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씬은 안수련의 얼굴이 앳된 아이의 모습이 아닌 성인이 된 안수련으로 변하는 그런 씬이었다. 아주 천천히 남태현의 얼굴이 줌 아웃될 것이라고 했다. 영상 편집은 서서히 두 닮은 얼굴이 섞이고 마침내 남태현의 얼굴만 남을 것이라고. 남태현의 아역과는 이미 안면을 튼 사이가 되어 종종 친하게 말도 하고 지내지만 가끔가다가 깜짝깜짝 놀랄 때도 있다. 너무 남태현을 닮아서. 남태현이 어렸을 때에는 꼭 이렇게 생겼을 것만 같아서. 남태현만의 트레이드마크인 팔자눈썹은 아니어도 그럴 듯하게 처진 눈썹. 눈썹은 내려갔는데 눈은 올라간 그런 이상하고 묘한 그런 얼굴이 너무나도 남태현을 닮았다. 둘이 크면 도플갱어라고 피해다니는 거 아닌가 몰라.
수수했던 차림과 아주 옅은 화장의 안수련 아역과는 다르게 남태현은 얼굴에 짙은 화장을 했다. 얼굴에 하얗게 분칠을 하고 눈두덩이에 검정색 무언가를 발랐다. 볼에 볼터치를 톡톡하고 입술에는 빨간 립스틱을 발랐다. 혼자 입기 불편했는지 남태현은 한복을 입을 때면 여자 스탭들에게 둘려쌓여 있었다. 굳이 부르지 않아도 남태현이 등장하면 재밌는 구경 한 번 한답시고 절반 이상의 여자 스탭들이 자기가 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남태현이 화장을 하거나 한복을 입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남태현이 어제 내 앞에서 입었던 한복을 입고 장신구들도 걸쳤다. 스탭들이 열심히 말아 올린 기생 머리에 흰 매화를 꽂은, 여장을 한, 남태현의 모습은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화초머리를 올린 후, 머리에 쓸 가채를 쓴 모습이 궁금해졌다. 좀 더 풍성한 모습일테니까. 정말 너무 이뻐서 반할 지경이였다. 이상형이 눈 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얼굴부터 찬찬히 훑어보니 정말 내 이상형에 가까웠다. 약간 여우상의 하얀 여자, 평생토록 못 본 처자가 내 앞에 있었다. 아니야, 쟤는 남자야, 남자. 그렇게 생각을 해도 자꾸 눈이 가는 건 사실이였다. 정말로 너무나도 이뻤으니까.
근데 왜 이리 신경쓰이는 건지.
“태현씨, 준비해주세요-!”
네- 하며 남태현이 어색하지 않은지 치맛자락을 잡고 뽈뽈뽈 촬영장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비단 도포를 입고 어슬렁어슬렁 부채질을 하며 정말 선비가 된 마냥 돌아다니다가 대본을 들고 있던 남태현의 옆에 슬쩍 서서는 팔을 둘렀다. 아직 친하지 않은 사이에 어색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뭔가 남태현을 괴롭혀 주고 싶었다. 미운 마음에서 괴롭히는 게 아니고 관심받고 싶은 마음에서 하는 그런 7살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예쁜데 오늘 밤 한 번 같이 놀아볼까?”
7살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수위가 높은 발언이었지만.
남태현은 허허허- 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주변 스탭들도 내 행동이 웃겼는지 연아, 뭐하냐- 어서 양반님에게 앵기거라! 하는 그런 추임새가 나오고 남태현은 허리를 살짝 꼬고 앉아 주먹으로 내 가슴을 퍽퍽 때렸다.
“이러시면 신첩은 부끄럽사와요”
그러고는 내 가슴을 아주 세게 퍽퍽퍽 때렸다. 으억- 졸라게 아프네. 나는 그냥 너무 아파서 남태현을 세게 안았다. 여자 향수도 뿌렸나. 여자 향수 냄새도 나네. 가까이서 본 남태현의 모습은 더 이뻤다. 항상 여자스탭들 사이에 끼어서 있는 남태현인지라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거의 처음이었는데 화장을 해서 그런지 더욱 곱상한 얼굴이 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언젠가 겪었던 첫사랑처럼 말이다.
“승윤씨, 이제 이쁜 마누라 두고 나오시고 촬영 들어갑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일어나서 스태프들 사이로 걸어갔다. 한 남자 엑스트라 배우(조연)가 남태현 옆에 술병과 함께 한쪽 무릎을 위로 굽힌 채 앉았다. 다른 배우들은 -연이의 친구 역으로 나오는 '화홍'이라는 기명을 가진 기생의 역을 맡은 남은상 외 다른 배우들- 각자 여자남자 짝 지어 낮은 식탁을 둘러싸고 앉았다. 카메라가 돌아가기 전인데도 벌써부터 왁자지껄한 기생각의 모습을 나타내려 했다. 대학로에서 나름대로 이름있다는 배우들을 모아놨다더니 벌써부터 연기에 대한 몰입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그 분위기에 신난 감독 옆에 서서 팔짱을 끼고 남태현이 하는 모습을 보았다.
첫 촬영은 남태현의 얼굴을 비추는 것이었다. 카메라를 똑똑히 보고 있는 -노려보는- 남태현의 모습이 비춰졌다. 안수련의 어린시절에서 차차 변하게 할 것이여서 눈, 코, 입의 비율이 맞아야해서 여러 번의 촬영이 이뤄졌다. 동성애를 다루는 약간은 막장? 인 드라마였기 때문에 더 조심히 연출해야 했던 것은 사실이였다. 감독이 연출에 굉장히 병적으로 신경을 썼던 것은 당연한 일이고.
“오케이- 컷! 다음 씬 가겠습니다. 이승현 씨, 좀 더 태현 씨한테 붙어주시고. 에- 태현 씨 메이크업 살짝 고치고 바로 다음 씬 들어갈게요.”
이승현이라는 사람이 거만한 양반다리를 하고 세워진 무릎에 팔을 척 올리고선 남태현에게 가까이 몸을 쭉 뺐다.
이승현하고 남태현은 무슨 장난을 하고 있었던지 메이크업을 고치던 코디마저 웃음이 터졌다. 보나마나 또 예쁘다는 그런 농담이겠지. 이승현이 곱게 전형적인 기생의 모습으로 앉아있던 남태현의 다리를 치마 위로 손가락으로 쭉 훑었다. 입모양을 보니 “처자, 이쁜데?”라고 말하는 듯 했다. 저게 어디서. 선배만 아니였으면.
그리고 남태현이 이승현의 짖궃은 장난에 한 행동은 그를 퍽 밀어버리는 것이였다. 일어나려는 이승현의 배때지를 퍽퍽팍퍽 때리면서 한 글자씩 끊으며 웃어말했다. 그, 러, 시, 면, 부, 끄, 럽, 사, 옵, 니, 다!!!!
내 마누라 잘한다.
“승현 씨, 똑바로 앉으시고. 네에- 촬영 들어갑니다. 큐-!”
카메라가 왁자지껄한 방의 모습을 쭉 담아냈다. 여러 개의 카메라가 동시에 남태현과 이승현을 비추었다. 남태현은 도도하게 앉아서 술만 따를 뿐이였다. 조명이 아주 환하게 그들을 비추었다. 이승현이 남태현의 치마 아래로 천천히 손을 넣으며 대사를 하기 시작했다. 연기인데도 왜 이리 불안한 건지.
“내, 너의 화초머리를 올려주겠다. 어떠하냐.”
“신첩은 술만 따르는 기녀일 뿐이지, 밤을 함께 보내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이승현의 손은 남태현의 치마 안에 들어가 있었다. 이승현은 더 능글거리게 말했다. 저게, 지금, 뭐하는, 짓이야.
“무얼 튕기느냐, 내 너의 화초를 올려준다하면 넙쩍 나의 것을 받아야하거늘. 어찌 그러느냐. 이러다가도 또 좋아할 것, 다아 알고 있다.”
"대감."
"어허어, 이래뵈도 내 별칭이 대물이여."
이승현의 손이 더 깊숙하게 들어갔다. 한 카메라는 아예 그 손이 들어간 치마만을 잡고 있었다. 뭔지 모르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남태현이 부담스러운 듯 이승현의 팔을 멀리 뺐다. 어허! 하며 이승현이 남태현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남은상이 이승현을 말렸다.
“이 아이는 화초를 올리지 않습니다. 자꾸 그러시면 행수 어르신을 부를 것입니다.”
쳇- 이승현이 토라진 듯 반대쪽에 있던 기생을 잡고 먹여주는 전을 받아먹었다. 남태현은 강단있지만 어딘가 아련해보이는 눈빛으로 왁자지껄한 그들을 보았다.
오케이- 컷! 승현 씨 원샷하는 동안 승윤 씨 다음에 들어갈 거니까 준비해주세요-!
나는 분홍색 도포자락을 날리며 기생각의 복도로 들어섰다. 아까 리허설을 했던 것처럼 동선을 확인했다. 카메라가 내 앞으로 다가왔고, 나는 유한 눈빛을 지었다. 감독의 큐- 사인이 들리고 긴 복도를 걸어 오른쪽으로 꺽고선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드르륵 대는 소리와 함께 시끄러웠던 기방 내 소리가 잠시 수그러들었다가 다시 최현을 반기는 소리로 더 시끄러워졌다. 나는 문 앞에 바로 털썩 주저앉았다. 연이가 따르는 술 -처럼 보이는 아침햇살- 을 입에 털어넣었다.
최현은 연이에게 관심이 있는 듯한 눈길을 보낸다. 나는 남태현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흥미롭고 자꾸만 눈이 가고 보고 싶었던 마음은 정말 100% 사실이었으니까. 다시 무관심한 듯 연이가 술을 따르고 최현은 다시 그 술을 받아 마신다.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던 연이가 최현의 얼굴을 보고선 깜짝 놀란다. 그리고 한참동안 남태현이 내 눈을 쳐다보았다.
“어이 그리 놀라시오. 내 얼굴에 마가 끼었나?”
“아니옵니다. 아는 사람과 닮아서 그만...”
너무 이뻤다. 순간 연기고 뭐고 키스신부터 찍자고 할 뻔했다. 남태현을 살짝 흘기고는 고개를 돌렸다. 남태현은 아련한 눈빛을 지었다. 저거다. 강남 팬들이 남태현에 목숨거는 이유. <세상>의 고은은 약했지만 강단있는 그런 아이였다. 남태현이 강하고 세고 섹시한 눈빛을 보내다가도 한순간에 바뀌어 슬픈 표정을 지을 때면 한없이 순하지만 또 그것마저 섹시한 어린 양이 되었다.
상대 배우에 대사에 맞받아치지 못하고 그냥 식탁을 본 채 멍을 때리고 있다가 감독의 호통이 들려왔다.
“컷! 강승윤!! 뭐해!! 정신 안 차릴래?”
“……에-?”
“오메오메, 이것 보소. 태현이한테 반했어? 왜 멍만 때리고 있어! 둘 대사부터 다시 시작할게요-. 준비해주세요. 승윤이 정신 차리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들어와 태현이와 나에게, 그리고 다른 배우들에게 나뉘어 각 맡은 배우의 얼굴을 두들겼다. 특히 남태현한테. 하얀 분 냄새를 풍기며 얼굴을 칠하고 입술을 빨갛게 발랐다. 여자 스탭들은 저들끼리 이쁘다며, 난리가 났다. 감독의 호통에 떠들던 것을 멈추고 세트장을 정리했다.
“원, 투, 고!”
남태현이 강승윤에게. 연이가, 최현에게 술을 따랐다. 최현이 연이의 얼굴을 보고 연이 최현의 얼굴을 확인한 뒤, 연이는 놀란 표정과 떨리는 손으로 술을 따랐다.
“어이 그리 놀라시오. 내 얼굴에 마가 끼었나?”
“아니옵니다. 아는 사람과 닮아서 그만...”
“이보게, 최현-. 연이는 너무 고고하시어 밤을 같이 보내주지 않는다네. 이리 오게, 내 술 함 따라줌세.”
“허- 기생이 밤을 보내주지 않는다라. 신기하군.”
최현은, 나는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는 연이를 한 번 보고 씩 웃고선 이승현의 얼굴을 보며 남태현에게 말했다.
“이리 이쁜 꽃이 어이하여 화초룰 올리지 않는단 말이냐.”
“…….”
“내 오늘은 급한 일이 있어 빨리 가보아야 하네. 아예 안 오기는 나몰래 나를 헐뜯까 두려워 얼굴만 보러 온 것이네.”
최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어- 품에 여자를 안은 이승현이 최현에게 손을 흔들었다. 연이, 남태현도 나를 따라 일어났다.
“앞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연이가 우리 최 도령, 아니 최 서방이 마음에 들었나보구려. 아주 그러다 정분 나 화초까지 올려달라 하겠어, 하하.”
“그런 게 아닙니다… 그저 앞까지 바래다 드리는 것, 그뿐입니다.”
“허어- 차라리 나를 연모하시오. 이리 이쁜 사람이 너무 차갑게 말하면 못 쓰오. 어서 바래다 주시오. 내 급하여 빨리 돌아가보아야하니.”
최현이 연이에게, 강승윤이 남태현의 어깨에 팔을 둘러 품에 쏙 가두었다. 순간 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왜 이러지. 방문을 드르륵 닫고 방에서 같이 나왔다. 최현과 연,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연이는 내 품에 안겨 치맛자락알 살짝 든 채로 꿋꿋히 아래를 내려다보며 걸었고, 최현은 천장을 한 번 보다 연이의 눈치를 보기를 반복하며 밖으로 걸었다. 맞닿아 있는 부분이 몽글몽글하니 간지러웠다. 옛날 말도 못 트던 첫사랑의 손을 스친 그런 기분이랄까. 자꾸만 혼란스러운 마음과 설레임이 동시에 내 마음을 마구 괴롭혔다.
카메라가 우리 앞에서 따르고, 감독의 오케이 사인. 옛날 같으면 바로 몸을 떼 흥, 하고 돌아갔겠지만 왠지 오늘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남태현을 내 품에서 내가기 싫었다. 한참을 팔에 힘을 주어 남태현을 못 나가게 하고 있다고는 꿈에도 모른 채 멍하게 있었을 때, 남태현이 내 팔을 톡톡 쳤다.
“비켜줄래요? 너무 세게 잡고 있어서 팔이 얼얼할 지경인데.”
“아아, 네. 죄송해요.”
“근데 그나저나 승윤씨 나랑 동갑 아니에요? 나 그렇게 알고 있는데?”
그랬나.
“저 빠른 94인데….”
“요즘 누가 빠른도 따져요. 94면 94지, 빠른 94는 또 뭐야.”
이보세요, 저 빠른년생 따져요… 그래도 난 쿨한 남자니까.
“그러면 말 놔요. 오늘부터.”
“그래, 잘 부탁해. 강승윤. 아까 팔은 좀 아프다.”
와아…. 정말 이쁘다. 진짜 이쁘다. 반말하는 남태현의 모습이 섹ㅅ....???? 섹시?? 지금 내가 섹시라고 말하려고 했던 것 맞지? 오. 지저스.
남태현이 한복 치마의 양끝을 살짝 잡아 들어올려 기생각의 입구로 나갔다. 나는 갓을 고쳐쓰고 남태현의 뒤를 따라 쫄쫄 걸어나갔다. 밤이라 그런지 꽤 찬바람이 불었고, 입에서는 입김까지 났다. 손을 막 비비고 있을 때 남태현이 나를 불렀다.
“잡아.”
“어?”
갑자기 얼굴로 날아온 무언가에 본능적으로 잡아보니 흔들어 쓰는 핫팩이였다. 짜식, 감동인데. 아, 쟤 게이잖아. 나 좋아하는...
순간 까먹고 있었다. 쟤는, 나와 같은 거 달린 남태현은 남자인 나를 좋아한다. 그래, 이쁘다고 내가 방심하고 있었네. 그래도 핫팩은 뜨뜨하고 좋구만. 핫팩을 자꾸만 주무르게 되었다. 이 온기가 꼭 남태현의 온기인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랬다.
미리 준비해있던 스탭들과 이동스탭들이 모두 준비가 되었는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감독의 소리침.
“씬 넘버 65, 레디 액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