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 바람이 불 것이라고들 말을 하지요, 이 곳에 피 바람이 곧 불 것이라고요. 진정 피비린내를 맡아보지 않아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곧 있으면 성우의 친모의 기일 이었다. 다른 왕실 어른들의 차례는 모두 종묘에서 예를 갖추어 지내는데, 성우의 친모는 폐위 당한 중전이라서 종묘사직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에 모셔져 있다. 폐비 이기에 왕실에서는 차례를 지내주지 않았고, 제 아무리 세자라고 해도 성우 혼자서는 차례를 지내지 못했다.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이유로 조정에서 말이 새어 나올 테니. 그래서 성우는 항상 그맘때쯤 사냥을 간다는 핑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무복을 갖춰 입고 민현이만 데리고 대궐을 나서서 기일을 밖에서 지내고 온다. 그걸 안 좋게 보는 시선들은 항상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차례를 지내는 건 아니고, 또 그것마저 못하게 하면 성우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다를 쉬쉬하는 상황이었다. 대놓고 세자를 말릴 수는 없기에 세자가 사냥터에 갈 때 마다 이제 그만 하라는 경고의 의미로 세자를 공격해서 다치게 하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민현이 있어서 무서울 게 없는 성우였고, 조금의 찰과상이야 어머니를 보러 가는데 신경 쓰지 않았다.
“불쑥 찾아오기에는 실례가 되는 시각이 아닙니까”
“주위를 물러 주십시오. 저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
“세자빈과 내가 단둘이 해야 할말이라.. ”
“……”
“물러들 가거라”
다 늦은 밤에 연우가 불쑥 성우를 찾아와서 주위를 물러 달라고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주위를 물러달라 한다.
궁인들이 문밖으로 나가고 마지막으로 민현이 문을 닫았다.
“긴히 할 말이 무엇 입니까.”
“몇 일 후에 사냥터에 나가신다 들었습니다.”
“그렇소만”
“소첩도 동행하고 싶습니다.”
“그 사냥터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이러는 것입니까”
“예 궁인들에게 들었습니다.”
“아니 됩니다."
"..........."
"세자빈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세자빈이 동행하기에는 위험한 곳입니다. 그 곳 사냥터에 갈 때 마다 쥐도 새도 몰게 피살 당하는 위기를 겪었습니다.”
“누구의 짓인지 알고 계십니까?”
“…..가끔은 적이 누군지 알고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저를 데려가셔야지요.”
“어째서요”
“그 누구라 해도 저하 곁에 제가 있는 한 공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자빈은 그 누군가가 누군지 아는 듯 말씀 하십니다.”
누군지 알고 있는듯 이야기 한다는 성우의 말에 연우는 다시 얼어붙는다. 제 아비의 짓일 것이다. 겁을 줘서 다시는 가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속셈일 것이다.
다 알기에 아무말도 할 수 없는 제 처지가 연우는 밉다.
.
.
.
"되었습니다. 세자빈까지 동행할 것 없습니다."
"문안..여쭙고 싶습니다."
"......."
"찾아뵙고 제가 옆에서 잘 보필하겠다 문안 드리고 싶습니다. 매년 무휼만 대동코 가신다기에 저도 함께 가 드리고 싶었습니다."
"...."
"성심을 어지럽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하께서 그리도 싫으시면 동행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성우는 말이 없었고 연우는 거절당했구나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돌아 나가려는데 등뒤로 성우의 목소리가 들린다.
"상복을 입을 수 없으니,,,, 하얀 적삼이 나을 것입니다."
.
.
.
"알겠사옵니다."
아직까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확신은 없다. 하지만 제가 다칠까봐 걱정해주는 마음이 고맙기도 했고, 제 어머니를 찹아뵙고 문안 드리고 싶다는 말이 기특하기도 했기에 같이 가자는 제안을 거절할 필요는 없겠다 싶었던 성우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묘에 예의도 갖추지 못하는 아들이라 늘 죄송스러웠는데, 민현이가 아닌 누군가를 인사시키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아직 까지 뾰족뾰족한 성우의 마음은 같이 가주어 고맙다는 말을, 오해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무엇을 입을지 알려주는 말로 대신했다.
(민현이 착장입니다.)
(성우 착장입니다.)
어머니의 기일이 밝았고, 성우는 아침부터 채비로 바빴다.
"세자빈 마마께서 동행 하실 것이다. 허니 더욱더 경계 늦추지 말거라."
말 두필 성우, 민현 이렇게 둘이서 떠나던 길이 연우가 동행하면서 제법 사람들이 많아졌다.
선두에 나란히 민현이와 성우가 있었고, 그 뒤로 가마 하나가 따라 움직였다.
"싫다 하 실 줄 알았습니다."
민현이의 말에 고개를 돌려 민현이를 보더니 씨익 웃는 성우이다.
"헌데 왜 동행하겠다 하셨는지도 알듯합니다."
"연유가 무엇인지도 눈치챘다는 것이냐"
"음...저의 벗이니, 저하의 벗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램이나 연유 "
자신이 성우에게 좋은 벗이 되어준 것처럼 연우도 민현의 친구이니 서로서로 의지하면 지낼 친구로 받아들여줬으면 하는게 민현의 마음이었다. 솔직히 성우가 왜 연우를 데리고 가겠다 했는지 모르겠지만, 민현이의 바램이 그랬다. 그래서 바램이나 연유라며 호탕하게 웃어보이는 민현이다.
"그래 다르게 만났더라면 벗이 될 수도 있었겠지, 허나 언젠가 꺽어버려야 하는 꽃일 뿐이다."
"......."
"너도 알고있지 않으냐, 곁에 둔다 한들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은 아니라는거"
"허면 왜..."
"나랑 닮았더구나, 부족한것 하나 없이 다 가진것 같은데 그 속이 텅 비어있어. 너무 위태로워 보여 안쓰러워서.그래서다."
"그뿐이십니까"
"다른연유도 있지.. 문안드리고 싶다하기에, 어머니가 좋아하실 것 같아서, 늘 너와 이렇게 둘이 갔었는데, 인사 받으시면서 좋아하실 것 같아서."
"뭐 어쨌든 저는 좋습니다. 저하께서 편안해 보이셔서"
그동안 사냥터로, 어머니꼐로 가는 길은 항상 위험하고 어려운 길이었는데
연우가 동행한 길은 마치 그동안의 위험이 어디서 왔는지 증명이라도 하듯 아무일도 없었다.
사냥터에 도착했고, 함께 문안을 올렸다.
예를 갖추어 절을 두번 올리고 반절을 한다. 그뿐이었다. 종묘사직에 모시지 못하는 어머니께 할 수 있는 도리를 다 하는것이 짧고 허무했다.
성우의 절이 끝나자. 한발 자국 뒤에 서있던 연우가 와서 절을 두번 하고 반절을 한다.
왕실어른이 아니기에 세자빈이 폐비에게 예를 갖출 필요는 없었다. 와서 멀뚱히 보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데 이 여인은 머리를 숙여 예를 갖춘다.
"물러나 있겠습니다. 어마마마와 오붓한 시간 보내시지요."
그리고 이 여인은 자신의 어머니를 어마마마 라 부른다.
무슨 마음인지 모르겠다. 자신의 하나뿐인 어머니께 예를 다하는것에 대한 고마움 이었는지, 아니면 제 예상밖의 행동을 하는 탓에 놀란 마음인지 이유 모를 싱숭생숭 함 이었다.
성우 곁에 민현만을 남기고 연우의 가마는 별채로 향했다.
별채로 향하는 가마가 사라질 때쯤, 화살 하나가 슈욱 날아온다.
"저하 피하십시오."
피하라는 민현의 말에도 성우는 신경도 쓰지 않고 칼을 뽑아든다.
"저하,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말에 올라타서 숲길로 들어간다. 연우가 있으니 아무일도 없었던 걸 증명이라도 하듯 이렇게 짜여진 각본 처럼 도적떼 라니.
“저하 괜찮으십니까? 어디를 얼마나 다치신 겝니까?”
“빈은 나가십시오. 신경 쓰지 말고”
“허나 어떻게”
“나가라 했습니다.”
“싫습니다. 제 일 아닙니까 저하를 보필하는 일.”
벽에 기대어 앉아 피가 흐르는 부분을 손으로 누르고 있는 모습이 연우의 도움을 받아도 될법 한데 성우는 고집을 부린다. 연우가 없으니 바로 또 공격을 받는 제 위치가 초라하기도 했고, 괜히 그 탓에 연우가 미워보였다.
"되었다 하였습니다. 나가십시오."
손 한번 대지 못하고 방에서 쫓기는 나온 연우는 문앞에 그대로 힘없이 기대 앉아 있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성우에게 처치를 해준 민현이 방문을 닫고 나왔다.
"송구스럽구나.. 방패막이가 변변치 않아서"
"이만하면 좋은 방패막이 였습니다. 저하도 저도 아직 목숨줄을 붙어 있으니"
"저하는 괜찮으신 거지?"
"예 마마, 이제 좀 안정 되신 듯 합니다."
"............ 너는 다친데 없고"
"... 예 무탈합니다."
제가 도움이 되어주지 못한 다는 생각에 우울만 연우였고, 이미 성우의 생각을 먼저 하고 있는 연우를 곁에서 두고 볼 수 밖에 없는 민현의 마음은 민현 대로 불편했다.
급하게 대궐로 전보를 보냈고, 늘 그렇듯 내관이 별채로 와 누워 있는 성우를 진찰 했다.
"세자저하, 매년 이리 일을 겪으시니 이 맘 때쯤 이면 소인이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부디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걱정은 고맙네만, 그리 우려할것 없네. 중전께서는 항상 살아는 있을 만큼만 공격을 하지 않는가 "
"저하 부디 옥체 강녕 하셔야 합니다. 이달 그믐 께 까지는 승마도 무술도 아니되십니다."
"알겠네, 내 조심하겠네"
“의관이 들려 진맥을 하였는데, 별이상 없다 하옵니다.”
“불행중 다행이구나.”
"이달 그믐 까지 환궁이 어려우 실듯 합니다."
"그믐까지나? 많이 다치신 게로구나"
성우의 호통에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없어서 앞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는 누가봐도 초초한 연우에게 민현은 잊지않고 성우의 소식을 전해준다.
성우도 연우를 걱정하고 있을걸 알기에...
연우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호기롭게 자신을 방패로 쓰라고 아무일도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잠시 같이 있지 않던 틈을 타 이런 일이 벌어졌다니, 제 아비의 소행이 확실 한데, 저가 해주는 간호라니 제 자신이 성우 였더고 꼴 보기 싫었을 것 같다는 마음이었다. 잘하려고 했는데, 도움이 되려고 했는데 일이 꼬여만 간다.
한참을 생각에 잠기다 김상궁을 불렀다.
"김상궁, 어마마마 께서 좋아하시던 음식을 혹 알고 있는 자가 있을까?"
"글쎄요, 중전마마를 뫼신게 워낙 오래된 일이라, 그때 마마를 모셨던 궁인들을 수소문 해보겠습니다."
"고맙네 김상궁. 내 어마마마께 극진히 신경 쓴 차례상 한번 올리고 싶네."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이 달 말 까지 별채에 오도가도 못하게 됐으니 시간은 넉넉했다. 김상궁이 수소문한 궁인들이 별채로 모여들었고, 성우의 엄마가 좋아하던 음식들을 연우에게 알려주고 또 가르쳐 주었다. 그게 연우의 방법 이었다. 지금 당장 마음을 열지 않는 성우를 닥달하고 싶지 않았고, 제 진심을 알아달라기 보다는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 따듯한 마음씨와 인품은 어디에 있어도 빛이 났다.
"못보던 궁인들이 드나드는 구나."
"세자빈 마마께서 옛 궁인들에게 요리를 배우고 계신다 하십니다."
"옛 궁인들에게?"
"예 저하."
"그만 환궁하라 일렀는데, 서서 일을 벌이는 구나."
시간이 꽤 흘렀고 성우는 이제 혼자서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나았다.
"세자저하, 세저반 마마 이시옵니다."
다쳐서 별채로 들어오던 날에 어쩔 줄 몰라하는 세자빈을 보고 나가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소리소리를 질러 놓은 후라, 한동안 보러 오지도 가지도 않고 있던데 못내 마음에 걸렸는데, 세자빈이 먼저 문을 두드릴 줄을 더 몰랐던 성우이다.
"... 안으로 뫼시거라."
그때는 너무 심했었다고 다쳐서 정신이 없었다고 사과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저하, 그간 강녕 하셨습니까?"
"많이 호전 돼었소,..."
"다행입니다."
"그 때는 내가,, 정신이 아득하여 세자빈꼐 무례하게 굴었소, 용서하시오"
"아비가 낸 생채기를 딸이 치료해준다니, 못믿을만 하지요, 이해합니다. 저하"
"세자빈이 이유없이 미운건 아니었소"
"..... 예 알겠사옵니다."
"내 정말 미안하오."
"......"
"별채에 지내는 동안 옛 궁인들에게 요리를 배웠다 들었소"
"예,, 무료함을 달래려 궁인들을 들여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하꼐서 허하시면 상을 차려 올리고 싶은데 허 해주시겠습니까?"
"그러십시다, 그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분명 미안한 마음이 먼저였다 그냥 안부를 묻고 미안했노라 사과 하고 싶었던 건데 갑자기 밥상을 받게 되었다.
상다리가 부러질듯이 큰 상이 들어오겠거니 생각했느데 생각보다 작은 상이 하나 들어온다.
가만히 밥상을 바라보기만 하던 성우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민현아 주변에 궁인들을 물리거라."
"예"
혼자있고 싶다는 말이었다. 민현은 반절을 하고 문을 닫고 나가 궁인들은 물린다.
화려하지 않고 대단하지 않지만 익숙하고도 아픈 기억들이 떠올랐다. 구중궁궐에서 중전이 직접 요리를 하는 일을 없었다. 하지만 이 별채에 오면 성우의 엄마가 늘 해주던 음식이었다.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별채가 어린 성우에게는 참좋았다. 기일에 어머니를 뵙고 와서 별채에 오면 민현이와 한잔 씩 기울이면서 그때 생각을 하곤 했는데, 지금 자신의 눈 앞에 그때 처럼 어머니의 손길이 담긴 밥상이 놓여져 있다.
마치 제 수고를 안다는 듯이, 제 아픔을 다 이해 한다는 듯이
쉽사리 음식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술을 먼저 몇잔 마시는 성우, 그리고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술을 따라 주는 연우이다.
"별채에 오시면 어머니가 늘상 해주시던 상차림입니다."
"저하께 위로가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어마마마가 계셨다면 이리 해주셨을 것 같아서"
"............ 예, 그러셨을 것 입니다."
한 동안의 무거운 정적이 이어졌다.
“ 피 바람이 불 것이라고들 말을 하지요, 이 곳에 피 바람이 곧 불 것이라고요. 진정 피비린내를 맡아보지 않아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
“10살 쯤이었습니다. 어마마마가 갑자기 아프셔서, 궐 밖 좋은 의원에게 가보셔야 한다고, 급히 길에 오르셨는데, 그때는 그게 마지막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궐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도록 권력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믿었던 아바마마 마저 두창으로 쓰러지셨습니다. 그때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어찌되었든 살아남아야 한다. 내 그리 컸습니다. 넓디넓은 궐에서, 기댈 곳 없이, 그런 연유로 마음을 열어 곁을 내주는 일이 익숙치 않습니다.”
“……….”
“그러니 세자빈이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내 이제 까지는 곁을 내줄 여유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