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청
조선의 개국공신인 황희석의 노비 출신
고려 조 낭장이었던 박자청은 조선 개국과 함께 중랑장으로 승진하여 궐문을 지키고 있었음
그러던 중 의안군 '이화'가 어명 없이 궁으로 들어가려고 했고,
문을 지키던 박자청은 어명 없이 들어 갈 수 없다고 제지함
이 의안대군은 이방원에게 정몽주의 척살을 종용한 인물이었는데,
박자청이 자신을 막자 화가나 박자청을 두들겨 패버림
그리고 나서 태조 이성계에게 가서 박자청을 처벌할 것을 청했지만
이성계는 오히려 박자청을 두둔하며 내상직에 임명해 유막을 지키게 함
그런데 이 박자청이 되게 일을 성실하게 하자
이성계는 박자청을 자신의 고향인 동북면으로 보내 동북면을 지키게 함
이후 태조의 시대가 끝나고 박자청은 태종 이방원의 눈에 띄게 되어 '공조 전서'에 임명됨
(지금의 국토 교통부 장관)
그리고 박자청은 과거 자신이 토목 관련 기술을 배웠던 것을 토대로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함
박자청의 대표 업적
제릉
(태조의 첫 번째 왕비인 신의 고황후 한씨의 묘)
건원릉
(태조 이성계의 묘)
한양 도성 수축
청계천 조성
(사진은 조선말 청계천)
창덕궁 건설
성균관 문묘 건설
(4개월만에 함)
경복궁 경회루 건설
(8개월만에 함)
헌릉
(태종 이방원의 묘)
살곶이 다리
등의 업적을 세우게 됨
그러나 너무 원리원칙만을 중시한 탓에 문제도 일으켰음
세종 1년 태종 이방원이 상왕이 된 후
박자청에게 창덕궁 인정문 밖 마당을 직사각형으로 만들라고 함
그러나 박자청은 공간을 더 넓게 쓰기 위해 고집을 부려 사다리꼴로 만들었고,
태종은 열받아서 박자청을 하옥시킴
그러던 한 달 후 태종은 박자청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풀어주었고
결국 창덕궁 인정문 밖 마당은 사다리꼴 모습으로 지어지게 됨
노비 출신으로 박자청을 시기하는 양반들이 많아 항상 모함을 당했었으나
태종과 세종은 오히려 박자청을 감싸주고 믿어주며 큰 일을 맡겼었음
심지어 이방원은 박자청을 명나라 사신으로 보내기까지 함
이후 박자청은 세종 5년인 1423년 11월 9일 66세로 사망하게 됨
박자청의 사망 소식을 들은 세종은 사흘 간 조회를 중지시켰으며,
종이 100권과 손수 지은 제문을 내려 나라에서 직접 장사를 지내게 해주었고,
'익위'라는 시호까지 내렸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