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지금 네가 잘 했다는 거야?" 지겹도록 들려오는 일명 '다그침' 목소리 톤. '네 자신의 잘못을 알라'는 듯, 너정을 가리키는 건지 마는 건지, 너정에게 반쯤 향한 채로 흔들거리는 손바닥 까지. "내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잘못한 것도 없잖아!" 억울한 마음을 호소해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까와 한결같은 다그침 뿐이야. "그게 왜 잘못한 게 아니야? 그게 어떻게 잘못한 일이 아닌데? 난 네가 그 다니엘인가 뭔가 하는 호주 애랑 단 둘이, 밤늦게까지 놀았다는 게 분명히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넌 아니라고?" 눈썹까지 찌푸리며 고나리질 하는 이 사람이 너정의 부모님인지, 그저 아는 오빠인지 헷갈리기 시작하는 상황이야. 아니, 차라리 부모님이었으면 너정이 다니엘과 놀았다는 것 조차 몰랐을 것이고, 혹여나 알게 되어서 걱정한다 해도 친구일 뿐이라고 대충 웃어넘기며 얼버무릴 수 있었겠지. 하지만 에네스를 상대로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걸 너정, 너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어. 에네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넌 초중고를 졸업한 지식인으로서 충분히 내 말을 알아듣고 너 자신을 뉘우칠 수 있으니 어서 반성의 시간을 가져라' 식이었으니까. 어휴... 우리의 곽막희씨. 앞뒤 꽉막혀가지고. 너정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꼈는지,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얘기해 보자는 에네스의 말에 너정은 꼭 깨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어. "처음엔... 우리 과 친구들과 다같이 어울렸고-" "그래, 그랬지. 그래서." 에네스가 차갑게 너정의 말을 진행시켜. 너정은 그런 에네스의 태도가 속상하지만 일단 이어서 말했어. "친구들이 하나 둘 집에 갔고, 나랑 다니엘 둘이 남게 된 거야. 다니엘이랑 둘이 남으려고 작정하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어쩌다 보니 둘이 남았다니까?" "어허, 아까부터 말이 짧다!" 에네스의 난데없는 호통에 너정은 입을 다물었어. 너정도 너정 나름대로 어젯밤 일에 대한 이유가 있고, 에네스의 태도가 기분 나쁜건 피장파장인데 존댓말까지 꼬박꼬박 써가며 용서를 구하는 식으로 굽히고 들어가기 싫었지. 내가 왜? 난 나대로 즐겁게 놀았을 뿐인데 나 도대체 왜 혼나고 있는 거야? "아니, 정상아. 객관적으로 생각을 해 봐. 즐겁게 술마시고 놀던 두 남녀가, 취기가 가시지도 않은 채, 그렇게 밤 늦게까지 같이 있었다고 생각을 해 보라구. 너, 바로 네 나이 때가 가장 조심해야 할 때인거 잘 알잖아. 어린 마음에 행동만 어른에 맞춰지고, 정말 조심하지 않으면 인생 한방에 훅 가기 십상일 때라고. 넌 몇개월 전 까지만 해도 고등학교 다니던 애야. 기억은 해?" 에네스의 깊은 눈이 너정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어. 에네스의 눈은 절대 흔들리지 않았고, 잔소리만 잔뜩 해대면서도 그 안엔 걱정을 한 아름 안고 있었지. 너정도 에네스가 너정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거 알아. 어제 너무 걱정되서 늦게까지 잠도 못 잤다는 거 다 아는데- "내가 왜 혼나야 해? 정말 아무 일도 없었고, 다니엘이랑 대화 코드가 잘 맞아서 같이 노래방 간 거고-" "노래방을 갔어?!" 에네스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소리를 질렀다. "사방 다 뚫린 술집에서 떠들다가 집에 간게 아니라 둘이 노래방을 갔다고?!" 에네스의 표정은 너정의 그 한 마디에 엄청나게 심각해졌- 아니 화가 나 보였어. "너를 진짜 어떡하면 좋냐. 다 큰 남녀가 오밤중에 술마시고 밀폐된 공간에서 같이 있었다는 게 말이 돼? 발없는 말이 천 리를 가는데, 너 그러고 다닌거 이상하게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아, 그만 좀 해!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물론 너정이 주장하는 말들은 일부를 제외하면 전부 거짓말이었어. 그에 반해 에네스 말은 단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고, 모두 맞는 말이었지. 너정도 거짓이 옳은 말에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 다툼의 탈출구는 보이지 않았어. 사실 너정은 다니엘과의 썸아닌 썸 기류를 탔고, 하마터면 집 앞에서 키스를 할 뻔 했다는 것도. 에네스에겐 모두 비밀로 한 거나 다름없었어. ...그런데 왜? 왜 비밀로 해야 하지? "아무 일도 없긴 뭐가 없어! 남녀 사이에 친구 없고, 그 다니엘인지 뭔지 하는 놈이 조금이라도 나쁜 맘 먹었으면 너 어제 정말 위험했다니까! 왜 내 말을 안들어!" 에네스는 결국 잘못을 뉘우치도록 하는 다그침이 아니라 정말 화를 내기 시작했고 너정은 뭐, 이미 한참 전부터 화가 나 있었지. 에네스가 화를 내자 너정도 이제 참는 구석 하나 없이 바락바락 대들었어. "위험 했든 안했든 에네스가 무슨 상관이야! 내 남자친구도 아니면서!" 바락 소리를 내지르자 에네스의 눈이 커졌어. 아주 잠깐 멈칫한 에네스가 곧 입을 열었지. "무슨 상관이냐니. 당연히 걱정되니까-" "걱정 할 필요가 없는데 하고 있잖아! 내 몸 내가 알아서 간수 할텐데 에네스는-" "여자가 여자 몸을 무슨 수로 간수해!!" 에네스가 화를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를 질러버렸고, 너정은 정말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어. 둘은 그제야 자신들이 카페에 앉아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 크게 혼난 아이처럼 숨이 턱 막힌 너도, 너무 화가 나 씩씩거리는 에네스도 분위기가 싸해진 카페 안에서 잠시 침묵을 지켰고, 먼저 호흡을 가다듬은 에네스가 다시 부드러운 다그침의 톤을 되찾으려 애쓰며 입을 열었어. "남자친구가 아니라고 해서 널 걱정하지 않아야 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 넌 그래서, 내가 너한테 가지는 관심, 너한테 쓰는 신경, 너한테 하는 걱정을 전부 그만두기를 바라는 거야?" "......" 에네스의 말을 들은 너정은 이해하는데 잠시 시간이 걸렸어. 그리고 어느 순간, 어린 마음에 눈물부터 차올랐지. 이게 뭐야. 내가 관심 갖지 말라면 정말 관심 가지지 않겠다는 거야? 내가 신경 끄라면 정말 끄겠단 거야? 정말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 걱정하지 않을 거야? 이게 뭐야. 난 이런걸 바란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정상아." 너정의 눈물을 보고 에네스가 나즈막이 너를 불렀지만 왜 너정의 마음은 점점더 어려지기만 했을까. "나... 어제 다니엘이랑 분위기 좋았어." "...?! 너 정말!" "키스 할 뻔 했어! 포옹도 했고! 헤어질때 다니엘도 나도 아쉬워 했어! 그런데, 그런데 이게 뭐야..." 너정의 터져버린 울음이 카페 안을 가득 채웠어. "내가... 내가 관심 갖지 말라면 안 가질 거야? 신경 끄라면 정말 끌거야? 걱정 하지 말라면... 걱정도 안 할거야?" 정신없이 넘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떼를 쓰듯 겨우겨우 말하는 너정을 보며 에네스는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어. 너정은 이미 엎질러진 물, 말을 이었지. "진짜, 에네스는 그럴 거지. 그럴 거잖아. 괜히 물어봤어. 어차피 그럴 텐데... 에네스 나빠. 내가 누굴 만나고 다니든 무슨 상관이야. 에네스는 그냥 나 같은 거 신경 끄고 살면 되는데... 에네스는, 에네스는 나 같은 거, 나 같은 건-" "너한테 신경 끌 수 있었으면." 에네스가 너정과 눈을 맞춰. "...애초에 여기서 이러고 있지도 않았어." "......." "잘 들어. 나 너랑 나이 차이도 너무 많이 나고, 네가 요즘 애들이랑 자주 어울려 노는 거, 매번 이해 못해줄 수도 있어. 네 또래 여자애들이 또래 남자애들에게 바라는거, 내가 거의 못해 줄 거야. 그렇다고 해서 바라는 걸 미리 말해 달라고 하면 네 입장에서 엎드려 절받기 식일 테니까, 내가 조사도 많이 하고 노력도 많이 할게. 그래도 너한테 많이 부족할 거야. 사람들 많은데서 사랑한다고 소리지르고 그러는 거, 절대 못해. 기습키스 해야하는 타이밍, 그런 거 몰라. 툭하면 너한테 잔소리하고 다그치고 꾸중하게 될 수도 있고, 넌 나한테 앞뒤 꽉 막혔다고, 난 너한테 좀더 어른스럽게 행동하지 못하냐고 서로 소리지르고 싸울 수도 있어." "에...네스." "그래도... 나랑 사귀어줄래?" *** 선택은 너정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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