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걔네? 쩔었지, 타쿠야네 애들이랑 블레어랑 2학년 때인가? 한 반에 붙었었는데 하도 쟤랑은 말도 못 섞게 쉴드 쳐대서 우리가 도비와 불사조 기사단이라고 불렀음."
"존나 대박이다."
"근데 맨날천날 쳐 노느라 성적 딸려서 죄다 실업계 가고 타쿠야 하나만 턱걸이로 인문계 온 거. 쟤도 블레어 아니었으면 공부 안 했을걸?"
"근데 쟨 왜 저렇게 장애인 싸고 도냐? 호모?"
"그런 소문 겁나 많았는데, 나도 몰라. 암튼 둘이 안 지 엄청 오래됐다더라."
"개쩌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샤프를 책상에 내려놓은 위안이 쓰고 있던 뿔테 안경을 벗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침 자습 시간에 공부는 뒷전이고 신나게 떠들던 짝과 그 앞에 앉은 놈이 순간 흠칫 놀라 위안을 돌아보았다. 깜짝이야, 너 공부하는 거 아니었냐? 그 말에 대답할 생각은 안 하고 찬찬히 그 둘을 쳐다보던 위안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남의 얘기 하는 게 그렇게 재밌냐?
"왜? 우리가 없는 말 한 것도 아니고."
"야, 얜 첫날부터 테라다한테 까였잖아. 너 그래서 찜찜한 거지? 그치?"
비아냥 섞인 어조에 뭐라 반박하려던 위안이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너희들 마음대로 생각해. 부러 요란한 소리를 내며 책을 덮은 위안이 고개를 쓱 돌려 창가 쪽에 앉아 색연필을 꾹 쥐고 혼자 그림을 그리는 블레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작고 마른 체구에 꼭 들어맞지 않아 약간 헐렁한 교복 셔츠에 눈길이 갔다.
사실은 그 날, 제가 블레어의 교복에 실수로 국을 쏟은 그 날 하교길에 타쿠야와 블레어를 보았다. 셔츠보다는 거의 원피스에 가까울 만큼 큰 교복을 입고 타쿠야와 나란히 길을 걸어가는 그 모습을 보고 말았다. 타쿠야는 티셔츠 위에 후드 집업만 입고 있었다. 의도치 않게 첫 날부터 불량한 복장으로 선생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아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위안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어버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
"블레어, 1더하기 1은 뭘까욥?"
"우음....기요미이~?"
푸훕! 정수기에서 물을 뽑아 마시던 일리야가 순간 놀라운 분사력으로 물을 뿜어냈다. 쿨럭, 쿨럭, 그러고도 충격이 가시지 않아 사레가 들린 일리야가 목을 부여잡고 연거푸 기침을 해대자 깜짝 놀란 블레어가 숫자놀이 카드를 팽개치고 일리야에게 포르르 달려갔다. 이, 일리야. 괜찮아욥? 당황한 알베르토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어보자 그 와중에 청소가 걱정인 일리야는 죄송해요 선생님, 금방 치울게요. 하며 잔기침을 뱉었다. 그나저나 옆통수에서 뭔가 굉장히 반짝반짝한 게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다.
"일랴 형아, 괜타나여?"
아아... 심쿵,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일리야가 물이 아니라 당장 영혼을 뱉어낸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비가 아니라 디멘터였어. 역시 오는 게 아니었다. 빠듯한 쉬는 시간보다 아침 자습 시간이 알베르토를 돕기에 훨씬 효율적이라 그런지 일리야는 아침에 주로 개별반에서 시간을 보냈었다. 물론 이 꼬맹이 때문에 요즘 매일 아침 살짝 망설이긴 한다. 적응이 될 만도 한데 하루가 다르게 더 예뻐지고 몸 전체에 색기가 돌았다. 천 년에 한 번쯤 나오는 색기인간이라던가 뭐 그런 거 아니겠지, 제 소매를 꼬옥 잡고선 막 존나 귀엽게 오물오물 말하는데, 일리야는 진짜 말 그대로 미치겠는 거다.
"아, 응. 괜찮지 그럼. 근데... 그건 어디서 배웠어?"
"넹?"
"바, 방금 알베르토 선생님한테 한 거... 다시 한 번만 해 주면 안 돼?"
"아아, 그거어? 우음....이케, 이르케 해서어... 기요미이!"
그랬다. 블레어가 짧은 손가락을 열심히 세더니 검지 손가락 두 개로 하얗고 통통한 양 볼을 콕 찔렀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야시시한 목소리로 외쳤다. 페북의 한 세대를 평정했던 귀요미의 시대가 가고 고백송마저 유행을 지난 지 꽤 오래 되었으나 일리야에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냥 저 작고 귀여운 생명체가 지 입으로 자기가 귀엽다며 날뛰는데 귀여워 해 주는 게 도리가 아니겠나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방금 전까지 부들부들 떨리던 안면근육이 입을 헤 하고 벌리는 쪽으로 향하고 저절로 눈웃음이 지어지는 거다. 자꾸만 웃음이 실실 나왔다. 아, 진짜 얠 어떡하면 좋지?
"나 기여어?"
"완전, 진짜 귀여워! 블레어, 이런 건 누구한테 배웠어?"
"이거어, 타쿠야가 가르쳐 줘써여!"
아, 또 나왔네. 타쿠얀지 기무란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길래 그래? 사실은 첫 날 블레어가 자신과 타쿠야의 외모를 비교했을 때 그 자체로 이미 감정이 상해 있던 터라 일리야가 조금 민감하게 반응했다.
"블레어는 타쿠야가 좋아?"
"네, 엄청 조아여! 나랑 매일매일 놀아주고, 밥 먹기 실타 그러면 먹여주고, 재미있는 것도 마니 가르쳐 줘여! 움...또오... 천둥번개가 쳐서 무서우면 타쿠야랑 가치 자써요! 그래서어 나눈 타쿠야가 너무너무 조아여."
"그럼... 타쿠야가 좋아, 형이 좋아?"
"타쿠야가 조아요!"
없었다.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세상의 중심에서 타쿠야를 외치는 블레어가 야속했는지 일리야가 살짝 뒷목을 잡을 뻔 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래, 오래 알고 지낸 친구 같은데 애초에 나랑 비교하는 게 말이 안 되지. 그러나 일리야는 인정할 수 없었다. 분노의 화살은 그냥 왠지 저 테이블에 앉아 숫자 카드를 정리하며 키득거리고 있는 알베르토 선생님한테 가야 할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생기부가 걱정인 일리야가 차마 뭐라 말은 못 하고 혼자 멘붕을 견뎌 내고 있는데 알베르토가 웃음과 비웃음을 적절히 섞어 일리야에게 위로를 건넸다.
"일리야, 너무 슬퍼하지 마욥. 한국에 처음 왔을 때부터 부모님들이 친하게 지내셔서 알고 지낸 지 10년도 넘은 친구래욥."
"...그, 그런가요? 에이, 저 별로 슬퍼하지 않았는데요? 하하, 즐겁다. 와! 신난다!"
머쓱해진 일리야가 괜히 시간도 남아 도는데 바쁜 척 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블레어, 형아는 이만 갈게. 점심 시간에 또 오겠다며 빠이빠이 손을 흔드는데, 갑자기 개별반 문이 드르륵 하고 힘차게 열렸다. 어떤 생날치가 나와 블레어의 아름다운 이별을 방해하는 걸까? 하고 고개를 딱 돌리는데 순간 일리야의 머릿속에서 전구가 탁 하고 켜졌다. 저 새끼구나?
"타쿠야!"
졸졸졸, 뛰어가더니 그대로 와락 안긴다. 일리야는 본능적으로 타쿠야의 전신을 스캔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길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데 한참이 걸렸다. 성장기인 걸 감안하더라도 180은 우습게 뛰어넘는 키에 조막만 한 머리통, 상도덕이라곤 없는 비율. 전체적으로 제법 까리한 외관에 일리야가 살짝 긴장했다. 분명히 아침 등교도 같이 했을 텐데 무슨 60년만에 만난 이산가족처럼 목을 끌어안고 방방 뛰는 블레어를 보며 입술도 물어뜯었다. 잠깐, 내 목만 안아주는 줄 알았는데 그냥 버릇이였어? 극도의 배신감에 일리야는 눈물이 차올라서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알베르토 선생님? 우리 블레어는 잘 놀고 있었나요?"
"그럼욥, 일리야가 재미있게 놀아주고 있었어욥."
"아, 일리야 선배님이시죠? 블레어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친절하게 대해 주신다면서요?"
"아니 뭐... 친절이라 할 것 까진 있나. 네가 타쿠야지?"
"네, 테라다 타쿠야입니다. 블레어 보호자, 뭐 법적 대리인 비슷한 거죠."
"얘 봐라, 친구 사이에 무슨 보호자에 법적 대리인이야?"
"그냥 친구라 하기엔 조금 깊죠, 저희 사이가. 그나저나 선배님 너무 귀찮지 않으세요? 우리 블레어가 워낙 아. 무. 나. 좀 잘 따라서요."
만약 컨셉이 호그와트였다면 분명 이 장면에서 둘의 눈빛에 스파크가 튀었을 거라고 알베르토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생각했다. 일리야는 그만 간다더니 안 가고 타쿠야와 눈빛교환을 계속했다. 컨셉이 해리포터가 아니라 엑스맨이었어. 영화 말고, SBS 예능 엑스맨.
이런 험악한 분위기에 블레어를 내놓을 생각이 없었던 알베르토는 미니 냉장고에서 싱싱한 한라봉을 꺼내 블레어의 눈앞에 흔들었다. 교실 안을 휘감기 시작하는 한라봉 향기에 블레어는 마치 좀비처럼 타쿠야에게서 벗어나 알베르토의 품에 쏙 안겼다. 턴탱님, tangerine 쥬떼여. 원하는 게 생기자 본능적으로 눈꼬리가 휘어지고 몸이 베베 꼬이더니 톤 자체가 간드러지게 변하는 거다. 그 아리따운 자태에 다리가 풀린 일리야가 학생의 본분도 잊고 수업 준비 종을 가뿐히 무시한 채 블레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껍질을 다 벗길 때까지 눈빛은 초롱초롱.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기다리다 선생님이 한라봉을 입에 넣어주기가 무섭게 오물오물 씹는다. 턴탱님, 마시써요! 그 모습에 절로 광대가 승천하는 일리야의 모습이 어찌나 꼴사나운지 타쿠야가 이를 빠득 간 채 눈웃음을 지으며 일리야를 향해 복화술을 시전했다. 슨븟늠, 으즈 그믄 가즈시져? 일리야가 한 살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뒤에 욕이 붙었을 수도 있었다. 왠지 혼자 가긴 억울한 일리야가 괜히 타쿠야의 발목을 잡았다.
"넌 안 가냐?"
"전 블레어 보러 간다 그러면 프리패스예요."
"자랑이니?"
"그럼요, 근데 선배님은 대학 가셔야죠."
약간 발로 걷어차는 것 같은 느낌도 들면서 타쿠야는 일리야를 쫓아냈다. 아... 더 보고 싶은데. 솔직히 다 먹은 한라봉 껍질 블레어 머리 위에 올려놓고 싶은 마음도 들었던 일리야가 아쉬움에 혀를 찼다. 일리야의 두 발이 교실 밖으로 나가기가 무섭게 문을 쾅 하고 닫아버린 타쿠야가 잽싸게 블레어에게 달려와 물었다.
"블레어, 저 형 뭐하는 사람이야?"
"일랴 형아?"
"벨랴코프 일리야라고 2학년인데, 사회복지사가 꿈이래욥. 1학년 때부터 여기 와서 저랑 애들 많이 도와줬어욥."
"아아... 그렇구나, 참 좋은 선배네요!"
하하, 강제로 입꼬리를 올려 타쿠야가 웃음 비스무레한 표정을 지었다. 눈빛에서부터 불순함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게, 별로 믿을만 한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되도록이면 가까이 두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받아쓰기 학습지를 준비하던 알베르토가 블레어 몰래 타쿠야에게 물었다.
"그런데 타쿠야, 블레어가 학교 생활 관련해서 뭐라 하지는 않던가욥?"
"네? 별 말 안 하던데...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무슨 문제가 없어서 걱정이예욥."
"...네?"
"반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아욥. 누구와 어울리려고 하지도 않구욥. 여기 애들하고는 잘 지내는 것 같은데...."
알베르토의 말을 듣던 타쿠야의 고개가 점점 내려갔다. 그저 블럭쌓기 놀이를 하고 있는 블레어의 머리카락을 얌전히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사실 블레어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 때 패거리들에게 맞았던 그 사건 이전에는 아무한테나 제법 활발하고 친화력도 있었다. 그 사건이 있고 나서도 제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다시 사람을 좋아하기 위해 노력하던 아이였다. 그 문을 억지로 닫아버린 건 타쿠야 자신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정말 기대하던 앤데, 빨리 새 친구들 사귀어서 재미있게 학교 생활 보내고 싶었을 텐데.
"그런 애들이랑 잘 지내는 거, 오히려 전 바라지 않아요. 제가 그러라고 했어요."
"타쿠야...."
"그냥 여기서만이라도 즐겁게 지낼 수 있게 해 주세요. 저 하나만 있으면 블레어가 얼마나 재미있어 하는데요. 집에선 제가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타쿠야 마음 내가 정말 잘 알아욥, 하지만 무작정 막는다고 될 게 아니잖아욥. 그리고 이건 블레어 뿐만 아니라 타쿠야에게도 좋지 않아욥."
"...."
"입학 첫 날 부터 블레어 돌보느라 정작 타쿠야 본인한테는 전혀 신경 안 쓰고 있잖아욥, 친구도 사귀려 하지 않구욥. 반에서 외롭지 않아욥?"
매트 깔린 바닥에 앉아 있는 타쿠야와 멀리 떨어져 의자에 앉아 있음에도 마치 타쿠야의 머리를 쓰다듬듯 다정한 태도를 한 알베르토의 말에 타쿠야는 차마 뭐라 대답하기도 어려워 한숨만 푹 쉬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타쿠야가 잘못한 건 없어욥. 난 다 이해해욥. 이제부터라도 블레어도 타쿠야도 더 잘 지내봐욥. 다가오려는 사람도 밀어내지 말고, 실수한 사람도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말구욥."
그냥, 그 말을 듣는데 타쿠야의 머릿속에서 그 아이가 스쳐지나갔다. 급식실에서 블레어의 교복에 국을 쏟아놓고 어쩔 줄을 몰라하며 쩔쩔매던 그 아이가.
"...네."
솔직히 말하면, 자신은 없었다. 그래도 노력해 보겠다고 다짐했다. 블레어를 위한 일이었으니까. 블레어에게 자신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우기기에는 이제 더 자신이 없었으니까.
암호닉
탑쳐 새달 네시반 체르니 주닝 뺑뺭 리디아
늦어서 죄송해여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개학하고 컴퓨터 처음 킨다능.....;ㅁ;ㅠㅠㅠㅠㅠ급하게 오느라 노잼인데다 분량도 왠지 마음에 안드네요ㅠㅠㅠㅠㅠㅠㅠ
아 빨리 진도 쭉쭉 빼고싶어요!!!!!!!!!!!!!흐엉 빨리 사구리는 애들 보고싶은데 갈길이 머네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그리고 제가 비축분을 안 만들어놓고 즉흥으로 쓰는거라 다소 부족한 점이 많아도 양해 부탁드려요ㅠㅠㅠㅠ
그래도 제가 언제나 여러분을 사랑하는 겋ㅎㅎㅎㅎㅎ아시죠?(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