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일제가 궁전까지 처들어가 한나라의 왕비를 폭행하고 살해하고 방화까지 한 끔찍한 사건이다. 정말 잊으면 안되는 치욕적 사건이다. 하지만 그때문에 명성황후가 심하게 미화되고 있는 것도 잘못이다.
얼마전 네티즌이 존경하는 위인으로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등이 뽑히셨는데 명성황후가 당당히 4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우리의 역사의식은 과연 바른 것일까?
명성황후는 대원군을 내고 정권을 잡았다. 따라서 당연히 대원군과 반대되는 정책을 펼쳐야 했고 개항을 하게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나라를 위해서였을까? 실은 개화정책의 실행은 지지부진했고 명성황후가 요직에 앉혀놓은 민씨일족들의 전횡덕에 민비정권은 곧 부패했고 그 결과 얼마안가서 임오군란이 터지고 만다.
임오군란에 대해 역사책에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라는 등 거창하게 써놨지만 발단은 단순한 사건이었다. 1년넘게 봉급체납에 시달리고 있던 구식군대가 정말 오래간만에 봉급을 준다고해서 기대에 부풀어 쌀을 타러 갔다. 그런데 누가 중간에 물에 불어 썩은 쌀과 모래로 바뀌치기해서 떼어먹었고 게다가 그 합한 양마저도 적은 쌀을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군인들이 항의를 했는데 쌀을 나눠주던 자가 오히려 군인들을 모욕하자 화가난 군인들이 그를 폭행하고 담당인 선해청 담상관 민겸호에게 찾아가 호소를 했다. 그러나 민겸호는 도리어 군인들을 체포하고 주동자 몇을 사형에 처하려 했다.
사실 쌀을 나눠주던 자는 민겸호의 하인이었으니 군인들의 급료를 착복한 자는 당연히 민겸호였다. 헌데 착복한 자에게 호소하러갔으니 매를 벌러 간 것이었다. 급료를 떼이고 진압당하다 얻어맞은 것도 억울한데 동료들이 사형에 처해진다는 소식을 들은 군인들은 급기야 폭발했고 임오군란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 대원군이 개입하고 일이 커져 군인들의 폭동은 정권탈취를 위한 난으로 발전하게 된다.
구식군대의 차별대우가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위해서였다고 말하는 역사가가 많지만 별기군은 80명의 고관집자제들을 뽑아서 시작한 일종의 사관후보생집단에 불과하며 정식군대도 아니었다. 따라서 민씨정권은 군의 근대화를 위해 구식군대를 차별한 것이 아니라 군대 자체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것이다. 만일 민비가 나라를 생각하고 국방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민겸호같은 그녀의 척족들이 군대의 봉급에까지 손을 뎄을까?
그럼 민비는 그렇게 착복한 재물을 어떻게 썼을까?
우선 명성황후는 미신과 잡기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이유인이란 무당은 점한번 잘쳐서 비단백필에 만냥을 받았고 한 맹인무당은 세자전담무당으로 고용돼 정이품대우를 받고 처첩들을 거느리며 살았다고 한다. 또 궁중의 내탕금으로 북관묘를 짓고 진령군이란 무당을 기거케 해서 이 무당에게 누님이라 부르며 아부하는 재상까지 있었다고 한다. 씀씀이가 큼직큼직 했으니 과연 여장부라 불릴만 하다고 미화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면들은 그녀는 조선의 개항을 한 인물임에도 서양의 합리주의나 과학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그것들과는 거리가 먼 사고방식의 소유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또 그녀의 차림세를 칭찬한 기록이 많은데 이런 칭찬은 한사람의 여성에게는 바람직하지만 당시 조세수입이 부족해 관리들의 봉급이 9년치나 밀려있던 상황에서 왕비가 받아야할 것이 전혀 아니었다. 그녀가 그렇게 사치스러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와 척족들이 매관매직등을 통해 자리에 앉힌 지방관들의 착복과 횡령이 심했고 민비가 들여놓고 뇌물을 상납받던 일본상인들이 쌀을 대대적으로 구매해가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오히려 민비정권의 부패를 나타내는 것일 뿐이었다. 즉 국가의 세금으로 들어올 돈이 민씨일족에게 세들어갔고 백성들이 먹을 쌀이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민비가 재물을 서양문물도입이나 인재양성에 썼거나 아예 착복하지 않고 국가운영을 위해 썼다면 어땠을까?
또한 민비의 외교전략이 탁월하다고 칭찬하는 사람이 많은데 임오군란으로 치명적 위기에 처한 민비는 결국 청나라를 끌어들여 권력을 다시 회복한다. 그리고 이후 청일전쟁때까지 조선은 청나라의 간섭하에 들어가야 했고 원세개는 조선왕처럼 행세하며 심지어 조선을 청에 합병시키려고까지 했다. 이게 탁월한 외교전략인가?
그리고 미국, 영국, 독일과의 수교도 실은 임오군란 직후 청나라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이이제이정책의 일환으로 다리를 놔서 맺게된 수교이다. 당시 청나라에 의탁한 민비로서는 싫어도 맺을 수 밖에 없던 외교관계였던 것이다. 또 청일전쟁 후에 러시아에 의탁하려 했던 것도 일제가 민비의 실각을 원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을 뿐이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한데로 일본상인들의 전횡으로 국내소비용 미곡이 부족할 정도로 쌀이 방출되것도 통제를 못하다가 지방관이 방곡령을 남발해야 하는 상황까지 허용하고서도 방곡령을 발령한데데한 손해배상까지 일본에 물어줘야 했다. 이 책임이 과연 방곡령을 내린 지방관에게만 있을까? 이것이 탁월한 경제외교인가?
그래도 민비정권은 청나라의 비호아래 20년이나 버티지만 그들의 부패에 더이상 참지못하게된 백성들이 동학교도들의 봉기를 시작으로 들고일어나는 바람에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민비정권이 선정을 베풀었다면 동학이 그렇게 교세를 확장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수십만이나 되는 농민들이 동학난에 참여했다가 일본군에게 학살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명성황후가 비운에 간 것은 분명 우리민족의 비극이다. 하지만 자신과 척족들의 권력유지와 재산모으기에만 노력하다가 우리민족이 참된 근대화를 이룰 기회를 놓치게한 명성황후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장군같은 분들과 비교되는 것은 위인들에게 참으로 죄송한 일일 것이다. 도데체 명성황후가 왜 이정도로 미화된 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명성황후의 과오가 을미사변을 비롯해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정당화시켜주지는 않는다. 아마 그래서 일본이 아직까지 세계에서 유일한 핵무기 사용의 대상국이 됐을지도 모른다. 또 그녀의 실책때문에 고의적으로 나라를 팔아넘긴 매국노들의 죄가 감경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네티즌이 존경하는 위인들 중에 명성황후가 4위로 등극된 것은 우리의 역사관에서 고치고 바로잡야할 부분임에 분명하다. (네이버 지식 in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