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는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남자였다.
한 번도 말한 적 없었지만 이따금 나는 우리가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손도 잡은 적 없지만 그 애의 작고 마른 몸을 안고
매일 잠이 드는 상상도 했다. 언젠가.
난 왜 이렇게 나쁜 패만 뒤집을까.
그 말 뒤에 그 애는 조용히
그러니까 난 소중한 건 아주 귀하게 여길 거야.
말했었다.
그러나 내 사랑은 계산이 빠르고 겁이 많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 애가 좋았지만 그 애의 불행이 두려웠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살 수도 있었다.
가난하더라도 불행하지는 않게.
남아 있는 생이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서받고 싶은 일들이 하나둘 떠오르고
뱉어내는 말보다 주위 삼키는 말들이 많아졌다.
삶이 낡았다는 생각이 들자 내 몸에 새겨진 흉터가
몇 개인지 세어보는 일이 잦아졌다.
반성한 기억들의 목록이었다.
악 소리도 없이 별똥별처럼 뛰어내린 너는
그날그날을 투신하며 살았던 거지?
발끝에 절벽을 매단 채 살았던 너는
투신할 데가 투신한 애인밖에 없었던 거지?
붉은 손목을 놓아주지 않던 물먹은 시곗줄과
어둔 강물 어디쯤에서 발을 잃어버린 신발과
새벽 난간 위에 마지막 한숨을 남겼던 너는
뛰어내리는 삶이
뛰어내리는 사랑만이 유일했던 거지?
나는 살고 싶다는 말이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살고 싶단 말이 아니야.
그런 일이 있었던 나로, 온전한 나로,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내 편에 서서, 제대로 살고 싶단 말이야.
나는 아직도 잠을 잘 못 자.
가끔 내가 누군지, 오늘이 며칠인지, 내가 몇 살인지, 뭘 하고 있었는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헷갈려.
내 기억을 신뢰하지 못해서 혼란스러워.
아주 좋기만 하던 날은 하나도 기억나질 않는데
한겨울 맨발에 슬리퍼 끌고 나온 나를
낮은 담벼락 위에 앉혀두고 자기 양말을 벗어주던
가난하고 구질구질한 날밖에 떠오르질 않는데
그런 일을 행복이라고 느꼈던 내가
비참하다고 울었던 것만 기억나는데
당신이 인천에 두고 간 낡은 책에 물을 엎지른 일로 한참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