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고 믿어요?”
환승연애>와 나는 솔로> 시청자들에게는 잠꼬대 같을 만한 소리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보다 ‘사랑할 가치가 있는 상대가 세상에 남아 있을까?’라는 질문이 더 절실한 시대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사랑의 영속성을 믿고 싶어질 만큼 강렬한 연애 감정이라면 여전히 얘깃거리가 된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그 감정을 섬세하게 재현한 작품이다.
준고의 소설은 홍에 관한 것이다. 요즘 같으면 홍이 재현 윤리에 어긋난다며 공식 사과와 판매 중단을 요구하고 독자들이 캔슬 운동을 벌일 일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원작 소설이 출간된 것은 2005년이다. 민준(홍종현)과의 결혼을 앞두고 있던 홍은 오래전 지나간 일이라며 준고를 밀어내지만 격하게 마음이 흔들린다. 준고는 이번에야말로 홍을 잡고 싶어 한다.
주인공들이 서로 사랑하지만 헤어져야 했던 이유는 서서히 밝혀진다. 공지영과 츠지 히토나리가 각각 홍과 준고의 관점에서 써 내려간 원작 소설은 그것을 매우 설득력 있고 유려하게 그려낸다.
홍은 유복한 집 자제이자 시를 좋아하는 낭만적인 인물이다. 바깥세상을 동경하고 자립을 갈망하지만 능력 있고 헌신적인 남자를 골라잡아서 결혼한 후 미국에 원정 출산을 간다거나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는 식의 삶도 원하면 가능한 사람이다. 반면 준고는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인물이다. 홍은 자기보다 일이 우선인 것 같은 준고를, 그의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홍의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였다. 그래서 아버지가 첫사랑 일본 여성과 결혼하는 데 반대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첫사랑을 못 잊었다고 생각해 내내 불행했다. 홍은 부모에게서 자기 모습을 봤다. 그런 가족을 팽개치고 사랑에 미쳐서 일본에 머무는 게, 자기 꿈도 포기하고 하루 종일 목 빠져라 준고를 기다리는 게, 준고가 확신을 주지 않는 게 힘들다. 홍의 과몰입과 과의존은 홍이 의지가지없는 외국 땅에서 지내는 탓이기도 했다. 그때 준고는 타국 살이의 외로움을 이해하지 못했다.
드라마는 원작의 유려한 필력을 아름다운 영상미로 대신한다. 주인공들이 재회한 첫날, 준고를 촬영하던 사진가가 홍에게 그의 터틀넥을 정리해달라고 부탁한다. 홍이 준고의 옷을 정리하는 장면은 1분 가까이 진행된다. 액션 영화라면 도망자의 차량이 재물 손괴를 1억원어치쯤 하고 서울에서 수원까지 갔을 시간 동안 이 드라마는 주저하며 다가가는 홍, 애써 덤덤한 준고, 서서히 올라가는 손, 회상, 준고의 목덜미를 오가는 홍의 손가락을 보여주는 식이다.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은 것은, 공들인 영상과 연기로 감정의 밀도를 꽉꽉 채웠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일본에서 연애를 시작하는 시기는 벚꽃이 흩날리는 공원, 활기찬 거리, 인형 뽑기 가게, 채광 가득한 준고의 빌라 등을 배경으로 밝고 서정적으로 묘사된다. 홍의 성격도 발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연애 후반은 어둡다. 홍은 밤거리에서 린치당하고, 병원에서 연락이 닿지 않는 준고를 기다리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는 준고를 원망한다. 홍의 현재는 차갑다. 유리창이 많은 출판사 건물, 조도 낮은 호텔, 준고가 홍의 차로 뛰어들 때 주차장의 살풍경, 무채색 의상 등이 홍의 상태를 드러낸다.
주인공 중 변화가 더 큰 쪽은 관계에 먼저 돌진했고, 먼저 이별을 고했고, 그 사랑을 과거에 봉인하려 애써온 홍이다. 이세영은 섬세한 연기로 시간에 따라 깊어지는 홍의 감정을 설득해낸다. 그의 일본어 독백은 언어로서의 완성도를 떠나 선율 자체로 매혹적이다. 이세영에 비해 사카구치 켄타로의 연기는 변화 폭이 크지 않다. 준고 자체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사카구치 켄타로의 담백함이 이세영의 직관적인 연기를 돋보이게 해주어 둘의 균형이 좋은 편이다. 그들의 투샷은 확실히 설렌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자극적인 설정 없이 우아하게 감정의 폭풍을 전달하는 드라마다. 평생의 사랑을 준고에게 다 써버렸다고 느낄 만큼 텅 빈 채 살아가던 홍, 홍이 떠나고 나서야 그를 이해하고 그리워하던 준고가 재회 후 어떤 선택을 할지, 드라마와 소설의 결말이 일치할지, 직접 확인해보길 권한다. 인간끼리의 사랑은 몰라도, 완성도 높은 정통 멜로를 향한 우리의 사랑은 변치 않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