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김신(939세로 추정)
그의 이름은 복선이었고 스포일러였다. 백성들은 그를 신神이라고 불렀다.
시뻘건 피를 뒤집어쓴 채 푸르게 안광을 빛내며 적들을 베는 그는
문자 그대로의 무신武神이었다.
덕분에 숱한 전쟁에도 백성들은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다.
평화로운 밤이 계속될수록 백성들은 김신이 왕인 꿈을 꾸었다.
그는 적의 칼날은 정확하게 보았지만
자신을 향한 어린 왕의 질투와 두려움은 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지키던 주군의 칼날에 죽었다.
하루 중 가장 화창한 오시午時. 영웅으로 살다 역적으로 죽어가며 바라본 하늘은 시리도록 맑았다.
천상의 존재는 상인지 벌인지 모를 늙지도 죽지도 않을 생을 주었고,
그로부터 939년 동안 김신은 도깨비로 살았다. 심장에 검을 꽂은 채로.
죽었던 순간의 고통을 오롯이 안은 채로. 그가 신경쇄약, 조울증, 불면증을 앓는 건 당연했다.
변한건 없다.
천 년이 지나도 왕은 무능했고,
하늘은 여전히 시리도록 맑았고,
도깨비가 되고 난 후에도 인간을 지키는 몹쓸 버릇은 고칠 수 없었다.
인간들은 모르지만 900년 동안 그는 인간들의 수호신이었다.
불멸의 시간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건
함께 살고 있는 저승사자뿐이었고,
그게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되었다.
그 위로가 이 엉망인 동거를 이어가게 하는 가장 큰 힘이다.
금욕주의자에 채식주의자인 저승사자와는 달리
미인과 돼지고기와 술은 많을수록 좋다가 인생 지론이다.
절개는 장군이었을 때 충분히 지켰다.
"오직 도깨비 신부만이 그 검을 뽑을 것이다."
지독히도 낭만적인 저주였다. 그래서 쉬울 줄 알았다.
큰 키에 타고난 품위, 어딘가 초월한 데서 오는 나른하고 섹시한 눈빛을 가졌고
무엇보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시간과 돈이 넘치도록 많으니까.
하지만 그가 만난 어떤 여자도 검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도깨비 신부라고 소개하는 열아홉 살 소녀 은탁과 맞닥뜨렸다.
아직 호적에 잉크도 안 마른 고딩 신부라니.
그에게 은탁은 고통에서 벗어나 소멸할 수 있는 도구였다.
달리 말하면 은탁은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유일무이한 무기였다.
죽고 싶게 외로운 날은 탁의 환심을 샀다가
아직 죽긴 일러 싶은 날은 멀리 했다가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마음이 오락가락 했다.
무無로 돌아가고 싶다가도,
이 정도면 견딜 만한 아픔 같기도 했다.
그런 김신을 보며 탁은 환하게 웃었고
김신은 소멸을 생각하지 않는 날이 늘어갔다.
불시착한 감정에 발이 걸려 넘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도 들었다.
탁의 웃음에 신은 몇 번이나 어딘가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혔다.
돌아서 한 번 더 보려는 것이 불멸의 삶인가, 너의 얼굴인가. 아, 너의 얼굴인 것 같다.
인간신부 은탁(19세)
미스터리 호러 가난물이었던 인생에 갑자기 판타지라는 이상한 장르가 끼었다.
엄마를 잃은 밤, 갑자기 들이닥친 이모 가족을 따라 이사를 했다. 다른 선택이 없었다.
탁은 깨달았다.
신은 없구나.
누구도 탁의 안부를 묻지 않는 날들이었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고3 수험생, 이고 싶지만
그녀의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평범하지 않았다.
엄마는 그녀가 9살 때 세상을 떠났고 아빠는 그녀가 잉태되었단 소식을 들었을 때
엄마와 태어나지도 않은 그녀 곁을 떠났다.
하지만 엄마와 아홉 해를 살았으니 살아온
인생의 반절이나 행복했으면 꽤 괜찮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긍정적인 열아홉 살이다.
탁은 다른 사람들 눈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였다.
이웃집 강아지가 죽었을 때, 그녀는 자신이 죽은 존재의 혼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친구들은 그런 탁을 이상한 아이라고 수군댔고, 때문에 늘 외톨이였다.
온갖 불행 소스를 다 때려 넣은 잔탕 같은 이 인생이 어이가 없는 와중에 김신을 만났다.
처음엔 늘 그렇든 귀신인 줄 알았더니 도깨비란다.
그리고 탁은 그의 신부가 될 운명이란다.
귀신 보는 팔자로도 충분한데 도깨비 신부라니.
근데 잠깐, 운명이라고? 운명... 참으로 로맨틱한 단어였다.
무엇보다 전래동화로 보던 것보다 실물이 훨씬 나았다.
어느 문이든 신이 열면 꿈과 환상과 모험이 가득한 놀이동산으로 탈바꿈했다.
호기심에 불러냈던 게 습관이 되고, 안 보면 보고 싶고.
김신을 기다리는 일은 아직 오지 않은 좋은 미래를 기다리는 것처럼 설렜다.
감정 기복이 심해서 성가실 때도 있지만,
가슴에 검이 꽂힌 채로 살면 그렇게 되겠거니 싶어 봐주기로 한다.
근데 그 검을 나보고 뽑아달란다.
그 말이 꼭 끝내자는 말처럼 아프다.
인간에겐 네 번의 생이 있다는데 이번 생은 몇 번째 생일까.
가능하다면 첫 번째 생이었으면 좋겠다.
두번째도, 세번째도, 그리고 마지막에도 당신을 만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