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5일.
남태현이 우리 집에서 깽판을 치고 간 지 4일 가량 흘렀다. 나와 남태현이 출연하지 않는 씬 촬영 덕에 그 동안 서울에 잠시 올라가 친구도 만나며 그렇게 쉬었다. 남태현한테도 연락을 하고 한 번쯤 사석에서 만나고 싶었지만 공식 스케줄이 있거나 정말 중요하게 물어볼 게 아니면 서로 연락하고 얼굴 볼 그럴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4일 만에 보는 남태현의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연예가중계 김진우입니다-! 오늘은 충무로의 뜨는 신인스타! 강승윤 씨하고 남태현 씨가 함께 해주셨습니다!와아- 밖에 벌써 유리창에 붙어있는 팬 분들이 많아요. 승윤씨랑 태현 씨 모두 팬 분들, 그리고 시청자 분들께 인사 좀 해주세요-!”
눈이 동그랗고 사슴 같이 생긴 이 김진우라는 사람이 <연예가중계: 강남커플 편> 의 오프닝을 열었다. 나와 남태현은 반갑게 인사했다. 지금부터 두 배우의 화려한 연기가 시작된다. 아니, 한 배우만인가? 아직 남태현이 나를 좋아하는 건지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술주정대로라면은 날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에게 대하는 행동과 태도하며. 사람 마음을 아주 싱숭생숭하게 만들어놓았다.
한창 수다가 불 오르기 시작하고 작가들의 요구들도 많아져 김진우가 급하게 진행을 했다. 급한 진행 덕에 나와 남태현도 괜히 급해져 식은땀이 마구 났다. 매니저가 나에게 손수건을 던져주었고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세상>에 관한 얘기, 자기의 프로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결국 안 나오기를 바랬던 강남커플의 얘기가 나왔다. 대충 전부터 생각해두고 집에서 연습을 해왔었던 터라 멘붕이 온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의외로 남태현은 방송에서 이런 질문을 할 지 몰랐는지 당황한 기색이었다.
“솔직히 강승윤, 남태현. 이렇게 말하면 바로 나오는 말이 강남! 이잖아요. 강남커플에 대해서 한 마디 해주세요.”
“강남 커플에서... 제가 남자입니다.”
남태현이 무슨 말을 꺼낼지 우물쭈물하고 있자, 내가 먼저 능청스럽게 말을 꺼냈다. 김진우가 나의 재치 있는(?) 대답에 마구 웃어댔다. 여자작가들은 내 대답에 어머 어머 거리고 입을 가리며 같이 웃고 있었다. 그러는 반면에 남자 스탭들은 얼굴을 썩히고 있었다. 오직 감독만이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거 원했던 거면서. 아- 승윤 씨-. 위트 있으시네요. 오버스러운 김진우의 멘트가 나갔다. 그렇다면 태현씨는요?
“그래요, 뭐. 제가 와이프 하죠. 제 남편 멋있다고 건드리시면 안됩니다-"
카메라와 김진우, 그리고 나를 번갈아보던 태현이 정말 커플이라도 되는 듯 말했다. 그리고 남태현이 슬그머니 팔짱을 꼈다. 김진우는 우리 팔을 보면서 오오오오오!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왼쪽 팔목 손가락 끝부터 이상한 기분이 올라왔다. 괜히 뻘쭘해지고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오오오-. 승윤 씨! 귀 빨개졌다, 귀 빨개졌어! 으핳핳, 태현 씨, 승윤 씨 귀 보세요, 귀. 어어어, 얼굴도 빨개진다, 핳핳"
정말 귀가 빨개졌나... 괜히 무안해져서 귀를 만지작만지작 거렸다. 남태현이 슬쩍 팔짱을 빼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조신하게 올려놓았다. 밖에서 팬들이 꺅꺅대고 있었다. TV로 이거를 볼 팬들은 난리가 나겠지.. 플투에 이은 현게 커플이라며. 엄마, 미안해. 엄마 아들이 여자들 사이에서 게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어, 정말 미안해.
그리고 이상한 농담들이 왔다갔다하며 김진우가 입을 열었다. 작가가 든 스케치북에는 <빨리 진행-! 게임차례 > 가 적혀있었다. 김진우는 힐끔힐끔 그 스케치북을 보고 뒤에서 이상한 바구니를 들고 있는 스탭을 보더니 얼굴이 장난기로 가득 찼다. 괜히 불안해지는데. 남태현도 나와 같은 기분을 느꼈는지 김진우와 그 바구니를 들고 있는 스탭을 불안하고 보았다. 대충 뭔지 알 것 같은 기분에 김진우에게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냈지만 김진우는 아아아주 상큼하게 무시한 채 멘트가 적혀있는 카드를 보고 진행을 계속했다. 아, 제발...
“그러기 위해 이들의 우정! 아니죠~ 사랑을 확인하기 위한 빼빼로 게임! 물론 상품도 있습니다!”
아... 시발...
“상품은 무려...! 한우세트! 아... 맛있겠네요... 상품을 가져가시는 것은 간단합니다-! 이 빼빼로 게임을 해서 강승윤씨와 남태현씨가 남긴 빼빼로가 1cm 이하면 특 A급 한우세트는 강남 커플의 차지! 그렇지 않으면 PD님들과 제가 함께 오늘 회식 때 먹어버립니다-!”
1cm 정도면 어렵나....?
**
으항항항- 김진우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양 쪽에서 양 끝 빼빼로를 문 남태현과 나의 모습을 보며 아주 입 찢어지게 웃었다. 카메라 한 대가 아예 일어나 우리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고 있었다. 원망스러운 나의 눈빛에 김진우는 움찔하다가도 또 다시 무시하며 호루라기를 불었다. 제한 시간은 30초입니다! 뭔, 제한시간이야.
내가 먼저 한 입 베어 먹었다. 가까워지는 남태현의 얼굴에 그때 그 골목씬이 생각이 났다. 젠장. 하필 이럴 때 자동차 안에서 뽀뽀했던 게 생각이 나냐. 도저히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내가 한 번 크게 물어줬으면 한 번 와줄 법도 한데 남태현은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오- 태현씨는 안 움직이는 건가요?”
“사람이 조금 튕기는 맛이 있어야지요”
남태현이 우물우물 말했다. 오오오- 역시 남태현. 하면서 김진우는 아주 PD 옆에 앉아 우리 둘의 꼬라지(?) 를 보고 있었다. 남태현의 말에 내 한우를 위해 한 입을 물고, 또 한 입을 물었다. 남태현은 눈을 가늘게 떠 나를 보았다. 젠장, 이 망할 호모새끼. 저번에 골목에서도 이 눈빛에 홀릴 것 같았는데. 이제 남은 거리는 대략 8cm 여기서부터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모르겠다. 한우인가, 게이와의 키스인가.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옹
김진우와 여자 스탭들의 엄청난 환호와 함께 나는 한 입을 더 베어먹고 남태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제 두 입술간의 간격은 약 5cm. 잘근잘근 빼빼로를 씹어먹어 갔다. 4cm... 4...
더 이상 고개를 똑바로 했다가는 입술이 닿을 것 같아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비틀었다. 남태현도 나를 따라 반대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머뭇거리는 나의 모습에 남태현의 얼굴이 내 앞으로 쑥 다가왔다. 입술에 뭔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남태현이 떨어지는 빼빼로 조각을 받았다. 아, 입술이 닿았던 것 같은데.
“어어어, 입술 닿았어요! 으하핳ㄱ, 입술 닿았어요!!”
아... 닿았구나... 그래... 이 새끼가 의도한 거구나... 젠장...
남태현이 과자 가루가 묻은 입술을 털었다. 그리고는 자를 들고 길이를 재던 PD에게 다가갔다. 나도 그 옆에 붙어 섰다. 제발 입술 닿은 게 허튼 일이 아니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 옆에서 한우 세트가 아주 반짝반짝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게 웬일이야! 이 길이는 입술이 닿아야만 나올 수 있는 길이!! 0.8cm!! 이야아아, 대애애단하십니다! 역시 강남커플!! 밖에 팬 분들 소리 질러주세요! 0.8cm.”
나는 순간 너무 기뻐 옆에 있던 남태현을 끌어안았다. 남태현은 홍홍홍 웃으며 팔자눈썹을 만들며 나에게 안겼다. 밖에 서 있던 팬들도 막 소리를 질렀다. 한우라니. 밖의 환호 소리와 분위기, 그리고 순간 발동한 비즈니스정신에 남태현에게 볼에 가볍게 뽀뽀를 했다. 카메라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우리를 찍었다. 남태현은 눈이 뗑그래져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씩 웃었다. 근데 신기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결국 강남커플이 한우를 가져가고 말았습니다아- 흑흑. 감독님이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요. 강승윤씨, 남태현씨 한우 맛있게 드시길 바랍니다-! 그나저나 남태현씨가 튕긴다면서 저돌적이신데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근데 그거 아세요? 저 남자가 저를 좋아한대요. 팬들의 망상 속에서? 팬픽에서? 영화에서? 아니, 실제로 좋아한대요. 이게 말이 되는 겁니까? 근데 더 이상한 거는 제가 그런 사람한테 더럽다, 기분 나쁘다라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는 거에요.
“뭐, 다음 영화에서는 이보다 진한데요, 뭘.”
....뭐?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뽀뽀보다 진해? 그러면 뭐... 설마, 에이, 19금 영화 아니라고 들었는데, 설마아.
“뽀뽀보다 진하면...? 흐헣하하핳핳, 뭘까요오-. 이런 말이 나온 김에, 다음 영화 얘기도 할 겸 시청자와 팬분들께 스포 조금 남겨주세요~”
“네, 이번에 저희는 이현웅 감독님과 영화를 찍게 되었는데요. <세상>이 게이인 듯 게이 아닌 게이 같은 강남 커플이었다면 이번 영화는 그냥 게이 강남 커플을 보실 수 있으실 것 같아요. 제가 남자 기생으로 나오고, 여기 계신 승윤씨가 양반댁 도련님으로 나와요. 자세한 내용은 영화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아, 그리고 강남커플 팬분들, 다음 저희 영화에서 키스신도 있을 예정이니 많은 기대 바랍니다”
응...? 키스신...? 가서 시나리오를 좀 읽어야겠다는 간절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음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서 남태현이 말하는 거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일지 몰라도 속은 정말 다음 영화 생각에 타 들어갔다. 분명히 매니저 말로는 간단한 사극 호모코드라 그랬는데 남자 기생과 양반댁 도련님의 키스신이라니. 이건 좀 아닌데, 망했다. 나는 우선 이 프로그램을 마쳐야 했기에 식상한 멘트를 남기고 인사를 했다.
“저와 여기 남태현씨의 데뷔작! <세상> 많이 사랑해주시고 저희 강남 커플도 많이 사랑해주시고 앞으로 열심히 관심 가져주시고 다음 영화도 많은 기대와 사랑 부탁 드리겠습니다.”
김진우의 엔딩멘트가 나오고, 슬레이트를 쳤다. 하, 긴장감이 모두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다. 김진우와 스탭들은 수고했다며 천천히 정리를 했다. 남태현은 앞에 놓여있던 한우세트를 나에게 건네주더니 수고하셨습니다를 계속해서 말하며 녹화가 끝나자마자 나에게 눈길 하나도 주지 않고 쌩 하고 나가버렸다. 대체 인격이 몇 개나 있는 거야. 알 수 없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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