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 눈사람 여관 中
아픈 데는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
없다,라고 말하는 순간
말과 말 사이의 삶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물 소리가 사무치게 끼어들었다
시집 뒷장을 읽으면서 엉엉 울었다
말과 말 사이가 아파서 벙어리가 된 내게
아픈 데는 없냐고 묻는 당신
무심하고 싶지만 무심할 수 없는 혼자인 나는
가끔 당신으로부터 사라지려는 수작을 부리는
나는 당신 한 사람으로부터 진동을 배우려는 사람
그리하여 그 자장으로
지구의 벽 하나를 멍들이는 사람
안도현 - 우리가 눈발이라면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이런 시中
이상 - 금홍에게 보내는 편지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 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평생 못 올 사람인 줄 알면서도
나 혼자 꾸준히 생각하리라
자 그러면 어여쁜 그대는 내내 어여쁘소서
도종환 -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백석 - 수라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을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아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노희경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2013년 7월에 출제된 모의고사 대본)
엄마: 당신은..... 나 없어두 괜찮지?
정철: (보면)
엄마: 잔소리도 안 하고 좋지, 뭐.
정철: (고개돌리며) 싫어.
엄마: 나....보고 싶을 거는 같애?
정철: (고개를 끄덕인다.)
엄마: 언제? 어느 때?
정철: ......다.
엄마: 다 언제?
정철: 아침에 출근할려고 넥타이 맬 때.
엄마: (안타까운 맘.보며) ...또?
정철: (고개를 돌려, 눈물을 참으며) 맛없는 된장국 먹을 때.
엄마: 또?
정철: 맛있는 된장국 먹을 때.
엄마: 또?
정철: 술 먹을 때, 술 깰 때, 잠자리 볼 때, 잘 때, 잠 깰 때, 잔소리 듣고 싶을 때, 어머니 망령 부릴 때, 연수 시집갈 때, 정수 대학 갈 때, 그놈 졸업할 때, 설날 지짐이 할 때, 추석날 송편 빛을 때, 아플 때, 외로울 때.
엄마: (눈물이 그렁해, 괜히 옷섶만 만지며 둘레를 두리번거리며) 당신, 빨리와. 나 심심하지 않게. (눈물이 주룩 흐르고)
정철: (엄마를 안고, 눈물 흘리고)
엄마: (울며 웃으며) 여보, 나 이쁘면 뽀뽀나 한번 해 줘라.
최영미 -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황경신 - 나는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
먼 세월 흘러 너를 우연히 다시 만나니
나는 변하지 않았는데 너도 변하지 않았구나
그러니 우리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못하겠구나
사랑을 하여도 금세 이별이겠구나
수천 번의 봄이 되풀이되고
수억의 꽃봉오리 피고 져도
내가 있는 풍경 속에서
너도 늘 그렇게 슬픈거구나
김소월 - 먼 후일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 때에 "잊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