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렬천추' 휘호의 진품은 충청남도 예산군 충의사에 보관
'壯烈千秋 장렬천추'
- 천년의 세월이 흘러도 씩씩하고 매운 기상 -
윤봉길 의사의 홍구(虹口, 훙커우) 의거(1932)를 칭송하며 중화민국의 총통 장제스가 쓴 휘호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장제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함
또한 카이로 회담에서 미, 영 연합국 수뇌부들에게 전후 한국의 독립을 적극 주장하며 관철함
그리하여 한국은 공식적으로 연합국으로부터 전후 독립을 약속받게 됨
* 윤봉길 의사의 홍구 의거 이전, 한중 양국민 간의 사이는 만보산 오보사건(1931)으로 최악이었음
* 만보산 오보사건 : 1931년, 재만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에서 발생한 경작지 개간 관련 소요사태 중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조선일보의 오보로 인해 한국 내 화교 배척, 화교 혐오 움직임으로 번진 사건
한국광복군 인원들과 미 전략사무국(OSS) 인원들간의 합동 단체사진
OSS 작전의 총책임자 도노번 미 육군 소장과 시안(西安)의 광복군 제 2지대 본부를 걷는 김구 주석
광복군 대원들이 미국의 OSS 교관으로부터 총기훈련을 받는 모습
OSS측 인사들과 작전회의 중인 한국광복군 간부들
영국의 베이컨 연락장교와 사진을 찍은 한지성, 문응국, 박영진 등 인면전구공작대 대원들
미얀마 전선의 영국군 기지에서 태극기를 펼치는 인면전구공작대 대원들
한국광복군의 OSS 연합작전, 인면전구공작대 파견
대일 선전포고(1941)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2차대전 당시 연합국 일원으로 참여했음을 공식 선언
미국, 영국과의 공동 작전 수립을 통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제적인 정의 실현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한국 독립' 의 정당성을 확보함
독립운동가 분들이 대외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내면서 공식적인 약속을 이끌어 낸 것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코리아' 의 정체성을 가지고 세계 무대에 독립의지를 지속적으로 보이지 못했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도 '한국' 의 영토로서, 우리도 '한국인' 으로서 인정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누구의 말마따나 절대로 '도둑처럼'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