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멍해져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강의실로 찾아갔어.
현실에도 정국 전하가……. 아니 정국이라고 해야 하나.
그토록 내가 보고 싶어 했던 그 사람이,
눈앞에 있었는데.
목에 둘둘 감은 목도리를 코까지 끌어올리고 자리에 기대앉았어.
아 우울하다.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다. 답답해.
반응 보니 나한테 관심 하나 안 던져 줄 것 같고.
무엇보다 확실한 건 조선 시대의 그 정국과 내가 마주했던 그 정국의 성격이 매우 다르다는 것.
물론 사람을 첫 만남으로만 판단하면 안 되지마는.
책도 표지만 보고 판단하지 말란 말이 있잖아.
그럼 뭐해 현실판 정국 전하는 펼쳐 보지 못하는 책인걸.
의자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간 몸을 다시 일으켜서 바로 앉으며 앞을 봤어.
다행히 교수님은 아직 안 들어오신 모양이더라.
거짓말쟁이. 백 년이든 이백 년이든 꼭 찾아와서 기억해준다며.
불퉁 튀어나오는 입에 속상한 마음만 가득했어.
코스닥 지수처럼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 다시 바닥으로 추락할 때,
옆에 있던 사람이 내 팔을 한번 쿡 찌르더라.
누구야, 하고 돌아봤는데.
"너, 아까 걔지."
"어?"
"내 친구 좋아해?"
얜 말이 뭐가 이렇게 두서가 없어.
노란 머리 남자애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더라.
지도 사람 뚫어지라 쳐다보면서. 그럼 너도 나 좋아하는거니.
그나저나 눈 되게 크다. 머리는 왜 저렇게 노래.
친화력도 장난 없는 것 같고. 무슨 말을 필터링 없이.
"전정국 걔, 좋아하는 사람 있어."
어쩌라고…….
네가 불러서 일단 돌아보긴 했다만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라는 내 심정을 담아서 쳐다보는데도 노란 머리 애는 관심도 없어 보였어.
저런 마이웨이, 개인플레이 대단한 놈을 봤나.
혼자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나를 쳐다보더라.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다시 앞을 쳐다보는데 다급하게 팔을 툭툭 치고,
자리 앉을 때 한번 둘러보고 앉을 걸.
"그래도 정 좋다는데 어쩌겠어."
"뭐라는 거야……."
"소개해줄까?"
물론 성공은 장담 못 하지만. 밥 한번 같이 먹고, 야 그러면 되겠다.
너도 좋고 나도 사랑의 징검다리 한번 놓아보고. 캬, 완전 일거양득이구만.
무슨 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하면서도 내 눈은 커졌어. 사실 이건 기회니까. 나이스.
혹시나 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정국 전하의 모습은 안 보였어.
휴 하마터면 처음 보는 척 코스프레 해제할 뻔.
"그 정국 전…… 아니, 전정국. 걔는 어딨어?"
아. 안타까운 표정을 잠시 지은 노란 머리가 대답했어.
방금 뭔가 괴상한 표정이 지나친 것 같은데.
"걔 수강신청 잘못해서 지금 자기개발과 대인관계 듣고 있을걸."
근데 걔는 그거 좀 들어야 해. 시크해서 대인관계가 안 좋아. 친구가 나뿐이거든.
노란 머리가 배를 부여잡고 웃었어.
어떻게, 수강신청을, 잘못,
말도 똑바로 못하는 걸 보니 둘이 많이 친한 사이인 게 딱 느껴지더라.
아니고서야 저렇게 비웃기도 쉽지가 않은데.
그런 식으로 계속 얘기하다가, 교수님이 들어오시고 나서도 우리는 계속 이야기꽃을 피웠어.
노란 머리 아이 이름은 김태형이라더라.
그 큰 눈은 기억에 제대로 입력될 것 같긴 해. 워낙 커서.
수업이 끝나고 우린 누구보다도 친한 사이가 돼서 강의실을 나왔어.
물론 첫날부터 얻어가는 것 없이 떠들다가 온 거지만 뭐.
수업이 끝나고 나오니까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 정국 전하가 보였어.
아 이제 전하라고 안 칭해도 되려나.
태형이와 나란히 걸어오는 나를 쳐다본 정국이 다시 태형을 쳐다보며 물어보더라.
"뭐야?"
어 어쩌다가. 야 근데 얘가 너 좋,
그리고 난 어색하게 웃으면서 김태형 정강이를 걷어찼어.
아프다고 방방 뛰면서 김태형이 잠깐 저편으로 멀어졌는데, 나를 한번 훑어보던 정국이 시선을 내리더라고.
뭔가 한참 쳐다보는 것 같길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내 손가락이었어.
꿈이 아님을 증명하는 유일한 물건.
정국 전하께서 주셨던 그 반지.
맞나, 싶어서 어색하게 웃으며 오른손으로 반지가 끼워진 왼손을 가리니까 다시 나를 보더라.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마셨어.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스멀스멀 올라왔지.
"너, 그 반지."
그 반지. 내 반지가 왜.
기억해봐 얼른. 네가 직접 끼워준 거잖아.
그 후로 절대 뺀 적이 없단 말이야.
잘 때도, 씻을 때도 항상 끼고 살았어.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 사이에 태형이 오두방정을 떨다가 다시 돌아왔어.
아무 말 없이 있는 우리 둘을 보고 또 웃으며 분위기를 깼지만.
배고프다며 밥 먹으러 가자는 태형의 말에 결국 대답은 못 들었네.
괜히 속상해서 천천히 둘의 뒤를 따라가는데,
정국이 나를 휙 돌아봤어.
"네 반지,"
알았으니까 기억난다고 해. 못 알아봐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란 말이야.
꿈이 아니었고, 앞으로 내가 마음고생 할 필요도 없을 거라고.
이 반지가 그냥 내가 잊고 살다가 찾은 그런 게 아니라고 얼른 대답해 봐.
"……그거,"
"……."
"특이하게 생겼네."
잠시 나와 눈을 마주치던 정국이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어.
니가 전기밥솥 쿠쿠냐 뜸들이게…….
아 속상해.
결국, 내 기대는 어디서건 똑같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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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암호닉은 똥 글씨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