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황궁 안에는 필수 지침이 있다. 창공을 가르는 새든, 개미 새끼 한 마리든 황궁에 몸담은 것들이라면 반드시 따라야하는 지침.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 이 지침을 무시하고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천자(天子)뿐이라. 만일 이것을 경히 여긴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황궁 안에서 사라진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 천자, 즉 황제를 만난다면 자신의 신분에 맞게 최대한 몸을 숙여라. 규방여인이 황궁에 발 들일 일이 무에 있을까 하지만, 제 아비가 정3품 이상의 관료라면 황제의 발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고개를 숙여라. 그리고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최대한 정갈한 목소리로, ‘황제 폐하. 천수, 만수, 흥복을 누리시옵소서.’하고 사뢰어라.
“누구의 여식이지?”
감히 눈도 맞추지 못할 황제의 물음이 들려오면
“소녀의 부친이 천자의 충신이 아닐까 저어되옵니다.”
한번쯤 튕겨줘야한다. 황제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을 지나쳐간다면, 무사태평하게 풍랑이 돌아간 것이라 여기고 작게 한숨을 내쉬면 된다. 허나,
“염려 말고 아뢰어라.”
다시금 되묻는다면, 깊은 황제의 목소리에 이끌려 고개를 들어도 좋다. 사내 주제 절세가인이라 소문 난 황제와 눈이 마주쳐 그대 마음속에 폭풍우가 휘몰아쳐도, 그 뒷일은 온전히 그대의 몫이다.
만약 자신의 신분이 황궁에 의탁하는 항아나 궁녀라면, 허리를 굽히고 모은 손을 무릎에 가져다대며 간결히 예를 취해라. 허나, 그 작은 움직임 한 번이라도 무례한 기색이 보였다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황제와 마주치는 일이 결연코 비일비재하지 않으나, 어찌되었건 황궁의 사람. 간결한 인사에 황제는 바람처럼 그대의 곁을 지나갈 것이다. 남은 흔적에도 설렘이 느껴진다면 다음 근무지로 황제의 거처인 대명전을 노려보거나 어느 높은 벼슬집 양녀로 들어가길 선택해라.
마지막, 제 신분이 천한 무수리라면 황제를 만날 일도 없겠지만 실수로 마주할 일이 생긴다면, 생각을 지우고 바닥에 엎드려 몸을 낮추어라. 아무런 말도, 아무런 행동도 취해선 아니된다. 허면 황제 역시 그대를 봐도 못본 척, 못봤어도 없는 척 지나칠 것이다. 그런 황제가 서럽다면, 새로 태어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으리라.
만인지상의 황제, 단 한 번의 흐트러짐으로 지존의 노여움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 인생에 황제를 볼 기회가 천재일우(千載一遇)일 것이나, 그 한 번을 억겁처럼 보내라. 그대의 목숨이 걸릴만큼 귀하고 높으며 유일한 자와의 만남이다.
둘. 태후를 만날 때를 유의해라. 태후는 황제의 모후이며 명실상부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이지만, 황제보다 단순하고 쉬운 편이다.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는 태후의 궁정에서 그녀를 만난다면, 제 상하귀천에 유의하지 말고 깨끗한 목소리로,
“태후마마의 은혜가 하해와 같사옵니다.”
라고 아뢰어라. 물론 앞전 태후를 본 적이 없더라도, 태후가 제 집 쌀 한 톨에도 도움주지 않았더라도, 감개무량한 그 한마디에 태후는 열여덟 소녀마냥 해사히 웃을 것이다. 자신은 황궁에 도움 하나 되지 않는 뒷방 늙은이다. 라는 생각에 평소 짜증과 시기를 달고 사는 태후에게 그 사소한 친절은 노인의 생기를 북돋아 줄 것이다. 허나 제가 한창 꽃 필 나이의 낭자라면, 고개는 최대한 들지 않는 것이 좋다.
“피부가 아주 탱탱하고 곱구나. 그것이 다 네 나이가 젊어 그런다. 네 때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이지. 꼴 보기 싫다! 누가 저 어린 것을 내 눈 앞에 갖다 놓으라 하였어?! 저 말간 얼굴에 인두자국라도 내어 돌려보내라!”
그 자그마한 노인네에게서 그런 악이 새어나올 수 있음을, 생동감 있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앳된 뺨에는 지울 수 없는 흉만 져 황궁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다면, 태후의 앞에서는 이것만 유의해라.
셋. 마지막 지침이라.
황후는… 가능한, 만나지 마라.
황후의 얼굴은 갓 만개한 복사꽃같이 하얗고 붉으며, 칠흑같은 머리칼은 태양빛마저 잡아먹을 듯이 일렁인다. 황궁의 밤하늘은 담은 눈동자와 그 안에 서린 낯선 신비감이 그대를 홀려놓을 지라도, 붉고 화려한 비단 옷자락에 숨겨진 낭창한 몸이 그대의 정신을 놓게 할지라도, 황후를 보거든 피해라.
그대가 사내건 여인이건, 태사이건 황궁을 청소하는 일꾼이건, 멀쩡한 인간이건 어디 하나 상한 병자이건, 황후는 되도록 마주하지 않는 것이 좋다. 황후는 황궁에서 소문난 박복한(薄福) 팔자를 사는 여인, 누구든 그녀와 엮이는 순간 팔자가 사납게 엉키리라.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한 번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불행을 안겨준다는 황후는 좀처럼 황후전을 나서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 황궁에서 황후와 시선을 맞추고, 한마디 이상 말을 섞는 이는 손에 꼽힌다. 그녀의 아비인 대승상과 오라비 문하시중, 매일 문후를 올리는 태후와 그녀를 수족처럼 받는 최고상궁 도미. 그리고.. 황후가 사랑해 마지않는 황제.
"입맞춰 주세요."
황제를 향해 건네는 음성이 미약하게 떨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듯 꽉 다물린 입술이 일자가 되어 실룩였다. 용기낸 황후의 그 한마디에도 황제는 차갑게 뒤돌았다. 그녀를 버려두고 내딛는 발걸음은 지나치게 가볍다. 멀어지는 황제의 뒤에서, 황후는 천천히 무너졌다. 심장이 뜨겁게 타올랐다.
황후는 마음에서 불이 일어
몸을 태우고 화신이 되었네
푸른 바다 밖 멀리 흘러갔으니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어다
황후열전(熱血皇后)
황후전은 이 넓고 화려한 주(周) 황실에서 두 번째로 크고 화려했으나, 가장 구석에 쳐박혀 있었다. 황후전 나인들은 크게 서른명 정도이며, 계절마다 거처를 바꿔 번살이 하는 다른 궁인들과 달리, 시신으로 황궁 밖을 나갈 때까지 황후전만 모셨다. 그 중 가장 지위가 높다던 최고상궁, 황후를 가장 곁에서 모시는 도미가 빠른 걸음으로 황후전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도미의 뒤에 나란히 선 궁녀 여섯. 오늘 황후의 치장을 도울 일손이었다.
“황후마마, 도미이옵니다.”
“들라.”
곧 마흔에 접어드는 도미는 황궁에서 보낸 오랜 세월이 깃든 뻣뻣하고 단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허나 상궁 도미만큼 황후의 의중을 잘 아는 이가 있으랴? 도미는 황후의 수족이자 어미였고 황궁 내 유일한 조력자였다. 황후가 도미를 믿는 만큼, 도미역시 오직 황후의 이익만 위하여 움직였다. 그러면서 도미가 가장 분노를 산 곳이 다름아닌 태후전인데, 태후는 우연히 도미를 볼 때마다 ‘저 물고기 같은 년, 내 언젠가 네년을 산 채로 태워버릴 것이야.’하고 저주스럽게 뇌까리다가도, 이내 소녀처럼 ‘어머’하고서 눈길을 거두었다.
“성심껏 모셔라.”
헌데도 끄덕도 않은 도미, 오직 황후의 말에만 움직인다. 도미의 단호하고 세찬 말에 일제히 예,하고 대답한 궁녀들이 황후의 곁으로 다가갔다. 먼저 향료를 곱게 갈아 다시 굳힌 것에 불을 붙였다. 제법 맑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황후는 눈을 느긋하게 감았고, 백옥같은 황후의 얼굴위로 고매한 연기가 날아들었다. 얇은 적삼만 입은 채 침대에 누운 황후는 적삼 자락 밖으로 손을 꺼내 가볍게 공기중을 휘저었다. 그 신호에 따라 타는 향을 내려두고, 다른 궁녀는 따뜻한 물기를 머금은 비단 자락을 들어 황후의 발을 닦았다. 옆에 서서 황후의 머리를 빗던 이가 짙은 머리칼을 조금씩 빗어올렸다. 둔덕진 이마위로 머리가 깔끔하게 올라갔다. 예쁜 두상이 살만큼 높이 묶은 머리를 천천히 돌려 땋고, 묶고, 땋는 것을 반복하여 황후의 머리장식까지 꼽아 마무리하였다. 황궁 내 모든 여인들은 머리를 반만 가볍게 묶거나, 상궁들은 비녀를 꼽는 것까지만 허락되었다. 가체를 쓴마냥 이리도 화려하게 머리모양을 할 수 있는 것도 유일하게 허락된 여인이 태후와 황후. 그 중 황후는 금과 수많은 보석으로 장식된 나비문양 핀을 돌려 꼽아 한층 더 화려함을 보태었다.
“마마, 무얼 대령하라 할까요?”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
“예.”
황후는 연 열흘 째 아침을 거르고 있었지만, 도미는 별다른 질책없이 수긍했다. 황후가 도미를 곁에 두는 궁극적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웃전의 말에 토 달지 않는 것. 도미는 황후의 신분이 얼마나 높은 지 뼈저리게 알고 인정했다. 황후는 눈을 감은 채 부스스 웃었다.
황후는 별다른 화장이 필요 없는 여인이었다. 간단한 연지와, 분, 그 외에 화려한 장신구들이 황후를 빛나게 만들었다. 청옥 귀고리, 한뼘만한 팔목을 감는 은색 팔지, 귀 뒤로 올린 머리를 제대로 넘겨주는 핀, 그것을 모두 매단 뒤 정중히 한 발 물러서는 궁녀의 움직임에 눈을 뜬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녀의 뒤로 궁녀들이 의복을 가지고 와서 섰다. 적삼 하나만 걸친 황후의 낭창한 몸은 확연히 눈에 띄었다. 어째서 황후전 근처에 사내를 들이지 않는 줄 알겠다. 의복을 꺼내던 궁녀는 생각했다. 눈시리게 하얀 적삼을 벗겨내고, 황후의 어깨에 붉은 적의를 걸쳤다. 가슴곁에서 매듭을 묶고, 그 위에 꽃 무늬를 바탕으로 한 고급스런 비단 의복을 덧대어 입혔다. 치렁치렁하다 싶을 정도의 치마의 품을 살려줄 고의를 안에 더 입고, 마지막으로 또 가슴곁에서 매듭을 지었다. 새빨간 옥대. 헐렁한 품을 조여줄 옥대를 황후의 허리에 매고 뒤에서 조였다. 두 손에 들어올 법한 허리가 잘록하게 옥대에 감겨들었다.
“황후마마 납시오!”
황후에겐 두 가지 길이 존재한다. 그 지위에 맞게 화려하고 아름답게, 온갖 사치를 부리는 것. 그리고 한 나라의 현숙한 안 주인답게 검소하고 간결하게 치장하는 것. 지금의 황후는 따지자면 전자에 속했다. 고귀한 신분임에도 무뎌져버린 생채기에 적응하기위한 황후만의 생존법. 더 아름답고 화려하게 저 자신을 숨기는 것.
황후는 바로 황제가 있을 대명전으로 행차했다. 평소처럼 오는 길에 대소신료를 비롯한 사람 한명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황후의 입가에는 긴장감 있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황상께선 아니 계시는가?”
“저, 그것이….”
대명전 문 앞까지의 행차에도 내시백은 말을 더듬으며 앞길을 트지 않았다.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황후의 눈동자가 허공을 맴돌았다.
“백씨가 안에 있느냐?”
옆에 서있던 도미가 직감적으로 물었다. 똑같은 신분인 상궁의 하대에 눈썹을 꿈틀하던 내시백은 황후에게 바짝 고개를 숙였다. 근래 폐하의 총애를 받았던 항아 백 씨가 또 대명전에 든 것이었다. 폭이 넓은 소맷자락에 숨겨진 황후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비인 대승상을 움직여 그리도 황제의 곁에서 떼어놓으려 노력했던 계집. 황후의 안색이 서서히 변하는 것을 눈을 흘겨 본 내시백은 눈치를 보다 말을 건넸다.
“황후마마, 염려 놓으소서. 백 씨 항아 일로 태후마마께서도 편전에 왔다 가신지라… 폐하께서 백 씨를 황궁에서 내치려 부르셨다 하옵니다.”
금방 처연한 표정에 눈물이 그득 걸려있던 황후의 얼굴이 일말의 기대감으로 들어찼다. 내시백은 그것을 보고 더욱 눈을 돌렸다. 내시백도 어쩔 수 없는 사내였다. 그의 감정을 읽은 도미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저 천 것이 감히 어딜, 도미의 표독한 눈은 그리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더물어 입가에 들어찬 썩은 웃음도 북풍 같았다.
“내시백.”
“예, 황후마마.”
“환관들과 궁녀들을 모두 물려주겠는가? 나는 이 문 앞에서 황상을 기다리겠네.”
따스한 웃음과 건네지는 말에, 내시백은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사옵니다.”
황제의 대명전을 지켜야 할 궁인들을 모두 물리라니, 말도 안 되는 요구였지만 황후에겐 가능한 것이었다. 내시백의 지시에 따라 모든 궁인들이 자리를 비우고, 대명전 안 문과 곁 문을 사이에 둔 복도에는 황후와 도미만 남았다. 순식간에 황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도미야, 너는 밖을 살피렴.”
“예, 마마.”
여전히 나긋한 목소리로 도미에게 명을 내린 황후는 곧장 문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주나라의 가장 큰 황궁, 그리고 그 중심에 우뚝 선 황제의 대명전. 만인지상과 문 하나를 틈에 두고 선 황후는 겁도 없이 문을 살짝 열었다. 열린 틈새로 눈을 비추자, 대명전 안의 풍경이 보인다.
“백야.”
황제, 정국이 보였다. 황후의 눈이 설핏 접혔다. 곧 편전회의를 앞두고 있는 황제는 면류관을 쓰고 황룡포를 입었다. 면류관에서 내려온 주렴이 정국의 얼굴을 살짝 가렸으나, 그 옥안은 변함없이 다정하고 사무치게 아렸다. 허나 그 속에 서린 표정은 냉기가 감도는 냉혈한의 것이었다. 그럼 어때. 황제가 저 얼굴을 하고 대하는 것이 백 씨인데. 황후는 생각했다.
황제의 앞,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은 백야. 문 손잡이를 잡은 황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황후의 미색과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맑은 백야의 얼굴에는 비통함과 슬픔이 잠겨 있었다. 그 눈은 오랫동안, 정국을 쫓았다. 제 사내를 보는 백야의 눈이 저만큼 애절하다는 사실이 황후는 분했다.
“폐하… 소녀는 이 황궁을 떠날 수 없습니다. 어찌… 이 곳에 폐하께서 계신데….”
저 계집이 지금 뭐라 떠드는 것이야. 항아라면 대명전 궁녀가 되지 않는 이상 볼 기회도 잘 없는 황제의 앞에서, 어린 항아는 횡설수설 연정의 말을 건넸다. 감히, 황궁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인 황후, 자신조차 얼굴 한 번 마주하고 말 한 번 하는 것이 억겁같은 황제인데….
“소녀를 버리지 마세요, 폐하….”
아직 앳되고 여린 백야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말했다. 그녀의 행동이나 말투, 모든 것이 정인을 대하는 태도였다. 항아주제에 황제 앞에서 자신을 소녀라 칭하는 것도, 정인이니까 그런 것이었다. 백야의 아린 말을 덤덤히 듣던 황제의 얼굴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황후는 그것에 안심하기로 한다. 황상은 제게도 그러하시지만, 다른 계집들에게도 그러하시군요. 그거면 되었습니다. 됐어요.
“떠나라. 더는 내 눈 앞에 띄지 마.”
“폐하…!”
황제는 아예 백야에게서 돌아서 용상으로 가는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타고난 지배자. 그래서 여인을 버릴 때조차 무참하고 강한 사람. 백야는 아예 울부짖었다. 허나 황제는 강한 사람. 황후는 그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백야. 너는 폐하를 모르는 구나. 폐하께는 정도 없고, 동정도 없고, 연모도 없단다. 너는 무얼 기대한 것이니? 그래봤자 버려지기 밖에 더 하였니? 황후의 텅 비어 공허한 눈은 문 틈새로 백야를 바라보며 그리 말했다.
“폐하께선 다 잊으신 거군요….”
“말하지 말라.”
“저는 아직 그러지 못했는데, 폐하께선…!!”
백야는 두려움이 없었다. 왜냐면 그녀는 제 앞의 정국을 황제가 아닌 사내로 보았으니까.
“소녀와 함께 한 시간을, 모두 잊으신건가요?….”
백야의 마지막말에 여운이 졌다. 뒤에서 백야가 무슨 말을 하건 막힘없이 걸어가던 정국의 걸음이, 문득 멈춰섰다. 황후는 점점 자신을 죄어오는 불안감을 느꼈다. 동요하지 마십시오. 저 계집의 한 풀이에 동요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황후의 예쁜 두 눈은 황제가 곧장 돌아서면서 볼품없이 일그러졌다. 인내를 마친 정국은 곧장 돌아서 계단을 내려갔다. 갑작스런 황제의 걸음에 눈물로 범벅이 된 눈을 동그랗게 뜬 백야의 입이 멍청하게 벌어졌다. 정국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큰 보폭으로 백야의 바짝 앞에 다가온 정국은 무릎을 살짝 굽히고 큰 손으로 백야의 허리를 잡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풀린 백야는 제대로 서지 못했지만, 정국은 뼈마디가 불거진 큰 손으로 백야의 허리를 감싸안고 그녀를 지탱했다.
“폐,폐하…”
“너는 어찌 나를 한낮 필부로 만드느냐?”
“…….”
정국은 백야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곧장 입을 맞췄다. 여인만큼 붉은 황제의 입술이 백야를 삼켰다. 맹수의 뜨거운 욕망을 읽어낸 소녀는 서투른 몸짓으로 정국의 성마른 울대를 자극했다. 황제가 서툰 그녀의 행동에 갈라진 신음을 뱉어낸다. 문을 잡은 황후의 창백한 손이 허공을 헤집는다. 백 씨는 소녀가 아니라, 황제에겐 여인이었다. 그 사실을 눈앞에서 목도한 황후는 정신이 어지러웠다. 어째서 황후의 손은 황제의 문고리를 몰래 쥐고 있으며, 어째서 한낮 항아의 손이 황제의 뒷목을 둘러져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황상….”
황궁 가장 아름다운 황후의 음성은 허공에서 흩어졌다. 면류관이 짙은 입맞춤을 나누는 정국과 백야 사이를 어지럽혔으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다는 듯, 황제는 백야의 허리를 잡고 들어올려 옆 협탁에 앉혔다. 아랫입술을 머금는 황제의 뒷통수를 겁도 없이 쓰다듬던 백야가 질끔 눈을 살짝 떴다. 황제가 다정한 손으로 백야의 목선을 살살 쓰다듬고 다시금 입술을 살짝 부딪혔다. 백야는 가슴이 쿵쿵 뛰었다.
“황후마마….”
황후는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백야와 입맞추는 황제를 보았다. 뒤에서 도미의 걱정스런 음성이 들려와도, 그 안색이 파리하게 굳어져도.
제 앞에선 늘 차가운 사람이었다. 황제에게도 저런 면이 있었나? 백 씨 앞에선 다정하고, 그 누구보다 따뜻했다. 왜? 황후는 자신인데, 대체 왜? 너무 분하고 화가 나서 황후의 가슴이 문드러졌다. 억울했다. 백야가 대체 무엇이길래 황제를 녹이는가? 대체 무엇이길래.
“도미야.”
“예, 마마.”
“합방일이 언제라 하였지?”
“보름 뒤옵니다.”
얇은 비단천을 헤집는 그 다정한 손길을 더는 볼 자신이 없다. 피눈물을 머금고 황후는 문을 조심스레 닫았다. 황후가 황제를 유일하게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은 합방일밖에 없다. 허나 황제와 합방이 이때까지 제대로 성사 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때까지 기다려야 겠구나. 이젠 백 씨가 쫓겨날 일도 없으니, 다신 폐하를 뵙지 못하겠구나. 황후는 힘없이 돌아섰다.
“오늘 내가 다녀간 사실은 황상께서 모르셔야 한다. 알겠느냐?”
“허,허나 황후마마….”
대명전을 빠져나온 황후와 도미는 밖에 서있는 내시백에게 말했다. 내시백은 황궁 안 모든 일을 꾸밈없이 황제에게 아뢰야 하는 존재, 하여 황후의 말에 곤란한 기색을 비췄다.
“부탁,한다. 황상께는 말하지 말아다오.”
허나 황후의 처연한 웃음에 내시백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녀의 미색 또한 내시백의 마음을 혹하게 만들었으나, 어딘가 곧 무너질 것같은 황후의 얼굴에 내시백은 마음이 안 좋았다. 수긍한 내시백은 잔잔히 바라보던 황후는 이내 돌아섰다. 대명전에서 아주 천천히 멀어지는 황후의 뒷모습은 꼿꼿하고 건드릴 수조차 없을 듯 완고했다. 여린 몸을 감싸안은 화려한 의복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皇后
列傳
주(周)나라 황실, 태후궁 안.
“그래서 내가 뭐라 대답했는지 아느냐?”
“제가 알겠습니까?”
“폐하께선 생선을 아주 좋아하시니, 튼-실한 도미를 상에 올리라 그랬단다. 하하.”
“…….”
“그랬더니 황후 뒤에선 그 도미년 표정이 어찌나 썩어가던지. 오호호. 오호… 어머, 참 주책이야.”
원래 황제의 뒤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며, 호위를 하고 있어야 할 자신이 왜 태후의 주책이나 받고 있는지 지민은 몰랐다. 한시진 동안 태후가 하는 말이라곤 황후전의 나인들을 욕하는 것 뿐이었다. 특히 ‘도미’라는 여자. 아니 차라리 욕을 할거면 황후 욕을 하던가, 황후 얘기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황후의 수족이라는 도미의 이야기 뿐이다. 또 실컷 욕을 하다가 갑자기 수줍게 호호호 웃으며 소녀마냥 제 주책을 탓하는 것이 벌써 열 번째 반복되었다. 지민은 정신이 멍해졌다.
“황상이 너를 보내주어 내가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황상의 명대로 매일 들러 한 시진씩 내 말동무를 해주렴.”
연지를 곱게 바른 입술을 끌어올리며 태후는 찻잔을 들었다. 망할. 지민은 낮게 욕을 짓걸였다. 며칠전 황제는 평소처럼 무심한 말투로 제게 청천벽력같은 말을 했다.
“태후께서 요새 적적하시다는군.”
그 말을 꺼낼때부터 왠지 모를 불안감에 지민은 인상을 지푸렸다.
“그래서 괜찮은 녀석을 하나 태후전에 보내야 겠어.”
“…….”
“너, 말이다.”
정국의 또렷한 시선이 지민을 콕 집어 냈다. 지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태후라면 황궁안에서도 유명하지 않은가? 말이 너무 많아서, 해 뜰 때 이야기를 시작하면 별이 뜰 때 끝낸다는 그 전설을 만들어낸 장본인. 아니, 항상 그림자처럼 제 뒤에서 저를 지키는 익위사를 맘대로 그렇게 보내도 된단 말인가?
“매일 한 시진씩 태후전으로 가, 태후마마의 말벗이 되어 드려라.”
“왜 하필 접니까?”
“네가 제일 잘 생겼으니까.”
평소처럼 상소문을 집으며 퉁명스러운 어조로, 정국은 그렇게 말했다. 덕분에 지민은 완전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어버렸지만. 오늘로 열흘 째. 매일 같은 이야기로 이렇게 시간을 끄는 태후가 대단해질 지경이다. 오늘도 이 끔찍한 시간이 아주 느리게 끝이 났다.
“허면 내일도 이 시간에 오거라.”
“예.”
태후의 다정한 웃음을 무표정으로 받으며 지민은 태후궁을 나섰다. 힘든 몸으로 마중 나오려는 태후도 겨우 말렸다. 대명전으로 향하는 지민의 발걸음에는 굳은 의지가 들어 있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오늘은 기필코 황제에게 제 의중을 전하리라. 계속 태후전에 출근하라 한다면 그만 둘 의사도 있었다.
“폐하는?”
“안에 계신다. 헌데 잠깐….”
대명전으로 드러선 지민은 문 앞에 서있는 내시백을 보고선 바로 문을 열려고 했다. 헌데 뜸을 들이는 내시백의 태도와, 다른 때보다 훨씬 적적한 대명전.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올린 지민은 정색하며 내시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처소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펼쳐진 관경에 내시백을 비롯한 궁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황제가 또 그 항아와 혀를 섞고 있었다. 신하된 도리로써 지민역시 고개를 숙이는 것이 맞았으나, 지민은 그 광경을 똑똑히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슬쩍 눈을 뜬 백야가 지민의 발견하곤 정국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백야의 손짓에도 제 허리를 그러쥔 손을 놓지 않던 정국은 한참이나 지나서야 고개를 떼곤 문에 기대어 이쪽을 쳐다보는 지민을 보았다.
“뭐하나?”
“관람중이었습니다.”
슬쩍 어이가 없는 듯한 황제의 표정에도 내색 않던 지민은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얼굴이 붉어진 백야는 정국의 손길에 의해 흐트러진 의복을 정리하고, 번진 입술도 손등으로 닦아내었다. 입술을 축이던 정국은 백야의 허리를 잡고 협탁에서 내려주었다.
“내시백.”
그리곤 내시백을 불러 백야를 대명전에서 내보냈다. 황제로 돌아온 정국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시선으로 지민을 바라보곤 협탁 옆 의자에 걸터앉았다.
“눈치가 없는 건가. 아니면 예의 따윈 개나 줘버린 건가.”
“폐하께서 그 계집을 아직도 싸고 도실 줄은 몰랐습니다. 원래 잘 질리시는 성향이 아닙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지민은 황제의 앞에서 유일하게 무례하고, 어떤 말이든 뱉어내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정국이 유일하게 무례를 봐주는 사람이 지민이라는 뜻이었다. 정국의 날카로운 시선이 지민을 향했다. 물론 적의나 진정으로 분노가 섞인 것은 아니었다.
“하나, 태후전에는 그만 가고 싶습니다.”
“왜? 태후께서 널 아-주 마음에 들어 하시던데.”
“황궁 일 그만둘겁니다.”
정국의 능청스러운 답을 지민의 단호한 말이 칼같이 잘랐다. 장난기 멤돌던 정국의 얼굴이 지민의 말에 단번에 굳었다. 미친놈.
“황궁에서 나가면 뭐하게?”
"무얼 하든 굶어죽기야 하겠습니까.”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는군. 좋다. 그리 괴롭다면 태후전에 가는 것은 사흘에 한 번으로 줄여주지. 다음 안건은?”
사흘에 한 번. 사흘에 한 번이라도 태후의 기나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속이 좋지 못했지만, 이만큼도 황제가 큰 배려를 한 것이라는 걸 안다. 태후는 태후이기 이전에 황제의 모후니까. 지민은 이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둘, 애정행각은 편전회의가 끝난 후에 은밀히 하십시오. 이런 대낮에 언제 대신들이 폐하께 알현을 청할지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그걸 네가 왜 신경 쓰는 거지? 네가 내 안사람인가?”
“방금같은 일이 생길까봐 그럽니다. 저도 한창 피끓은 청춘이라.”
금방 지민이 농담같은 말을 한 것 같은데… 너무 아무렇지 않은 어조라 정국은 잠시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러다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실 이번 일은 실수였다. 분명 태후며 대신들이며 하나같이 하는 소리들이 똑같기에 정말 백 씨 항아를 황후에서 내보낼 생각이었다. 뭐, 결과는 정반대로 이어졌지만.
“그럼 편전에 납시시지요.”
모든 요구가 수렴되자 가볍게 미소지은 지민이 옆으로 비켜섰다. 나름 황제의 길을 터 준 것이었다. 대체 속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지민을 바라보던 정국이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붉은색과 금색이 섞인 고아한 용포를 차려입은 황제는 제게 너무도 잘 어울리는 면류관을 쓰고 뒷짐을 진 채 높은 대명전 계단을 내려왔다. 그 뒤에는 순차적으로 지민을 포함한 익위사 넷, 내시백을 포함한 환관 여섯, 수가 꽤 되는 궁녀들과 항아들.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온전히 웃전인 황제를 보필하는 것에 있었다.
“편전회의를 열흘에 두 번으로 줄일까 생각중이다.”
“황제폐하 뜻대로 하오소서.”
황제의 대명전은 황궁의 중심에 있지만 동쪽 끝에 있는 편전까지는 거리가 꽤나 되었다. 주 나라의 유명한 지침 때문인가, 그 먼거리를 가면서도 코빼기하나 사람이 비치기만 하면 부복하기 일쑤니, 귀찮음과 무료함에 정국은 편전회의를 파격적으로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 나라안에서 정치라는 것을 하는 사람은 황제 자신 뿐이었다. 황후의 아비인 대승상을 주축으로 외척이니 척신이니 불한당들이 주 황궁에 가득한 건, 만인지상 황제의 유일한 불편함이었다.
“백야는 어디에 두었느냐?”
“백 씨 항아는 대청전에 보냈사옵니다.”
“그래?”
황제는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워낙 쉽게 질리고, 정 또한 잘 주지 않는 황제가 아주 오랜만에 관심을 보인 백(白 )가 야(夜). 주변의 모두가 그녀를 내치라 말하고 있었지만, 절대권력의 황제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암, 그 어떤 자가 주나라의 전쟁영웅 지금의 황제 말에 토를 달 생각을 하겠는가. 지금까지 반발한 용기만 해도 가상했다. 편전으로 향하던 막힘없는 황제의 걸음이 느려진 건, 누군가를 발견하고 부터다.
“황후…”
정국의 뒤에 서있던 지민이 입밖으로 나직하게 그 누군가를 읊었다. 황제의 황후. 저렇게 느릿한 걸음으로 황궁 가장 구석에 있는 황후전으로 향하는 황후였다. 절색으로도 유명하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조정 실세 대승상의 여식으로 유명한 황후, 지민은 황후는 딱 두 번 제대로 보았다. 태후도 황후전의 ‘도미’이야기만 맨날 했지 황후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얘기 한 적 없었던 것 같다. 황제역시, 황후얘기는 일절 입에도 대지 않았다. 문득 주나라의 지침을 생각해낸 지민의 얼굴에는 의문이 들어찼다. 절색인데,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술렁대는 그 소문의 황후는 대체 어떤 여인일까? 뒷모습만으로는 화려하고 곧 바닥에 쓸릴듯한 긴 의복 사이에 몸을 숨긴 작은 여인이었다. 그 여인의 뒷모습에 황제의 두 눈이 움찔했다. 여실히 느린 황후의 발자취 뒤, 황제는 그녀를 탐색하듯 느릿하게 뒤를 따라 걸었다. 황후 쪽에서는 적은 궁인들 중 몇몇만 황제를 발견한 듯하였으나, 황후는 아직 황제를 의식하지 못하고 정면만 꼿꼿이 바라보고 걸었다.
“폐하, 황후께 아뢸까요?”
“아니 됐다.”
내시백이 황제의 의중을 살피며 묻자, 정국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황후도 황제도 대체 생각을 알 수가 없다. 황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에는 다정함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탐색하는 눈은 집요했다. 뒷짐진 황제 특유의 거만함은 한껏 두드러졌다.
“황후마마 안색이 안 좋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가뜩이나 창백한 낯이 더 파리하게 질렸다. 대명전에서 나온 뒤, 황후는 아주 느릿하고 흐트러짐 없이 걸어 이까지 왔으나 그것이 못내 불안했던 도미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래. 헌데 자꾸 다리가….”
목소리에도 힘이 없더니, 끝내 황후가 무력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일절 당황하지 않는 도미의 얼굴에 당황함이 들어찼다. 그건 황제의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눈 앞에서 꼿꼿하게 걸어가던 황후가 갑자기 풀썩 쓰러졌다. 툭 치면 넘어갈 것 같던 무거운 의복을 감당하던 몸이 순식간에 무너지자 황제의 얼굴에도 잠깐의 당황이 스쳤다.
“폐하…!”
황후를 살피느라 무릎을 굽힌 도미가 이제야 황제를 발견하고는 부복했다. 황후 뒤의 궁인들의 부복에 시선도 주지 않은 정국의 눈이 황후를 향했다. 그리곤 다가오는 정국의 걸음을 따라 황후전 궁녀들이 일제히 길을 텄다.
“갑자기 황후가 왜 쓰러진 것이지?”
“소인의 불찰이옵니다! 황후마마께선 심신이 미약하시어 한시라도 마음을 놓아선 아니되는 것인데…”
“아니다.”
도미가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 헌데도 정국은 태연자약한 얼굴로 도미의 죄를 치사했다. 보통 아끼는 이가 갑자기 쓰러지거나 앓는 일이 생기면 웃전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로 아랫것들을 다그치는 것이 다반사다. 도미는 괜히 기분이 상했다. 황제는 황후의 혼절에도 별로 자극이 없는 모양이었다. 황제는 위에서 빤히 황후를 보기만 할뿐, 직접 친히 무릎을 굽혀 황후의 안색을 살피거나 접촉을 하진 않았다. 황제가 본 황후의 얼굴. 항상 센 척하고 고집 센 자그마한 얼굴이 생기없이 흩어졌다.
"지민.”
“예, 폐하.”
“황후를 옮겨야 겠군.”
정국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지민을 불렀다. 쓰러진 황후를 어의에게 보이더라도 우선 황후전에서 해야 했다. 헌데 그걸 보통 익위사에게 시키나? 지민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황후는 유일무이한 황제의 여인. 사내구실을 할 수 없는 내관이면 모를까 다른 사내의 손을 타서는 안 될 존재다. 지민은 엄연히 멀쩡한 사내였다. 그런 이가 황후를 안아 옮기거나 손을 대는 일 자체가 예민한 사항이었다. 도미의 얼굴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여기선 저 연약해보이는 내시백이 황후를 안을 수 있을 것 같아보이지 않으니, 황제가 황후를 드는 것이 가장 나은 선택일텐데… 황제더러 황후를 좀 옮겨달라 함부로 청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망설임을 띄는 지민의 얼굴에 의문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정국이 고개를 까딱였다.
“왜?”
“제가 함부로 황후께 손을 대도 될지….”
“그럼 짐이 황후를 안아들어야 하는 것이냐?”
당연한 소리를. 지민은 그런 얼굴로 정국을 보았지만, 정국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묻는다. 하는 수 없어진 지민이 황후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혔다. 눈앞에 보이는 황후의 감은 눈이 지민의 시선을 옭아맸다. 황후의 머리 밑으로 손을 끼운 지민이 그녀의 쇄골쪽에서 힘주어 당겨 황후를 품에 안아들었다. 왼쪽 팔에 감기는 화려한 치맛자락의 느낌이 생경했다. 그토록 궁금해하던 여인이 제 품에 안겨있음에도 지민은 일부로 고개를 들어 정면만 보았다. 옆에서 불타는 시선으로 노려보는 도미의 시선때문에도 그러했지만, 황후는 황제의 여인이었다. 그 고귀한 여인의 가는 숨결이 제 품에서 느껴진다. 지민의 품에 단번에 안긴 황후를 잠시 물끄러미 보던 황제가 먼저 고개를 돌려 나아갔다.
“황후전으로 가겠다.”
정국의 말에 따라 모든 일행이 편전과 반대인 황후전으로 향했다. 황제는 다시 한 번을 돌아보지 않았다. 지민은 무심한 황제와 힘을 잃고 쓰러진 황후, 그 사이의 기류를 읽어냈다. 그러고보니 지금 황제의 마음을 잡아챈 건 항아 백 씨. 아까 전 지민이 생경하게 보았던 풍경이 다시금 떠올랐다. 황제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백야. 허면 제 품안에 이 작은 황후는 어찌 되는 것이지? 지민은 답지 않게 머리가 복잡해졌다. 제 목에 걸쳐진 손과 가벼운 몸이 신경 쓰인다.
“황상…”
품안에서 곧 꺼질 듯 작고 여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황후는 무의식중에 황제를 불렀다. 그걸 느낀 지민이 처음으로 제 품 안의 황후를 내려다보았다.
“내시백은 태의를 불러오라.”
“예, 폐하.”
이 여인이 애타게 찾는 황제는 앞에서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앞서 걷고 있었다. 지민은 괜시리 황후를 든 손에 좀 더 힘을 주어 제 품에 당겨 안았다. 고귀한 여인의 의외의 모습에 일순간 생긴 동정심인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여인을 향하는 사내의 본능인지 지민도 알 수 없었다.
황후전에 당도했다. 처소 바로 앞에서 그제야 돌아선 정국은 황후를 든 지민에게 다가왔다. 제 아내가 다른 사내의 품에 안겨있음에도, 황제의 표정은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이제 내려주지. 황후는 상궁들이 모셔라.”
황궁의 주인 황제의 짙은 음성이 정신을 깨웠다. 지민은 황후를 내려주려 했고, 도미를 비롯한 상궁들이 정신이 없는 황후를 부축하려 다가왔다. 헌데, 일순간의 일이었다.
“…하.”
황후가 사내의 품에 안겨들었다. 약간의 힘이 들어간 그녀의 두손이 지민의 뒷목을 그러안고, 그 품을 파고들었다. 지민의 몸이 순식간에 경직되었음은 물론, 주변의 모든 이들이 숨을 참았다. 황제의 앞에서 그만의 여인 황후가 다른 사내를 안았다. 지민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작고 부서질 것같은 몸이 저를 힘주어 안는 것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하던 정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건 황후가 지민을 안아서도, 지민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어서도 아니었다. 황후의 감긴 두 눈에서 흘러내린 것이 눈물임을 안 순간, 황제의 평정은 깨졌다.
/ 황 후 열 전 熱 血 皇 后 /
여러분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에 황후열전으로 찾아뵙는게 설레기도하고 많이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기본적인 스토리나 표현 등이 많이 바뀔 것 같아요,,!
(황후도 악독하고 대외적으로 성격이 포악하게 알려졌다 이 설정은 지웠어요
많은 사람들이 황후를 피하는 이유는 황후가 독수공방한다는 소문이 퍼져서,
비운의 대명사라 그렇습니다)
아마 예전에 올렸던 것에서 가장 수정을 덜하는 편이
이 1편일지도 모릅니다.. 정말 잊지 않고 황후열전을 기다려주시는 분들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기존의 암호닉 기록해 놓은 것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구 황후열전 사랑해주셨던 여러분 다 기억하고 있으니 편하게 말씀해주세요ㅜㅜㅜ
피드백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앞부분에 쓰인 독백인 '지귀설화'를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