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소유 X 어반자카파 - 틈
"미치겠네. 그것 때문에 온 거야, 지금?"
*
"...들어와."
"아저씨 제 은인이에요! 저 진짜 밥 안 먹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학교에 매점도 없어?"
"있긴 있는데 돈 아껴야 돼서 자주 가지도 못해요."
하루 사이에 정리도 거의 다 돼서 어제보단 훨씬 낫더라ㅋㅋㅋㅋ 어젠 텅텅 비어서 공허 그 자체였거든...
아저씨는 비몽사몽한 상태로 터덜터덜 걸어가서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꺼내더니 전자렌지에 뭔가를 돌리고 있었음. 난 거실에서 아름이 노는 거나 보고있는데 대놓고 얼굴에 아저씨 딸이라고 써둔 것처럼 얼굴이 닮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옴ㅋㅋㅋㅋㅋ 유전자의 힘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어
"진짜 신기하다. 아름이 그냥 아저씨 얼굴 복붙한 것 같아요."
"어디 데리고 나가면 다 늦둥이 동생이냐고 물어보더라."
"하긴. 누가 아빠로 보겠어요?"
"어제 저녁엔 산책하려고 유모차 끌고 가는데 어떤 할머니가 고등학생이냐고, 동생 놀아주러 나왔냐고 물어보더라니까."
"난 아저씨 처음 보고 스물하나? 스물둘? 이 정도나 되는 줄 알았는데 완전 동안."
"너 지금 아부 떠는 거지. 밥이나 빨리 먹고 가, 나 졸려. 오늘 공강이라 하루종일 잘 거야."
"아닌데? 진짠데?"
아저씨가 내 앞에 상을 턱, 놓고 쇼파에 쓰러지듯 앉더니 바로 눈 감고 팔로 얼굴을 덮는데 정말 내 자신이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음... 역시 전 남한테 민폐만 끼치는 존재였군요.
일 하고 온 사람 이른 아침부터 깨우고 난 뭘 한 거지. 괜히 왔다.
"죄송해요, 제가 진짜 원래 남한테 뭐 잘 안 빌리거든요? 근데 오늘만..."
"와도 돼."
"네?'
"너 나 처음 봤을 때 말했잖아. 부모님 지금 미국 가 계신다고."
"그렇긴 한데, 그게 왜요?"
"그럼 혼자 신경쓸 부분도 여러가지로 많을 거 아니야. 안 그래도 다 짜증나고, 괜히 화나고 그럴 때잖아, 지금 네가. 나도 그랬었거든, 그 때."
"……."
"눈치 안 보고 자주 와도 된다고. 지금처럼 밥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화풀이 하고 싶은 일 있으면 들어줄 수도 있고."
이 때 이유가 뭐였는지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어. 왜 그랬는진 모르겠음. 너무 오랜만에 나를 위해 다정한 말을 건네주는 사람을 만나서 그랬던 건가. 한 마디 말로도 많은 것들을 공감해주는... 그런 기분.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쉽게 따뜻한 말을 들을 순 있겠지만 내 앞의 아저씨가 전해주니까 다른 기분이 들었어. 내 친구들, 준회나 가족들과 같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과는 다른 뭔가가 있었어, 아저씨는. 그 깊은 눈빛에서 오는 위로였을지도 몰라.
묘한, 그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정말 묘한 무언가가 있었어.
"...진짜요?"
"그럼 뻥이겠어?"
"왜 이렇게 잘해주세요, 저한테?"
"그냥,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는데 너 되게 나 고딩 때랑 닮았어."
"어떤 점이요?"
"지금 너처럼 염치도 없었고. 아, 농담이고 그냥 안쓰러워서 그래. 안쓰러워서. 고생 엄청 할 거 아니야."
"농담 아니죠? 상당히 직설적이시네?"
"맞다, 나 어제 너 때문에 길에서 웃겨 죽을 뻔했어. 폐 썩은 사진 못 봤냐 할 때 터지려던 거 참았잖아."
"아... 어제요? 저 진짜 화낸 거 맞는데? 피우지 마요, 골로 가요 그러다. 설마 집에서도 그래요?"
"미쳤다고 그러겠어. 밖에서만 그러지."
"...끊으면 안 돼요?"
"안 그래도 애 때문에 슬슬 끊을 생각 중이야. 가끔 생각날 때만 손 대는 것부터 시작해봐야지."
뭘 하던 그건 다 아저씨 마음이니까 내가 참견할 문제가 아니긴 해도 싫었음...
난 담배 쳐다보기만 해도 싫거든. 구준회가 한참 나쁜 길로 빠졌을 때 옆에서 하루종일 그 냄새만 맡았으니까.
치가 떨려, 치가. 뭐 하러 돈 주고 자기 몸 망가뜨리나 몰라.
"그리고 나한테 계속 잔소리하다 남자친구한테 끌려갔잖아."
"남친이요?"
남친? 내가 남친한테 끌려갔다고? 정말 누구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잠시 어제 기억을 더듬어보기까지 했음.
"아, 구준회요? 그 키 큰? 친구예요 그냥. 옛날부터 친했어요."
"그럼 말고. 이런 말 애들한테 하긴 뭐한데 그런 사이는 보통 친구로만 남기 힘들더라."
"전 그 말 아직도 이해가 안 돼요. 왜 친구가 못 돼요? 아저씨랑 나도 따지면 친구 사이 아닌가?"
"너랑 나는 별개지 별개. 아무튼 순탄히 좋은 친구로만 남기엔 힘들 수도 있어. 네가 그 친구에 대해서 다 아는 게 아니면."
"전 걔에 대한 건 다 아는데요?"
"그래? 그럼 그 친구가 지금 누구 좋아하는지도 알아?"
그러네. 요즘은 서로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얘기를 하도 안 해서 관심조차 없었어. 구준회라면 몰라도 나는 연애쪽으로 꽝이라 그런 얘기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기도 했음. 아예 궁금하지도, 생각나지도 않는 분야였기도 함.
"...그러게요?"
"그럼 너희 진짜 편한 친구 사이 되려면 시간 좀 걸리겠다."
"에이, 어떻게 장담해요."
"너 학교 늦는 거 아니야? 지금 20분인데?"
"언제 벌써 이렇게 됐지? 가야겠다, 잘 먹었어요!"
-
"아... 문학 너무 싫다. 개노잼."
"나도..."
"매번 지가 늦게 들어오면서 우리 보고 진도 늦다 뭐라 하는 것도 짜증남. 지금도 늦잖아."
"맞아. 맨날 우리 탓."
"맞다, 내가 말했나?"
"뭘?"
"나 좋아하는 오빠 생겼다?"
"...오, 누구?"
"오빠 친군데 이번엔 진짜 내 스타일. 넌 누구 좋아하는 사람 없어? 철벽 좀 무너뜨리라고 그렇게나 말해도 못 알아 들어요. 넌 철벽이 너무 높아서 그 안에서 너도 못 나가고 있어."
좋아하는 사람이라... 확실히 나한텐 거리가 먼 단어였어. 그저 잘생긴 사람을 보면 가슴이 조금 뛸 뿐이지, 연애에는 큰 흥미가 없다고 그렇게 말해도 친구들은 나한테 철벽을 무너뜨리라느니 오지랖을 부렸음.
마냥 듣기 싫단 표정을 짓다가, 이 지긋지긋한 입방아를 끊고 싶단 속마음이 나도 모르게 표출됨. 나도 모르게 뜬금없이 어느 누군가가 머릿속을 스쳐서 충격적인 한 마디를 뱉어버렸어.
"있거든, 나도?"
"...진짜?"
"...어?
"ㅇㅇㅇ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고? 공부만 하다 죽을 줄 알았던 ㅇㅇㅇ가? 이게 뭔 일이래?"
"아, 미친. 그니까 이건 실수로 말 한건데..."
"숨길 게 뭐가 있냐? 잘생겼어?"
"제발 내 말 좀..."
"오키, 결정. 나 오늘 그 사람 보러 갈래. 되지?"
하필 이 인간한테 덜미를 잡혔다는 사실에 조금 전 내 자신을 때려 눕히고 싶은 심정이었음; 나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입을 턴 거?
이제 뭐만 하면 썰 좀 풀어달라 매달릴 이수현을 생각하니 눈앞이 뿌얘짐...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어두워서인지 차오르는 내 눈물인지... 머리 위로 물음표가 수백 개씩 떠다니던 도중 알 수 있는 건 딱 하나였어. 나는 좆됐다.
-
내가 돌았지 돌았어...
시덥잖은 얘기 사이에서 하필 머릿속에서 번뜩 지나간 아저씨 생각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있다고 해버렸음 정말 미친 거 아닌지?
그 때 갑자기 왜 아저씨가 생각났는지도 모르겠고... 난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행여 아저씨를 마주치더라도 부디 아저씨 앞에선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닥치고 있기로 약속하고, 보고 싶다 떼써대는 이수현을 대책 없이 우리 집에 데려가려 학교 언덕에서 내려오는 길이었음
"어? 저거 준회 아니야?"
"어디에?"
"저기 학교 밑에 있는 사람! 맞네 맞아, 준회야!"
미친 듯이 구준회를 부르면서 언덕을 순식간에 내려가는 이수현 뒷모습은 뒤에서 보니 가관이었음ㅋㅋㅋㅋㅋㅋㅋㅋ
수현이도 구준회랑 대충 아는 사이임. 물론 알게 된 경로는 나였고, 우리 둘이 놀다 오며가며 몇 번 준회랑 마주친 걸로 시작해서 이젠 서로 말도 텄을 정도.
나도 어기적어기적 내려와서 준회 알아보고 손 흔들었더니 저 멀리서 구준회도 아는 체를 해왔음. 그런데 저 자식이 우리 학교는 왜 온 거래.
"이제 끝났어? 늦게도 끝나네."
"맨날 이렇지 뭐. 그런데 왜 왔어?"
"뭐냐. 그 말투는 지금 내가 와서 싫다는 거?"
"아, 왜 또 얘기가 거기로 흐르는데."
"별건 아니고. 너 어제 나한테 지갑 놓고 간 거 알긴 알았냐?"
"헐, 진짜? 나 왜 지금 알았지?"
"이왕 온 김에 밥 같이 먹고 갈까?"
"그럴까?!"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마련해준 구준회가 갑자기 너무 예뻤음ㅋㅋㅋㅋㅋㅋ 내가 열띤 반응을 하니까 준회도 얼떨떨한 얼굴을 함... 하긴 나였어도...
이 틈을 타서 수현이한테 다음에 소개해 주겠다는 말로 벗어나려고 했는데.
"안 돼, 지금 우리 바빠. 얘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길래 누군지 보러 가려고."
? 저기요.
"뭔 개소리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