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크리처물 마니아의 실망은 이해 가능하다. 그도 그럴 게, '경성크리처'에 등장한 크리처는 (고작) 1마리. 크리처 떼의 무한 공격을 기대했다면, 당황할 수 있다.
하지만 괴물 머릿수를 세는 시청자가 아니라면, 경성크리처는 볼만하다. 드라마는 경성에서 활약하는 '괴수'가 아닌, 경성에서 벌어진 '만행'을 긴장감있게 펼쳤다.
장태상(박서준) : 밖에 있는 괴물은 피한 것 같은데.
윤채옥(한소희) : 글쎄. 어느 쪽이 더 괴물일까…
무엇보다. '경성크리처'에 숨겨진 함의를 생각하자. 크리처의 좁은 의미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생명체. 1945년 봄, 일본 패망 직전 창조된 괴물이다.
하지만 광의의 크리처는, 옹성병원이다. 조선인을 상대로 생체 실험을 자행한 731부대다. 일본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극악의 피조물. 그것이 바로, 광의의 크리처다.
심지어, 장태상도 초반에는 시대의 크리처 아닐까.
"나랏님도 뺏긴 나라를 내가 어떻게 찾냐"며 오사리잡놈(?)처럼 살던 그. 난세에서 혼자만 잘 살기를 궁리한 그 마음이 그렇다.
사실, '경성크리처'는 전형적인 크리처물로 볼 수 없다.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 상황이 (괴물의) 창조주다. 그 어떤 괴물도 그 시대가 저지른 만행보다 잔인할 수 없다.
배우 한소희는 '경성크리처'를 이렇게 해석했다.
"경성의 낭만이 아닌, 일제강점기 크리처가 아닌, 인간을 수단화한 실험 속에 태어난 괴물과 맞서는 찬란하고도 어두웠던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의..."
실제로 이 드라마는,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의 생존 투쟁기에 가깝다. 크리처에 이용(실험) 당한 희생자들, 생존을 목표로 살아갔던 사람들, 그리고 저항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강은경 작가는 회차별로 부제를 더했다. 공통 키워드는 '경계'. 선과 악, 집념과 집착, 인성과 본성. 인간의 다양한 감정과 그 위를 변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태상은 1회에서 선과 악의 경계에서 줄을 탔다. 그런 그가 7회에서 이기와 이타의 경계에 섰다. 그때, 이타를 고른다. 자신을 희생해 병원 탈출을 진두지휘한다.
각각의 회차는 "인간이 극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를 묻는다. 단, 그 선택에 대해 비난할 마음은 없다. 괴물같은 시대를 살았으니 먹히지 않으려면, 도망칠 수 밖에.
(강은경 작가는 6회 나월댁을 통해 생각을 전했다. 나월댁은 독립운동을 하다 모진 고문을 당한 인물. 그는 갑평에게 "그 상황에서 배신을 해도 절대 원망 안할 거다"고 말한다.)
선택을 만드는 건, 인간의 마음이다. 그래서 '경성크리처'는 인간 군상의 감정들을 풍부하게 그려내는 데 집중한다. 이를 관찰하는 게, '경성크리처'를 정주행하는 묘미다.
'경성크리처'는, 전형적인 크리처물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그 시대가 공포다. 괴물의 촉수보다, 실험실의 (귀 아래 반점이 있는) 얼굴이 더 무섭다. 공포다. 아니, 슬프다.
강은경 작가는 소품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실뜨기(운명), 모자(연대), 캐러멜(사랑) 등 작은 아이템에 의미를 부여했다. 벚꽃과 불꽃놀이에도 삶과 죽음을 담았다.
물론, 호불호는 갈릴 수 있다. 장태상의 (갑툭튀) 코믹 연기는 엇박으로 보일 수 있다. 캐릭터의 사연을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7회 옹성병원 전투는 감정의 과잉이었다.
그러나, 그 조차 아쉬운 정도다. "크리처물이 아니다"라고 까는 건, 단지 괴물의 머릿수만 세는 리뷰일 뿐. 우리는 크리처 한 마리보다 더 무섭고 아프고 잔인한 일제강점기를 살았다.
"이건 반일이다"
한소희의 글에 한 일본인이 남긴 댓글이다. '경성크리처'가 더 월드와이드하게 뻗길 바란다. 일본은 731부대의 생체실험을 인멸했고, 반성보다 뻔뻔을 유지하고 있다. 그 역시 크리처다.
https://n.news.naver.com/entertain/article/433/000010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