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그녀는 가볍게 만난 사이다. '가볍다.'라는 건 하룻밤 자고 끝낼 사이라는 말이 아니라, 서로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인생이 심심해서 지루함을 이겨낼 요량으로 그녈 택했고 그녀 또한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편히 쉴 수 있는 소재를 찾다가 날 발견했겠지. 당시의 난 2년차 대학원생, 그녀는 워커홀릭 커리어우먼이었다.
둘 다 따분한 인생에 대해 그다지 불만족스럽지도, 그렇다고 행복하지도 않은 상태. 두부를 우린 물 같은 하루. 희뿌옇게 어제의 일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그런 미지근한 일상들.
처음엔 만나서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남들처럼 영화를 봤다. 연인보다는 영화메이트에 가까웠다. 평점 2점짜리 영화를 보면서 하품 한 번 하지 않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궁금한 것들이 생겼다. 이 여자는 과연 무슨 재미로 살까. 특별한 기억은 있나? 우리 만남의 금기는 선을 넘지 않는 것이다. 그저 정해진 날에, 정해진 시간을 떼우며 가볍게 연인 행세를 하는 정도.
근데, 넘지 못할 선이라는게 내게 있었나?
"왜 하필 저한테 이런 제안을 했어요?"
"넌 왠지 아무런 미련도 갖지 않을 것 같았거든."
아마, 사랑 또는 그 언저리의 애정이 삶을 특별하게 바꾸어준다는 이야기를 들은 거겠지. 실행할 자신은 없고, 연애에 그다지 흥미도 없었을 그녀는 우연히 지인 소개로 나를 알게 되었고, 언제든 사라져도 상관없을 상대에게 대수롭지 않게 제안한 것이다.
'가볍게 만나볼래?'
그때의 난 황당하면서도 아주 작은 희열을 느꼈다. 대학원 생활의 군기가 빠져 재미에 굶주려 있었고, 연애를 하지 못한지도 꽤 되었으니, 나름 설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얼마 못가 그런 기대는 와장창 깨져버렸지만.
'가볍게요?'
'응. 불편하면 바로 거절해도 돼.'
'사귀자는 말인가요? 아니면...'
'널 좋아하는 건 아니야.'
'그럼...'
'그냥. 일상에 변화를 좀 주고 싶어서.'
주저없이 무례한 답변들 속에서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변화라는 건 내가 그녀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의미에 집착하는 스타일이다. 심리학 전공에 걸맞게.
"오늘은 어땠어요?"
"똑같았어. 거래처 만났다가 회의하고..."
"일 말고, 기분."
"기분...? 음... 그냥 그래."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따뜻하게 데워진 초코라떼를 건냈다. 은근슬쩍 손도 잡았다.
"지금은?"
"...아까보다는 좋아."
일방적인듯 아닌듯 난해한 관계를 지속한지 세달째다. 여전히 그녀에게 나는 커피친구, 술친구쯤으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나한테는 안 물어봐요?"
"뭐를?"
"오늘 어떤지."
"아, 오늘은 어땠어."
"이름도 불러줘요."
"...켄지로. 오늘은 어땠어?"
"즐거워요."
"지루한게 아니라?"
"네. 변했어요. 이제는 묘하게,"
"...?"
떨려요.
긴장이 돼서 활력이 돌고, 그래서 즐겁고,
"좋아요."
"뭐야."
우리에게 허용된 진심은 좋아, 까지다.
하루는 늦은 밤, 그녀에게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다시 전화를 해보니 서너번 거절을 당하고, 외투를 걸친 채 택시를 잡던 와중에 드디어 그녀의 목소릴 들었다.
"어디야."
"...모르겠는데."
"술 마셨어?"
"으응."
"무슨 일 있어요?"
내 질문에 그녀는 평소처럼 미팅이 잘 안됐고, 팀장 호출이 있었고, 사내 실적이 떨어졌고-, 와 같은 일과를 나열할 줄 알았지만 한동안 말이 없었다.
"슬퍼."
저릿한 오늘의 기분을 전달하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전달되자 나는 숨이 찼다. 몇 초라도 늦게 전달되는 이 기계말고 눈 앞에서 보고싶다. 가녀린 음성과 떨림을 직접 듣고 싶었다. 1초라도 늦게 전달받고 싶지 않다. 그녀의 흔치 않은 진심을 내게 보여줬으면 싶었다.
"가고 있어요."
"올거야?"
"응. 거의 다왔어."
몇 분 지나지 않아 식당 옆 골목에서 등이 보이게 기대어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어깨 위로 뿌연 연기가 올라오는게 흡연 중인듯 했다. 담배를 피운다는 건 오늘 처음 안 사실이다.
"켄지로."
"왜 슬픈데요?"
나는 그녀를 다그치고 싶지도, 그녀에게 집착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건 멋없으니까. 천천히. 그녀가 원하는 미지근한 온도로, 아주 느린 속도로 다가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게 한없이 가벼워보인데도, 나는 무거운 시간을 짊어질 자신이 있었다.
"예전에 사귀었던 애인이 있었어."
"응."
"좋아했나? 모르겠어. 근데 오늘 찾아왔더라고, 회사에."
"갑자기?"
"응... 그러더니 지난 일은 미안하대. 여전히 날 사랑한대. 그러고는 날 껴안았어."
"왜 헤어졌는데요?"
"그 사람이 바람피웠거든."
"..."
부글거리는 속에 온 몸이 데일 것 같았다. 마음이 아프다는게 이런걸까. 누군지도 모르는 초면의 남자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가만히 안겨있는데 따뜻하더라. 그러더니 그 사람이, 한번만 용서해달라는거 있지."
"...그래서요."
"모든 걸 다 용서한다고 했어."
나는 그녀의 대답을 끝으로 그간의 짝사랑을 접겠노라 다짐했다. 이 미적지근한 여자가 누군가에게 안겨 자신의 마음을 곱씹다니. 완전한 패배가 아닌가. 나는 그녀를 부축하며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코트에 베어있는 쌉싸래한 담배냄새가 낯설다가도 편안했다. 이 여자의 슬픔은 이런 향기가 나는구나.
"다 왔어요."
"...들어왔다 갈래?"
"아뇨."
"...그럼, 잘가."
"이제 우리 그만해요."
"뭐를?"
"그 남자를 다시 사랑하게 됐잖아요. 그럼 우리 사이도 이제 정리해야죠."
단호한 말에 그녀는 물끄러미 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고이거나 하진 않았겠지, 걱정이 되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당신은 가벼웠겠지만. 사실 저는 아니예요. 버거웠고 힘들었어요."
멈추고 싶었지만 자꾸만 원망스러운 마음이 녹아나왔다. 붙잡아 달라는 말, 그 사람 대신 날 선택해달라는 의미 없는 바람이.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어?"
"..."
"모든 걸 다 용서할 수 있다고 했지."
"그게 그거잖아요."
"그 반대야."
완전한 작별. 그 어떠한 미련도 사랑도 남지 않은 마지막 인사.
"그 사람이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라 용서하는거야."
"..."
"켄지로, 나는 사랑하면 절대 용서못해."
"네."
처음 말하는거야. 정말로, 네가 처음이야.
"지금 날 떠나면... 너를 용서하지 못 할 것 같아."
그녀는 조심스레 다가와 고백했다. 살벌하기도 한 이 말은, 미련스럽게 나를 기억하겠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허용된 선은 좋다는 말까지, 그 미지근한 선을 지키며 나는 그녀를 안아주었다. 첫 눈이 내릴 때까지.
"가볍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물론이야."
나는 용서를 바라지 않는다. 어떤 형태로든 네게 남고 싶었다. 미움도 애정도 나를 생각하며 네가 울고 웃었으면 좋겠다고, 정성껏 저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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