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김진아는 병원에 실려갔다. 그날 밤 나를 보고 바닥에 주저앉은 김진아가 그 다음날 복통을 호소하며 구급차에 실려갔다. 이런 일이 생기면 내가 마냥 기뻐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위층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나서 놀라 올라가 보니 배를 잡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김진아가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아이를 지키려는 김진아는 배를 부여잡고선 겨우겨우 전화를 향해 달려갔다. 김진아가 먼저 전화를 걸기 전 나도 모르게 핸드폰으로 119에 신고를 하려 전화를 하고 있었다. 부랴부랴 집 주소를 말하고 김진아를 안아들었다. 송민호에게도 연락을 했어야했지만 정신이 정신인 지라 송민호고 뭐고 머리가 백지가 된 상태였다.
김진아는 내가 안아들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모르지만 내 팔을 세게 부여잡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그 순간에 김진아의 몸을 보았는데 그때는 별로 상관하지는 않았지만 다행히도 피가 안 나고 있었다. 아이를 죽이려 한건 나인데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거에 다행이라고 안심했다고 생각한 걸 보니 나도 정말 못돼먹은 사람은 아니구나... 싶었다.
문을 열고 나갔는데 정말 넓디 넓은 정원이 보였다. 구급차가 과연 빠른 시간 내에, 김진아가 어떻게 되기 전에 이 곳의 정원을 뚫고 올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렸다. 나는 바로 앞에 있는 검정색 세단의 문을 열고 김진아를 뒷자석에 실었다. 김진아는 그대로 의자 위로 엎어져서 아프다며 엉엉 울었다. 나는 운전석까지 달려가 앉았다.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여러번 왕복했던 그 정원 길을 따라 운전했다.
"아까 이 번호로 119에 신고했던 사람인데, 여기 집이 너무 커서, 어, 음. 어"
"못, 들어오실 거 같아서 니가 데리고 간다고. 안 와도 된다고. 미안하다고."
당황함으로 물들은 내 말에 김진아가 답답했는지 내가 해줘야할 말들을 얘기해주었다. 김진아가 내가 해야할 모든 말을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입에서 말이 잘 나오지를 않았다. 전화를 받고 있던 119 대원도 말 못하고 있는 내가 답답했는지 점점 목소리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 제가, 이. 그. 어, 뭐냐. 이 위급한 분 병원으로 데리고 갈테니 안 오셔도 돼요!"
대충 내 할 말만 하고 끊고 급하게 송민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띠리리- 가 몇 번도 안 가서 송민호가 전화를 받았다. 어, 왜. 다행히 송민호가 낯간지러운 말을 안해서 정말 애매한 상황은 피했다지만 송민호에게 이 말을 해도 될련지를 헷갈렸다. 진아씨 배가 아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간다고. 이 말을 하면 죄책감에 송민호가 나를버리지 않을까 하는 그런 걱정이 머리에 확 들어왔다. 아직은, 그리고 앞으로도 아이에 대한 미안함보다는 송민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너무나도 비교할 수 없이 컸다.
"그... 그게... 지금 진아씨가 배가 너무 아프다고 해가지고, 아, 그. 어. 음. 병원 데리고 가요. 그, 아, 그. 아! 뭐라고 해야돼."
"알았어. 지금 병원으로 갈게."
충분히 목소리는 놀람으로 가득차 있었다. 김진아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겨우 고통을 삼켜내고 있었다. 약빨이 이렇게나 빨리 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날 밤, 김진아가 내가 무얼 하는지 지켜본 건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약빨이 너어무나도 잘 든 거라고 넘기고 있었다.
이미 송민호가 병원에 연락을 해놓았는지 내 차가 병원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한 군데로 몰려 김진아를 병원 침대에 실었다. 김진아의 예쁜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거의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나는 차 좌석에 앉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창문을 두드리며 주차장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주차장에 차를 주차에 놓았다. 모르는 번호로 나에게 병실 호수가 문자로 와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고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12층.
"네, 원장님. 저예요."
"아, 태현 씨... 무슨 일로..."
"약이 생각보다 잘 들었어요. 고맙다는 인사 드리려고."
"예?"
"뭘 그렇게 놀라세요. 약이 너무 잘 들어주었다구요.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양현석이 말 끝을 흐렸다. 뭔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나에게 숨기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아무 버튼이나 눌러서 엘레베이터에서 내렸다. 12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이 사람과의 일은 담판을 내야한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같은 배를 탄 사람인데 나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나는 다시 말했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실은... 그게... 제가 보낸 약이 전혀 자궁과는 관련이 없는 약이에요."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십니까."
"보내주신 이천만원, 원하시면 다시 돌려보내드리겠습니다. 입도 또한 꾹 다물어드리겠습니다. 우선 그 제안에 승낙한 건 사실이었으니까요. 죄송합니다."
"하... 그럼 지금 김진아가 이 병원에 실려온 건 어떻게 설명할까요?"
"그건 저도 잘."
그때 영화처럼 나와 송민호의 정사를 지켜보고 있던 김진아의 모습이 팍! 하고 떠올랐다. 그리고 입을 막은 채로 주저앉은 모습, 그리고 아프다며 배를 잡고 엉엉 울던 모습까지. 나는 이상한 분노에 핸드폰 배터리를 분리했다. 다시 엘레베이터를 타고 12층으로 올라갔다. 한 1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좋은 병원에서 좋은 병실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꽤 경관이 좋았다. 넓은 창문 밖으로 점점 저무는 태양과 노을이 보였다. 괜히 마음이 착잡해졌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지나갔다. 뒤에서 내 어깨를 감싸오는 누군가의 팔에 뒤를 돌아보았다. 착잡함이 보이는 송민호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괜히 송민호에게 미안해져 고개를 다시 돌렸다.
"미안해요."
"뭐가."
"그냥 ... 다..."
아이한테는 미안한데, 김진아한테도 너무너무 미안한데. 그래도 송민호, 너를 놓지 못하겠어서. 송민호에게 절대로 김진아가 어젯밤 우리의 정사를 보았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며 김진아의 손을 잡고 말할 송민호가 머릿속에 떠올라서. 미안하다며 다시 김진아, 정확히는 김진아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용서를 구하며 나를 내칠 송민호의 모습이 보여서. 나는 그냥 꾹 입을 다물었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나는 그 로맨스를 하면서 사람이 하지 말아야할, 해서는 안 될 그런 일들까지도 하고 있었다. 죄책감을 느끼지만 느끼지 못했다.
송민호는 내 어깨를 두어번 토닥였다. 복잡한 마음에 송민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복잡하고 치밀하게 돌아가는 이 계획에서 잠시만, 잠시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다. 그게 평생 내 편일 엄마면 더 좋았겠지만 엄마가 없으니 평생 내 편이었으면 하는 송민호에게 기대었다. 송민호 특유의 향이 나를 그나마 편하게 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김진아가 저렇게 위급한 상황에서도 나를 찾아왔다는 사실이. 아직 나를 내치지는 않는 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미안해요, 도련님."
"뭐가 미안하냐니까."
"... 그냥... 다... 다, 미안하다구요. 다. 전부 다."
"니 잘못 아니야. 하나도 니가 잘못한 거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김진아가 저러고 있는 원래의 근본적인 이유마저도 알고나면 송민호가 나한테 이런 행동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사랑해요? 응, 사랑해. 정말? 응, 정말. 나도 사랑해요. 알아.
김진아의 주치의로 보이는 의사 하나가 송민호를 불렀다. 송민호가 내 팔을 잡고 김진아의 병실로 이끌었다. 그새 수척해진 김진아의 모습을 보며 정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김진아의 눈빛을 보면 그대로 내가 잘못한 모든 것들을 울며불며 말할 것 같아서 그냥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다행히도 의사의 말은 김진아가 괜찮다는 것이었다. 조금만 안정을 취하면 바로 집에 갈 수 있다는 그런 말이었다. 그 상황에서도 어찌나 상황에 대한 머리는 잘 굴러가는지 아직 송민호의 사랑을 완벽히 계산하지도, 느껴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일이 이렇게 진행되면 일이 망한다는 걸 다 계산했던 머리가 대단했다.
나는 방문을 열고 나가려 했지만 김진아의 목소리가 내 발을 붙잡았다.
"태현 씨, 나 할 얘기 있어. 잠시만 기다려줄래? 민호 오빠. 잠깐만, 아주 잠깐만 나가줄래요?"
의사는 이미 방을 나선지 오래. 송민호는 나와 김진아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방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문 앞에서 서있다가 김진아를 보았다. 링거를 꽂은 채로 김진아는 어느새 앉아있었다. 뭐야, 쟤 아픈 거 아니었어? 고급진 병실 안. 아니, 병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고급졌다. 룸이라고 하면 모를까. 깔려있는 카펫을 밟고 김진아에게 다가갔다. 김진아는 표정의 변화도 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 나를 노려보았다. 왠지 눈빛에서부터 나에게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읽을 수 있었다.
방 안에 침묵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이런 어색함은 김진아와 나 사이에서는 거의 처음이었다. 김진아는 한숨을 내뱉더니 하! 하며 허공에다가 작게 소리쳤다. 그리고는 나에게 일갈하는 어조로 물었다.
"니가 어떻게. 내, 내가 정말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이 없네."
"알고는 있었는데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일 줄이야."
"알고 있었다니."
"니가 오빠 사무실에서. 더러워서, 정말."
더럽다니. 아까까지만 해도 폭발해서 넘치려던 동정심과 미안한 마음이 한순간에 분노로 바뀌어버렸다. 뭔데 송민호와 나의 사랑을 모욕해. 니깟게 뭔데 나를 모욕해? 계속해서 김진아가 하는 말을 아무런 대꾸없이 들어주었다. 솔직히 내가 큰 잘못을 한 거는 맞으니까. 한 가정을 파탄으로 이끈 건 나이기도 하니까.
"내가 닐 믿었던 게 잘못이지. 내가 권희영 거치는 거 보면서 무슨 느낌이었어? 웃겼어, 마냥? 내가 우습고 만만했지? 니가 어떻게. 정말. 정말로, 니가 꺼져줬으면 좋겠어. 나랑 민호 오빠 앞에서."
지 분함에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김진아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의자에 털썩 앉고 다리를 꼬았다. 김진아는 빨개진 눈으로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흥, 무서울 줄 알고. 산전수전 파란만장 파라다이스 막장 게이 드라마의 인생을 살고 있던 나였다. 어떤 여자가 와서 노려본들 한 개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나도 김진아의 눈빛에 맞대응을 했다. 뭔데 날 노려봐, 지가 뭔데. 김진아는 흐르는 눈물이 야속했는지 고개를 돌렸다.
"어제 들어서 알잖아."
"뭐?"
김진아가 돌린 고개를 다시 돌려 나를 보았다. 김진아의눈빛이 점점 원망으로 물들어갔다. 자기가 가장 자기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주제에 피해자인 척, 불쌍한 척 다하고 있는게 너무나도 아니꼬웠다. 이제 꺼져줘야할 건 너인데 왜 나보고 꺼져달라는 식으로 말하는 건지.
"나를 사랑한대, 송민호가. 어제는 그냥 사랑한다고만 말했는데. 전에 강승윤이랑 너랑 나랑 송민호랑 식사하러 갔을 때 같이 화장실 갔을 때에 너보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대. 어쩔 거야? 너보다 나를 더 좋아한다는데."
"......"
"설마 니 뱃속에 있는 그 아이에게 모든 걸 거는 건 아니지? 무슨 막장 삼류드라마도 아니고, 찌질하게 부잣집 딸이 그게 뭐야. 아, 물론 송민호가 니 뱃속에 있는 아이를 좋아하긴 하드라. 그래도 나만큼은 아니야. 너도 잘 알거 아니야?"
나쁜 새끼, 개새끼. 임산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그런 말들이 계속해서 나왔다. 나는 묵묵히 김진아가 하는 욕을 다 들어주었다. 그 욕들이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그정도는 내가, 이 게임에서 사실상 '위너' 가 되버린 내가 베풀어야할 아량? 정도로 생각했다.
"잘 생각해. 정말로 꺼져줘야할 사람이 누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