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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아"
낭자, 그러다 정말로 혼이 날지도 모릅니다. 궁녀들이 다 듣고 있지 않습니까. 장차 황제가 될 세자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맑았다. 그에 대꾸하는 목소리 또한 다정했다. 혼이 날까 겁이라도 났는지 목소리가 작아졌다. 조그맣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재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예, 듣고 있습니다. 작은 소녀는 재현의 앞으로 달려가 재현의 소매를 잡았다. 재현의 뒤에서 어린 소녀를 저지하려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재현이 소녀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숙였다.
"청 한 가지만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눈치를 살펴 예를 갖추는 목소리에 재현은 또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자신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소녀가 토라질까 그저 웃음이 담긴 눈빛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 청이 무엇인지 저도 한번 들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소녀는 곤란한 듯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다 결국은 재현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 재현은 소녀의 간지러운 목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 제가 낭자의 청을 들어줄 터이니 낭자도 나와 약조를 하나 해주십시오. 아까 그 청을 꼭 지키겠다는 약조를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
소녀는 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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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커서 저와 꼭 혼인하여 주십시오. 세자 저하가 좋습니다. 이게 제 청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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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는 오늘도 나를 보러 오시지 않으시구나."
한숨 쉬듯 내뱉은 목소리가 지쳐있었다. 저 뒤에선 궁녀들이 여/주를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여/주는 후원 안에 있는 호수 앞에 쪼그려 앉아 이리저리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를 바라봤다. 마마 새벽 공기가 찹니다. 그러다 고뿔에 걸리시면 어쩌시려고... 걱정 어린 목소리에 여/주는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기분을 전환하고 싶었기에 궁녀들의 말을 무시했다. 그러다 옆에 있던 꽃을 꺾어 유치한 장난을 쳤다. 정재현이 나를 보러 온다 ..안 온다 ... 온다 ... 안 온다.. 온다 ...
" 거기서 뭐 하십니까"
안 온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여/주는 재현이 저를 보러 왔나 싶었지만 듣고 싶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목소리는 민형이었다. 여/주의 호위무사이지만 그도 재현의 사람이었다. 여/주는 갑자기 솟구치는 서러움에 눈물이 흘렀다. 민형은 당황한 듯 뒷걸음질 쳤다. 여/주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자네도 결국엔 나를 떠나겠지 폐하처럼 말이야. 여/주는 눈물을 닦고선 자신의 침소로 향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여/주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재현의 모습을 민형만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