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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둥이.ll조회 2436l 1

 

어렸을 적부터 공부보다 하루 빨리 집에서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에 관심 이 많았던 나는 고등학교에 올라가 자동차 정비를 배우기 시작했다.카 센터 를 운영하면 돈벌이도 쏠쏠하고 다른 직업에 비해 남는 시간도 많아 자유롭게 놀기에 좋을 것 같았다.그런데 막상 해보니 자동차 정비라는 게 그리 쉬 운 일이 아니었다.특히 추운 겨울-잘 알다시피 강원도의 겨울은 엄청나게 춥 다-에 자동차를 만지고 있으면 손이 차디찬 철판에 쩍쩍 달라붙었다.죽을 지 경이었다.또 손톱에 낀 기름때는 일주일이 지나도 빠지기는커녕 어쩌면 그토록 시커멓게 변해가는지….

이러다 보니 공부에 흥미를 잃어갔다.아니 자동차 정비에 흥미를 잃었다고 보는 편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2학년에 올라가면서부터 친하게 지내는 4명의 단짝들과 함께 담배 맛을 알게 됐다.그리고 오토바이에도 재미를 붙였다.그 리 값 비싼 오토바이는 아니었지만 바람을 가르며 타고 있으면 모든 근심 걱 정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내가,우리 가족 전부가 그렇듯이 체질적으로 술을 전혀 못 먹는다는 것이다.아마 내가 술까지 잘 먹었으면 고교시절에 이미 폐인 일보 직전까지 가지 않았을까?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을 때면 자취방에서 뒹굴며 TV를 보는 것이 유일한 낙 이었던 나의 머리에 어느날 문득 한줄기 빛이 들어왔다.앞으로의 밥벌이,즉 진로에 관한 생각이었다. 

촬영 또는 음반 활동을 하고 나면 저마다 외 국에서 재충전을 하는 연예인들과 달리 기름밥을 먹어가며 자동차 배터리의 재충전 여부나 살펴야만 한다는 사실이 자동차정비사를 꿈꿔왔던 나를 흔들 리게 만들었다.물론 연예인이 되고 난 뒤 그 같은 당시의 생각들이 아주 단 순무식했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에이,XX.나도 연예인이나 한번 돼볼까?’ 일단 마음을 고먹고 나니 자동차 곁에도 가기 싫어졌다.그래서 정비 가운 데도 가장 기름밥을 적게 먹는 전기정비로 전공을 바꿨다.때마침 이때부터 외모도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통통하고 동글동글했던 얼굴은 살이 쪽 빠져 갸르스름해졌고 키 역시 쑥쑥 자라 자타가 공인하는 춘천기계공고 최고의 미 남으로 자리잡게 됐다(으흠,내 입으로 얼굴 자랑을 하자니 조금 부끄럽군).

그러나 우물 안 개구리가 뛰면 어디로 뛰겠는가? 연예인이 되겠다는 뜻과 의지만 있었지 도대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방송 관계자들과 매니저들이 춘천까지 내려와 나를 발탁할 리도 없고 빠듯한 가정형편에 서울을 오가며 연기학원에 다닌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었다.일단 연예인의 꿈을 접어두고 삼촌이 소개해준 경기 시흥에 있는 자동차정비공장에 취직하기로 결정했다.그러니까 95년 고등학교 졸업 을 한 학기 남겨둔 시점이었다.

웬만하면 참고 견디려 했다.그러나 외롭고 적막한 정비공장 생활은 내 인 내심을 서서히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광명의 큰 누나 집에서 경기 시흥의 공장까지 출퇴근했는데 보통 해 뜨기 전에 버스를 타면 거짓말 조금 보태 점심 먹을 때쯤 돼야 공장에 도착하곤 했다.게다가 또래 친구들 하나 없이 나이 지긋한 어른들과 함께 지내는 생활 은 내성적이고 낯을 많이 가리는 나로서는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한마디로 말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견디기 힘들어 탈출을 구체적으로 꿈꾸고 있을 즈음 무심코 스포츠 지를 보다가 신인 탤런트 모집 광고를 발견했다.지금은 드라마넷으로 이름이 바뀐 케이블채널 제일방송에서 전속 연기자를 뽑는다는 얘기였다.

눈이 번쩍 띄었다.‘그래,바로 이거야!’ 주저하지 않고 막내 누나한테 얘 기했다.내 계획을 들은 막내 누나는 “도진아(내 원래 이름은 김도진,아는 분은 다 안다),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는데 괜찮겠어”라며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그렇지만 한번 마음을 먹으면 주위에서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무조건 저지르고 보는 성격인 내가 누나의 충고를 귀담아 들을 리 만무했다 .

옷장을 뒤져 몇 벌 되지도 않는 옷들 가운데 가장 폼나는 옷을 입고 막내 누나와 함께 집앞 공터로 나갔다.미용사로 일해 아무래도 미적 감각이 우리 남매들 중 가장 뛰어난 막내 누나는 빨간 벽돌담장을 배경으로 열심히 셔터 를 눌러댔다.사진 찍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그날만큼은 무슨 모델이라도 되는 양 열심히,그리고 멋있게 포즈를 취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얼마나 무모한 발상인가.남들은 수백만원씩 들여 스튜디오에서 찍은 프로필 사진을 방송국에 제출하는 마당에 손바닥만한 싸 구려 카메라로,그것도 담장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자랑스럽게 원서에 붙여 제출할 생각을 하다니….‘무식하면 용감해진다’는 말이 바로 이 경우였다 .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제출한 원서가 의외로 쉽게 제일방송 드 라마 관계자들의 눈에 들었던가 보다.서류 전형과 면접을 거쳐 당당히 공채 3기로 전속연기자 모집 시험에서 합격했다.95년 11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기쁜 사실을 함께 살고 있는 누나들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 할 수 없다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왜냐하면 당시의 내 신분은 학생이었고 만 약에 공장 일을 그만뒀다는 얘기가 학교 선생님들의 귀에 들어갈 경우,당장 춘천으로 내려가야만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원래 실업계 고교에서는 3학년 마지막 학기에 취업했다가 도중에 그만두면 다른 회사에 갈 때까지 다시 학교에 다녀야 한다.그래서 공장에 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선생님들이 알게 되면 나 또한 바로 ‘춘천 가는 기차’를 타야

만 했다.

그 때부터 나의 이중생활은 시작됐다.아침에는 공장으로 출근해 잠깐 얼굴 만 내비치고 오후에는 제일방송 사무실로 가 연기 훈련을 받았다.그 과정에서 몇 편의 드라마에도 출연했다.그러나 전속 신인연기자들에게는 출연료가 없었다.단지 한달에 12만원씩 월급을 받을 뿐이었다.

월급을 받으면 나는 큰 누나에게 5만원을 떼어 생활비로 준 뒤 7만원을 가 지고 한달을 버텼다.주머니에는 언제나 100원짜리 동전 서너개가 있었고 이 돈으로 방송국 동료들과 어울려 논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답답해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래도 다행스러웠던 것 이 내가 이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쉽게 좌절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남보다 의지가 강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태어나면서부터 늘 없던 놈에게 무슨 욕심이 있었겠는가? 뭐든지 그냥 죽기 살기로 하는거지...그렇게 지내던 95년 12월의 어느날 모 PD가 나를 급하게 사무실로 불렀다.

 

“디자이너 앙드레김 선생 TV에서 봤지? 그 양반이 내일 너 좀 보잔다.”

솔직히 말해 처음에 나는 앙드레 김이 뭘 하는 분인지도 전혀 몰랐다.

주위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 분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명 디자이너이며 앙드레 김 패션쇼에 선다는 것 자체가 연예인으로서 더할나위 없는 영광이라 고 흥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속으로 ‘그게 그렇게 좋은 거야? 좋으면 하지,뭐…’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나는 방송국 관계자와 함께 앙드레 김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앙드레 김 선생님은 특유의 친절하고 나긋나긋한 태도로 나를 반겨줬다.공중파에 얼 굴 한번 내밀어 본 적 없는 햇병아리 탤런트인 내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당시의 대화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앙드레 김:안녕하세요,김도진씨.TV에서 잘 봤어요.

나:(쭈뼛거리며)예,고맙습니다….

앙드레 김:시간이 되면 제 무대에 한 번 나와주세요.가능하시겠어요?

나:(더욱 쭈뼛거리며)언제라도 불러만 주신다면….

드디어 무대에 서는 날이었다.장소는 서울 H호텔,이름만 가끔 들어봤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특급 호텔이다.엄숙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웅장 한 분위기의 패션쇼 무대와 달리 분장실과 대기실은 완전히 시골장터 수준이 었다.옆에 남자가 있건 말건 훌렁 훌렁 옷을 갈아입는 여성 모델들부터 바닥 에 주저앉아 자장면을 어지러운 먹는 유명 탤런트들까지 무척이나 낯설고 정 신없는 광경에 나는 할 말을 잃고 구석에 처박혀 앉아 있었다.

그런데 (장)동건 형이 대기실 안으로 걸어오는 것을 봤다.평소 형의 팬이었 던 나는 쑥스러움을 애써 참고 동건 형에게 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그러자 동건 형은 “네,근데 누구시죠”라며 그 커다란 눈으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갑자기 부끄러워진 나는 말을 대충 얼버무리고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나중 에 같은 소속사(스타 제이)에서 만난 우리는 당시의 첫 만남을 얘기하며 유 쾌하게 웃은 적이 있다.

되풀이해서 얘기하는데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옛말은 정말 맞는 얘기다.

유명 모델들도 올라가면 떤다는 앙드레 김 패션쇼였지만 나는 전혀 긴장하 지 않았다.아니 긴장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뭘 알아야지 무서워하거나 긴장 할 것이 아닌가? 무조건 눈에 힘을 주고 무대 위를 왔다 갔다하니까 끝이란 다.나는 속으로 ‘에이,패션쇼도 별 거 아니구먼’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 같은 내 ‘무대포’같은 모습을 주의깊게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 나보다.

바로 지금의 소속사인 스타제이의 정영범 사장(사석에서는 형이라고 부른다) .나를 발탁해 오늘날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있는,한마디로 은인 같은 존재다.

영범 형은 패션쇼가 끝난 뒤 나를 찾아와 “무대 밖에서 모니터를 통해 봤 다”며 한번 만나자고 얘기했다.못 만날 이유가 없던 나는 그러자고 순순히 대답했다.며칠 뒤 영범 형은 나를 만나더니 대뜸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 ”고 제안해 왔다.

조금 당황스러웠다.‘내가 뭐 좋다고 이런 얘기를 하지?’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형의 얼굴을 보니 왠지 믿음이 갔다.다른 매니저들보다 조금 젊어서 그랬을까….호감을 느낀 나는 “신중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얼마 후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형은 내게 “지금부터 무조건 나를 믿고 따라오라”고 당부했다.나도 영범 형에게 “다른 건 모르겠는데요,저는 하기 싫은 것은 때려죽여도 안해요”라고 말했다.이 얘기를 들은 형은 마치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씩 웃기만 했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 5년여 동안 나와 영범 형은 잘 지내오고 있다.물론 가 끔씩 내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릴 때마다 형이 “어휴,이 꼴통 XX야”라며 한 숨을 내쉬기는 하지만 말이다.

(정)영범 형의 매니지먼트사에 들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다.김도진이란 본명이 그리 촌스럽지는 않으나 좀더 강한 인상을 주려 면 예명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원빈이란 이름을 택했다.

처음에는 조선시대 사극에 주로 등장하는 ‘세자빈’과 머리가 나쁜 것을 뜻하는 속어 ‘골이 빈(?)’이 연상돼 조금 어색하기도 했지만 자주 듣다보 니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았다

 

나름대로 혹독한 연기훈련과 캐릭터 구축작업을 거쳐 97년 드디어 공중파 드라마 데뷔작이 결정됐다.당시나 지금이나 대단한 인기를 모으고 있는 김희선 류시원 주연의 K2TV 월화미니시리즈 ‘프로포즈’였다.꼼꼼하기로 소문난 연출자 윤석호 PD(현재 K2TV ‘가을동화’의 연출자)는 본격적인 촬영에 들 어가기 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잠시 후 뭔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 덕였다.

그리고 나서 다음날 촬영장에 가 보니 웬 개 한 마리가 와 있었다.연출진 은 나에게 “그거 비싼 개니 조심해서 잘 다루고 빨리 친해져라”고 말했다. ‘개키우기’라면 마을에서 왕년에 한가락하던 나 아닌가? 비록 족보를 알 수 없는 개들이어서 그렇지….개는 금세 내 말 한마디면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는 충견이 됐다.

그건 그렇고,주인공인 김희선씨 옆집에 사는 미남청년이 바로 내 배역이었 다.대사는 별로 없었지만 개를 데리고 나온 모습이 브라운관에서 제법 그럴 싸하게 비쳤나 보다.내가 봐도 괜찮았으니까. 흐흐흐.

방송이 시작되고 얼마되지 않아 사방에서 조금씩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아! 내가 연예인이 되기는 됐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https://instiz.net/pt/74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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