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틀요괴 22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
"그래! 그 의미."
"사랑...이 사랑이지 뭐...."
"애인으로서?"
동동은 그렇게 말하며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담았다.
그러니까 얘 지금, 김한빈이 애인이냐고 묻고 있는 거다.
김한빈에게 쓴 편지에 장난스레 들어가있는 '사랑' 몇개 때문에.
"애인은 무슨! 그런 사랑이 아니고!"
"그럼 여기 '사랑해줄게'는 뭐야! 둘이 어디까지 갔어?"
"미친.... 너 보틀요괴 아니고 음란요괴지?"
"아 빨리 설명해봐! 둘이 어디까지 갔어? 설마 침대?"
"음란마귀가 잔뜩 씌였어...."
나는 밤을 새워가며 모든 걸 설명했다.
경황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는데 한숨이 약 15번 정도 나왔고
동동을 저격하는 삿대질이 약 8번 정도 사용되었다.
초딩때 웅변학원 이후로 이렇게 열심히 변론해 본 적 없다.
달밤에 이게 뭐하는 짓이야.
"후우- 그리고.... 침대에 같이 올라온 건 너 밖에 없잖아!
이 음란요괴야! 지가 내 침대에 올라와놓고....!
너 밖에 없다고, 이 음란마귀야!"
나중엔 진이 다 빠져버려 힘이 쭉 빠졌다.
내가 왜 동동에게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서러워졌다.
내가 콧물을 닦느라 훌쩍거리며 우는 척을 하자,
동동이 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다가왔다.
동동이 두 손을 꼭 모아잡은 채로 내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을 왜 그리 헤프게 쓰나...?"
"허- 참나."
"미안해, 울지마. 내가 집주인을 너무 사랑해서 오해한 거야."
오호라. 너 잘 걸렸다.
"어떤 의미로 사랑하는데?"
"응...?"
너도 한번 당황타봐라.
나는 동동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
동동은 쭈뼛대다가 내 눈을 힐끔 쳐다봤다.
그러나, 이내 동동의 태도가 담담해졌다.
동동이 딴청을 피우며 내게 말했다.
"음....남자 여자로서?"
"뭐?"
오히려 내가 놀라서 동동에게 되물었다.
동동을 당황케 만들려 했는데 되려 내가 당황스러웠다.
동동은 여전히 날 쳐다보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동동이 말하는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나 너무 작아서 볼폼없지?"
글로만 읽으면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일 수 있겠다.
하지만 위의 말은 어디까지나 동동의 몸집과 키를 말하는 것이니,
음란마귀 독자들은 어서 음란마귀를 쫓아버리자.
"집주인이랑 똑같은 인간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우리 제법 잘 어울리지 않을까?"
형광등 불빛이 깜박거렸다.
형광등 수명이 다한 모양이었다.
나는 깜박거리는 불빛 아래서 동동의 표정을 보려 애썼다.
예전과 같은 사과동동이라면 내 맘이 참 설레겠다.
동동은 뒷짐을 진 채로 몸을 베베 꼬았다.
간헐적인 빛이 비추는 방안에서 동동과 내가 눈이 마주쳤다.
동동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책상 구석으로 도도도- 뛰어가서 쪼그리고 앉아버렸다.
와중에 '히히' 거리는 동동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동동, 고개 들고 나 좀 봐줘."
".........."
"그럼 그냥 듣기만 해.
우린 이대로도 잘 어울려. 그렇지?"
내 말에 동동이 파묻었던 고개를 들고 날 바라봤다.
볼이 발갛다. 하지만 사과동동이라 놀릴 수 없다.
내 볼 또한 사과가 됐을 지 모르는 일이다.
나는 허리를 굽히고 책상 위에 턱을 올렸다.
동동과 눈높이의 차이가 좁아지고 거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그 상태로 잠시 뜸을 들이다가, 동동에게 물었다.
"내가 너무 커서 징그러워?"
나는 그렇게 말하곤 가만히 답을 기다렸다.
깜박거리는 형광등 불빛 아래서,
한발짝 한발짝 빠르게 다가오는 동동이 보였다.
동동은 내 코앞에서 우뚝 멈춰서고는 말했다.
"아니. 뽀뽀할 데가 많아서 좋지."
수명이 다한 형광등이 팟- 나가버렸다.
더이상 켜지지 않는 불빛 아래서 나는 눈을 감았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나는 안다.
내 입술에 무엇이 닿았는지.
우린 그날과는 다른 감정으로, 그날을 재현했다.
*****
"내놔 빨리."
"......."
김한빈이 외투 주머니에서 종이 쪽지를 꺼냈다.
꺼냈으면 썩 줄것이지, 내놓지를 않고 망설이고 있었다.
황금 같은 주말 오전,
나는 잘못 배송된 편지를 돌려받기 위해
김한빈과 놀이터에서 만나자고 제의했다.
김한빈도 흔쾌히 그러자고 답했었다.
헌데 왜 냉큼 주지를 않고 제 손에 쥐고만 있는가.
"편지 빨리 줘!"
"아 잠깐만. 근데 진짜 누구야? 그 사람."
"신경 쓸 거 없고 빨리 내놔. 네 것 아니잖아."
"왜 얘길 안 해주냐. 너무한다."
김한빈은 그렇게 말하면서 편지를 자꾸만 만지작댔다.
아 글쎄 너한테 쓴 편지도 아닌데 왜 미련을 못버리니.
김한빈은 바스락대며 편지를 착착 펼쳤다.
그리고 그 편지의 내용을 차근차근 읽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김한빈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서 편지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김한빈이 재빨리 손을 뒤로 숨겼다.
펼쳐진 편지가 팔랑대며 소리를 냈다.
"아 뭐하자는 거야!!"
"아 줄거라고! 왜 이렇게 재촉해!"
"야! 여기 너한테 썼던 편지!"
나는 외투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김한빈에게 던지듯이 건냈다.
미처 받아내지 못한 김한빈의 팔에 맞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편지 쪼가리가 놀이터의 모래 바닥에 떨어졌다.
근데 김한빈은 그걸 주울 생각도 않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제 것이 아니라는 듯한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네 거 저깄으니까 그건 빨리 내놔! 동동이 꺼란 말야!"
"아이 참나 진짜...!"
나는 김한빈의 팔을 붙잡아 강제로 편지를 낚아채려 했다.
그리고 김한빈은 팔을 높이 쳐들어 하늘을 향했다.
"어...! 안돼!!"
그 순간, 팔랑대는 종이 쪼가리가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향했다.
꽃샘 추위의 찬바람을 타고 올라간 종이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손에 닿을 듯 말 듯 하며 팔락팔락거리더니,
이내 제대로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버렸다.
나와 김한빈은 넋이 나가 하늘만 올려다봤다.
마치 어린 시절 풍선을 바라보듯, 넋이 나가 멍하니.
*****
하얀 빛의 한복 치마가 바람에 펄럭거렸다.
초봄의 꽃샘 추위가 매섭지도 않은지,
나이를 꽤나 먹은 듯 보이는 노파 하나가 바람을 타고 날았다.
하얀 한복의 노파는 어느 집의 파란 지붕 위에 살포시 발을 디뎠다.
그리고 맨 얼굴로 찬 바람을 느끼며 동네를 둘러보고 있던 중,
펄럭거리는 제 하얀 한복과 비슷한 종이 쪼가리를 발견한다.
웬 종이 쪼가리 하나가 상공을 이리저리 날고 있었다.
"음...이게 무엇인고 하니...."
노파는 제 앞 까지 날아온 종이를 손쉽게 낚아챘다.
그리고 꼬깃한 주름이 진 종이를 곧게 펴서 들여다봤다.
종이의 내용을 읽는 노파의 표정이 점점 흥미롭게 변했다.
그것은 한 인간 소녀가 요괴 소년에게 쓴 연서였다.
(연서: 연정을 담은 편지)
"껄껄. 요놈들 봐라? 고새 요런 앙큼한 짓까지 하는가?
헌데 이게 왜 여기에 버려져 있는고? 주인에게 돌아가지 않고. 쯧쯧."
노파는 종이의 내용을 몇 번 더 들여다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노파는 희미하게 웃으며 종이를 착착 반듯이 접었다.
노파는 반듯이 접힌 종이를 한 손에 쥐고 뒷짐을 졌다.
그리고 지붕 위 상공에서 바람을 맞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노파의 눈빛은 꽃샘추위 바람보다도 차가웠다.
"그 인간 소녀아이. 영적 기운이 보통이 아닌지라....
어렸을 적부터 알아봤지. 그래서 내 귀띔을 해주었으련만.
그 아이 영혼을 거두어 내 곁에 두고 일을 시키고 싶었는데만.
동동 아가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껄껄껄."
노파의 늙은 웃음 소리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 사라졌다.
노파는 제 발 아래의 인간 마을을 훑어 살폈다.
그리고 썩 기분 좋게 중얼거렸다.
"뭐, 귀여운 것들이니 봐주도록 할까.
그나저나 이것은 주인에게 갖다줘야 하는데,
어디보자, 동동 아가가 거처하던 집이 어디더라."
노파는 발 아래 인간 마을을 두리번거리며
인간 소녀와 요괴 소년의 집을 찾아 헤맸다.
정확히는, 인간 소녀와 요괴 소년이 있는 방의 창문을.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노파는 이내 어딘가를 발견한 듯 멈췄다.
그리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종이를 날려보냈다.
종이는 바람의 흐름을 거스르며 정확히 한 곳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다다른 종이가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보름에 한 번씩 요괴 세계에 다녀와야 하는 요괴 소년이 있었다.
신발끈을 고쳐 묶으며 나갈 채비를 하고 있던 요괴 소년은
갑자기 날아들어와 떨어진 종이 쪽지를 발견했다.
요괴 소년은 자신의 청자켓을 주워입으려다 말고
창틀에 떨어진 종이 쪽지를 향해 달려갔다.
"어라? 이게 뭘까?"
요괴 소년은 제 몸통만한 종이 쪽지를 안아들고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창 밖 하늘을 바라봤다.
차가운 공기의 하늘에는 흰구름 밖에 없었다.
그리고 요괴 소년은 종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늘에서 온 편지일까?"
요괴 소년은 종이 쪽지를 주섬주섬 펴보았다.
제 몸통만한 걸 펼치느라 조금 힘이 들었지만
서서히 보여지는 편지의 내용에,
"아...."
요괴 소년의 얼굴에는 묘한 함박 웃음이 번졌다.
보름에 한 번씩 요괴 세계에 다녀와야 하는 요괴 소년은
조금 기다렸다가 제 집주인의 얼굴을 보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연정을 품은 인간 소녀를 기다리는 요괴 소년의 얼굴이 행복해보인다.
"동동, 나 왔어...."
이내 인간 소녀가 시무룩한 얼굴로 방에 들어서 외투를 벗었다.
요괴 소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날아올라
소녀의 볼을 붙잡고 제 얼굴을 부벼댔다.
"에? 왜 이래? 갑자기."
"그냥! 너무 좋아서!"
방 안에는 간지러움을 이기지 못한 소녀의 웃음소리와
기쁨에 찬 소년의 웃음소리가 매워졌다.
보틀요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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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매우 치세요!! 결국 실기 끝나고 돌아왔어요!!
주일 안에 완결한다고 입을 나불대질 말았어야 했는데.
엎드려서 곤장 맞아야 될 듯....
꼬박 꼬박 댓글달아주신 분들 너무 감사드리고,
이런 병맛 글에 어떻게 그런 열광적인 댓글을 써주실 수 있는지!!
부끄러운 저는 필력을 길러야 겠어요ㅠ
[암호닉] 뿡뿡이님 보틀동동님 충전기님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조금 텀을 두었다가 시즌 투 연재할거에요!
텍파는 메일링을 통해서 배포합니다.
원하시는 분만 댓글로 알려주세요.
+) 헐 초록글; 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