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청소년 교육기관에 따르면, 대학에 입학한 탈북자 10명 중 1명만이 졸업장을 받는다. 중도에 포기한 이들은 아르바이트나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저소득층으로 전락하거나, 노르웨이, 캐나다 등 제3국에 난민으로 귀화한다.
스무 살에 혼자 한국에 온 탈북자 김혜성(28) 씨는 6년간의 고생 끝에 2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그의 대학 시절은, 캠퍼스의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탈북자 청년이 평범한 한국 대학생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기록을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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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4일, 나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졸업식장에 앉아 학사모를 한참 어루만졌다. 연세대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목표는 오직 ‘졸업’이었다. 남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내게는 모두 엄청나게 어려운 관문이었다. 이 졸업장을 받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 노력했던가. 그간의 고생이 떠올라 계속 눈물이 났다.
나는 탈북 새터민이다. 18세 때 혼자 국경을 넘어 2년간 중국, 몽골을 헤매던 끝에 2006년 한국에 들어왔다. 나진 지역에서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이러다 다 굶어죽겠다. 너라도 살아야지”하며 내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고향을 떠나온 지 10년이 훌쩍 지났다.
한국에 홀로 왔기 때문에 내 졸업식에 올 가족이 아무도 없었다. 내가 외로울 거라고 생각했는지, 정말 많은 친구가 졸업을 축하해주기 위해 왔다. 학사모를 쓴 나를 보며 마치 자기들 일인 양 기뻐했다. 이 졸업장을 따기 위해 걸린 6년이라는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사람이 남한 사회에 적응하는 것은 탈북보다 더 어렵다. 사람마다 일생 쓸 에너지가 한정돼 있다고 하면 탈북자는 남한으로 오는 동안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다 쓴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지친 심신을 다스릴 여유도 없이 바로 이 사회의 냉혹함을 견뎌야 한다. 생각보다 높은 사회의 벽을 경험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의지를 잃는 경우도 있다. 나도 한국에 온 지 8년이 다 됐지만, 아직도 이 사회에 온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매일매일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그저 살아갈 뿐이다.
아메리카노에 딸기 시럽
한국에 온 후, 처음부터 대학을 가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아니, 나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한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지인의 소개로 한 도너츠 매장에서 일을 했다. 손님이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넣어달라”고 주문했다. 나는 아메리카노를 먹어본 적이 없다. 어찌어찌 커피는 만들었는데 손님이 말하는 시럽이 무엇인지 도무지 몰랐다. 나는 찬장을 열어 맨 앞에 놓인 시럽을 커피에 넣었다. 나중에 손님은 사장에게 항의를 했다. 내가 설탕시럽이 아니라 스무디용 딸기시럽을 넣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3일간 실수를 연발했더니 사장은 내게 10만 원을 쥐여주며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이 나라에서 할 일이 별로 없음을. 그때부터 나는 식당 서빙, 고깃집 불판 닦기 등 눈치와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일은 고되고 일당은 적었다.
겉보기에 화려하고 풍요로운 대한민국에서, 나는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북한 출신일 뿐이었다. 평생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살기 위해 배워야 했고, 대학을 가야 했다. 나는 북한에서 고등학교를 나왔지만, 한국에서 학력이 인정되지 않아 검정고시를 봤다. 북한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내가 한국에서는 어떤 평가를 받을지 궁금했다. 나는 별도로 공부를 하지 않고 고교 학력 인정 검정고시를 봤다.
평균 62점. 60점 이상이라는 커트라인을 겨우 통과했다. 영어와 역사는 겨우 과락을 면했고, 국어와 수학 점수는 높았다. 이때 나는 ‘내가 북한에서 배운 것이 모두 쓸모없지는 않구나’하고 안도했다.대학을 선택해야 하는데, 나는 한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이 어디인지도 몰랐다. 집에서 가까운 대학 3곳에 원서를 냈다.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 그중 연세대에만 합격했다.
농담도 못 알아들은 첫 수업
지금도 연세대 입학 관계자들이 왜 나를 뽑았는지 매우 궁금하다. 당시 내가 쓴 자기소개서를 읽어보면, 나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저 운이 좋았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다. 남한 친구들은 연세대에 오려고 그토록 노력하는데 나는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이곳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연세대에 입학한 것은 분명한 특혜다. 하지만 거기서 버티고 졸업하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우수한 학생들은 치열하게 경쟁했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였다. 첫 수업 날, 나는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10%도 이해 못했다. 농담도 못 알아들었다. 평생 강력한 규율 속에 살던 내게, 대학생활이 준 자유는 일종의 폭력과 같이 느껴졌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며 백양로를 걷는데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라는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연세대 담장은 한없이 높아 보였다.
그렇게 첫 학기는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수업 내용은 거의 알아듣지 못했고 열등감과 외로움 때문에 친구들과 친하게 지낼 엄두도 못 냈다. 학교 수업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으니 경제 사정이 안 좋아졌고, 교통비가 없어 강의실에 출석을 못하는 날도 있었다. 결국 나는 학사경고를 받았다. 학사경고를 받으면 국가에서 등록금을 보조해주지 않기에 나는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휴학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나는 왜 내가 첫 학기를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고민했다.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북한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내가 쓰는 사투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았고, 그들이 나에게 북한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매번 같은 대답을 해야 하는 것에 짜증이 났다.
나는 그때부터 ‘남한 사람 되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북한 억양을 버리기 위해 매일 저녁 볼펜을 입에 물고 신문 사설을 따라 읽었다. 매일 신문 사설을 필사하며 남한식 글쓰기 방식을 익혔다. 또한 나는 남한 친구들과의 공통점을 만들기 위해 그들이 좋아하는 소설을 사서 읽었고, 일본 만화도 열심히 읽었다.
남한 친구들이 자주 하는 게임기와 게임 CD들을 전부 사서 직접 플레이해 보았고, 2000년대 이후 유명한 영화, 드라마를 모두 내려받아 보았다. 이렇게 남한 친구들과 같은 문화적 배경을 얻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같은 탈북자 출신들과 연락을 철저하게 끊었다. 이 사회에서 정착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1년6개월을 준비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일체의 소비를 차단했다. 버는 돈은 전부 저금하고, 용돈도 아껴 매주 1만 원이라도 저금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내가 살던 임대아파트를 월세에서 전세로 돌렸다. 매월 빠져 나가는 월세만이라도 아끼면 좀 여유로울 것 같았다. 경제적 여유가 없으면 공부는 물론 친구들과의 관계도 어렵고, 결국 꿈을 이루기 힘들다. 나는 자본주의의 힘을 실감했다.
학점 3점을 넘겼지만…
노력 끝에 2010년 가을학기의 등록금을 자비로 냈다. 그리고 1년6개월간 혼자 준비했던 것을 실전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내 말씨가 변하자 이제 나에게 “어디서 왔어?”라고 묻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나는 수업시간마다 내 전후좌우에 앉은 모든 학생을 친구로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먼저 말을 걸었고, 대답할 때도 한껏 긴장해 단어를 선택했다.
그 친구들이 좋아하는 관심사가 있으면 따로 공부를 해가기도 했다. 남한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을 나는 학습을 통해 의도적으로 공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남한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하도 긴장을 하다보니, 만나고 난 후 등에 식은땀이 흐를 때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매일매일 새로운 가면을 쓰고 덧써가며 내가 아닌 남한의 새로운 나로 살아가고 있었다.
친구들에게 북한 사람임을 숨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만날 때마다 북한 사람임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새로 사귄 친구들은 나의 학업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2010년 가을 학기에 4.3 만점에 3.3이라는 학점을 받았다. 그토록 꿈꾸던 학점 3점을 넘은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나였다. 밖에서 완벽한 남한 사람 행세를 하느라 북한 사람인 ‘나’를 잊으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저녁에 집 출입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는 북한 사람인 ‘나’를 만났다. 너무 외로웠다. 너무 슬펐고, 집으로 들어오면 하루의 긴장이 풀리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번 집에 들어오면 다시 밖으로 나가기 싫었고, 나 스스로에게 이토록 잔인하게 폭력을 행사해야 하는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살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 사회를 배워야 하며, 이 나라 사람들을 이해해야 하며 여기에 나를 조각을 내서라도 끼워 맞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 나는 발전이 없고, 내가 만난 이 사회가 흠 많은 사람을 받아줄 만큼 그렇게 여유롭지도 관대하지도 않았다.
교수님이 준 흰 봉투
나는 북한 사람인데, 북한에서 태어난 것이 죄는 아닌데 왜 이토록 숨기고 살아야 하는가. 수없이 질문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는 추측만 남았다.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다. 스스로 너무 비참해졌고, 그런 나를 보는 주변사람들마저 힘들어했다. 너무 혼란스러웠고 매일 그렇게 살다간 더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북한 사람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다음 학기를 준비했다. 대학에 입학한 이상 졸업은 해야 했다. 목표는 오로지 졸업이었다.
연세대는 ‘채플’이라는 종교 필수 수업을 4학기 동안 들어야 졸업할 수 있다. 나는 그것도 모른 채 3학년이 돼서야 첫 채플 수업을 들었다. 원래 1~2학년용 수업인 ‘채플’을 3학년이 들으려면 학과장의 사인이 필요했다. 학과장실에 내가 채플 수업을 못 들은 이유를 쓴 종이를 들고 찾아갔다. 노크를 하고 들어가 멀뚱멀뚱 서있으니 학과장님이 물었다.
“너 누구야?”
“저 김혜성인데요.”
“김혜성? 그게 누군데.”
“저 사학관데요. 이쪽으로 가서 학과장님 사인 받아오라고 해서 왔는데요.”
자그마한 체구의 학과장님은 안경 너머 반짝 날카로운 눈빛으로 내게 소리쳤다.
“넌 대학 3학년짜리가 자기소개도 할 줄 모르냐. ‘08학번 사학과 누구입니다’라고 해야지.”
나는 그제야 교수님이 가르쳐준 대로 내 소개를 하고 사유서를 내밀었다. 나는 그렇게 자기소개도 할 줄 모르는 상태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학과장 하일식 교수님이 전화로 내게 학과장실을 방문하라고 하셨다. 갔더니 교수님이 흰 봉투를 하나 주셨다. 그 속에는 10만 원짜리 수표 12장이 들어 있었다. 하 교수님은 “사학과 교수들이 사비를 모아 어려운 학생을 위한 장학금을 주는데, 너를 너무 늦게 알았다”며 “금액이 적어 미안하다”며 봉투를 내 손에 꼭 쥐여주었다. 겉보기엔 냉정하고 차가운 사회지만, 이 땅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흰 봉투에는 따뜻한 온기가 감돌았다.
책 한 장 읽는 데 하루 꼬박
3학년이 돼 전공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공부는 더욱 어려웠다. 학술서적은 왜 그리도 어려운 말만 골라서 쓰는지. 꼭 한국말로 된 외국어를 읽는 느낌이었다. 한번은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책을 읽다가 책 내용을 내가 아는 한국말로 번역해 써보았다. 이렇게 쉬운 개념을 그토록 어렵게 쓴다는 것도 재주인 것 같았다. 마치 나같이 한국식 외래어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은 책을 못 읽게 하려는 것 아니냐는 삐뚤어진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책을 한 권 읽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논문 한 장을 이해하기 위해 10번 이상 읽어봤다. 사학과의 특성상 보고서를 많이 써야 하는데, 전공 글쓰기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전공 수업시간에 교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꺼벙하게 앉아만 있는 날이 늘어갔다.
또 이러다가는 1학년 1학기 때처럼 될 것 같다는 위기감이 생겼다. 스스로 약속을 했다. 욕심 부리지 말고 수업시간마다 하나만 제대로 배우자. 수업시간에 집중하기 위해 선생님의 얼굴과 동선에 시선을 고정했다. 교수님과 끊임없이 눈을 맞추며 교수님의 말씀을 최대한 받아 적었다. 친구들과 관계에서도 나를 포장하지 않고 진심으로 대하려 했다.
내가 특히 자신 없는 분야가 영어였다. 나뿐 아니라 많은 북한 출신 대학생이 이에 공감할 것이다. 나는 YG(연세글로벌)라는 동아리에 가입했다. 외국인 교환학생과 한국인 재학생을 짝지어주는 동아리다. 나는 이 모임을 통해 많은 외국인을 만났다. 외국인을 자주 만나 대화하다 보니 영어 말하기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향상되는 경험을 했다. 외국인 친구를 집에 초대해 요리도 대접하면서 친분을 쌓았다. 외국인 친구들에게 나는 북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동양인이었다.
3년간 스스로를 너무 억압했던 나는, 이제 행복해지고 싶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 자신에게 엄격해질 필요는 있지만, 숨 막힐 정도로 나를 학대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기 중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방학 때 여행을 떠났다. 연세글로벌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은 내가 해외에서 무료로 숙식을 해결하도록 도와줬다.
동아리에서 만난 프랑스 친구의 집을 방문했을 때다. 프랑스 남부의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한 아주머니는 내가 북한에서 왔다는 얘기를 듣더니 내 손을 잡고 한참 우셨다.
“내 아들이 교환학생으로 브라질에 가 있어. 물론 보고 싶으면 언제든 볼 수 있는데도 걱정되고 가슴이 아파. 근데 너희 어머니 마음은 어떻겠니. 이렇게 어린 딸을 멀리 보내놓고 단 한 번도 볼 수 없으니….”
나도 아주머니를 안고 한참 울었다. 나는 한국에서 사람들에게 밝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북한에서의 추억을 가슴 깊이 묻어뒀다. 어머니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너무 아파 생각할 엄두도 못 냈다. 아니,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인종도 국적도 다른 프랑스인 아주머니가 내 손을 잡고 눈물 흘리며 내 어머니를 걱정해주다니. 나는 이 먼 곳 땅에서 가족을 느꼈다.
여행을 통해 나는 대한민국에서 북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신감을 얻었다. 잘사는 나라든 못사는 나라든, 그곳에는 사람이 있었고 실상 나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대학생활을 거듭할수록 느낀 것도 비슷했다. 남한 사람들 역시 사람이었다. 친구들은 내 학업이 뒤처지지 않도록 진심으로 도와줬다. 나는 남한 친구들과 경쟁하기를 포기했다. 그들은 모두가 나의 멘토였다. 난 친구가 하는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들이 쓴 보고서를 빌려 열심히 필사하고 분석했다. 친구가 하는 만큼 나도 노력했다. 그러다보니 조금씩 성적이 올랐다. 조금씩 성장해가는 나에 대해 많은 교수님이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한국을 떠난 탈북자 친구들
도움을 받기만 하던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은 참 기쁜 일이었다. 나는 어느새 남한 친구들에게 ‘북한 출신’이 아니라 그냥 친구가 됐다. 남한 친구들은 비교적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은 나에게 고민을 자주 털어놓았다. 이성, 진로, 사회 등 다양한 주제로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이렇게 내가 이들과 진짜 친구가 되는 과정이야말로 통일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남한 친구들의 도움으로, 나 역시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줄 여유가 생겼다. 나는 그때부터 북한 사람들과의 모임에도 자주 나가고 그들과도 친구가 되었다. 주변에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여럿 생겼다. 외롭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대학도 졸업했는데 어떤 일인들 못하겠냐”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처럼 대학생활을 어려워했던 탈북자 출신 친구 중 다수가 외국으로 떠났다. 영국, 캐나다, 벨기에 등 안 가는 나라가 없을 정도였다. 탈북자 친구들은 사회적 차별을 견디지 못했다. 여기든 다른 나라든 어차피 차별을 받을 거라면 차라리 더 넓은 세상에서 인종차별을 겪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나 역시 남한에서 산다는 것이 고단했다. 나에게 외국으로 가자고 제안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갈 수 없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언어가 통하는 한국에서도 적응을 못하는데 외국에서는 적응하겠느냐고. 그 말도 맞다. 하지만 내가 한국에서 얻은 기회를 포기할 수 없었다.
한국은 내게 많은 기회를 줬다. 그간의 내 노력이 아까웠다. 내가 외국으로 간다고 한들 한국에서의 상황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그게 더 힘들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나는 또다시, 이 사회의 벽을 넘고 싶었다.
대학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이젠 사회인이다. 그간은 친구, 학교, 교수님의 도움을 받았다면 이제 홀로 해결해야 한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8개월간 쉬지 않고 구직활동을 했다.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 가릴 것 없이 서류 지원을 했다. 하지만 단 한 건의 면접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또다시 좌절에 빠질 뻔했다. 나는 이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가. 대학을 다니는 동안 그토록 많은 지원을 받았으니 이제는 사회를 위해 내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이 때문에 나는 지금도 쉬지 않고 구직활동 중이다.
많은 북한 출신 대학생이 졸업하고도 취직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취업이 어려운 건 남한 출신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남한 친구들이 가진 스펙과 내 스펙을 비교해보면 사실 내 것은 참 보잘것없다. 자본주의 사회는 어디까지나 결과 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에 내 좌절은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나는 남한 친구들과 출발선이 달랐기 때문에 대학 졸업 과정에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사실 많은 기업이 탈북자 채용을 꺼린다. 북한 출신들이 취직 후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탈북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용기를 잃지 않고 도전할 것이다. 일자리의 소중함을 알기에, 기회가 닿는다면 끝까지 잡고 열심히 노력해서 남한의 일원이 될 것이다. 그토록 높아 보였던 대학 문턱을 넘는 동안 받은 도움을, 사회에 돌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