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소서 도망치다 일본군에 잡혀 온몸에 문신당한 정옥순 할머니의 몸 - 인사이트
자신의 몸으로 일본의 만행을 증명하고 있는 위안부 피해자 정옥순 할머니의 참혹한 회고록이 재조명되고 있다.
www.insight.co.kr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인사이트] 황규정 기자 = 한일 위안부 협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평창올림픽에 참석하지 않겠다던 일본 아베신조 총리가 갑자기 말을 바꿨다.
도리어 개회식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표한 것이다. 그는 이번 평창올림픽을 빌미로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전달하겠다는 의중을 드러냈다.
여전히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반성이 없는 뻔뻔한 태도다.
어린 시절 일본으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던 생존자들이 끊임없이 증언을 이어가고 있지만 일본은 오히려 '강제성이 없다'며 역사 왜곡까지 일삼는 상황.
이러한 가운데 혀와 입술, 가슴부터 배 아래까지 온몸에 새겨진 문신으로 일본의 만행을 폭로한 위안부 피해자 정옥순 할머니의 가슴 찢어지는 증언이 재조명되고 있다.
영화 '귀향'
북한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정옥순 할머니는 1920년 함경남도 풍산군에서 태어났다.
정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군 손에 끌려간 날을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933년 6월 3일, 14살이었던 할머니는 밭에 일하러간 부모님 점심밥을 가져다주려 우물가로 나섰다가 일본군과 마주쳤다.
손과 발이 꽁꽁 묶인 할머니가 도착한 곳은 파발리 경찰서였다. 그곳에서 경찰 8명이 정 할머니에게 옷을 벗으라고 협박했고, 강하게 저항하자 입에 누더기를 물려 강제로 겁탈했다.
온몸으로 반항하는 와중에 경찰에게 눈을 맞았는데, 그 후로 3년간 할머니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artic.or.jp
그 길로 14살의 어린 소녀였던 할머니는 혜산시 군부대 막사로 옮겨졌다. 그곳엔 자신처럼 끌려온 400여명의 소녀들이 있었다. 대부분 12살, 13살, 14살 등 20살 미만이었다.
이들이 상대해야 하는 일본군은 5천명. 하루에 40명이 넘는 일본군이 정 할머니를 찾아왔다.
말을 안 듣는다며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할머니의 몸을 지졌다. 살갗이 다 벗겨졌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군들은 또 할머니에게 달려들었다.
그해 8월, 일본군은 소녀 15명을 못판 고문으로 죽이기도 했다. 정 할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을 죽인 일본군의 이름도 명확히 떠올렸다.
니시하라 수비대 대대장, 야마모토 중대장, 가네야마상 소대장. 수년이 흐른 뒤에도 절대 잊지 않겠다 뼈에 새긴 이름들이었다.
artic.or.jp
한 일본 장교가 "하루에 100명 상대할 수 있는 사람 손 들어라"라고 말했다. 그중에 14살 된 소녀가 "왜 우리가 100명을 상대해야 하냐"고 되물었다.
그 소녀는 이날 팬티 한 장만 입은 채 300개 못이 박힌 판 위에 굴려졌고 끝내 칼로 목이 베였다. 일본군은 땅에 묻기도 아깝다며 시신을 변소에 던졌다.
눈앞에서 친구들이 죽어 나가는 걸 보고 눈물을 흘리자, 가네야마 소대장은 "저 계집들이 사람 고기 못 먹어 운다"며 시신을 물에 삶아 강제로 먹이기도 했다.
1937년 6월 15일 정 할머니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도주를 시도했다가 17일 붙잡혀 다시 위안소로 돌아왔다.
영화 '귀향'
그때부터 잔인하고 끔찍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그들은 도주를 시도한 '위안부' 12명의 입에 고무호스를 물려 배속에 물을 주입한 뒤 널빤지로 배를 눌러 다시 게워내게 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양쪽에서 널빤지로 강하게 눌러 갈비뼈가 부러지고 허리뼈까지 나갔다. 몇 번이고 정신을 잃었다.
주모자를 대라는 말에도 모두 입을 꾹 다물자 일본군은 소녀들을 철봉에 거꾸로 매달았다.
그 앞으로 검은색 기계가 들어왔는데, 거기엔 작은 바늘이 잔뜩 달려 있었다. 고문기계였다. 일본군은 바늘에 먹물을 묻혀 소녀들의 입안, 가슴, 배 아래쪽까지 문신을 낙서처럼 문신을 새겼다.
그때 만들어진 문신은 지금도 할머니의 몸에 선명히 새겨져 있다. 이 몸으로 평생을 살았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장장 구만리 같은 청춘을 통째로 빼앗겼다.
악진 세월을 버틴 정 할머니는 보상금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왜 데려다가 우리 여성들을 그렇게 했냐"고 물어보고 싶다고 했다.
70년이 넘게 이 질문을 했지만 일본은 아직도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