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별 다를 것 없는 나날이었다. 홍운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평생 단 한 번 보았던 그 날 왕의 그 모습이, 나를 바라보며 서글픈 웃음을 짓던 그 얼굴이 생각나 마음이 아렸다. 나보다 오랜 세월을 살아 오신 분인데.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알며, 더 넓은 견식과 덕을 갖추신 분일텐데. 왕을 생각하면 왠지 자꾸만 마음에 동정이 일었다.
아버지께서 돌아오신 후로 자연스럽게 동혁이와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어제 잠시 들렀던 뒷편의 창고에서는 더이상 호롱불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를 기다렸겠지? 제법 밤바람이 쌀쌀한 날씨인데 나를 기다렸을 동혁이를 생각하니 미안했다.
나는 잡념을 떨치려고 책을 폈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글공부도 해야지 않겠냐며 책을 여러 권 건네주셨다. 읽고 쓸 줄이야 알지만 이리 어려운 책들을 갑자기 던져주시고는 읽으라고 하셔서 막막한 참이었다. 오늘부터는 공부를 도와줄 선생님이 오신다는게 다행이지만.
나는 책 마지막 장에 과꽃을 놓고는 조심스럽게 책을 덮었다. 이 책을 다 보고 나면 꽃이 예쁘게 말라있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공부할 것을 챙겨서 작은 방으로 가 있거라. 곧 선생님께서 오실 게다."
"안그래도 막 움직이려던 참이었어요."
"진작 좀 가르쳐줄 것이지, 그렇게 부탁할땐 모른척을 해놓곤 갑자기 덥석 가르쳐 주겠다고 하니..."
"예전에도 부탁한 적이 있었어요?"
"하다마다. 그 책들이 최근에 들어온 게 아니야. 너로 읽게 하려고 예전부터 모아뒀는데, 혼자 읽기엔 어려운 책들이 아니더냐. 그래서 도와달라고 부탁을 좀 했는데, 단칼에 거절을 하고선 몇 번을 더 찾아가도 만나주지도 않았었지. 자신은 글을 쓸 뿐이지 가르치지는 않는다면서 말이야. 어쨌든 지금에라도 가르쳐 주신다니 되었다."
누군진 몰라도, 내 선생님이 될 분은 참으로 도도한 분이시구나. 진작 부탁을 들어줬더라면 며칠이라도 덜 무료했을텐데.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작은 방에서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밖에서 웅얼대듯 짧게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열린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늘부터 글공부를 돕게 된 김동혁이라고 합니다."
다시 문을 닫고선 그가 내 눈을 마주봤다.
나는 한참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동혁이를 멍하니 바라만 봤다.
"아가씨께서는 별로 저와 인사할 마음이 없으신가봅니다."
말을 마치고 샐쭉 웃는 모습은, 내가 아는 김동혁이 맞다.
"...너...이렇게 장난치기 있어? 놀랬잖아!"
"초면에 반말이라니...무례한 아가씨로군요."
"아 진짜, 김동혁!"
"푸흐..미안미안, 네 반응이 궁금해서 놀려봤어. 어때 공주님, 내가 낮에 만나러 온다고 했지?"
"또 공주님이래. 그러면 니가...내 글 선생님이야?"
"그래. 사실 난 평범한 등갈이 소년이 아니야. 홍운에서 꽤 유명한 글쟁이라구."
"아버지 말로는 네가 그렇게 거절을 했다던데."
"그야, 말했잖아. 난 니가 엄청 못생겼을 줄 알았다니깐. 이렇게 예쁜줄 알았으면 거절 안했을텐데 말야."
"또, 또. 선생님으로 왔으면서 무슨 수작을 부리는거야."
"무슨 소리야, 선생님은 둘째고 너한테 수작 부리려고 온건데."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들을 주고받으며 동혁이와 나는 함께 시간을 보냈다. 혼자 읽을 때는 그토록 지루하고 어렵기만 하던 글이, 동혁이의 목소리가 얹어지자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었다. 글 이야기를 할 때의 동혁이는 나보다 한참 어른같았다.
"글이라는 건 말이야, 네가 생각하는 것을 전혀 다른 말로 남에게 전해줄 수 있어야 하는거야."
"무슨 말이야?"
동혁이는 대답 대신 종이에 무엇인가를 적어내려갔다.
"이게 무슨 뜻일것 같아?"
달이 유유히 빛났다. 나는 달에게 손을 뻗어 달을 녹였다.
종이에는 그렇게 써 있었다.
"손을 뻗어서 달을 녹여..? 이건 뭐, 허구..."
동혁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건지, 열심히 머리를 굴려 떠올리려는 찰나 동혁이가 나를 당겨 안더니 내 눈에 자신의 입술을 맞춰온다.
"너...지금...뭐..뭐하는.."
"내가 네 눈을 보고 달 같다고 한 거...기억 안나?"
"...응?"
"이해했어, 공주님? 너한테 입맞추고 싶다는 걸, 그렇게 표현한거야."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붉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다음에는 또 어떤 글을 써볼까나- 기대해, 공주야."
******
어느새 겨울이 왔고, 해는 평소보다 조금씩 일찍 모습을 감췄다.
그날도 별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뒤숭숭한 꿈을 꾸었다는 걸 빼면. 눈을 뜨니 이불에 땀이 흥건했다.
이상한 꿈이었다. 내가 걷는 길 뒤로 노을처럼 붉은 불길이 하늘까지 치솟고 있었다.
그날 아침, 아버지께서 나를 불렀다.
아버지께서 나를 오라신 곳은 우리 집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작은 방인데, 쓰는 일도 없고 해서 가끔 여울이가 청소하러 들락날락하는 것이 다인데 왜 하필 이곳에서 보자고 하시는건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자 아버지는 바닥에 자신의 이마를 맞댄다. 마치 내가 왕을 보았을 때 했던 것 처럼.
"아버지..? 왜이러세요, 저예요."
"...그간 나라의 공주를 기만한 죄로는 죽어 마땅하나 왕께서 분부하셨던 바 모른체 돌아설 수 없었습니다. 부디 용서하소서."
"...아버지...왜..왜 이러시는 거예요.."
아버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로 믿을 수 없는 말들을 계속해서 뱉아냈다. 내가 실은 전 왕의 딸이라느니, 어머니께서 나를 낳다 돌아가셨다느니, 신녀의 예언이니 하는 것들...왕께서 나를 버리지 못해 아버지에게 맡기셨다는 것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를 그렇게 꽁꽁 숨겨두고 키웠던 거였을까. 모르고 지냈던 나의 운명이 이제와 내 등에 비수처럼 박히는 듯 했다.
"혹시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왜 이제와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데요..네? 이제 저를 보기 싫으신 겁니까..?"
"공주님의 이복 동생, 즉 현 왕께서 공주를 찾고 계십니다."
"...그래서요?"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사람을 시켜 가구마다 여자들을 세워놓고 살핀다고 하더군요. 그 눈을 알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 계속 계시면 위험할 겁니다."
"전 그럼 어떻게 해야하는 건데요..?"
"오늘 밤, 홍운을 떠나세요."
"...."
"이곳은 홍운의 아주 동쪽에 위치한 곳이라, 동쪽으로 조금만 내달리면 시와에 닿을 것입니다. 그 곳도 홍운과 사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 곳 사람들은 이방인에게도 호의적이라 하니, 적응하시기 괜찮을 것입니다."
손등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보고 그제서야 나는 내가 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의 떨리는 등은 그가 마음으로 울고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내 일어나 서랍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화려한 무늬가 수놓아진 붉은 옷. 나를 만나러 왔을 때, 왕이 입던 옷과 같은 옷이다. 왕과 그의 직계 혈손만이 입을 수 있는 옷.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그간 공주님의 아비로 살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제게는 과분한 일이었습니다. 밖으로 나가시거든, 되도록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생활하십시오. 다가오는 사람들을 경계하십시오. 특히 공주님의 눈, 그 회색 눈동자는..."
나는 목이 메고 숨이 차 더이상 아버지의 말을 들어낼 기력도 없었다. 지금껏 살아오던 것과 전혀 다른 삶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라니, 이렇게 급작스럽게- 너무 잔인하잖아. 나는 아무것도 모른채로 충분히 행복했는데, 왜 이 행복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지.
내가 좋아하는 아버지, 여울이, 또...동혁이는.
생각이 동혁이에게까지 미치자 나는 번쩍 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 곧있으면 동혁이가 올 것이다.
"오늘 글공부가 끝나면, 바로 갈 채비를 하세요. 날이 어두워지는대로 여기를 떠나도록 하십시오. 밤에는 아무도 다니질 않으니 염려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제가 가도..아버지는 괜찮으신거지요?"
"저는 괜찮을겁니다. 걱정마시고 가세요. 반드시 다시 볼 날이 있을 겁니다."
눈물이 계속해서 흘렀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아버지에게 큰 절을 올렸다. 나를 낳아주신 분이 누구든, 내 아버지니까. 나는 아버지를 사랑했다.
욕심내어 한 마디라도 더 하려 했다가는, 그냥 같이 이대로 살면 안되냐고, 잡혀가도 상관없다고, 철없는 소리를 하게 될 것 같아서 나는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등 뒤로 나이든 남자의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동혁이를 기다렸다. 네 얼굴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구나. 함께 공부한 책도 오늘이면 다 끝날 분량이었다. 무심결에 넘긴 책장의 끝에 예쁘게 마른 과꽃이 가지런히 접혀 있었다.
"공주야, 울어? 왜그래..무슨 일이야."
얼굴을 묻고 우느라 동혁이가 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나보다. 나는 마음을 추스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울어댔다. 동혁이의 목소리를 듣자 다 털어놓고 싶었다.
내가 이 나라의 공주래, 저주받아서 버려졌대, 하고. 이제는 또 얼굴도 모르는 동생에게 쫓겨 너와, 사랑하는 사람들과 생이별을 해야 한단다, 하고.
나는 나 자신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이야기를 정신없이 해댔다.
"공주야, 공주야, 불렀더니. 진짜 공주였잖아."
"..."
"그래서, 홍운을 떠난다는 거야?"
동혁이의 물음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혁이는 한참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단호한 목소리를 하고 내게 말했다.
"같이 가자."
"뭐라고..?"
"같이 가자구. 혼자서는 위험해. 너 혼자서는 시와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겠는데."
"그치만..."
"나야 천애고아로 자랐으니 마음 상해할 부모님도 없고, 내가 없대도 슬퍼할 사람도 없어. 오히려 너보다 떠나기가 수월할 거다."
동혁이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걱정하지 마, 하며 달래는 듯 했다.
맞잡은 손 위로 모를 감정들이 엉켜 흘렀다.
"오늘 밤에 집 뒤의 창고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 데리러 올게."
날이 어두워지면 동혁이를 만나기로 하고, 나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별로 챙길 것도 없구나. 옷 몇 벌, 아버지께서 그려준 초상화, 과꽃이 꽂혀 있는 책 한 권을 챙기고 나니 딱히 더할 것도 없어보였다.
나는 해가 지기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나라를 멸망시킬 운명, 이 무서운 운명을 고작 이 두 발로 달음질해 벗어날 수 있을까.
********
"소식은 아직이냐."
"예. 말씀하신대로 찾고 있는 중입니다만, 나라가 작지 않은 탓에 시간이 걸리는 듯 합니다."
"그래, 서두를 것 없어. 찾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소식이 들리는대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가 보도록 해."
아래위로 붉은 옷을 입은 홍운의 젊은 군주는 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호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도 자신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더이상 준회로 살지 않고, 홍운의 왕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상처받고 슬퍼하던 어린 준회가 생생히 살아있었다.
공주의 죽음을 보기 전까지는 이 마음 속의 준회도 죽지 않으리라.
그는 공주가 보고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 운명을 타고난 것이 공주의 잘못은 아닐테지만, 그밖에는 더이상 원망할 곳이 남아있지 않았다.
누님,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내 눈으로 그 얼굴을 똑똑히 보고, 내 손에 그대의 피를 묻히리.
모든 것이 끝나면, 세상 사람은 아무도 모를지라도, 나만은 누님을 홍운의 공주로 기억해 드리리다.
준회는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되뇌었다.
날이 추웠다. 홍운의 가장 높은 곳에서도 그는 외로웠다.
탓할 곳이 없어 그는 그의 가장 가까운 혈육을 원망했다.
그날도 다를 것 없는 평범한 날이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아주 긴 하루였다.
암호닉
김밥빈 님
김까닥 님
♥
+)
으아..전개를 빨리빨리 빼고싶은데!!!!
답답해요!!!! 다뤄야 될 내용이 느므많네여!!!!
주네 언제까지 기다료..
다른 등장인물들은 언제까지..또륵..
기다려주시면 나옵니다!!!
지금은 동혁이한테 집중해주쎄여!!!
부족한 글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늘 감사합니다ㅠㅠ
댓글도 너무너무 고마워영
다음엔 좀더 스릴넘치는(?) 스토리를 가지고 올게여;
브금도 좀 바꿀때가 되어가는 듯 하구요!
어쨌든 다음글도 열심히 써서 찾아오겠습니다!
굿밤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