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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와 나라는 바로 옆에 위치했는데도 불구하고 오가는 것이 불편했음. 왜냐면 두 지역을 장벽처럼 갈라놓고 있는 이코마산 때문.
그리하여 1914년 4월. 이코마산을 가로지르는 이코마 터널이 만들어졌고, 이후 두 지역이 활발하게 교류하며 경제적으로도 큰 이득을 얻게됨
그런데 이코마 터널 개통 50년만인 1964년 7월, 들은 별안간 그 터널을 폐쇄되기에 이름.
엥. 굳이?
원숭이라 아이큐가 떨어지는지? 물론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이유는 따로 있었음
이코마 터널에서 귀신을 봤다는 제보가 끊이질 않았기 때문임. 덕분에 이코마 터널은 폐쇄된 후 오사카의 이누나키 터널, 교토의 기요타키 터널과 더불어 일본의 3대 심령 스팟이 되었다고.
그런데 허미 나약한 들,, 그럼 기껏 지어놓은 터널을 귀신땜에 폐쇄한 거임?
(끄덕)
ㅇㅇ 마즘.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알 수 없는 각종 사건 사고들 때문이었음.
사고의 시작은 1946년 4월부터였음. 이코마 터널을 지나가던 열차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한 거.
바닥에서부터 시작된 불로 인해 당시 승객 28명이 사망, 약 70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큰 사고였음. 그 뿐 아니었음.
8개월 후 1946년 12월엔 잘 달리던 열차가 갑자기 이코마 터널 한가운데 정지해버림,, 잘 가던 열차가 갑분 정지해버린 바람에 뒤에서 따라오던 열차와 충돌이 일어났음.
이 사고로 승무원과 승객 18명이 사망, 약 50여명이 부상을 입게됨.
그걸로 모자라 다음해 4월 또다시 터널 안에서 열차에 화재가 발생함. 20명 이상이 사망했고, 50명이 부상을 입게 됨.
거기서 끝이냐고?
ㄴㄴ
자신들의 과오를 바로잡지 못하는 게 종특 아니겠음?
그로부터 4개월 뒤인 1947년 8월. 오사카->나라행 급행열차가 터널을 지나가던 순간
히로시마 버섯구름
빼앰~ 폭팔해버렸음다
이 사고로 승객 40여명이 부상을 입게됨 ㅠ
여시들 : 그래도 이번 사고가 마지막이겠지, 설마.
ㄴㄴ
1948년 3월 이코마 터널로 진입하던 열차의 브레이크가 고장나면서, 속도를 줄이지 못한 열차는 가속이 붙은 상태로 앞에 있던 열차와 충돌하게 됨. 승객 50여명이 사망하고 180여명이 부상을 입을 정도의 대형 사고였음.
유독 터널 안과 근처에서 발생하는 사고들,, 사람들은 급기야 터널에 저주가 걸렸다고 수근거리기도 했음,,
그러던 어느날,,
이코마 터널을 지나는 열차에 탄 승객이 멍하니 창밖을 보던 중 뭔가를 발견한거임.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좁히던 승객은 깜짝 놀랐음.
빠르게 스쳐지나간 무언가는 바로, 하얀색 상하의를 입고 머리를 위로 틀어올린 ‘사람’ 이었던 거 ㄷㄷ
이 승객은 자신이 본 게 헛것이 아니라고 확신했음.
왜냐하면 터널 주변에서 이상한 경험을 한 사람은 자신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임
과거부터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터널 부근에가 수상한 바람소리가 난다는 소문이 있었음. 이 바람소리를 자세히 들어보면 분명 어떤 남성의 울부짖음같다는 소문이었음.
하여간 씹새리들 지은죄가 많아서 그런가 쫄기도 정말 잘쪼는듯,,
그렇게 흉흉한 소문이 도는 와중에 우연히 터널에 들어갔던 주민 중 하나의 몸에 인체 발화 현상이 일어남 ㅠㅠ
불을 붙인적도 X 불이 날만한 뭔가를 소지한 것도 아니었음; 갑자기 몸이 뜨겁다고 말하더니 몸 안쪽에서 불길이 치솟은 거,, 불이 붙은 몸은 3분만에 완전히 타서 재만 남게 됨.
인체 발화 현상이라니. 이런 일이 한번만 일어났대도 믿기 어렵다 아님?
그런데 이코마 터널에서만 무려 3번이나 인체 자연발화 현상으로 사람이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함 ㄷㄷ
곧 인체발화현상이 일어난 현장 조사가 이루어졌고, 분석결과가 발표됨
구라데스.
결론이랍시고 내놓은 게 ’주민들이 공포심에 잠겨서 허구로 지어낸 말이다.‘ 였음 ㅇㅇ
주민들 : 아니라고
주민들은 반발했음. 당연함. 마을 주민들이 뭐하러 자기 마을 터널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거짓말을 치냔 말임?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고, 하는 수 없이 마을 주민들은 터널 옆에 넋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를 세우게 됨.
그런데 여기서 뭔가 뜬금없다는 생각 안듦? 위령비를 왜? 대체 누구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
뭐 어쨌든 넋을 기리기 위해 위령비를 세웠다니 그 뒤론 괜찮아졌겠지?
ㄴㄴ 아니었음
그리하여 일본정부는 이코마 터널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자 보수 공사를 감행함
하지만,,
인부들마저 귀신을 봤다며 도망가버리니 공사가 진척될 리 없었음. 그래서 결국 일본은 1964년 터널을 완전히 폐쇄하기에 이른것임
그저 유명한 심령스팟 정도인 줄 알았던 이코마 터널. 하지만 90년대에 와서 터널에 숨겨져있던 엄청난 비밀이 세상에 낱낱이 밝혀지게 됨
이코마 지역이 살았던 증언자들의 말을 토대로 쓰여진이라는 책 덕분이었음.
이 책의 저자 스미이 씨는 책을 쓰기 위해 직접 이코마 터널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충격적인 사실들을 발견하게 됨.
사실 이코마 산은 터널을 뚫기엔 불안한 지형이었음. 수맥이 흐르는대다 지반 자체가 단단하지 않아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던 거.
하지만 터널이 필요했던 일본 정부는 모르는 척 공사를 감행했고,
무려 1000여명의 조선인 노동자를 동원해서 1911년 6월부터 터널 공사를 시작하게 됨.
그런데 당시 건설회사였던 오바야시구미는 경영난을 겪고 있었음. 자국 직원들한테도 월급을 제대로 못챙겨줬으니 타국에서 온 조선인들에겐 오죽했겠음?
온종일 조선인 노동자에게 가혹한 노동을 시키면서도 오바웅에서 제공한 것은 고작 이것뿐이었음..
하루에 주먹밥 하나..
개호로
호로의 만행은 그뿐이 아니었음.
정해진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터널 안.. 그 먼지구덩이 안에 가둬두고, 밤사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터널 입구를 막아놓기까지..
물론, 고된 노동을 견디다 못해 탈출하는 사람들도 있었음. 하지만 그러다 잡히면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았다고 함..
하지만 우리가 누구임,,
근면성실이 dna에 새겨진 민족ㅇㅇ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조선인 노동자들은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희망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음
그러다 1913년 1월 26일..
갱의 천장과 암벽이 무너지며 당시 작업중이던 조선인 수백명이 매몰되는 참사가 일어남. 140명 정도가 부상을 당했고 나머지는 사망하는 대형 참사였음.
사건이 있고 바로 다음날. 오바웅 건설회사는 조선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공사는 공사임 ㅋ
간신히 살아남은 부상자들은 기본적인 치료조차 받지못한채 다음날부터 다시 일을 재개하게 함..ㅋㅋ 하 웃는게 웃는게 아님 지금
내기분도 이렇게 같은데 당시 조선인 인부들은 얼마나 분하고 원통햇겟음? 당연히 건설회사에 부당하다며 항의했지만 건설회사로부타 돌아온 답변이라곤 무차별한 폭행이 전부였음
스트레스
거기다 사망한 조선인들의 시신을 따로 안치해주지 않고 매몰된 상태 그대로 냅둠,, ^^ 그게 끝이면 이 글 쓰지도 얺았음
터널에 하루종일 갇혀서 일하다보니 당연히 병을 앓는 사람들이 속출하게 됨. 먼지로 인한 폐병부터 기타 합병증, 또 터널 붕괴당시 부상을 입고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팔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 사람들까지.
그러자 이 건설회사는 꼴랑 주먹밥 한덩이도 주기 아깝다며, 병 든 조선인들을 그 자리에서 가차없이 죽여버림.. 이게 끝일거 같지? 아님..ㅋㅋ
더 큰 소름은 따로 있었음
들은 죄없는 노동자들도 마음에 안들면 그냥 죽이곤 했는데, 조선인들이 죽으면 그 피를 양동이에 받아 터널 곳곳에 뿌려댔음.
왜냐. 일본에는 ‘사람의 피가 많이 섞여야 공사가 성공한다’ 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임
이런 헛된소리를 미신으로 믿고 있는것부터가 본놈들은 아주 유구하게 미들이란 증거임. 뭔 도 아니고 이런 걸 어휴.
어찌되었든 조선인들의 피로 얼룩진 이코마 터널이 1914년 3월 완공되게 되었음.
일본 오사카와 나라를 잇는 장장 3388m의 기나긴 터널을 완공하는 데 걸린 기간은 고작 33개월.
조선인들에게서 참혹하게 갈취한 강제노동으로 이뤄낸 결과였음.
물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조선인들도 있었지만, 회사로부터 제대로 된 보상은 받지 못했다고 함.
이걸 세상에 밝힌 스미이 작가는 이코마 터널에서 노동한 조선인들이 심한 박해를 받았다며 그때 억울하게 죽어간 조선인의 한때문에 참사가 끊이질 않는 것이다. 라고 말했음.
본인들 : 헐 진짜임?
그러자 일본 정부와 오바야시구미의 답변은 이러했음
우리 그 공사에 조선인 쓴 적 업는디; ㅎㅎ
스미이 작가 : ㅋ 그럼 이건 뭔데?
1912년 9월 나라조보라는 일본 신문에 짤막하게 실린 기사 내용은 이러했음
또한, 1913년 10월 아사이 신문의 기사 내용.
이 사건도 진짜 어이없는게 조선인 노동자들이 배가 너무 고프니까 근처 연못에서 물고기를 낚시하려 한거임. 그런데 그걸 본 일본인이 시비를 걸었음.
‘그거 일본 연못이니까 물고기 낚지마셈.’
먹는걸로 드릅고 치사하게 으이구. 하여튼 그 일로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고, 결국 조선인 노동자 한 명이 죽기도 했다고 함.
또 다른 기사도 있음
1917년 12월 중국의 신문에 쓰여진 기사 내용임
현재에도 위령비와 추모비가 고스란히 남아있음. 특히 오바야시구미가 이코마 터널 비탈길 쪽에 세운 위령비도 남아 있는데,이 위령비에는 1913년 1월 26일 발생한 터널 사건의 희생자의 이름이 적혀 있음.
현재 일본 5대 대형 건설회사(..ㅋㅋ)로 자리잡고 있는 오바야시구미는 일제강점기 당시 경성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경의선을 준공했고, 구 제일은행 본점을 건설한 적도 있음
그 당시에도 조선인을 가혹하게 다루기로 아주 악명 높았다고 함. 건설 현장에 위안부를 동원,, 아
후..
암튼 다시 이어나가면. 건설현장에 위안부를 동원한 전력이 알려지면서 전범 기업으로 낙인 찍혀있다고. 그걸로 되겟나
폐쇄된 후 심령스팟으로 유명해진 이코마 터널..
하지만 이곳은 우리에게 무섭다기보다 참혹한 조선의 역사가 곳곳에 남아있는 슬프고 애통한 장소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