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은 흉흉하다. 그건 지금 내 상황만 봐도 알 수 있다.
나는 지끈거려오는 머리 위로 식은땀이 한가득한 손을 얹었다. 이마보다 차가운 손 온도에 두통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기도 한데. 여기엔 오로지 나와 저 정체불명의 남정네 두 명 뿐이다. 나는 일단 침묵을 지켰다. 괜히 상대방을 자극했다간, 여차하면 골로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자꾸만 바짝 말라가는 입술을 침으로 적셔가며 쏟아지는 질문을 참아냈다. 미칠 듯한 침묵 속에서, 남자가 물 마시는 소리만 크게 울렸다. 저거 내가 노래방 가서 마시고 남은 물인데.
내가 입을 대고 마셨던 물통 입구에 제 입을 잘만 대곤 벌컥벌컥 물이 마시는 꼴이 참 안쓰럽게 느껴졌다. 괴한이고 나발이고 이젠 통 감도 못 잡겠다. 사막에서 살다 오셨나 물을 뭐 저렇게 쉬질 않고 마셔. 진정 되었던 머리가 다시 지끈거려오는 것 같았다. 협박이라도 좋으니, 뭔 말이라도 하면 반응을 보여줄 텐데. 주구장창 물만 마시고 계시니 대답도 못 하겠고. 아직 도발하기엔 내가 깡이 부족했다. 식칼을 들고 올까 고민했지만, 안타깝게도 부엌 쪽에 서 있는건 내가 아니라 저 남정네였다.
그러고 보니 인상착의도 심상찮다. 상투를 틀어올린 머리에 현대 사회에서 보기 힘든 갓을 얹고, 화려하다 못해 눈이 아플 지경인 새빨간 레드, 빨간 도포까지 장착. 여기 근처에서 사극을 찍는다는 소식은 못 들은 것 같은데. 엑스트라로 뛰다가 지쳐서 도망 나왔나. 혹시 이 분이 그 유명한 최저 시급도 못 받고 일한다는 이 나라의 불쌍한 알바생? 생각해봤지만 내가 알바를 많이 해봐서 아는데, 방청이나 엑스트라 시급은 꽤 쳐준다. 그럼 도망은 아닐 거고. 길을 잘못 들었나. 아무래도 후자는 조금 억지인 듯하다. 누그러진 위협감에 나도 모르게 팔짱을 꼈다가 얼른 풀었다. 건방져 보이면 어쩔까 했기 때문에. 그래도 아직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저기……."
사람이 부르면 좀 쳐다봐 이 새끼야. 대놓고 말은 못하고 속으로만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상상해냈다. 아무리 빡이 돌아도 나는 청순가련한 천생 여자가 아니던가. 하지만 저 괴한 안중에는 내가 없나 보다. 그래, 친구들도 나를 개밥으로 아는데 처음 보는 당신이라고 뭐가 다르겠습니까. 예. 정신 놓고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랬다간 내 호신용으로 쓰였을지도 모를 식칼이 내 복부에 머리를 들이민다 해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럼 난 비명도 못 지르고 그 자리에서 과다 출혈로 죽는 걸까. 차라리 쇼크로 죽으면 조금 더 빨리 죽어서 고통을 못 느끼겠지. 난 의대생이 아니므로 정확한 건 모른다. 아무튼, 고통 속에서 발버둥 치며 죽어가는 내 모습을 내려다보며 씩 웃을 괴한의 모습을 상상하니 몸에 절로 오한이 들었다. 아, 소름이 돋는다는 게 바로 이거구나.
오백 미리 물병을 한참에 걸쳐 깔끔하게 비워낸 남정네가 드디어 내 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손을 이마에 짚은 자세 그대로 방문에 기대서 그를 쳐다보았다. 버르장이고 나발이고 이젠 체념이다. 죽일 거면 죽이세요. 이미 지금 이 미칠 듯한 정적에 제 멘탈은 아작난지 오래거든요. 심리적으로 압박당하는 것도 오늘에서야 제대로 경험해봤다. 차라리 서비스직 알바하면서 호들갑으론 세계 최고를 먹는 아줌마들께 시원하게 한 소리 듣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괴로운 느낌이었다.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진 않네.
괴한, 그러니까 남자는 잠시 나를 위아래로 관찰하더니, 제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덕분에 남자의 손에서 자유낙하 운동을 하게 된 내 물통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아주 조금 남아있던 물이 방울져서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아이고 두야. 골이 울린다. 왠지 집안에 괴한이 아니라 저 지방 어딘가에 사는 마의 7세 사촌 동생을 초대한 듯한 좋지 않은 느낌이 온몸을 전율시켰다. 그리고 꼭 이런 건 틀리 지가 않던데.
"망측하다, 망측해. 어디 성숙한 아낙네가 몸을 다 내놓고 다리속곳만 입은 것이냐."
뭐라는 거야. 부끄럽다는 듯 얼굴 다 가려놓곤 눈은 똑바로 뜬 채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이니, 보이는 건 내 잠옷 차림이었다. 짧은 트레이닝 바지에 헐렁한 반소매 티. 그나저나 다리속곳이 뭐였지. 속옷이랑 어감이 비슷한데 맞나. 고민하느라 바닥만 내려다보던 내가 고개를 들자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동그랗게 떠진 눈, 정확하게는 동공이 미친 듯이 지진현상을 보이는 게 훤히 보였다. 아니 남의 집에 들어왔으면 용건을 말하던가, 뭐를 훔쳐가기를 하던가.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짓만 하는 괴한의 모습에 내 속에서 억눌러져 있던 깡이 빠락빠락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얼른 저 귀찮은 새끼를 치워버리라고.
아이고, 비속어 안 쓰기로 했는데. 움찔거리는 입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찰싹 치곤 한숨을 쉬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망측하단 말을 늘어놓는 괴한. 아무래도 뉴스에서 신 나게 떠들어대는 연쇄 살인범이니, 전자발찌를 차고 용감하게 도망친 성폭행범이라든지 그런 과는 아닌 듯했다. 다른 면으로 끔찍한 것 같긴 하다만. 집에서 내보내면 그만일 테니까. 근데, 말투는 왜 또 저래. 도포 입었다고 지가 무슨 조선 시대 사람인 줄 아나 봐.
"저기요, 이거 속옷 아닌데."
"어허, 어디서 말을 낮추느냐."
"속옷 아닙니다."
"감히 내 앞에서 네가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게야!"
이런 씨발, 어쩌라는 거야! 지금 누가 신고를 하고 당하는지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지 되려 나에게 소리를 지르는 괴한의 떳떳한 행동에 띵하고 머리가 울려오는 듯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지금 누가 누구보고……. 완벽하게 왕의 모습에 빙의된 듯한 괴한, 아니 저 또라이 새끼의 상황극에 그나마 남아있던 어이마저 하늘 위로 증발해버렸다. 살면서 이런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거지. 경찰에 신고할까. 하지만 지금 내 상태에서 사이렌 소리까지 들으면 스트레스로 인해 그대로 뒤로 넘어가 영원한 잠에 빠져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잠자는 숲 속의 공주도 아니고, 키스로는 깨어나지 않겠지.
상대하기를 포기하고 들숨 날숨을 반복하며 평정심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내 모습을 또라이께서 이번엔 관찰이 아니라 구경을 하더니, 방정맞은 입을 다시 열었다.
"여기가 어디며, 연도는 어떻게 되느냐."
"2014년, 서울인데요."
너의 병신 미에 박수를 쳐 드립니다. 짝짝. 평정심을 찾으려던 나의 노력은 인어공주의 물거품처럼 허공으로 흩어져 나갔다. 진짜 정신이 나갔나. 외모는 멀쩡하게 생겨서 왜 저런대. 사실 멀쩡한 정도도 아니었다. 굉장히 잘생겼는데 어디선가 분내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손목이 무거워지는 쇠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내가 칭찬을 하건 욕을 하건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서 고개를 끄덕이고 계시는 또라이께서는 다시 입을 여셨다.
"나는, 조선 시대에서 왔노라."
아이고 저런, 세상에. 자신을 병신으로 의심하고 있는 내 생각에 보탬이 되줄려는 모양인지 나는 조선 시대에서 왔노라, 드립을 시전하시며 진지한 표정을 짓는 남자에게 나는 현실 박수를 쳐주었다. 와, 그것 참 놀라운 얘기네요. 차라리 내가 전지현이라고 하는 게 더 현실감 있지 않을까요. 평양에서 내려온 것도 아니고 조선 시대라니. 피실 터지는 웃음에 다시 호통이 내려앉았다. 내 집에서 마음대로 웃지도 못하는구만.
"조선 시대에서 오셨다고요."
"그러하다."
그러구나. 근데 그 소매에 묵직하게 들어가 있는 그건 뭐세요. 내가 가리키자 씩 웃으며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꺼내 보이는데, 네모의 각진 저건 책이 아니었던가. 네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과인이 이것을 다 정독했느니라. 하는데, 제목을 확인한 나는 굳어가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사경은 둘째치고 아니 읽어도 무슨 팬 북을. 저거 수위 있는 걸로 기억하는데. 벌어진 내 입을 손수 닫아주며, 남자는 신 나서 다시 떠들기 바빴다.
과인은 조선 시대에서 왔지만, 어인 일로 오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확실한 것은 과인이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고, 여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네가 나를 모셔야 함이니라. 이것은 하늘의 뜻이므로, 네 마음대로 거스를 수가 없다. 그나저나 너는 딱 보아하니 천민이 맞거늘, 어디서 하늘과 같은 나에게 그 주둥아리를 놀리며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게냐. 예를 지키거라. 너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가르쳐야 하는 것이 많은 아이로구나. 근데, 여긴 참 망측한 것들이 많구나. 너의 차림새도 그러하고, 이 외설도 그러하고.
손이 다시 이마로 향했다. 아, 하늘의 뜻이요. 하나님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시련을. 교회 안 나가서 그런가. 앞으로 자주 출석할 테니까 얘 좀 다시 거둬가시면 안 될까요. 진짜 또라이 아니야 이거 완전. 자기만의 세계에 푹 빠져있는데 나보고 뭘 어쩌라고. 나보고 천민이, 어쩌고 저째? 화도 나지만 당황스럽다. 내가 제 말을 다 씹어먹고 있는 건 아는지 아직도 책을 들고 혼자 신 나서 연설을 하는 놈의 모습을 보니 앞길이 캄캄했다. 너를 내가 왜 모셔요. 잠깐만 일단 진정하자, 저 말을 정리하자면 지금 갈 곳 없으니 우리 집에서 지내겠다는 소리인데. 내가 시중도 들고, 제 정신세계에 맞춰서 배우기도 해라 이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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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르장이니 뭐니 운운하며 왕 행세를 하는 괴한을 소리를 질러 제압하고, 식탁에 마주 앉아 잠시 고민을 해봤다. 평정심을 찾으니 신기하게도 이젠 내 머릿속에 흥미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다시 마주친 시선 속엔 순수함과 깨끗함이 가득하였다. 왕이고 나발이고,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소리가 있는데 쉽게 네 마음 대론 안 되지. 저 말이 사실이건 잘또이건 어차피 내 비위 안 맞추면 제 발로 기어 나갈 테니 안 나간다면 차라리 재미를 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뭐, 나도 또라이인건 인정하니까. 아무튼, 여기는 확실한 현실의 우리 집이고, 여기선 내가 집주인이니 왕인 셈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권력 남용 좀 해볼까.
그 와중에 또 눈치는 빠른지, 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흠칫 놀라는 괴한. 아니지, 이제 괴한이라고 부르면 안 되나. 이름이 뭐야. 아까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던 내 모습에 충격을 받긴 했는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전정국, 한다. 그래도 팬픽이나마 읽은 게 조금 도움이 됐는지 말은 통하네. 근데 얜 왜 또 우리 방탄소년단 막내 이름이랑 똑같아. 생긴 것도 비슷해가지곤. 대리만족이라도 해야 하나. 뭐 좋아, 이름이 똑같으니까 여태껏 있었던 일은 내가 너그럽게 용서한다.
"정국이?"
"그러하다."
빌어먹을 말투. 고치라고 강요할까 싶다가도, 언제 또 내 귀로 직접 조선 시대 말투 들어볼까 해서 그냥 내버려두기로 마음먹었다. 사투리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분내가 나니까 너는 나랑 동갑이야. 열여덟 동갑이라고. 그냥 나이 다르면 불편하니까 그렇게 정하자. 오빠라고 부르기엔 죄책감 들기도 했고, 무엇보다 조선 시대 사람이라면 나이가 그렇게 많을 것 같지도 않을 거란 내 판단하에 정해진 강제 나이었다.
집에 혼자 있기도 적적했는데 귀찮게만 안 굴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집안일 귀찮으니까 얘한테 좀 떠넘겨볼까. 그래도 온 지 하루도 안됐을 테니까 벌써 인생의 쓴맛을 맛보게 하지는 말아야겠다. 이 와중에 너무도 착한 내가 기특했다. 우리 집에 떨어져서 망정이지, 너 남의 집 갔으면 벌써 신고 먹고 경찰서에서 질질 짜고 있었어 인마. 거기 가서 드립치면 바로 유치장 행이었을 걸. 알게 모르게 혀를 차는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정국에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날 밝으면, 머리부터 어떻게 좀 하자."
"……?"
"그 상투부터 싹둑, 잘라버리자구요."
자신의 갓을 두 손으로 잡고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도리질하는 걸 보아하니 일이 그렇게 마냥 수월하게 풀릴 것 같지는 않다. 이 애늙은이를 어떻게 적응시켜야 한담. 한편으로는 대리만족을 위해 내가 좋아하는 아이도루 모습으로 복제시키고 싶었지만 참았다. 오해받았다간 괜히 스포트라이트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매스컴 타면 안 되는 귀한 몸이에요. 보단 사실 부끄러워서지만. 뭐, 이런 식으로 벌어지지도 않을 일에 김칫국을 드링킹하면서 슬슬 날이 밝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휴대폰 속 초록 창에 적어 내려가는 검색어만 정국이 옆에서 빤히 내려다봤다. 앞으로 어쩌면 좋을까.
[조선시대에서 현실로 타임워프한 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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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부터 예고했던 조선 시대물 예고편입니다 =)
편의점썰이 끝나면 제대로 시작할거니 기대해주세요!
예고편이라서 양도 별로 안 되는데 세시간이나 걸리네요. 망할.
이젠 썰 말투말고 제대로 글 한번 써볼 예정입니다.
잘 되면 책자로 제작해볼까 고민 중이기도 하구요.
예전부터 제가 쓴 글로 팬 북 하나 만드는 게 소원이었거든요!
가격은 싸게싸게 가야겠죠. 예.
암호닉은 1편부터 받습니다.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네요, 너무 어려운 주제를 정해써 8ㅅ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