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우리 그만 만나자
-다른 사람 생겼어
-미안.. 내맘 알지?
-차단할게..ㅎㅎ
준면은 화면이 까맣게 변할 때까지 말 없이 휴대폰을 쳐다봤다.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던 여자친구였다.
마지막 사랑이라 믿었는데. 준면의 허탈함은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아영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준면은 침대에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러고 있으면 숨이 막혀 죽는 건 아닐까? 그러면 아영이가 조금은 슬퍼해 줄까?
한참을 그렇게 있던 준면이 빨갛게 익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꽤 오래 숨을 참았는지 호흡이 거칠었다.
베게 옆에 놓인 휴대폰을 바라보던 준면이 거칠게 휴대폰을 던졌다. 어디로? 침대 위로. 벽이나 바닥으로 던지기엔 준면의 휴대폰은 아직 약정이 1년 가까이 남아 있었다.
준면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 배고픈 건 배 고픈 거였다. 시계를 보니 보니 11시 46분, 준면의 야식 타임이었다.
냉장고를 열자 보이는 건 두유 두 개와 계란 세 개, 엄마가 일주일 전에 가져오신 밑반찬 몇 개 뿐이었다.
준면은 반찬통 서너개를 꺼내어 양푼에 털어 넣었다. 밥도 세 주걱 집어넣고 고추장도 듬뿍 덜었다. 참기름까지 뿌리자 준면의 입에 침이 고였다.
그래. 여자친구야 다시 사귀면 되는 거 아닌가. 준면이 다 비벼진 밥을 크게 한 숟갈 떠 입으로 가져갔다. 역한 맛이 준면의 입을 맴돌았다.
준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엄마가 가져오신 시금치나물처럼 준면의 속도 상했다.
결국 그날 밤 준면은 비빔밥을 한 입도 먹지 못했다.
"김준면!! 문 열라고 김돼지!!!"
띵동, 띵동. 쾅쾅쾅. 철컥 철컥. 서라운드로 들리는 소음에 준면이 인상을 찌푸리며 시계를 쳐다봤다. 여덟 시 삼십 분.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한 명 뿐이다.
감히 내 잠을 깨우다니. 준면이 신경질적으로 현관문을 반만 열었다. 문틈으로 이빨을 드러내고 활짝 웃는 찬열의 모습이 보였다.
"도비는 자유로운 집요정이에요!"
"꺼져. 박도비."
그리고 준면은 다시 문을 닫았다. 닫으려 했다. 하지만 찬열이 더 빨랐다. 문 틈으로 발을 끼워넣은 찬열이 잽싸게 현관문 틈으로 들어왔다.
준면은 어이없다는 듯이 찬열을 노려봤다. 찬열이 귀엽다는 듯이 준면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아 이 도비새끼가 진짜!"
"준면이, 횽아 안 보고싶었쪄요?"
"꺼져!!"
"너무해, 흑흑.. 준면이는 아영이밖에 모르는 바보야!"
"아영이 얘기 하지 마! 씨발.."
찬열의 입에서 아영의 얘기가 나오자 준면의 코끝이 찡해졌다.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준면은 그대로 침대에 다이빙하듯 누웠다. 찬열이 보면 쪽팔리니까.
반면에 찬열은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언제나 아영의 얘기만 나오면 얼굴이 빨개져서 '우리 아영이는~'을 외치던 준면이 아니던가.
이런 면에선 눈치가 빠른 찬열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야 혹시 헤어.."
"그래!! 나 아영이랑 헤어졌다! 씨발 흐어어.."
"야 울지 마! 사내자식이.."
"뭐!! 뭐 씨발!!! 아영이가 다른 남자 생긴게 뭐!!! 아영아아.."
결국 준면은 울면서 헤어진 스토리를 미주알 고주알 전해주었다. 찬열은 말없이 준면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힘 내, 인마.
울다가 휴지 한 통을 다 쓴 준면이 뒤늦게 찾아온 민망함과 쪽팔림에 찬열의 눈치를 봤다. 찬열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신이 가져온 봉투를 가리켰다.
결국 준면과 찬열은 찬열이 사온 소주에 삼겹살을 먹기로 했다. 노릇하게 익어가는 삼겹살을 보며 준면은 말없이 쓴 소주를 삼켰다.
오늘따라 술이 맛있는 것 같았다. 준면은 마지막 반 잔을 마신 후 우울함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준면과 찬열의 주량은 소주 일곱 잔 반, 즉 한 병이었다.
"찬녀라. 너는 왜 나랑 아영이랑 헤어진 것 같냐?"
"아영이가 다른 남자 생겼다며어.."
"그거 말고.. 딸꾹! 다른 이유가 있다고 안하냐아?"
"다른 이유?.. 모르겠는데에.."
준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거. 이게 내 헤어짐의 원인 아니겠냐아.. 찬열은 갑자기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준면의 손가락 끝은 정확히 준면의 배를 가리키고 있었다. 준면의 오랜 친구인 찬열이 처음 봤을 때부터 늘 자리잡고 있던 그것. 뱃살이었다.
준면은 아주 어릴적부터 통통했었다. 아니, 어릴 때는 통통했었다. 그래서 초등학교때는 나름 귀엽다는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중학교에 입학한 뒤로 준면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약간 달라졌다. 준면을 돼지라고 부르는 것부터가 그랬다.
어느 순간 준면을 부르는 말은 이름이 아닌 돼지였다. 준면은 거기에 약간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서 더 먹었다. 그리고 살이 쪘다.
아이들은 뚱뚱한 준면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준면도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 때 만난 친구가 찬열이다.
준면처럼 뚱뚱했던 찬열 역시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찬열과 준면은 친구가 되었다.
은근 곂치는 점도 많고 개그코드도 비슷했던 둘은 무서울 정도로 친해졌다. 아이들은 그 둘을 돼지패밀리라고 놀렸다. 하지만 둘은 개의치 않았다.
찬열은 준면을 김돼지, 준면은 찬열을 박돼지라 불렀었다. 하지만 준면은 고등학교를 기점으로 찬열을 더이상 박돼지라 부르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찬열은 준면에게 자신의 소박한 꿈을 말했다. 행성고 밴드부에 들어가서 드럼을 치고 싶다고.
준면은 넌 할 수 있을거라 했지만 찬열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밴드부는 키가 크고 잘생긴 아이들만의 특권이었다. 찬열과 준면과는 다른 세계에 사는.
그래서 찬열과 준면은 두 달 동안 피나는 다이어트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찬열은 성공했고, 준면은 그러지 못했다.
원래 살이 잘 빠지는 체질이었는지 찬열의 살은 쑥쑥 빠졌다. 20kg 감량. 놀라운 수치였다. 살이 빠지고 찬열의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다. 키도 쑥쑥 컸다.
준면도 5kg 감량에 성공했다. 하지만 5kg라는 수치는 준면의 외형에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리고 준면의 키는 중학생에 머물렀다.
찬열은 준면의 노력을 알았기에 조금만 더 하면 빠질거라고 격려를 해 주었다. 준면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요요현상 뿐이었다.
살이 빠지고 키가 커진 찬열은 당당히 밴드부에 지원했고, 합격했다. 아이들은 찬열의 주위에 제 발로 찾아왔다.
반면 준면의 주위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과 비슷했다. 하지만 찬열이 있어 준면의 고등학교 생활은 나름 순탄했다.
운명인지 인연인지 같은 대학에 붙은 둘은 입학하자마자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준면은 군대에 다녀오면 살이 빠지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준면의 체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 뒤로 준면은 포기했다. 군대에서도 뺄 수 없는 살이라면 정말 빠지지 않을 거라 생각됐다.
물론 찬열은 준면의 살에 아무런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성격은 조금 더럽지만 그래도 꽤 멋있는 친구였다. 준면은. 그래서 아영과도 사귈 수 있었다.
하지만 준면은 아영이 다른 남자가 생긴 것이 자신의 뱃살 때문이라고 느껴졌다. 준면은 오늘따라 몸이 무거운 것 같았다.
그래서 준면은 결심했다.
"찬열아."
"..어?"
"형 오늘부터 다이어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