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 시대별로 정리해 봤긔. 저는 찾아 본 자료를 나열해서 정리만 했을뿐이긔 내용도 넣긴했는데 길긔...사진만 보셔도 되긔. 사진은 여성 한복 위주)
한복의 유래: 한복의 시초를 보면 고대 동북아시아의 스키타이-시베리아 문화에서 건너온 것으로 유목민의 다양한 의상 중의 하나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42][43] 동북아시아에서 발견되는 가장 초기 증거는 흉노족의 집단 매장지인 노인 울라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몽골 북부에 위치한다.[44] 한편, 한복 자체의 디자인과 관련해 가장 오래된 증거는 기원전 3세기 전 고구려 벽화에 담겨 있다.[45][46]
한복 구조: 기본적으로 상유하고(上襦下袴)[1] 양식을 띠고 있다. 북방(알타이)계 호복을 근간으로 상의와 하의가 나누어져 있어 여자는 저고리와 치마, 남자는 저고리와 바지로 구성된 활동적인 복식이다.[2] 또한 아한대성 기후조건 탓에 몸을 감싸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한푸와 달리 치마 속에도 반드시 바지를 입는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복은 속바지건 겉바지건 간에 바지를 포함하고 있고, 여러 겹을 껴입어 풍성하다는 특징이 있다. 복식사에서 한민족만큼 끈질기게 동형성을 지킨 민족도 드물다고 한다. 다만 광복 이후는 제외.
1. 상대시대
1) 부족국가시대
- 고조선 시대
복식에 대한 기록으로는, 단군 원년에 '나라 사람에게 머리에 개수하는 법을 가르쳤다'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에 이미 의복이 정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우리옷의 기본 조형인 소매통이 좁은 저고리에 바짓가랑이가 좁은 바지를 입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 부여
흰색을 숭상하는 부여의 백성들은 흰색천으로 된 대수포와 바지를 입고, 신은 가죽이나 풀로 엮은 초 탑을 신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추울 때는 살쾡이와 여우 등의 동물 가죽으로 만들어 입었다고 한다.
- 삼한삼한의 복식 생활을 보면 머리가 길고 흰옷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또한 이들 남쪽 부족 국가들도 직조기술이 발달했음을 넓은 폭의 곱고 가는 삼베를 잘 짰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2) 삼국시대
- 삼국시대 통용되던 기본 복식
삼국시대에 한반도는 전반적으로 의복의 재료인 직물이 크게 발달하여 견직물만 해도 주(紬)·능(綾)[비단]·사(紗)·라(羅) 등이 다양하게 생산되었고, 모직물도 전·백류·포 등 여러 가지가 생산되었다. 이 시대의 또 다른 중요한 특색은 국가 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계층화된 신분 제도로서, 복식도 일부 특권층의 것과 일반 서민의 것에 차등을 둠에 따라 평상복도 귀족복과 서민복으로 구분되게 되었다.
- 고구려 (BC37-AD668)
(북한에서 복원한 고구려 의상)
(남한에서 복원한 의상)
고구려 남녀의 기본의복은 상의로 유 또는 삼(衫)을 착용하고, 하의로 고(袴)를 착용하였다. 귀족남녀들은 의식이 있을 때는 물론, 평상시에도 예의를 지키기 위하여 지금의 두루마기에 해당하는 포(袍)를 덧입었으며, 귀족 여인들은 높은 신분을 표시하기 위하여 주름을 많이 잡은 치마인 상(裳) 또는 군(裙)을 고(袴) 위에 덧입었다. 고구려 복식에 대한 전반의 내용은 고기록(古記錄)이나 고분벽화(古墳壁畵), 고분출토품(古墳出土品) 등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 백제 (BC18-AD660)
백제의 복식 생활은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비롯하여 주변 국가인 중국의 이십오사(二十五史), 일본의 일본서기(日本書記) 등의 단편적인 기록 및 무령왕릉 출토의 부장품, 양의 직공도(職貢圖) 등을 통해 그 대략을 살필 수 있다. 북사(北史), 구당서 등에 이르기를 백제는 "언어와 복식, 음악이 고구려와 같다"고 했듯이 일반적인 복식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것과 유사한 것이었다.
(참고로 삼국의 문화가 일본 아스카 문화와 복식에 영향을 줬다 하긔)
일본 여자복식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문헌「일본서기(日本書紀)」 3권에 의하면, 백제에서 옷을 꿰매는 공녀 마케스(眞毛津)가 건너가서 일본의 의봉의 시조가 되었다.(應神十四年春二月 百濟王 貢縫衣工女 曰眞毛津 是今來目 衣縫之始祖也)고 하고 있으며, 고구려의 힘을 빌어 오(吳)의 옷 꿰매는 공녀 네 사람이 일본에 건너갔다.(應神十七年春二月戊午朔……略……令求縫工女 爰阿知使主等 渡高麗國欲達于吳……略……由得通吳 吳王 於是與工女兄媛·弟媛·吳織·穴織·四婦女)고 하고 있다. 하였다.
그 후 고분 시대의 여자의 의복은 의상(衣裳)이 그 주류가 되고 있으며 우리나라 고구려고분벽화의 복식이나 신라 토우의 여성복식과도 상당히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복식의 영향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 여기 클릭: 백제와 일본, 일본 복식
고구려 고분 벽화와 유사한 일본 국보 다카마쓰 고분 벽화(아스카 시대)
자세한 내용 여기 클릭: 일본 다카마쓰총 고분벽화 발견
- 신라 (BC57-AD668)
통일 이전의 신라 문화의 발달은 대개 3단계의 전환을 거쳤다고 볼 수 있다. 제 1단계는 대백제(對百濟), 대왜(對倭)의 관계에 있어 고구려 보호를 받는 보호국가적 존재였으며, 제 2단계는 고구려에 대항하여 백제와 동맹을 맺는 시기로 백제를 통해 들어오는 중국 남조문화를 받아들이는 시기였고, 제 3단계는 고구려, 백제 양국을 적으로 삼고 고구려와 대립하고 있는 수(隋), 당(唐)과 연결하는 시기이다.
중국 상고문헌에 나타난 고신라인들의 복식을 살펴보면, 「양서(梁書)」,「남사(南史)」등에서는 “신라인들이 그 관(冠)을 유자례(遺子禮)라 하고, 유(저고리)를 위해(尉解), 고(바지袴)를 가반(柯半)이라 하며 화(靴)를 세(洗)라고도 한다”고 전하고 있으며, 「수서(隨書)」와 「복사(複寫)」동이전 신라조에는 “의복은 대개 고구려, 백제와 같은데 복색은 소(素)를 숭상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신라복식은 그 의복의 형태가 선사시대 복식의 기본형과 거의 같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전체적인 윤곽은 고구려나 백제의 것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 가야 (기원전후~AD562)
삼국시대는 문헌과 자료가 많이 부족하여 고증이나 복원에 어려움이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이에 따라 가야의 경우에도 그 복식을 고증하는 일이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다. 고령군은 대가야인의 복식이 목부분이 둥근 곡선 깃 저고리를 입는 점에서 신라와 다르다는 사실과 함께 가야제 철제도구에서 나타나는 무늬들을 세부 문양으로 채택했다고 밝혔다.[58][59]
2. 남북국시대
1.) 통일신라 (AD669~935)
당의 제도를 모방해 제반 제도의 개편을 단행하여 중앙집권적 체제를 완성하였고, 문화면에서도 고유문화와 중국문화를 잘 융합하여 찬란한 민족문화를 이룩하였다. 통일 후, 신라의 문화가 더욱 원숙해짐에 따라 복식에 있어서도 많은 발전과 변화가 있었던 반면, 사치와 문란이 극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에 제 42대 흥덕왕9년에 복식 금령(服食禁令)이 내려지게 되는데, 이는 신분을 10개로 나누고 그에 따른 복식을 크게는 12종류, 세부적으로는 20종류로 분류해 복식의 착용범위를 구분한 것으로 심지어는 버선 끈과 머리핀까지 언급될 정도로 아주 세세하게 열거하고 있다. 이러한 복식금제는 신분을 구분하기 위함과 동시에 극도로 사치스럽고 문란한 복식문화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또한 이것은 당시에 얼마나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호화롭고 아름다운 복식문화가 발달했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것이기도 하다.
삼국시대까지의 복식이 고유복식 형성기라고 한다면, 통일신라는 외국문물에 적극적으로 접하게 되는 ‘복식의 변혁기’라고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복식은 대체로 삼국시대와 유사하나 무열왕, 문무왕 이래 친당정책이 복식에 영향을 미쳐 복두, 단령, 반비, 배당, 표 등과 같은 삼국시대에는 없었던 새로운 복식이 등장하였다.
2.) 발해 (AD698-926)
발해는 건국 초부터 고구려 문화를 계승하여 이를 토대로 발해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일반적으로 말타기와 사냥을 기본으로 하는 생활 방식과 축국(蹴鞠)과 격구(擊毬)와 같은 놀이를 즐겨했던 풍습 등 고구려인들의 생활 및 복식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발해인들은 활동하기 편리한 상의와 하의가 분리된 형태의 복식을 일반적으로 착용했을 것이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발견된 청동여인상과 길림성 용두산 부근에서 발견된 삼채여인상이 있다. 청동여인상은 쌍계(雙?)의 머리 형태에 대수포(大袖袍: 소매가 매우 넓은 상의)를 입고 그 위에 운견(雲肩)을 착용했는데, 대수포 밑으로는 땅에 끌릴 정도로 긴 길이의 상(裳: 치마)을 입고 있다. 삼채여인상은 소매 길이가 긴 상의의 유(?) 위로 긴 길이의 하의인 상(裳)을 덧입는 착장 방법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당나라 여성들에게서 나타나는 독특한 방식으로, 상을 입고 그 위에 유를 덧입는 우리나라의 고유 양식과는 다른 방법을 취하고 있다.
3. 고려시대 (AD918-1392)
황후의 대례복
시대:고려후기(AD 1360)
소장기관:일본 성택원 소장
원나라식 고고관 착용 공민왕비
시대: 고려말(AD 1354)
옷해설:고고관은 전형적인 몽고 복식임에도 불구하고 고려 상류 사회가 몽고복식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고려왕비(高麗王妃)가 제사 지낼때도 원나라 상류층에서 입었던 고고관을 착용하게 된 것이다.
종묘소장, 공민왕의 왕비 노국 공주 예복
시대:고려말(AD 1371)
일본 친왕원 소장, 미륵하생경 변상도 근거, 왕비 예복
시대:고려말(AD 1371)
일본 대덕사소장,수월관음도 근거, 왕비예복
시대:고려말(AD 1371)
일본 서복사 소장, 관경서분변상도 근거, 왕비 소례복
시대:고려말(AD 1371)
배경: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통일신라시기의 옷입는 방법인 저고리 위에 치마를 입는 양식이 치마 위에 저고리를 입는 방법과 혼재되어 사용되다가 고려가 망하고 조선조에 들어가면서 조금씩 지금처럼 치마 위에 저고리를 입는 착장방법으로 통일된 것이다.
궁녀 시녀 복식
일본 대덕사소장,수월관음도 근거, 시녀복식
시대:고려말(AD 1371)
일본 친왕원소장, 미륵하생경 변상도 근거, 시녀복식
시대: 고려말(AD 1371)
불설예수시왕생칠경 변상도 근거 시녀
시대:고려말(AD 1371)
일본 서복사 소장, 관경서분변상도 근거, 시녀복식
시대:고려말(AD 1371)
신분이 낮은 궁정 시녀
시대: 고려초(AD 1113)
귀족사녀의 예복 및 상복
고려도경' 근거, 몽수입모, 선군, 의상 착용 귀부인
시대:고려말(AD 1371)
배경: 고려도경에 보면 귀부인들은 머리의 쓰개로서 몽수를 쓰고 다녔는데 그것은 1폭의 길이가 8자나 되는 검은 비단 3폭으로 만들며 이것을 머리위에서 드리워 얼굴만 내놓고 나머지는 땅에 끌리게 하고 다녔다고 한다. 일면 개두라구 한다.선군이란 속치마의 일종으로 치마폭을 넓게 하기위한 것이었으며 조선시대의 무지기치마 같은 것이었다. 따라 이 선군 위에 입는 겉치마는 8폭에 길이가 꽤 길어서 걸을 때 겨드랑이에 끼고 다녔다고 하는데 부귀한 집의 부인은 치마 한벌 만드는 데 옷감을 7~8필이나 소요되었다고 한다. 몽고복식의 영향으로 고려 상류층 귀부인도 몽고상류층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아 이와같은복식을 입게 된 것이다.
미국박물관 소장 고려회화 근거 사녀
시대:고려말(AD 1371)
일본 이영개 소장 고려 귀부인(高麗 貴婦人)
시대:고려말(AD 1371)
일본 지은원 소장 16관경 변상도 근거 사녀
시대:고려말(AD 1323)
온양 민속 박물관 소장, 불복장물 자의 근거 귀부인 복식
시대:고려말(AD 1323)
고려도경 근거 몽수착용 사녀
시대:고려말(AD 1350)
고려도경 근거 사녀복식 백색모시 장의, 황견(黃絹) 치마 착용
시대:고려말(AD 1350)
고려도경 근거, 緇帛長衣, 蒙首 및 입모(笠帽)착용 귀부인
시대:고려말(AD 1350)
하연부인 초상화 근거 귀부인
시대: 고려말 조선초(1376-1453)
배경: 하연부인(河演夫人)은 고려 말에 태어나 조선조 초까지 산 사람데 하연부인(河演夫人) 초상화는 옛 통일 신라 시대 이후의 복식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조반부인 초상화 근거 귀부인
시대: 고려말 조선초(AD 1341-1401)
부모은중경 변상도 소재 귀부인
시대: 고려 1378년
귀족 아동 복식
일본 대판,도자미술관 소장, 청자조각, 동녀형 연적 근거, 소녀복식
시대:고려말(AD 1371)
‘아집도 대련(雅集圖 對聯)’ 근거, 소녀 복식
시대:고려말(AD 1371)
평서민 복식
고려도경'소재,유,고 착용 평서민 부녀
시대:고려말(AD 1355)
고려도경 근거, 평서민 부녀복식
시대:고려말(AD 1355)
방배동 출토 목우(木偶) 인물상 근거, 여자 평서민 복식
시대:고려말(AD 1355)
고려의 복식 변천 제도는 ≪고려사≫에서 보면 고려 태조는 초창기에 신라의 구제를 그대로 따와서 사용하다가 의종조(毅宗潮)에 가서 모든 제도가 갖추어졌다고 하고 있다. 그 후 원(元)의 영향을 거치면서 호복을 입게 되었고 다시 명(明)의 영향을 받으면서 옛날 제도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배지인 관인 계급의 제도상 변천이었고 서민층에서는 옛 복식을 답습하면서 변천을 해 왔을 것이다. 고려는 워낙 자료가 없으므로 자료는 거창 둔마리 고분 벽화와 나한도(羅漢圖) 옆에 있는 여인상 고려말의 불복장유물(佛腹藏遺物)과 서울 방배동에서 출토된 고려말의 목우(木偶) 및 하연부인상이 있고, 관경서분변상도(觀經序分變相圖)가 있다. 여기의 왕비상 · 시녀상 · 공양인상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자료를 통해 고려시대 복식의 전형적인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밖에 고려복식을 유추할 수 있는 문헌으로는 ≪고려사(高麗史)≫≪고려도경(高麗圖經)≫이 있고 중국 자료가 있다.
고려의 지배체제는 군주를 위시해 귀족, 즉 양반층, 그리고 하급 이서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그 밑에 피지배계급으로 서민층이 있었다. 복식은 왕복을 비롯해 백관복에 이르기까지 오대, 송, 중국화된 원, 그리고 명의 제도를 본떴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우리 나라 고유의 복식은 면면히 이어져왔다.
(참고로 원나라, 명나라 시기에 한복 영향을 받아서 고려양이 유행이였다 하긔.)
명나라 고려양 한푸
자세한 내용은 여기 블로그 고려양 검색: http://lnn0909.blog.me/80189444871
4. 조선시대 (AD1392~1910)
- 궁중 한복
- 15~16 세기
- 17 세기
- 18 세기
- 19 ~ 20 세기 초
- 20 세기
조선시대는 유교의 예(禮)가 통치 이념이었기 때문에 예는 곧 법이었고 인간 생활의 규범이었다. 따라서 복식도 예를 표현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준시되었으며 복식을 통해 왕과 신하, 지배층과 일반 백성들의 차이를 분명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의 복식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계기로 크게 변화하여 왕 이하 관리의 각종 관복(官服)은 점차 중국과는 다른 고유한 형태로 변화되었으며, 일반 여성의 저고리는 점점 짧아졌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치마가 등장하였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겉옷(袍)과 바지, 저고리, 치마의 기본구조는 변함 없이 유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총합)
- 개화기 한복 (20 세기 초)
1960년대 개량한복
4. 21세기 현재
- 북한 한복
뉴욕타임즈에서 찍은 2015년 사진
- 한복
(개인적으로 조선시대 한복뿐만 아니라 고대시대 고려시대 한복 퓨전으로도 많이 나왔으면 하긔ㅎㅎ)
- 생활 한복
문화콘텐츠
http://gongju.emanwon.com/information/definition_3.htm
http://guro.grandculture.net/Contents?local=guro&dataType=01&contents_id=GC03001450
http://contents.nahf.or.kr/edkjViewer/item.do?view=contents&pg=002&grade=003
http://cafe.daum.net/qkfgosu5/FaGq/20
https://ko.wikipedia.org/wiki/한복
https://namu.wiki/w/%ED%95%9C%EB%B3%B5
https://www.museum.go.kr/site/main/exhiSpecialTheme/view/past?exhiSpThemId=3949&listType=list
문화콘첸츠, 다음 네이버 블로그, 뉴스 기사 등등
http://ssamii.egloos.com/480319
http://blog.naver.com/hanbokday1/20115832224
http://blog.daum.net/csn6110/8730533
https://www.maxwell.syr.edu/moynihan/kpac/News/Missionary_Exhib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