저택에서의 생활은 단순했고, 쓸쓸했다. 나는 언어보다 악보 읽는 법을 먼저 배웠다. 틈틈이 글자 연습을 한 건 언젠가 그에게 편지를 써주고 싶어서, 그게 다였다. 그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고등부 엘리트 코스를 밟을 때도, 나는 그것이 당연하게만 여겨졌다. 한낱 재능으로 얼버무릴게 아니라, 그는 누구보다 정성껏 연주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꺼져.”

눈이 가늘게 내리던 날, 하필이면 그가 가장 좋아하던 곡으로 함께 나간 콩쿠르에서 내가 입상을 해버렸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최악인 결과였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간절히 좋아하면 할수록 스스로 증오하게 된다는 것을.

“...”

“꺼지라는 말 안 들려?!”

“제가 사랑한 건 도련님의 바이올린이 아니었나봐요.”

“...나가. 제발.”

“저는 그냥, 도련님을 사랑한 것 같아요.”

나는 그대로 집을 뛰쳐나와 보육원까지 쉴 새 없이 걸었다. 나는 바이올린 따위를 하고 싶어서 주인님을 따라간 게 아니었다. 나를 고아로 만든 건 이름조차 모르는 어머니, 아버지도 아니었다. 편지를 휘갈겨놓고 나온건 그 때문이다.

- 도련님, 당신이 나의 결핍을 처음으로 인식시켰어요. -

3. 구원자 : 시라부

나는 괴로운 것을 볼 때면 숨을 참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켄지로는 그 버릇을 알고 있다.

“다 때렸냐?”

“뭐 이 새'끼야?”

구관 체육 창고는 우리의 아지트였다. 그와 동시에 피식자의 소굴이기도 해서 불량한 놈들은 이곳에서 우리를 발견하면 입맛을 다셨다. 그들은 처음에 펼쳐진 문제집을 짓밟거나 도시락통을 발로 찼는데, 켄지로가 딱히 반응이 없자 손찌검을 시작했다.

“더 때릴거면 빨리 해.”

”하?“

”곧, 종치니까.”

그는 나를 흘긋 보며 말했다. 켄지로는 종치는 것을 걱정한 게 아니라 내가 숨을 안 쉬고 있으니 주의를 준거다. 나는 그의 눈길에 그제야 조금씩 밭은 숨을 내쉬었다. 살아있는 게 무력함을 입증하는 순간이었다. 켄지로가 몇 번의 주먹질을 더 견뎌야 할까.

우리는 작고 허름한 멘션에서 살았다. 아주 어릴 적부터 가족같이 지내와서 언제부터 우리 둘만 남겨진 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여튼 분명한 건 나는 이 애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거다.

“켄지로는 전혀 아니겠지만...”

“뭐? 안 들려.”

“아냐. 연고 바를거니까 눈 감아봐.”

멍이 든 눈꺼풀이 감기며 긴 속눈썹이 내려앉았다.

여느 때와 같이 아프다고 툴툴대려나 했는데 드물게도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그 틈에 터진 입술 근처에 반창고를 붙였다.

"야, 나도 너 없으면 안돼."

"뭐야... 다 들었으면서."

"짜증나니까."

켄지로는 내 옷깃을 만지작거리며 괜히 성질을 부렸다. 나는 그의 신호를 알고 있다. 켄지로가 다가오면 나는 눈을 감고 다분히 감정섞인 입맞춤을 받는다.

"너 또 다른 생각하지."

"아니. 연고가 맛없어서..."

"참나."

그가 나의 어깨를 감싸안고 그대로 누웠다. 머리칼이 흩어지는 감각이 좋았다. 우습게도 안도감이 든다. 네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네가 아직 잘모르나본데."

"뭐를."

"난 혼자 남는거 무서워해."

"...그랬어?"

"그래 이 바보야. 내 약점이 너라고."

추천  1


 
닝겐1
셋 다 너무 맛있다 진짜...😭😭😭
27일 전
글쓴닝겐
헿 고마워💙
27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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