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2010년 3월 27일
회색 유인물이 교실 바닥을 마구 뒤집었다. 이제 더 줄 생각 없으니까 알아서 해! 라며 유인물을 뿌리고 나간 담임 덕분에 아이들은 초등학생 마냥 비행기를 접어 날려댔다. 항상 학기초면 유인물이 많은데, 이 유인물은 조금 특별했다. 졸업여행. 굵게 써져있는 네 글자가 신기했다. 2학년 초반이지만 벌써부터 졸업을 준비하는 모습에 새삼 와닿았다. 이제 곧 어른인가. 초등학생이나 중학생때는 그렇게 되고 싶었던 어른이 점점 가까워지니 왜 이렇게 되기가 싫은지. 사회생활이라는 일념에 혼자있을 시간도 별로 없을테고, 눈치와 아부를 적절히 섞어서 살아야 할텐데, 그 전에 인간관계가 형성되긴 하려나? 나는 여전히 수업시간에 창밖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바람 한 점 없이, 언제 강해졌는지 운동장을 데우고 있는 햇빛, 또 그 건너편, 교정을 넘어 보이는 가게들은 눈요기를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제 점점 피어나고 있는, 꽃. 만발했을때처럼 화사하진 않지만, 조금씩 보이고 있는 핑크빛들이 즐거운 눈요기를 한층 더해줬다. 딱 나른한 시간.
그렇게, 쉬는 시간이 끝나고 현재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5교시는 꽤나 졸릴 시간이었다. 물론 그에 맞게 대부분의 아이들이 엎드려서는 책상과 조우하고 있었다. 앞에서 마구 떠들어대는 국어 선생은 개의치도 않은 채 다들 국어 교과서를 배게 삼아 신명나게 자고 있었다. 칠판에 하얀 분필로 무언가 글씨가 적히기 시작했다. 또 적어야 겠네, 나는 공책을 펴고 적혀나가는 하얀 글씨들을 그대로 공책에 따라 적었다. 그렇게 필기가 끝나갈 즈음, 수업시간도 막바지를 향해 달려나가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눈치챘는지 몇몇 아이들이 일어나서 나와 같은 행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볼펜 적히는 소리와, 강한 국어선생님의 울림만이 소리쳐지는 그 곳에, 갑자기 의자가 넘어가는 소음과 함께 조금은 애처로운 외침이 퍼졌다.
ㅡ 열으라고!!
다들 고개가 소리의 근원지로 바쁘게 돌아갔고, 나 역시 그랬다. 큼지막한 울림을 만들어내던 국어 선생님도. 모두의 시선을 한 눈에 받은 사람은 다름아닌 남우현이었다. 다들 와하하, 하고 신나게 웃기 바빴다. 뭐라도 꿈을 꾼건가, 남우현의 표정은 그닥 좋아보이지 않았다. 식은땀이 좀 나는거 같기도 하고, 악몽을 꾼건가?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또 남우현과 눈이 마주쳐 아차, 싶어 빨리 고개를 돌렸다. 안 좋은 기색이었는데, 남우현은 대충 내 예상대로 악몽을 꾼 것 같았다. 그냥, 죄송합니다. 하고 민망한 웃음으로 사건이 일단락 되었다. 국어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아주 숙면을 해라, 하며 타박을 내렸고, 조용히 의자끄는 소리를 끝으로 다시 펜과 국어선생님만의 울림이 남았다.
고등학교 2학년이나 되서야 나는 알았다. 나같이 정석대로 사는 애가, 남자를 좋아할 수도 있구나. 그 전에 첫사랑이라던가, 딱히 느껴본 적이 없어서 자세하게 알 수는 없었으나, 확실한 건 나는 그냥 남우현이랑 있으면 기분이 자연스럽게 좋아진다는 것이었다. 사람과 있는 그 시간 자체를 불편해하는 나에게는, 둘이서 같은 공간안에 있는다고 한다면 좋을리가 없었다. 심지어 친 엄마랑도 같은 공간에 둘만 있으면 불편한데, 그렇게 사람과의 사이를 거부하는데도. 딱 하나 남우현과 같이 있는 순간 알수 있는 건, 나는 그냥 남우현이랑 같이 있으면 즐겁다는 사실 하나였다. 그게 정말로 사람들이 정의하는 사랑인지, 아니면 그저 친구로서의 느낌인지, 확실하게 구별할 수는 없었다.
그냥 나는 남우현이랑 같이 있는 그 순간에 쿵쿵, 하고 울려오는 가슴이 좋았다. 그게 끝이였다.
**
길었던 수업시간이 마무리 되었다. 곧 야자를 신청한 아이들이 교실 이동을 위해 가방을 정리하고, 몇몇은 학원으로 가고, 몇몇은 PC방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남자반이다 보니 대부분의 외침이 욕 아니면 음담패설이었다. 나는 또 그 구석에서 조용히 가방을 싸고 학원 가야할 시간을 계산했다. 지금 출발하면 조금 시간이 남겠는데, 호원이네 서점이나 들렸다가 갈까? 가방을 잡고 호원이를 쳐다보니, 아무래도 무리들과 오늘은 야자를 할 것 같았다. 아, 이건 안 말했던 비밀이지만, 나는 호원이가 가르쳐 준대로 조용히 몰래 호원이네 서점에 가서 신간들을 읽고 있었다. 책 종류도 많고 넓어서 읽다가 들킬 우려도 조금 적고, 게다가 좋은 작품도 많아서 하나 건지면 구매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호원이네 어머니는 매우 착하시니까. 오늘의 행선지는 정해졌네, 검정빛 가방을 메고, 조금은 쌀쌀한 날씨에 덧대입은 후드집업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안경을 손으로 올린 채 천천히 걸음을 떼어 반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려 한 발을 떼는 순간,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ㅡ 야, 김성규!
ㅡ ....
남우현이었다. 복도 청소 담당이었는지 빗자루와 다 더러워진 쓰레받기를 들고 있었다. 내가 왜? 하고 짧게 답하자 남우현은 조용히 가까이로 걸어왔다.
ㅡ 너 오늘 일정 뭐야, 오늘 부터 선생님이 시킨거 다시 하게.
ㅡ ..끝난 거 아니였어?
ㅡ 누구 맘대로? 여태껏 내가 가짜로 써서 제출한거 몰라? 어쨌든 넌 오늘도 약속 없을거 같으니까 거기서 기다려.
아, 학원가야 하는데.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이 입 안에 머물렀다. 남우현은 잽싸게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교실로 들어갔다. 나는 또 그 복도에 혼자 남았다. 계단 첫번째 칸에 서서 멀뚱히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조금 지루했다. 항상 자주하던건데, 또 안경속에 박힌 초점없는 눈은 끝내 허공에 다다랐다. 순간, 누군가가 내 앞에 손을 휘저었다. 아마도 정신 차리라는 뜻이겠지? 놀라서 고개를 흠칫 떠니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많이 친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아직 까지는 조금 불편한 아이. 호원이었다.
ㅡ 여기서 서서 뭐해?
ㅡ 아, 잠깐.. 음.. 대기....
ㅡ 나 PC방 가는데, 너도 안 갈래? 내가 존나 재밌는 게임 알려줄게. 너 한번도 안 해봤지?
평소에는 그냥 자기들끼리 쌩 가더니 꼭 일정이 잡히니까 이러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어댔다. 왜? 하는 아쉬움의 말투에는 미안하다는 답 뿐이었다. 그래, 뭐 할 수 없지. 아쉬움이 잔뜩 묻은 대사만을 남기고 호원이는 아이들과 신나게 계단을 내려갔다. 큼지막하게 발걸음 소리가 울리고, 나는 곧 다시 주위를 멀뚱히 둘러보기만을 반복했다. 하얀 빛, 곧 오후 5시가 다다르는데도 겨울과는 다르게 밖은 빛이나고 있었다. 약간 노을진 것 같은 햇빛이 딱 맘에 드는데, 이럴때 혼자 나들이를 해야하는데, 또 가만히 기다리는 내가 스스로 억울했다. 평소에는 찾아주지도 않으면서, 학교에서 말도 자주 못하고 그저 몇번 눈만 마주치는게 다였다. 그리고 복도 청소를 할 때면, 내가 나갈 때 가끔 손인사. 근처에서 마구 말을 걸어대는 아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호원이나 우현이는, 내가 조용해서 그런지 나를 조금 다른 차원에 있는 친구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게 나름대로 좋으면서도, 가끔은 용기가 안 나 먼저 말을 걸 수 없을때. 조금은 비참해졌다. 약간 진회색 빛이 나는 바지를 손 끝으로 문질러대다가, 곧 교실문이 닫히는 소리에 고개를 치들었다. 교복 마이까지 전부 갖춰입은 남우현이 보였다. 내려가자, 하는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ㅡ 야, 오늘 학원가?
남우현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우현은 미처 몰랐다는 듯 당황스러움이 담긴 외침을 뱉어냈다.
ㅡ 아, 야 그럼 아까 말했어야지!
ㅡ 아직, 그 전에 시간 있어. 학원이 6시 까지니까.
ㅡ 죽을래? 40분 밖에 없잖아. 야, 너 학원 빠져. 오늘만 빠져.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반응에 팔에 걸쳐져 있는 시계를 보며 남우현은 볼멘소리를 이어댔다. 지금이 몇 시인데? 어? 부터 시작해서 학원을 빠지라는 악마의 유혹까지 전부 일궈냈다. 나는 안된다는 단호한 대답만을 내놓고 있었지만 남우현은 끝까지 나를 뜯어 말렸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야자를 시작하려 준비하는 아이들이 눈에 보였고, 곧 우리는 교문에 서서 신발을 갈아신었다. 가방 안 비닐에서 나오는 운동화에 발을 끼워넣고, 점점 지고 있는 햇빛과 함께 교문에 발을 놓았다. 회색빛 운동화가 나름 괜찮아 보였다. 남우현은 요란한 운동화를 뽐내며 내 옆으로 걸어왔다. 뭐하냐? 서서. 나가. 단호한 말투에 나는 입을 비죽 내밀고서는 교문을 나섰다. 곧 세개로 이루어진 큰 스탠드 계단을 지나, 얇은 흙바닥으로 이루어진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여전히 근처에 피지 못하고 시기를 기다리는 벚꽃들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거의 해가 반쯤 저물고 있었다. 새로 페인트칠 했다던 주황빛의 교문을 지나, 우린 곧 근처 시내 방향으로 발을 돌렸다. 그리고 그 사이에도 나를 열심히 설득하다 지쳤던 남우현이 조용하게 다시 말을 꺼냈다.
ㅡ ..야, 너 이호원이랑 친해?
ㅡ ....왜?
ㅡ 아니, 너네 아침마다 맨날 책 보잖아, 같이. 둘이서 창가에 앉아서 뭔 그렇게 지루한 책을 열심히 읽어? 만화책도 아니고.
보고 있었어? 물어보고 싶었지만, 조용히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ㅡ 넌 원래 이렇게 말이 없냐?
ㅡ ..그렇기 보다는, 사람을 좀 싫어해. 억지로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러다 보니까 대화도 없어지고.. 그렇게 말도 없어지고.. 나는 그게 다야.
근데 아침마다 이호원이랑 그렇게 깔깔거려? 우현이가 비아냥 대듯이 말했다. 나 딱히 깔깔 거린 적 없어. 오기로 크게 말하자 남우현이 그래, 그렇다 치자. 하더니 곧 말이 없어졌다. 그렇게 계속 우현이가 가는대로 발을 옮기는데, 익숙한 풍경이 시야에 찼다. 항상 내가 자주 오던 파란색 간판의 널찍한 서점. 가판대에 걸려있는 여러 잡지와 책들이 눈에 띄었다. 학교 끝나고 자주자주 가던 서점. 무한 서점이라고 파란 바탕에 하얀 글씨로 촌스럽게 써진 간판을 지나쳐, 곧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남우현은 앞장서서 서점으로 입장했다. 천장에 걸려있는 문학 종류들이 먼저 눈에 띄고, 교복을 입은 몇몇의 아이와, 점원 두 명 정도가 다음 시야에 걸렸다. 남우현은 자신있게 입장하더니, 곧 만화책 부분으로 발을 돌렸다. 나는 조용히 남우현을 보내고, 그 옆 추리소설 쪽으로 향했다. 그저께 봤던 책이 뭐였더라. 히가시노 게이고 꺼는 아니었는데, 요즘 신작가라며 난리를 쳐대던 사람. 누구더라, 책을 검지손가락으로 쭉 훑으며 제목을 찾고 있는데, 곧 누군가가 내 머리 위에 책 두어권을 올려놓았다. 나는 시선을 위로 치켜뜨며 투덜거렸다.
ㅡ 하지 마.
ㅡ 너가 이런것도 봐? 이미지랑 다르다? 난 무슨 교양에 가정적인 소설 이런것만 볼 줄 알았더니, 장르는 추리소설?
나는 조용히 올려진 책을 무시하고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까와 같은 작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봤던 하얀 표지. 곧 하얀방 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이 눈에 띄고, 나는 사이에 끼워진 하얀 책을 뽑아내었다. 남우현은 다 골랐냐? 하고서는 먼저 발을 옮겼다. 가는 방향이 비슷한데? 싶더니 곧 컴퓨터 서적 뒷쪽 남는 빈공간에 남우현은 엉덩이를 붙였다. 내가 항상 자주보던 공간이었는데, 나는 조용히 아빠다리를 하고 앉은 남우현 옆에 무릎을 세워 앉고는 책을 둥글게 펼쳤다. 어제 기억해뒀던 79페이지가 한번에 펼쳐지고, 나는 곧 하얀 바탕에 써져있는 검은 글씨들에 빠져들었다. 내용은 항상 악몽을 꿔대는 살인자로 오인받는 사람에 관한 얘기였는데, 자기는 살인을 안 했다고 결백하게 증언했고 그걸 증명도 받았으며 이제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인데 밤만 되면 피가 철철 흐르는 죽어나간 꼬마들이 꿈에 나온다는 거였다. 재판도 모두 다 끝냈고 진범도 잡았는데. 아무래도 방향은 주인공 자체가 원래 진범이었다는 느낌으로 흘러가는 듯 했다. 명백한 복선들이 쏙쏙 나오고 마지막을 흥미롭게 바라볼 즈음, 아까 있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와장창, 넘어졌던 악몽을 꾸던 아이.
ㅡ 근데.. 너, 악몽 자주 꿔?
무릎위에 놓인 책에 시선을 떼지 않으며,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만화책에 집중하고 있던 남우현 역시 나에게로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ㅡ 웬일이야, 말도 걸어주고.
ㅡ ....대답이나 해 줘
ㅡ 특별히 해준다. 이 멋지고 삐까뻔쩍한 남우현 형님의 과거 얘기. 아무데서나 떠들고 다니면 죽는다.
ㅡ 응.
ㅡ ...음.. 우선, 나는 지금 사귀는 여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첫사랑이 있었는데, 바로 옆집에 살았어, 나는 그 사람이랑 노는게 좋아서 맨날 학교가 끝나도 거의 6개월동안 그 집, 그 쪽. 계속 거기를 향했는데, 그러다 보니까 조금 이상했나봐. 둘 다. 다른 사람하고는 느낌이 조금 달랐나 봐. 그래서 어쩌다가, 키스했는데. 그리고 나서 알게 된거야. 내가 그 사람을 엄청 좋아한다는 걸.
뭐야, 첫 사랑 인가. 이래저래 여자를 잘 갈아타도 순정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남우현의 얘기를 경청했다. 이미, 옛 생각에 울컥했는지 목소리는 조금 메여있었다.
ㅡ 그리고 나는, 그 사람도 그럴거라 믿었던거지. 그 사람도 나를 엄청 좋아할거다. 그래서 아무것도 상관없이 나랑 있으면 다 괜찮을거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가장 큰 문제가 뭐였는지 알아?
ㅡ 뭔..데?
ㅡ 그 사람이 남자였거든. 내가 16살이었을 때, 그 남자가 18살이었어. 너도 남자면 알지 않냐? 16살은 성욕이 불타오를 때잖아, 그래서 착각했나 싶어서 일주일간 가만히 있었는데, 그 형이 나를 피하기 시작한거야. 그렇게 일주일만에 나타나서 뭐라는지 알아? 여자를 소개받겠다고 했데. 그 때, 완전 꼭지가 돈거야. 그래서 마구 욕을 내뱉었어. 나는 하나도 상관없는데 너 다 무서운거지? 형 존나 겁쟁이네, 이러면서 비아냥 거리고. 그러니까 형이 그러는거야, 자긴 엄청 무섭다고, 이래서 내가 받는 불이익이나 미래의 혼란스러움이나. 그런거 때문에, 너랑 이제 못 논다고. 그래서 난, '그래, 꺼져버려 겁쟁이야.' 이러고 나왔지. 그리고 또 정말로 딱 일주일 후에 보고싶어서 잠깐 집에 들렸는데, 아무도 없길래 형을 불러댔다? 그러니까 형이 '나 화장실에 있어,' 이렇게 화장실에 있다고 말만 해주고 계속 안나오는거야, 그래서 나오라면서 마구 문을 두드렸는데. 대답이 없었어. 그 이후로 쭉.
조금 의외의 얘기에, 나는 조용히 하얀빛의 책을 덮었다. 남우현의 눈은 이미 그렁그렁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곧 뺨으로 한줄기의 눈물이 흐르고, 남우현은 교복 마이로 재빠르게 훔쳤다. 나는 조용히 주머니에서 하늘빛 수건타입의 손수건을 꺼내서 건넸다. 우현이는 그냥 조용히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쭉. 다섯글자가 머릿속을 멤돌았다.
ㅡ 나 때문에 죽은 거 같아서, 괴롭고, 그래서, 남자를 다신 못 좋아하게 된 거 같았어, 그렇게 여자친구를 마구잡이로 사귀고, 지금 이런거야... 근데 그냥, 아주 가끔, 정말 아주 가끔가다가 그 형이 꿈에 나오는거 뿐이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내가 남우현 한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위로였다.
볕도 안드는 구석 진 곳, 둘이 쭈그려 앉아 나눈 얘기에 나는 생각했다. 쿵쿵거리는 심장, 너한테는 절대로 보여줄 수 없겠구나.
**
조금은 무거웠던 남우현의 과거얘기가 끝나고, 나는 조용히 책을 덮었다. 그리고 괜시리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학원 시간이 다 됐다면서 우현이를 재촉했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다 닦아낸 남우현은 만화책을 덜 봤다며 고집을 피워댔다. 6시까지 입실이었으나, 곧 5시 50분이 되어가는 상황에 나는 벌떡 일어섰다. 엉덩이에 붙은 먼지를 탈탈 털어내고, 하얀빛 책을 덮었다. 나도 이 책은 다시는 못 볼거 같아. 조용히 속삭였다. 남우현은 예의 원래모습으로 돌아와서는 투덜거리다가 곧 만화책을 덮었다. 쪼잔한 새끼, 얘기도 다 해줬는데 이러기냐? 학원 진짜로 안 빠져? 하면서 나를 달달 볶아댔다. 안 빠져. 단호한 말에 우현은 서점을 걸어나가면서까지 필사적인 허세를 보였다. 나는 오늘도, 남우현이랑 있으면서 단 한번도 불편한 부분을 느낀적이 없었다. 같이 있으면 있을 수록, 깊이 퍼진 현실을 알게 된다는 점이 가장 큰 단점이긴 했지만, 남우현도 극복했으니 나도 할 수 있겠지. 학교 책가방을 고쳐메고, 서점 앞에 멈춰섰다. 그리고, 조용히 손을 흔들었다. 남우현이 미소를 지으며 나와 똑같이 손을 흔들었다. 다시 봄바람이 살짝 불었다. 아직은 차가운 냉기가 뺨에 와닿았다. 가벼운 손인사가 끝나고, 반대방향인 학원으로 향하려는데, 남우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ㅡ 야, 너.
ㅡ .....
ㅡ 오늘 나눠준 유인물, 버리지 말고 꼭 담임한테 써서 내라.
그래, 나는 느릿한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남우현은 곧 등을 돌려 검정 가방을 보여주었고, 나는 검정 가방을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곧 등을 돌리려고 하는데, 갑자기 남우현이 고개를 확 돌렸다. 눈이 마주칠까 난 또 재빠르게 얼굴을 돌려 피했다. 멀리서 뛰어오는 소리가 울렸다. 곧 얼마 되지 않아 내 어깨에는 남우현의 손이 올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또 얼빵하게 그 아이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우현이는 주머니를 한 손으로 마구 뒤적거리더니 곧 펼쳐서 내 손에 쥐어주었다.
ㅡ 뭐야..?
ㅡ 사. 너 안 사면 나중에 후회한다. 그럼 간다.
곧바로 검정 가방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고, 남우현은 점점 멀어졌다. 남우현이 가고나서 펼쳐본 종이는 찢어진 종이를 억지로 붙였는지, 테이프 자국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종이 바로 한 가운데에는, 졸업앨범 구매 신청서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마지막으로, 유인물 끝단에는 단정한 내 글씨체와는 조금 다르게 삐뚤하게 적혀있는 '2학년 11반 7번 김성규, 신청O' 가 보였다.
@ 이 다이어리는 시즌 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당. 봄 시즌은 7화가 완결입니다! (3월 너무 많이 써서 4월 3화가 끝이라는게 함정;)
@ 결론은 3화 후 완결잼
@ 그리고 또 시즌 시작 해서 사계절 전부를 그릴 생각 임당.
@ 결론은 봐주시는 여러분들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