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가 2018년 11월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변호사회관에서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한 뒤 기자회견을 하며 강제노동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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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가 지난 5일 경기도 안양시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5세.
1929년 전남 순천에서 출생한 김성주 할머니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수난을 많이 겪었다. 1942년에는 아버지가 경남 진해 비행장으로 강제징용됐다. 그로 인해 아버지 소식이 끊어진 상태에서 어머니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5세 때인 1944년에는 소녀 김성주도 아버지와 비슷한 상황에 내몰렸다.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다"라며 "네가 원하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는 일본인 교사 오가끼의 말을 믿었다가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서 강제노역을 하게 됐다. 노예 노동과 다름없는 열악한 작업 환경 속에서 비행기 동체를 절단하다가 손가락 부상을 입었고, 그해 12월 도난카이 대지진 때는 왼쪽 무릎뼈를 다쳤다.
그러는 동안, 오가끼 교사는 동생 김정주에게 "일본에 가면 언니도 만나게 해주고 중학교도 보내주겠다"고 감언이설했고, 동생은 그 말을 믿었다가 일본 서해안 중간쯤인 도야마현의 후지코시강재공업으로 강제징용돼 비행기 부품을 제작하는 강제노역으로 내몰렸다.
김성주 할머니의 역사적인 승리,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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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주 할머니는 배상을 거부하는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특허권 2건을 압류했다. '전범기업의 책임을 우리가 대신 떠안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제3자 변제 방침 발표 이후에도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끌고 갔는데, 어디에다가 사죄를 받고, 어디에다가 (사죄)요구를 하겠느냐"라며 반발했다. 그러나 결국 지난해 5월 그 대위변제를 받아들이고 특허권 압류를 취하했다.
그를 포함한 피해자들이 80년 가까이 일본과 싸우는 것은 꼭 금전 때문만은 아니다. 한마디라도 사과를 받고 싶다는 심정이 그들을 움직여왔다. 그런 사과를 받아 조금이나마 한을 풀 수 있는 기회가 한일 두 정부의 공조로 인해 차단돼 있다. 이런 상태에서 그는 95세라는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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