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애신 28세 (김태리 역)
하루가 멀다 하고 온갖 추문이 대문을 넘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열다섯만 넘어도 노처녀 소리 듣는 조선 땅에서 혼기를 놓쳐도 한참 놓친 애신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이게 다 희성 때문이다.
희성은 애신이 열다섯 되던 해에 조부들끼리 정혼한 애신의 정혼자다.
얼굴도 못 본 정혼자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는 소식을 조부를 통해 들었었다.
큰어머니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샘을 내는 혼처인 걸 보면, 어떤 사내일까 궁금은 하나 십년이 넘도록 코빼기도 안 봬주는 걸 보면
내가 저를 잊고 살 듯 저도 나를 잊고 사는 게 분명했다. 지금 같아서는 영 돌아오지 말았으면 싶다.
조부와 근 한 달을 힘겨루기 끝에, 물론 행랑아범과 봉순네를 대동해야 하는 볼썽사나운 등교지만,
‘개 상놈’의 여식들이나 다닌다는 신식학당에 이제 막 입학해 'I am a girl Boys be ambitious'를 배우는 참이기 때문이다.
학당의 누군가는 작금을 낭만의 시대라고 했다.
애신도 동의했다. 다만 애신의 낭만은 가배(커피)도, 양장도, 박래품(수입품)도 아닌 러시아제 총구안에 있었다.
조선 최고 명문가의 ‘애기씨’가 갖기엔 과격한 낭만이었다.
나라를 위해 살다간 아버지의 피 탓이었을까.
그런 사내를 사랑한 어머니의 열정 탓이었을까.
암만 생각해도 Boy들만 야망을 품으리란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를 꽃처럼 어여뻐 하는 사내들은 시시했고 어차피 피었다 질 꽃이면 제일 뜨거운 불꽃이고 싶었다.
애신의 방에서 서책 갈피에 몰래 숨겨놓은 ‘한성순보’와 ‘독닙신문’이 발각된 날, 조부의 눈빛은 노여움이 아니라 슬픔이었다.
맷짐승 고기가 먹고 싶으니 포수를 찾아가란 조부의 심부름은 그날부터였다.
조부의 당부는 딱 하나였다. 살아남거라.
애신의 나이 열아홉이었고, 그날부터 강포수는 애신의 스승이었다.. 강포수는 화약다루는 법, 총기류 다르는 법, 사격술 등을 가르쳤고
9년이 흐른 지금, 애신의 타깃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그런 애신이 시시하지 않은 남자를 만난 건 한성에 첫 가로등이 켜지던 순간이었다.
이기적인 배려, 차가워서 다정한, 자신의 조국은 미국이라는,
자기생에서도 이방인의 사내, 유진이었다.
그 사내의 심장이 자신의 타깃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비는 애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