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역사에서 최고의 미남은 누구였을까?
미의 기준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시대에 따라 그 기준도 역시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상 한국(신라), 중국(당나라), 일본의 삼국에서 공통적으로 외모를 인정받은 남자가 있다.
바로 김춘추(金春秋, 603~661, 재위 654~661)다.
통일신라를 이끈 주역이자 고구려, 당나라, 일본을 넘나들며 국제외교를 주도하였던 인재였던 그는
그런 전방위적 행동들 덕분에 외모에 대한 기록이 각국에 남게 되었다.
화랑세기 필사본
제18세 춘추공
–(무열왕의) 얼굴은 백옥같았고, 온화한 말투로 말을 잘 했다. 큰 뜻을 지니고 있었고, 말수가 적었으며, 행동에는 법도가 있었다.
(王面如白玉 溫言善辭 有大志 少言語 動靜有度)–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1년(654)
–왕은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하여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릴 뜻이 있었다.
(王儀表英偉幼有濟丗志)–
삼국사기, 진덕왕 2년(648)
–이찬(伊湌) 김춘추(金春秋)와 그의 아들 김문왕(金文王)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당 태종(太宗)이 광록경(光祿卿) 유형(柳亨)을 보내서 교외에서 그를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이윽고 [궁성에] 다다르자 김춘추의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함을 보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遣伊湌金春秋及其子文王朝唐太宗遣光祿卿柳亨郊勞之旣至見春秋儀表英偉厚待之)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 –왕이 태자로 있을 때(648년, 46세) 고구려를 치고자 군사를 청하려고 당나라에 간 일이 있었다.
이때 당나라 황제가 그의 풍채(風彩)를 보고 칭찬하여 신성(神聖)한 사람이라 하고 당나라에 머물러두고 시위(侍衛)로 삼으려 했지만 굳이 청해서 돌아오고 말았다.
(在東宫時欲征髙䴡因請兵入唐唐帝賞其風彩謂爲神聖之人固留侍衛力請乃還)–
일본서기, 고토쿠(孝德) 천황 3년(647)
-이 해 … 신라가 상신(上臣) 대아찬(大阿湌) 김춘추(金春秋, 45세) 등을 보내서 … 김춘추를 인질로 삼았다.
김춘추는 용모가 아름답고 담소(談笑)를 잘하였다. (是歲 … 新羅遣上臣大阿飡金春秋等 … 春秋爲質 春秋美姿顔善談咲)
김춘추는 먼저 고구려와의 동맹을 맺기 위해 찾아간다. 삼국은 그동안 한 나라가 힘이 강해지면 두 나라가
동맹을 맺어 힘이 강한 나라를 견제하며 공존해 왔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은 고구려 땅이었던
'죽령이북 땅을 돌려주라'며 김춘추 억류한다.
깊은 밤, 고구려 귀족 선도해가 김춘추가 갇힌 옥을 찾아와 고지식한 춘추에게 '토끼의 간' 얘기를 힌트로 주었다.
다음 날, 보장왕과 연개소문을 만난 춘추는 "나는 고구려 땅을 돌려 줄 결정권이 없지만 나를 신라로 돌려보내준다면
우리 여왕께 고구려 땅을 돌려주라고 힘써 권하겠다'고 하여 풀려난다.
춘추의 아름다운 용모에 반한 선도해의 언질로 보아 김춘추는 고구려가 인정한 미남이었다.
신라로 돌아온 김춘추는 왜로 건너갔다. 신라가 백제를 치러 갈 때 왜가 지원군을 보내 협공할만한 여력이 있는지
왜의 사정을 파악하러갔던 것이다.
그런데 왜의 귀족들은 '춘추가 말을 하면 향기로운 바람이 이는 듯 했다' 라고 표현할만큼 춘추의 용모에 대한
찬탄을 아끼지 않았고 많은 선물을 받아 가지고 신라로 돌아왔다. 왜의 국내 사정이 백제를 도울 상황이 아니라는 것도
간파하고 선물도 듬뿍받고. 김춘추는 왜도 인정한 미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당나라를 찾아갔다. 한반도 동남쪽 조그만 나라 신라의 김춘추가 당태종 이세민을 만났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춘추의 출중한 외모에 반해서. 무조건 나당동맹이 체결된 것은 뻔한 얘기.
그리고 당태종은 덧붙였다. 신라로 돌아가지 말고 내 곁에 머물면 많은 재물과 높은 관직을 내리겠다고...
딸의 원수를 갚기 위해 백제를 멸망시켜야 했던 김춘추는 이세민의 만류에 자신만큼이나 잘 생긴 아들 문왕을 남겨
이세민을 숙위케하고 신라로 돌아왔다. 나당동맹은 신라와 당나라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맺은 동맹이었지만
당태종 이세민이 김춘추의 아름다운 용모에 반해 쉽게 성사될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