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 화
五 화
六 화
四.
주나라의 천자(天子)는 전장에서 붉은 투구라 불린다. 피만치 붉은 투구를 쓰고 적장을 가차 없이 베다 보면, 그의 얼굴도 반쯤 피로 뒤덮여 알아 볼 수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그저 붉은 투구를 쓰고 있으면 무조건 피해야한다, 할 수 밖에. 나락으로 떨어지던 주나라를 구한 진정한 전쟁영웅. 그것이 정국을 부르는 명칭이었고, 그 이름값을 하듯 주나라는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그럼에도 민심이 이토록 평온하고 나라가 안정적일 수 있는 까닭은 연이은 전쟁에서 매번 승리를 하기 때문이었다. 황제 아래에 있는 병사들은 강하다. 그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괘씸한 놈.”
지민은 어깨에 난 상처를 붕대로 감으며 뇌까렸다. 황제의 익위사. 전장에서조차 황제를 지켜야 하기에 황제만큼 수많은 전쟁을 치룬 그는, 오늘 아군의 목을 베었다. 최근 북방의 진(進)나라와의 전쟁을 끝으로 살아 돌아온 장군들은 황궁으로 복귀했고, 영토확장과 부국강병을 위한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나라에 목숨을 바쳐야 했다. 헌데 그 중 하나가 회군하는 길에 사라졌고 황궁에 복귀하지 않았다. 거의 달포가 지난 일이었다. 분명 화살이 팔에 스친 것을 제외하곤 별다른 부상도 입지 않았다는 상장군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난 후, 익위사와 병부 쪽에서는 나라 곳곳을 수색하여 상장군을 찾았다. 그리고 오늘, 외딴 산지에 초가 하나를 짓고 이방인 여인과 살림을 꾸린 상장군이 발각되었다.
“혼인을 한듯한데… 진나라 계집이었사옵니다.”
그 혼비백산한 전장터에서 어느 틈에 눈이 맞은 것인지, 상장군은 망국 진나라의 계집과 함께 살기위해 나라를 버리고 도망갔다. 어차피 향한 곳도 자신의 나라이거늘…. 아직 황제에게 보고하기 전이었지만, 어차피 제 뜻대로 해도 황제는 별 말 하지 않을 것이었다. 나라를 배신한 것은 목숨을 끊어 마땅한 일. 지민은 수많은 전장에서 동고동락한 상장군을 향해 검을 빼 들었다.
“연정 때문에 대의를 저버리다니. 참으로 유감입니다.”
“익위사! 제발, 제발 이 여인만은 살려주게.”
일생의 대부분을 검을 쥐고, 전장과 황궁을 넘나들며 마음까지 무뎌진 지민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얼굴로 상장군을 내려다보았다. 끝까지 정인을 지키고자 무릎을 꿇은 상장군을, 지민은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의 뒤에서 함께 전쟁터를 누비며 그 누구보다 대담하게 적을 베던 상장군이 어찌 이리 초라하게 변할 수 있단 말인가.
“아직 폐하께선 모르십니다. 그 여인을 버리십시오. 허면 신은 아무것도 모른 척,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상장군을 황궁으로 모실 겁니다.”
전우였던 상장군을 향한 일말의 정이 남은 지민이 건넨 마지막 기회였다. 세상을 다 잃은 듯 망연한 눈으로 바닥에 손을 짚은 상장군은 제 옆에서 겁에 질린 여인을 멍하니 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제발, 차라리 내 목숨을 거두고 이 여인만은 풀어주게. 변방이든, 이 주나라 밖이든 어디로 쳐내든 상관없네.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게. 익위사….”
지민의 입에서 기어코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답이 없군. 더 이상 아군이 아니라 적을 향하듯 가늘어진 눈으로 상장군을 바라보던 지민이 칼을 꺼내 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무정한 그 검은 상장군의 옆, 진나라 여인에게 겨누어졌다. 여태까지 비굴하게 매달리던 상장군의 눈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지민의 검에 의해 여인의 목에서 피가 새어나오자 정신을 놓은 듯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상장군이 옆 벽에 걸린 제 칼을 집어 들었다. 지민의 뒤에 서있던 병사들이 반응할 새도 없이, 상장군은 그 명색에 걸맞게 빠른 속도로 지민의 검을 쳐냈다.
“기어코 피를 보시겠다?”
“여인을 살려 달라하지 않았나.”
“연정에 눈이 멀면 모든 사내가 이리 됩니까?”
사람의 마음만큼 의미 없고 덧없는 것이 또 어디 있다고. 초가 한 칸에서 지민과 상장군의 칼이 여러 번 엇갈렸다.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 상대의 허점을 찾아 칼을 치켜드는 상장군을 막아낸 지민은 마지막으로 한 때는 아군이었던 상장군을 향해 연민의 눈빛을 보냈다.
“부군!!!!”
여인의 비명소리와 함께 상장군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복부를 생경하게 파고드는 검의 느낌이 고통스러웠다. 입에서 울컥 피가 토해졌다.
“여인을 살려…주게, 제…발….”
끝까지 여인의 목숨을 애타게 구걸하던 상장군은 기어코 눈을 감았다. 여인은 악에 받친 듯 비명을 지르고 엉엉 울며 상장군의 시신을 붙들었다. 허나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지민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눈물로 얼룩진 여인의 얼굴을 천천히 치켜들었기 때문이었다. 분노와 두려움. 그 두 가지 감정이 섞인 여인의 눈동자가 그런 지민을 노려보았다.
“네 부군의 부탁을 들어주지. 있는 힘껏 도망쳐라. 되도록이면 내 눈에 띄지 마.”
지민은 여인을 놓아주었다. 아직 도망친 포로여인의 숨이 붙어있는 데도, 미련 없이 돌아섰다. 저승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두 사람 모두를 죽일 듯 굴던 지민은 동료였던 상장군을 마지막 염원을 들어주고서 초가를 나섰다.
“익위사 나으리, 저 여인을 저렇게 살려두어도….”
“폐하껜 비밀로 하지. 상장군의 죽음도, 그 정인의 생존도.”
“예.”
조용히 황궁으로 돌아온 지민은 상장군과 대치하는 중에 제 어깨에서 상처가 났음을 깨달았다. 황제에겐 철저히 비밀에 부치기로 하였으니 괜히 이 상처 하나로 의원을 찾았다가 황제의 귀에 들면 곤란했다. 덕분에 서투른 손길로 직접 치료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으면서 상처가 아파올수록, 끝까지 검을 놓지 않던 상장군에 대한 생각이 골똘히 났다. 그리도 대의와 명분을 위해 목숨마저 내놓을 듯 굴던 자가 어떻게 연모 하나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까. 대체 그게 뭐라고. 지민의 입에서 바람 빠진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런 건 다 허상이지.
충과 대의. 그것만 알고 살던 지민에게 사랑이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허상. 굳이 필요하지도, 바라지도 않는 무형의 것일 뿐이었다. 무상하고 공허한 그의 삶은, 허나, 한 여인의 침입으로 손 댈 수 없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벌컥-
순식간에 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온 여인. 의복이 죄다 흐트러지고 머리가 산발이 되었지만 고고하단 말이 어울리는 침입자와 마주친 순간, 지민의 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황후마마?”
거센 풍랑이었다.
皇后
列傳
“신이, 황후마마를 사모합니다.”
황후는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눈앞의 별감이 제게 뭐라 짓거린 것인지, 잠시 침착하게 생각해 보기로 한다. 사모한다, 그리 말했다. 그리도 연모를 갈구하던 황제에게서도 한 번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는데, 별감이 황후인 저더라 사모한다라 하였다. 눈앞이 아뜩해졌다. 여전히 저 너머로 보이는 황제가 그 말을 들었는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사랑고백을 처음으로 들어본 황후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몰랐다.
“뭐, 뭐라?”
“들으신 그대로.”
점차 상황을 파악한 황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게…무, 무슨….”
경악에 물든 황후는 치렁치렁한 소매 속에 감춰진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으며 온 몸으로 당황을 표현했다. 오랫동안 황후를 모신 도미조차도 황후가 저리도 당황한 모습은 생전 처음 보았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던 황후는 지금 이 갑작스러운 상황이 어색하고 민망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저 영악한 별감은 무엄하게도 제 눈을 똑똑히 올려보고 있었고, 그 시선에도 연정이 담겼다고 생각하니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답을 주시지요. 황후마마.”
“나, 난 그러니까….”
머리가 빙빙 회전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황후는 태형의 고백에 대한 답을 주기도 전에, 뒷걸음질 쳤다. 황제의 여인인 황후가 다른 사내에게 사랑고백을 듣다니. 무엇이 두려웠던 것인지 뒷걸음질 치던 황후는 그대로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하늘거리는 치마를 사방으로 퍼뜨리며 아주 빠르게 뛰어가는 황후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신조차 모르는듯했다. 웃음 가득한 얼굴로 그런 황후의 뒷모습을 보던 태형이 무릎을 피고 일어났다,
“황후마마.”
존귀한 황후가 시녀하나 대동하지 않고 위험천만하게 황궁 안을 누볐다.
“따라가지요.”
발을 동동 구르며 황후를 부르던 도미는 태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황후가 힘차게 달려간 곳을 향해 덩달아 빠르게 걸음을 움직였다. 흡사 정신이 이상한 여인처럼 눈물로 엉망이 되었던 얼굴로 황궁을 누비는 황후와, 그 뒤를 쫓아가는 시녀와 별감. 때 아닌 대낮의 술래잡기였다.
“따, 따라오지 마라!”
황후는 진심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저를 연모한다는 당돌한 태형에게서도, 그걸 지켜본 황제에게서도. 잠깐 돌아본 뒤에서 태형과 도미가 따라오는 것이 보이자 황후는 절망적인 얼굴을 하며 더 빨리 달렸다. 형형한 황후의 의복이 아름답게 펄럭였지만, 격한 뜀박질 속에서 머리는 온통 흐트러지고 숨이 찼다. 구석진 황후전에서 제법 달려온 탓에 몇몇 관료들과 시녀들을 마주쳤지만 그 중 누구도 미친 듯이 달리는 그녀를 황후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어쩌지, 아아.”
전각하나를 끼고 돌았더니 사방에 우뚝 솟은 전각을 제외하곤 길이라고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뒤 돌았을 때도 포기를 모르고 쫓아오는 나인들과 태형의 모습을 보았다. 죽어도 마주칠 수 없었다. 모르겠다. 황후는 결국 치맛자락을 한금 움켜쥐고서 눈앞에 보이는 전각하나를 올랐다. 황후는 망설임 없이 전각문을 활짝 열고 들어갔고 다시 거침없이 문을 쾅 닫았다. 누가 바로 문을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듯 문을 딱 막고선 황후가 쉬지 않고 뛰어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가삐 내쉬었다.
“하아….”
“…황후마마?”
이제 좀 살았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진정 그게 아닌 모양이다. 숨을 고르며 바닥에만 향해있던 황후의 시선이 낯선 부름에 일어났다. 방금까지 있었던 일에 평생 놀랄 것을 다 놀랐다고 생각했건만, 황후의 눈은 다시 놀란 듯 팽창되었다. 눈앞에 사내가 있었다. 그냥 사내도 아니고 웃옷을 벗고 있는 사내. 심지어 안면까지 있는 사내.
“그대는… 황상의 익위사?”
“…그렇사옵니다.”
지민이 손에 쥐고 있던 붕대를 놓친 것은 눈이 마주친 이후였다. 황후의 맑은 두 눈이 제 얼굴을 훑고 아래로 내려가, 실오라기 하나 없는 제 상체로 향한 것을 알아채자마자 손에 힘이 풀렸다. 붕대가 바닥에 굴러가며 자취를 남겼다. 어서 옆에 벗어놓은 옷을 걸치고, 붕대를 주으려 하였으나 그것은 황후가 더 가까이 다가옴에 무산되고 말았다. 지민의 눈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살려다오.”
황후가 제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으며 저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말씀을….”
“나, 난. 이 곳 밖에 나가면 죽어버릴 지도 몰라.”
언제나 정갈하고 고고한 자태로, 느릿한 걸음으로 황궁을 누비던 황후가 몇몇 장신구가 떨어진 듯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서 제 눈을 똑똑히 쳐다봤다. 그 눈에 사로잡힌 듯 황후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던 지민은 애써 손을 더듬어 제 상의를 가져오려 노력했다.
“어, 그래 다쳤구나! 내가 황상을 많이 치료해 봐서 이런 잔상 치료엔 일가견이 있다. 내가 상처를 봐 줄 테니, 나 좀 숨겨다오. 응?”
품에서 꺼질 듯한 목소리로 황제를 부르던 여인의 애살 있는 목소리는 익위사의 머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황후는 아무래도 자신이 제 목을 끌어안고 품을 파고 들었다는 것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었다.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듯 한데?”
지민은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대응하려 하였으나, 황후의 말에 금방 무산되고 말았다. 황후가 지민의 어깨에 엉망으로 메어진 붕대를 흘끗 쳐다봤기 때문이었다. 황후가 오기 전까지 스스로 메던 붕대의 허술함이 발각되자 지민은 반사적으로 황후의 눈을 피하고 싶어졌다. 저 집요하고 맑은 눈이 자신을 더 민망하고 감정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황상의 밑에 오래 있다 보니 의심이 많은 듯한데, 날 믿어보렴. 응?”
자꾸만 대답을 요구하듯 되묻는 황후에 지민은 점점 정신이 산으로 가고 있음을 느꼈다. 황후가 정녕 이런 여인이었나. 소문의 황후는 평소엔 태연자약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평온하다가 황제의 앞에서만 꿀먹은 벙어리가 되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여인이었다. 헌데 어째서 눈앞의 황후는 이리도 파악하기 쉽단 말인가. 누가 봐도 원하는 걸 위해 상대를 녹이려는 수작을 부린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점점 황후에게 말리는 듯한 자신이 한심해 지민은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마마!”
황후가 귀를 쫑긋 세웠다. 누각 밖에서 익숙한 도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그리 홀로 가시면 위험하십니다, 마마!”
“황후마마.”
도미의 애타는 부름 뒤로 희미하게 들리는 좋은 목소리. 태형의 목소리가 들리자 황후의 얼굴이 절망적으로 물들었다. 저 기세면 누각 하나하나를 뒤질 법도 한데.
“부탁한다. 응?”
“힘 빼세요.”
이때까지 황후에게 휘둘려 안절부절 대던 지민의 얼굴이 제법 진중해졌다. 전장에서도 매복은 빈번한 편이다. 그래서 지민은 적이 숨어있는 것을 아주 잘 알아차렸고, 동시에 적을 피해 몸을 숨기는 것도 잘 했다. 전각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지민이 말과 동시에 황후의 팔을 가볍게 밀었다. 황후가 침상 뒤에 주저앉은 것을 보고 드디어 손에 잡은 제 상의로 황후를 덮어 가렸다. 정확히 동시에 전각이 문이 열렸다. 지민이 바로 고개를 돌리고 가늘어진 눈으로 문을 열고 서있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뭐하는 짓이지?”
“아.”
태형이 잠깐의 탄식을 뱉어냈다. 눈치 빠른 그의 시선이 재빠른 순서로 지민의 전각을 훑었다. 그 시간이 지체될수록 지민의 얼굴이 더 굳기 시작했다.
“혹시나 황후께서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않았는데.”
“그럼 송구했습니다.”
의도적으로 기분 나쁜 기색을 들어내는 지민의 대답에 가볍게 웃은 태형이 고개를 까닥 숙였다. 짧은 인사를 끝으로 태형은 미련 없이 문을 닫았다.
“갔습니다.”
묘하게 상충되는 공기에 태형의 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지민은 문이 닫힌 후에도 잠깐 있다가 황후에게 나직이 말했다. 자신의 몸을 가린 의복을 살짝 들켜 빼꼼이 눈을 내밀고 태형이 정말 갔음을 확인한 황후가 천천히 일어났다. 이어지는 황후의 행동들에 지민의 입에선 실소가 피식 새어나왔다. 아깐 그리 급박하게 굴더니 이젠 저렇게 느긋하고 침착할 수가.
“고맙구나.”
“아닙니다.”
“약속대로 보답을 하마.”
안 그래도 되는데 황후는 지민의 상의를 한번 개어 제 팔에 걸친 후 지민의 옆에 걸터앉았다. 급했다가 침착해지긴 하였으나 아까처럼 거침없는 행동은 여전했다. 지민이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살짝 뺐다.
“괜찮습니다.”
“나는 황후다. 한 번 한 약속은 어기지 않아.”
우선 황후의 팔에 걸쳐진 그 상의먼저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황후는 기어코 손을 뻗었다. 마치 품속에서 자신을 안을 때처럼 나긋하게 다가온 손길이라 지민은 잠시 자신이 환영 속에 머무는 줄 알았다. 허나 그 손은 생경하게 제가 엉망으로 메어 놓은 붕대를 풀었고, 상처를 더듬었다.
“어쩌다 다쳤느냐?”
“…….”
“응?”
아까 바른 약을 좀 더 고르게 피면서 닿는 손길이 화끈거렸다. 상처가 아파서 일거라고 되 내었지만 어쩌면 아닌 것도 같았다. 자신이 다친 마냥 인상을 잔뜩 찌푸린 황후가 집요하게 이유를 물었다. 그렇다고 황제에게도 말하지 않는 상장군과의 일을 황후에게 냅다 고할 수가 없어 지민은 괴로웠다. 얼른 황후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다. 아, 그리고 자꾸만 응? 하고 되묻는 것도 그만 했으면 싶었다. 그렇게 말하면 도저히 안 들어주고는 못 베기겠으니까.
“묵인 하고 싶은 거니?”
“군대의 일입니다.”
“그렇구나.”
다행이도 황후는 금세 포기했다. 상처를 살짝 만지던 손길도 거두었고, 대신 그 손으로 붕대를 집어 들었다. 자신 있게 다짐한 것처럼 황후는 제법 붕대를 잘 감을 줄 알았다. 황후는 붕대를 감는 동안 어깨에 난 상처에만 집중했지만, 지민은 마땅히 시선을 둘 곳이 없어 힘들었다. 눈앞에 바로 황후의 작은 머리통이 있어서 그쪽으로 시선이 가는 게 자연스러웠지만, 이상하게도 황후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기가 창피했다.
생채기 가득하고, 근육으로 단단한 제 투박한 몸에 뭉근히 닿는 섬섬옥수가 생경하게 느껴졌다. 지민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리도 충성스런 익위사의 이름은 무엇이냐?”
“당치 않습니다.”
황후가 상처를 감으며 잔잔히 웃었다. 주군의 여인에게 이리 치료를 받는 주제에 무엇이 충성스럽나 싶어 지민은 황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럼 아주 불충하다고 정정하자꾸나. 네 이름이 무엇이니?”
“…지민입니다.”
“음, 그렇구나. 지민.”
자신의 투박한 이름이 황후의 입에 오르자 간질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오늘 여러번 지민은 황후 덕분에 머리가 어질함을 느꼈다.
"자, 다 되었다.”
황후는 봉대의 매듭을 지으며 마무리까지 다 한 뒤에 지민의 몸에서 손을 떼어냈다. 동시에 지민의 입에서 참았던 숨이 튀어나왔다. 황후가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나자 드디어 제 상의를 갖춰입은 지민이 따라서 일어났다.
“지금쯤이면 다 돌아갔을 테니, 나도 이제 가보마.”
“예.”
“오늘은 정말 고마웠다.”
황후의 친절한 인사에 지민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 밖에 하지 못했다. 태후 말고 황궁여인을 이리 가깝게 대하는 건 처음이라서였다. 그래도 황제의 마음이 백야에게 가 있어 항상 비련하다는 소문의 황후가 나름 대차고 강단 있는 여인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열기 전 앞에서 황후가 제 의복을 더듬었다.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정리하고, 의복의 옥대를 제대로 맨 후 치맛자락을 확 펴서 마무리했다. 역시 황후는 황후였다. 만만의 준비를 끝낸 황후가 문을 열었다. 평소처럼 느긋한 발걸음으로 누각을 나서 계단을 내려오는데, 태형이 보였다. 황후의 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얼굴만 보아도 얼굴이 다시 뜨거워지는 게..
“그만 피하시지요, 황후마마.”
태형의 다정한 한마디에 울상이 된 황후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 황후열전
주(周)나라, 황후 전 안.
“황….”
“잠시만! 아직 아무 말 하지 마라.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느니라.”
사상 처음으로 황후전 안의 공기가 달큰해졌다고, 도미는 생각했다. 얼마 전 데려왔었던 저 별감 놈이 예사롭지 않다고는 생각했으나 저리도 목숨이 여러 개나 되는 듯 굴 줄은 몰랐다. 황제의 앞에서 황후에게 사랑고백이라니. 엄청난 파란을 일으킨 행동이었으나 도미는 나름대로 태형의 고백에 통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소중하게 여겨지지 못했던 황후를 사모하는 자라니. 이리도 반가울 수 없었다.
“차를 내 올까요?”
“도미야! 이게 무슨 만담인줄 아느냐? 이건 취조다. 취조. 차는 무슨…”
탁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태형과 황후. 기분 좋아 보이는 도미의 물음에 황후가 발끈하며 대꾸했다. 그 또한 황후가 부끄러움을 타서임을 모르지 않았기에 그마저도 도미는 즐거웠다.
“후. 자, 이제 말해보렴. 아까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다 무엇이니?”
“말 그대로입니다. 신이 황후마마를 사….”
“시끄럽다!”
누가 봐도 태형의 입에서 다시 ‘사모’라는 두 글자가 나올 것 같아 황후는 급히 그의 말을 끊었다.
“솔직하게 말해보란 말이다. 혹, 네 취미가 단명이니? 해서 부러 내게 그런 말을 한 것이야?”
“하하, 단명이라. 마마 신은 무병장수를 바라는 쪽입니다. 허니 신이 어떤 말을 하던지 목숨을 살려 주겠다 약조해 주십시오.”
황후는 정말 진지하게 물은 것인데 태형은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더불어 태연하게 농담을 건네기 까지. 황후는 기가 막혔지만 태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처음 황후와 태형이 만났을 때와는 전혀 반대되는 분위기였다. 지극히 높이 있는 황후와 낮은 일개 별감이었던 태형 사이엔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이 정해져 있었다. 태형역시 황후에게 건넨 작은 언사와 행동 하나에 제 목이 날라갈 수도 있음을 잘 알았다. 그래서 지금 이 행동들은 태형이 정말로 제 목숨을 건 일이었다. 방금 전의 약조도 태형의 입장에선 나름 진지한 사항이었다.
“황후마마를 사모합니다.”
“네, 네가 나를 언제 보았다고? 설마 얼마 전 황후전에 왔을 때를 말하는 것이냐? 허, 설마. 우리 사이엔 발까지 내려져 있었다.”
"마마 누군가를 연모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저 태연자약한 얼굴을 하고서 저런 말을 하다니. 굳은 목석같이 다정한 말이라곤 모르던 정국에게 익숙해져 그런가, 황후는 태형의 한마디 한마디에 얼굴을 붉어지며 과민반응했다.
"허, 그렇다고 황후인 내게 그리 대놓고 고백을 해? 나는 네 목숨이 수십개는 되는 줄 알았다."
"폐하께서 설마, 제가 황후마마를 연모한다는 사실 하나로 저를 죽이기라도 하실까요?"
태형의 물음에 흥분하여 달싹이던 황후의 입이 꾹 일자로 다물렸다. 황후전에 가뜩이나 관심이 없는 정국이었다. 게다가 아까는 백야를 마치 제 여인처럼 황후전에서 빼내 소중히 데리고가기까지 하던 정국이었다. 그런 정국에게, 질투를 바라는 게 더 이상했다. 이 사실을 직시하자 황후는 금방 마음이 속상해졌다.
"그럼, 네가 그 마음을 내게 말해서 얻고자 한 것이 무엇인데?"
“마마께 청이 있사옵니다.”
“…무엇?”
황후는 오늘 정말 평소답지 못했다. 저리도 태연자약한 태형의 말에 들뜨고, 우울해지고, 긴장하며 끝없이 휘말리고 있으니 말이다.
“신을 황후전 별감으로 삼아 주십시오.”
“뭐라?”
“허면 황후마마를 신이, 황제폐하의 마음을 얻어 드리겠습니다.”
황후의 얼굴이 얼떨떨해졌다. 앞의 말들과 맥락이 맞지 않아서였다. 사모한다고 고백하던 태형이 황제의 마음을 얻어주겠다니. 황후가 고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네가 감히 나를 농락하는 것이냐?”
“저를 믿지 못하십니까?”
남이 황후 앞에서 황제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면 그건 황후를 잘못 건드려도 단단히 잘못 건드린 것이었다. 황후의 유일한 약점이자 치부가 황제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것이니 말이다. 헌데도 태형의 눈은 거침없이 단단하고 견고했다. 해서 바로 미간을 좁힌 황후의 시선도 흔들렸다.
“네가 무엇인데, 내가 널 믿느냐. 게다가 날 사모한다면서 어찌하여 내게 황상의 마음을 얻어준다는 것이지?”
황후는 마치 성질이 날카로운 고양이처럼 꼬리를 세웠다. 허나 그 또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태형은 알아차렸다. 황후는 자신도 몰래 기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신은 진정으로 황후마마의 행복을 바랍니다. 그렇기에 폐하의 마음을 황후께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무슨 수로.”
황후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태형을 노려봤다. 그러자 태형이 제 발로 황후와 자신 사이를 가로막던 탁상을 옆으로 치웠다. 순식간에 황후와 태형 사이엔 아무것도 가로막는 것이 없었다. 황후가 입 밖으로 무엄하다, 하고 말하기도 전에 태형이 조심스레 일어나 코 앞까지 다가왔다. 황후의 시선이 정처없이 흔들렸다. 콧날이 닿일 듯이 가까워져서 태형의 눈동자가 똑바로 보이고, 낮은 목소리가 귓전에서 웅웅댔다. 무엄하다, 무엄하다. 황후는 속으로 수도 없이 소리쳤지만 입을 열면 입술이 부딪힐 것 같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런 수로.”
이렇게 가까워진 주제에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정해서 민망함은 더해졌다. 어떻게 사내주제 저따위 고운 얼굴을 하고서…. 황후는 태형의 행동에 떨린 것이 분해 주먹을 꽉 쥐었다.
“황후마마의 아군이 되기 위해선 가까워져야 겠지요. 황후께서 제게 마음을 열어야 신의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겠습니까?”
마치 방금까지의 일이 연극이라도 되는 것처럼 태형은 너무도 태연하게 황후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다시 멀어졌다. 자연스럽게 탁상을 제자리로 돌려놓기까지. 황후는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저 어린 별감이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또 친목엔 술만 한 것이 없지요.”
말렸다. 태형의 말수에 제대로 말리고 말았다. 분에 맞지 않았다. 별감과 황후 사이의 술상이라니. 황후는 멍한 얼굴로 이미 탁상에 놓인 술병과 술 잔 두 개를 쳐다봤다. 무슨 놀라운 일들이 눈 깜짝할 새에 하나씩 벌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태형이 황후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태형의 웃는 낯을 한 번, 술이 채워진 술잔을 한 번 노려보던 황후가 술을 벌컥 들이켰다.
“황후께선 왜 폐하를 연모하십니까?”
밑도 끝도 없는 태형의 질문에 황후는 이미 술을 삼켰음에도 사례가 들 번 했다. 왜 황제를 연모하냐니? 어느 누가 황후더러 저런 질문을 할 수 있을까.
“이유가 어디 있느냐. 연모하기에 연모하는 것이다.”
“황제께선 마마를 연모하지 않는다 해도요?”
“그래. 황상은 그러실 수 있는 분이야.”
황후의 허탈한 대답에 태형도 제 앞에 놓인 술을 한 잔 마셨다.
“황후마마. 사랑은 의무도, 권리도 아닙니다.”
태형이 나긋하게 황후에게 말을 건넸다. 이때까지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으로 황제에게 사랑을 퍼붓던 황후. 황후는 생전 이런 말을 처음 들어보았다. 다른 누가 보더라도 황후가 황제를 연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황제가 황후의 마음을 무시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황제니까. 헌데 이 겁도 없는 이는 감히 황제가 누군 줄 알고 저런 말을 한다. 황후의 눈이 흔들렸다. 황후가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연속으로 술을 두어 잔 들이켰다.
“아, 또 폐하와 어찌 처음 만나셨는지 궁금합니다.”
한잔 마실 때마다 질문하기로 한 건가. 약간 취기가 맴도는 황후가 태형의 의도를 알아채곤 부스스 웃었다. 황제와의 첫만남이라. 문득 기억을 더듬자 지독히도 선명한 그 때가 떠올랐다. 5년 전, 황궁에 처음 들어왔을 때. 황후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대승상 집에서 여식이 태어났다는 것은 즉, 황후가 될 인물이 태어났다는 것과 같았다. 날 때부터 황제의 여인이었던 사람. 황후는 그 누구의 여인도 아닌 애초부터 황제의 여인이었다. 열여덟이 되는 날. 대승상은 황후를 황궁으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 날은 황후가 감기에 들어 지독히도 열병을 겪던 날이었다. 침소에서 일어나기만 해도 머리가 띵하고 귓전이 웅웅거릴 만큼 앓았던 날이었는데도, 대승상은 기어코 여식을 치장해 황궁에 보냈다. 하늘색 의복을 갖춰입고 황실여인의 상징인 옥대를 매고, 연분홍빛 가리개로 얼굴 아랫쪽을 가린 황후는 그 화려한 천덕전에서 황제, 아니 당시에는 태자였던 정국을 기다렸다. 부군 될 사람을 기다리면서도 황후는 계속되는 이명에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을 듯이 위태로웠다.
“천수,만수,흥복을 누리시옵소서. 저하.”
그때는 태자가 또 한 차례의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때였다. 황궁의 문턱을 넘자마자 정국은 투박한 손길로 투구를 벗었다. 태자를 맞이하러 성문 앞에 일렬로 서있던 신하들과 수복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정국에게 예를 갖추었다. 정국의 거침없는 발걸음을 무장한 병사들이 따랐다. 악마의 탈, 붉은 투구를 벗은 태자. 어린 항아들은 맨 뒷줄에서 고개를 빼꼼히 들어 정국을 몰래 보았다. 소문대로 저승사자 같은 모습일까. 들키면 당장이라도 목이 잘리겠지만 그 나이에 호기심은 어쩔 수 없는 법이다. 맑은 아이의 눈동자가 태자를 향한다.
“대승상의 여식은?”
“화궁전에서 태자저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 불찰이군. 대승상의 여식을 기다리게 하다니.”
아아…….
항아들은 제 눈앞에 펼쳐진 황홀한 심사에 넋을 놓은 것처럼 멍하니 바라보았다. 태자는, 아니었다. 소문처럼 요괴 같은, 저승사자 같은 모습이 아니다. 잔혹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팔 척은 되어 보이는 키에 하얀 얼굴과 진한 인상. 가히 지존이다. 그들은 정국이 제 앞을 스쳐지나가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땅에 쳐 박았다. 무심하게 이쪽을 보는 눈과 마주친 것 같기도 하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주나라 태자 정국. 전쟁터에서는 피바람을 몰고 다니는 무자비한 붉은 투구였을지는 몰라도, 그의 용모는 세상풍파 맞은 적 없어 보이는 절경이다.
“혼자 갈 테니 따를 필요 없다.”
정국은 제 정혼자가 기다리고 있을 화궁전으로 바로 향했다. 전장에서 바로 돌아온 터라 입고 있는 것은 태자의 용포가 아닌 갑옷이었지만 상관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대승상의 여식이라면 황후가 될 일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 혼자 화궁전에 들어선 정국은 저 멀리 뒤돌아 서있는 여인을 보고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기 위해 혹여라도 전장에서 묻은 피가 없는 지 살폈다.
정갈하게 정리한 다음, 여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가지런하게 늘어진 머리 위로 끈이 묶어져 있는 것이 가리개를 한 것인가. 어림짐작 해보면서 여인에게 가까워진 정국이 마침내 여인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 여인이 뒤 돌았다. 눈이 마주쳤다. 헌데 이상하게도 힘이 풀린 눈이 곧 감길 듯이 숨이 꺼져갔다. 가리개 너머로 희미하게 들리는 숨소리가 무언가 이상함을 직감하게 해주었다.
“태자, 저하는… 언제 오신 답니까?…”
나직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정국을 더러 태자라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용포가 아닌 갑옷을 입고 있어 그러한가. 잠시 제 행색을 훑어본 정국은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확인하고 자신이 태자라 그리 말해주려 고개를 드는데, 순식간에 여인의 몸이 무너졌다.
“아아…”
아까부터 위태로워 보이던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인지 쓰러졌고 정국이 놀란 듯 그녀의 몸을 받혔다. 자신도 모르게 여인을 지탱하기 위해 어깨를 그러쥔 탓에 정국의 얼굴엔 잔뜩 당황한 기색이 맴돌았다. 여인이 완전히 정신을 놓았다. 어찌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정국이 이내 여인을 안아 들었다. 아파서 쓰러진 여인을 두고 꽃밖에 없는 이 화궁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어 자리를 옮기려는 것이었다. 화궁전을 나서다가 가볍게 안긴 여인을 힐끔 내려다보던 정국이 손을 뻗어 여인의 가리개에 가져다 댔다. 이걸 하면 숨은 제대로 쉴 수 있으려나 싶어서였다. 모순적이게도 이런 것엔 무지했던 정국이라 결국 여인의 뒷통수에 지어진 매듭을 풀어 가리개를 벗겼다. 드러난 여인의 콧날과 입술. 살짝 벌어진 입 밖으로 열이 가득한 뜨거운 숨이 색색 뱉어졌다.
“아버지….”
그 숨 사이로 희미하게 들리는 말소리가,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제 품에 안긴 여인은 미래 황후이자 대승상의 여식. 그토록 높은 여인이라 불쌍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 여인은 안쓰럽게 중얼였다. 그녀의 입술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이 일자가 되어 실룩였다. 순식간에 정국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들어찼다. 여인은 물론, 여인의 울음은 더더욱 처음 겪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울면 안 됩니다. 울면…”
앳된 정국은 정신을 잃은 여인에다 대고 그렇게 읊조렸다. 그 소리를 여인이 들었을 리는 만무하니 그녀가 기어코 눈물을 흘렸다. 제 옷깃을 적시는 눈물을 감물을 감추려 하듯 그녀는 품을 더 파고 들었다. 옷깃을 꼭 쥐고 고개를 파묻는 대승상의 여식이라니. 정국은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서 화궁전 계단에 우뚝 멈춰 섰다. 도화가 날리는 날이었다.
/ 황 후 열 전 熱 血 皇 后 /
五.
“황상은……참으로 모진 사람이다….”
밤을 지새우며 이어진 대화 속에서 태형이 3잔의 술을 비우는 동안 황후는 저 혼자 장장 세 병을 마셨다. 분명 처음 대화 주제는 태형에 관한 취조였으나 어쩌다보니 황후만 자신과 황제에 관한 이야기를 술술 하고 있었다. 태형은 그저 가끔 가다 황후가 부리는 주정이 웃겨 잔잔히 웃는 것을 제외하곤 묵묵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황후마마.”
반쯤 채운 잔을 뜨거운 뺨에 대고서 눈을 감고 있던 황후는 태형의 부름을 미약한 목소리로 응? 하고 대답했다. 저러다 곧 정신을 잃을 것 같다.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손에 쥔 술잔을 놓치며 결국 탁상으로 고개를 떨궜다. 태형이 급한 손으로 탁상에서 떨어지는 술잔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황후의 머리를 받혔다. 하마터면 쿵- 소리를 내며 머리를 정통으로 박을 번 했다. 얄쌍한 얼굴인데도 바로 손에 닿는 황후의 뺨은 뭉근하고 부드러웠다. 취기를 나타내듯 뜨겁기도 했다.
“이런.”
낮은 탄식을 뱉어낸 태형이 잔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잠에든 황후를 침상으로 옮기기 위해서였다. 제 앞에 무방비하게 정신을 놓은 여인이 황제의 유일무이한 황후였음에도, 태형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머리맡에 손을 끼우고 조심조심 황후를 다루는 손길은 제법 능숙했다.
“황후는 주로 사내의 품에 안겨 다니는군.”
황후가 넋두리한 황제와의 첫 만남을 생각하면서 태형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새 하얗고 깨끗한 황후의 얼굴이 여김 없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눕혀놓고 보니 이리도 순할 수가 없다. 이런 황후를 그 붉은 비단보와 발에 가려놓고 박복하다 얘기하는 꼴이 우스울 정도였다. 그런 황후를 바라보는 태형의 눈빛은 극에 흥미를 가진 제 3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황후마마는?”
“잠드셨습니다.”
황후를 눕히고 나오자 밖에 서있던 도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리 술을 드신 건 처음이라 무리가 가실 텐데.”
“소신이 내일 아침에 들리겠습니다.”
“그리하도록 해라.”
태형은 걱정 말라는 듯 미소 지었다. 이미 달이 한웅큼 차오른 황궁은 그 곳만이 지니는 고요함과 고매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황후전은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지만 고고히 빛을 내뿜는 불야성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찬란했다. 황후전 계단 위에서 황궁을 관망하던 태형은 잠시 저 멀리 보이는 사람의 그림자를 보고 눈을 찌푸렸다. 저리도 많은 상궁과 내관을 동원하고 뒷짐 진 사람이라면 황궁에 황제 말고 더 있겠는가. 지금은 한 밤중. 황제의 밤 산책길에 황후전도 포함된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벌써 입질이 오는 건가.”
멀리 있었고 황제가 서 있는 쪽은 어두워서 태형은 정국의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서로를 알아차렸다. 황제는 그 멀리 가만히 서서 황후전을 바라봤다. 타고난 지배자. 하지만 당신도 알아야 할 겁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마음은 없다는 것을요. 태형은 멀리 선 황제에게 일말의 예도 취하지 않은 채 황후전 앞에 서있었다.
황후는 깨질듯한 고통에 눈을 찡그리며 일어났다. 이런 고통은 처음이라 느껴지는 불쾌함, 그리고 서서히 정신이 들면서 찾아오는 죄책감이 황후의 정신을 지배했다. 그 오만방자한 별감 놈을 제 기세로 제대로 눌러줘서 쫓아냈어야 하는 건데,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취조는커녕 자신은 태형과 단란히 술을 마셨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 한 밤중에 이 황후전 안에서 일어나 버린 것이었다.
“도미…!”
본능적으로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도미를 부르며 고개를 돌리는데, 황후는 나오려는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밤새 함께 있었던 저 천역덕스런 얼굴이 아침부터 나를 반기를 것이야?
“무엇이냐?”
“속은 괜찮으십니까?”
“속은 괜찮은데 머리가…,아니 니가 왜 여기 있냐고 물었다.”
물 흐르듯 이어진 태형의 걱정에 황후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할 번 하였다. 더 이상 저 청산유수 같은 말주변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야. 다짐한 황후는 단호한 얼굴로 태형을 쳐다봤다.
“잊으셨습니까? 황후께서 약조하셨습니다. 저를 황후전 별감으로 들여 주시기로요.”
“지난 밤 내가 술에 취해 허언을 한 모양이구나.”
천진한 태형의 말에 황후는 뻔뻔스럽게도 모른 척을 시전 했다. 어제 그렇게 당황해서 도망까지 가던 황후가 지금은 평소대로 돌아온 것처럼 태연한 얼굴로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의 입에서 허탈한 실소가 흘러나왔다. 쉽지 않을 건 알았지만 성격이 너무 자주 휙휙 바뀌는 게 아닌가. 적응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듯 했다.
“그러지 말고 정말로 원하는 걸 말해보렴. 내가 자꾸 헷갈리잖니.”
황후가 머리를 한 쪽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애초에 황후전 내에서 한낮 별감이, 방금 잠에서 깬 황후와 마주하고 있는 것부터가 전례 없던 일이었다. 그렇게 예민하고 날카롭던 황후가 어째서 이 상황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마마, 신이 원하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황후 전에서 황제페하의 마음을 얻도록 도와드리는 것.”
애써 마음먹고 태연해지려고 노력했건만 저 젊은 별감은 달큰한 목소리와 다정한 시선으로 황후를 녹여버린다. 흔들리는 시선을 다잡으려 했지만 황후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팍 썼다. 당황해서였다.
“무엄하다…, 정말 무엄하기 그지없구나.”
“황후전은 원래 금남의 구역이었다 하셨지요. 번살이가 내일입니다. 황후께서 폐하께 말씀드려 주십시오.”
구체적으로 계획까지 알려주는 태형에 황후는 표정관리가 안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의 입에서 나온 ‘폐하’라는 말에 황후는 잠시 잊고 있던 가장 큰 고충이 떠올라 아, 하고 탄식을 뱉어냈다. 황제가, 황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 별감의 대단한 고백을 분명 정국이 들었을 터였다. 무작정 도망가느라 정국의 반응을 살피지 못하였는데, 황후는 갑자기 자신을 둘러싸는 두려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황제가 아무리 제게 무심하다 해도 다른 사내의 고백이라니. 황후의 얼굴이 절망적으로 변했다.
“왜 그러십니까?”
“황상에게 가야겠다. 어서.”
황후의 낌새를 알아 챈 태형의 물음에 황후가 침소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미야!”
“예. 황후마마.”
“내 의복을 가져오렴. 대명전으로 가야겠다.”
이리도 급박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그랬던지 황후는 처소 안에 태형이 있다는 것도 까먹고 어제 입었던 푸른 의복을 벗어 내렸다. 적삼너머로 부드러운 어깨선이 눈앞에 드러나자 태형은 처음으로 당황이란 걸 해버렸다. 고개를 확 돌린 태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전을 나갈 수도, 앉아 있을 수도 없어서 곤란했다.
태형이 그러건 말건 빠르게 붉은 의복으로 차려입은 황후는 최소한의 장신구만을 지니고서 황후전을 달려 나갔다. 아직 어제 들이부운 술이 울렁거렸지만, 황후는 내색하지 않고 황제를 찾아 갔다.
/ 황후열전
“해서, 상서성을 보수하는 데 자금이 더 필요합니다.”
“폐하,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
“폐하….”
가히 보름 만에 열린 대전회의였다. 전쟁영웅이라 칭송받던 태자가 황상에 오른 이후로 대신들의 목소리는 날로 갈수록 작아졌는데, 오늘은 황제를 부르는 음성이 더욱 기어들어갔다. 저 높은 곳에 앉은 황제가 오늘따라 무슨 일인지 도통 회의에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보고가 끝이 났고, 황제의 윤허가 잇따라야 할 시기에 황제는 다른 생각에 빠진 듯이 허공을 응시했다. 그 생각이 좋은 것은 아닌 모양인지 불편하게 관자놀이를 꾹꾹 짚는 행동이 불편한 심기를 대변했다.
“폐하.”
다들 눈치만 보고 있는 가운데, 연이어 입을 꾹 닫고 있던 대승상이 나직이 황제를 불렀다. 드디어 황제의 눈길이 신료들을 향했다. 잠시 얼이 빠져있던 정국이 차가운 눈으로 대승상을 내려다 봤다. 오늘 대전회의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온 신하들이 고한 안건은 대승상의 입맛에 맞게 개편되어 있을 터였다. 그래서 대전회의가 거슬리는 것이었다. 어째 저 집안은 양쪽으로 짐의 정신을 흩트린다. 아비나, 여식이나 거슬리는 것은 똑같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이 사안이 어찌 진행되고 있는지는 짐이 애초에 제대로 보고받지 못했소. 해서 이 얘긴 다음번에 다시 했으면 좋겠는데.”
정국은 미소 지으며 능숙하게 안건을 다음으로 넘겼다. 어차피 회의에 도통 집중을 하지 못한 탓에 현명한 판결은 어려울 듯하니 저치들의 뜻대로 돌아가기 전에 결단을 미루려는 것이었다. 대승상의 평온한 얼굴에 묘하게 금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신하주제 천자의 판단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가. 정국이 짙은 눈썹 사이를 일그러뜨렸다.
“짐이 오늘은 좀 곤하오. 여기서 이만 대전회의를 파하지.”
황제는 대전회의를 싫어한다. 전장이 황제의 무대라면 대전회의는 명백한 대승상의 무대였기 때문이었다. 아들인 문하시중을 비롯하여 저 아래 직책인 중서시랑까지 대승상의 손이 닿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오늘 황제가 이처럼 대전회의에 집중하지 못한 것도, 다 저 대승상의 여식 때문이다.
“폐하. 괜찮으시옵니까?”
대전을 내려오는 황제에게 내시백에 조심스레 물었다. 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정국은 온 얼굴로 불편함을 나타내는 중이었다. 어제 황후전에서 백야를 데리고 오고 나서부터다. 내시백은 황후가 백야에게 함부로 대한 것 때문인가, 짐작해 보았지만 그 뒤로 잊혀진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발칙하군.”
정국은 선명이 기억에 남는 별감의 얼굴을 생각해냈다. 파릇파릇한 얼굴을 하고 겁도 없이 황후의 앞에 부복한 그는 ‘사모한다.’ 라는 말도 안 되는 연정의 말을 황후에게 건넸다. 정국이 정말 신경쓰이는 것은 그 고백에 당황한 황후가 얼굴이 잔뜩 붉어져 어쩔 줄을 몰라 했다는 것이었다. 그 때의 황후는 황후가 아니라 여인이었다.
분명 황후전의 일에는 신경을 끄는 것이 답이었다. 황후가 그 별감이 좋아 정부로 들이겠다 해도 관심을 주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헌데도 황제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뺨이 발그레해진 황후를 바라봤다. 집요하게 그 마음을 무시하였으니, 이제 제게서 마음이 떠난다 해도 할 말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헌데 어째서 황제는 처음 느껴보는 박탈감에 분개했다.
“어제 황후전 앞에 있던 별감의 이름이 무엇이냐.”
내시백도 어젯밤 황제의 뒤를 따라 황후전으로 갔을 때 앞에 서있는 태형의 얼굴을 보았다. 황제가 왜 이리 신경 쓰는지 몰랐지만, 주군의 명에 내시백은 순순히 입을 열었다.
“본래 대명전 소속이었던 아이라 알고 있기를, 태형이라는 별감이옵니다.”
“황후전에 전부터 왕래가 있었나?”
“그것은… 소인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대명전에 돌아온 황제는 자연스럽게 걸치고 있던 황룡포를 벗으며 말했다. 정국이 대명전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항아들이 황제의 겉옷을 받았다. 정국은 여전히 내시백과 대화하는 중이었다.
“그 자를 이번 관서이동 때 변방으로 보내라.”
“허, 허나. 이번 번살이에서 황청으로 발령될 예정이온데….”
내시백이 우물쭈물 거리자 정국의 차가운 시선이 바로 날아 들었다. 바로 입에서 긍정의 답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게끔.
“알겠사옵니다.”
운명에도 없는 변방으로 발령받은 별감이 가여웠으나 천자의 명인데 뭘 어쩌겠는가. 헌데 황후전엔 일말의 관심도 없는 듯 하더니… 황제의 심중은 정말 알 수가 없다. 내시백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러났다. 혼자 남은 정국이 의자에 앉아 고개를 젖혔다. 몰려드는 생각에 눈을 꾹 감았다. 거슬려.
정국이 인상을 찡그리며 제 얼굴을 쓸었다.
“폐하. 황후마마께서….”
“황상! 신첩을 만나주세요.”
혼자 생각을 정리하기도 벅찬데, 저 문 밖에서 벌써 황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시백이 고하기도 전에 말길을 빼앗는 황후에 정국은 한숨을 내쉬었다.
“들라.”
마음 같아선 황후를 만났다가 마음만 더 복잡해질 것이 뻔하니 물러가라 하고 싶은데, 저 갈급한 목소리로 보니 절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것 같아 황후를 들였다. 문이 열리고 황후가 들어왔다. 곧장 눈을 맞추는 황후는 영원히 순백일 것 같은 맑은 눈으로 정국을 집요하게 붙잡았다. 항상 시선이 흔들리지만 정국은 오늘도 무심하고 차가운 눈으로 황후를 마주했다. 이것만큼 고역도 없다는 걸, 저 미련한 황후는 알고 있을까.
“무슨 일이지?”
“황상… 그러니까,”
막상 급하게 맞은편에 앉은 황후는 먼저 말을 꺼내길 두려워했다. 정국은 황후가 무슨 얘기를 할지 잘 알았다. 보나마나 백야를 그리 대한 것은 오해라고, 별감의 말도 다 허튼 소리라고 떠날 지도 모르는 황제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애초부터 황후에 대한 마음은 머문 적도, 떠날 수도 없는데 말이다.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나. 짐은 애초에 황후전 일에 관심을 둔 적이 없다.”
“…….”
“그대가 걱정하는 일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작은 머리통이 굴러가는 소리가 훤히 들려, 정국은 먼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초조하게 맴돌던 황후의 눈이 파동을 일으키며 정국의 얼굴에 멈췄다. 황후는 너무나 단순해서 자신이 상처 받았다는 걸 쉽게 티낸다. 정말이지… 그러지 않으면 좋겠는데.
“허면 다행이군요….”
“이왕 온 것, 백야에게 첩지를 내릴 거라는 짐의 말. 잊지 않았겠지? 그대가 백야의 첩지를 골라주었으면 좋겠는데.”
애초에 그 마음을 상처 낼 거라면 뭐든 확실한 게 좋지 않겠는가. 정국은 태연한 어조로 황후의 면전에다 백야의 이름을 들먹였다. 백야의 첩지를 황후더러 고르라니 이토록 잔인할 수가 없었다. 백야가 황제의 마음을 얻은 것은 오래 전 일이나, 후궁 첩지는 얘기가 다르다. 후궁이 된다는 건 황궁의 모두가 인정하는 황제의 여인이 된다는 소리였기에, 겉으로나마 황제의 안주인이라는 사실이 마지막 자부심이었던 황후에겐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그걸…신첩이 하라구요?”
“시작부터 너무 높은 품계를 내리면 주변의 견제가 더 심해질 테고. 재인은 어떤가?”
정치적으로도 백야가 힘들지 않게 고려하는 황제의 다정한 어투는 황후의 가슴을 파고들어 생채기를 냈다.
금세 황후의 입술이 입자가 되어 실룩였다. 울음을 간신히 참고 있다는 신호였다. 저 행동이 황제에겐 황후의 눈물보다 더 익숙했다. 황후는 정국의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몇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황후는 항상 입 안에 피를 내서라도 울음을 삼키려 애썼다. 그럴 때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황후의 떨리는 입술은 황제를 감아 죄는 전쟁보다 고통스런 것이었다. 정국은 당장이라도 일그러질 듯한 표정을 다잡기 위해 황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재인 첩지, 어떤가?”
“…좋습니다. 내명부에서도 백 씨에게 재인 첩지를 내리는 걸 승인하지요. 대신, 황상. 신첩의 청도 하나 들어주세요.”
그럴 수는 없다며 또다시 화를 낼 줄 알았더니, 어째서인지 황후는 순순히 승낙했다. 대신에 황후도 조건을 내걸었다. 황후가 정국의 마음을 제외하곤 무언가를 바라는 게 처음이라, 얼떨떨하면서도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첩의 황후전에 별감을 하나 들일까 합니다.”
“…….”
“역시 사내 하나 없으니 불편한 일이 이것저것이 아니라서요. 신첩이 황후전 별감을 직접 선택할 수 있게 해주세요.”
황후의 말이 너무도 뜻밖이라, 가슴을 묵직하게 울리는 고통을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을 덮치는 불안감에 황제는 자신의 감정으로 온 얼굴로 적나라게 드러냈다. 불안에 젖은 지배자의 얼굴이 낯설고 파악 가능할 법도 한데, 황후는 그걸 읽지 못했다. 애초에 황후는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당장이라도 그 별감의 목을 벨 수 있다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인가?”
정국답지 않게 말이 빨라졌다. 흥분한 그의 어조는 태형을 콕 집어내서 어제 그가 저지른 오만방자한 행동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다는 걸 드러냈지만, 황후는 황제가 어제 그 일을 신경 쓰고 있을 줄 몰랐다. 그래서 단지 황후전에 별감 하나도 내어 주기 싫어하는 말인 것 같아서 황후는 오기가 생겼다.
“백가 항아의 첩지, 신첩이 얼마나 많이 양보한 것인지 모르시는 겁니까? 황상은… 황상이 황후전을 탐탁지 않게 보신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허나 옆에 두어야 겠습니다. 그래야 신첩의 숨통이 트일 것 같아요.”
황후의 말은 황제를 나락에 떨어뜨렸다. 숨통이 트일 것 같다. 허면 그동안 황후의 숨통을 잡아 죄던 이가 황제라는 소린가? 황제는 갑자기 들이닥친 여러 번의 파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후는 제게 상처 줄 수 없다. 고작 황후의 말 따위에, 이렇게 동요 될 순 없었다. 연모하지 않으니까. 자신은 절대 황후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 영문을 알 수 없는 감정은 이내 분노로 뒤바뀌었다.
“그럼 허락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황상.”
황후가 마침내 황제의 공간에서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듯한 공허함과 상실감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자신이 뒤돌아보지 않더라도, 마음 주지 않더라도 황후는 그 자리 그대로 있어야만 하는 거였다. 그게, 맞는 거였다.
/ 황후열전
황후는 떨리는 다리로 대명전 계단을 내려왔다. 다른 때였다면 그 느린 걸음으로 스스로 버티며 황후전까지 가야했겠지만, 오늘은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풀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대명전 앞에 태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잘 하고 오셨습니까?”
잔잔히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묻는 태형에 황후는 무작정 힘이 풀렸다. 황후전 밖에선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황후인데, 왜인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태형을 보는 순간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안온함이 느껴져서 황후는 처음으로 제 공간 밖에서 긴장을 풀었다. 주저앉는 제게 놀라 다가온 모습이 처음으로 시선을 흔들었다. 주저앉는 제게 놀라 다가온 태형이 시선을 맞췄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네가 분명…날 도와준다 하였지?”
황후의 메마른 눈길이 태형을 옭아맸다. 이 세상에서 자신만을 의지하는 듯한 여인의 눈은 상당히 위험했다. 태형은 뒷목에 힘을 주었다.
“도와다오.”
세상 아쉬울 것 없는 목소리로 하는 황후의 말에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끝까지 서로의 시선을 놓지 않았다. 한참 만에 태형이 입을 뗐다.
“황후마마.”
“…….”
“황궁 밖에, 한 번 나가보시겠습니까?”
“뭐?”
그러더니 뜻밖의 제안의 한다. 황후의 눈이 순간 동그랗게 팽창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이 황궁의 주인이었고, 그곳을 벗어난 적이 없는 황후였다. 그런 황후에게 황궁 밖 세상이란 넘을 수 없는 경계와도 같았다. 황궁을 벗어나면 황제와 자신을 잇는 유일한 연결고리가 끊기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헌데 태형이 동행해준다면 한 번쯤은 밖으로 나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말?”
“예. 신이 마마께서 좋아하실 곳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정말 태형의 말에 구미가 당겼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황후는 태형을 멀뚱히 바라봤다. 좋다는 건가. 태형은 살짝 웃음을 터뜨리며 추측했다.
“허면 함께 가시지요.”
태형이 황후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정한 시선을 맞추는 태형이 내민 손을 잠시 응시하던 황후가 의복 속에 숨어있던 하얀 손으로 맞잡았다.
태형의 손을 잡고 바닥에서 일어난 황후는 황궁 밖으로 나서기에 앞서 황후전으로 돌아왔다. 태형과 함께 오는 황후를 보고 도미는 약간 놀란 눈치였으나 이내 아무렇지 않게 태형을 들여보냈다.
“도미야.”
“예. 황후마마.”
“황궁 밖으로 나갈 것이다.”
“예?”
“별감과 함께. 너희는 따르지 않아도 된다. 몰래 나가는 것이니 폐하께도, 오라버니께도 비밀로 하고.”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말에 도미는 놀라 되물었다. 허나 도미는 황후의 충성스런 수족. 아무것도 묻지 않고 황후에게 도성 여인들이 입는 옷을 갖다 주었다. 화려하고 온 몸을 뒤덮는 황궁 의복과 달리 제 몸에 딱 맞는 수수한 옷을 입은 황후는 단아하고 소박했다. 얇은 천이라 적당히 살랑거리는 노란 치마는 황후에게 깨나 어울렸다. 사치스런 봉잠도, 비녀도 없이 반으로 묶은 머리도 제법 아름다웠다. 태형은 준비를 마친 황후에게 너울을 둘러주었다.
“신과 마마가 함께 나간다면 분명 눈에 띌 것입니다. 신은 몰래 담을 넘어 나갈 테니, 마마께선 정문으로 나가십시오. 번살이를 끝내고 돌아가는 항아의 복장과 엇비슷하니 큰 오해 없이 나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연한 담홍색 너울로 황후를 꽁꽁 덮은 태형이 아이 달래듯 말했다. 얼굴만 빼꼼 내민 황후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그래.”
도미는 끝까지 황후의 안위를 걱정했다. 태형을 매섭게 쏘아보는 것으로 네 놈이 황후마마를 잘 지키지 못하면 요절을 낼 것이다, 라는 말을 암묵적으로 전했다.
“명심하십시오. 누구에게든 들켜선 안 됩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황후가 혼자 황궁을 나섰다는 게 알려지면 일이 복잡해지니까요.”
황궁을 나간다는 건 황후에게 처음이고 어색한 일이라 이번에도 황후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태형이 웃으며 눈을 맞췄다. 신뢰 가득한 눈빛에 황후가 둘러진 너울을 좀 더 꼭 쥐었다. 태형은 그렇게 담으로 향했고 황후는 홀로 황궁의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황후전 근처엔 아무도 다니지 않아 괜찮았는데, 좀 걷고 나니 황궁 안을 바쁘게 누비는 대신들과 별감, 항아들이 보여 황후는 저절로 고개를 속였다.
“괜찮아, 괜찮아.”
스스로 되뇌며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너울로 가리기까지 했으니 감히 저를 알아볼 이는 없을 것이다. 운도 더럽게 없이 황제나 오라비를 마주하지만 않는다면, 순조롭게 빠져나갈 수 있을 터였다. 한걸음, 한걸음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히 발을 움직여 황궁을 가로질렀다. 눈앞에 정문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든 황후는, 갑작스레 손에 쥔 너울을 놓았다. 담홍빛 비단너울이 바람에 날렸다. 그리고 황후는 그 자리에서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
누군가 어깨를 끌어당겼기 때문이었다. 아프지 않은 그 악력에 등이 누군가의 품에 안겼다. 동시에 어깨위로 고개를 얹는 것이 느껴졌다.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휘감아 숨을 헉 들이켰다.
“어디 가.”
그리고 귓전에 내려앉는 음성은 사무치고, 눅진해서 심장을 터질 듯 뛰게 만들었다. 황제는 끝까지 황후를 제 품에 가둬, 벗어나는 걸 놓아주지 않았다.
/ 황 후 열 전 熱 血 皇 后 /
六.
“어디 가.”
황후는 잠시 제 귀를 의심했다. 목언저리에서 흩어지는 음성은 분명 황제의 것이 맞았지만, 어쩐지 평소와는 너무도 달리 다정하여 이질적이었다. 어깨에 약간의 체중이 실렸다. 얇은 비단위로 느껴지는 황제의 숨결과 나긋한 속삭임, 힘을 주어 끌어안은 허리의 손길. 그에 황후는 숨이 탁 막혔다. 아무도 몰래 황궁을 빠져나가려는 황후의 다짐은 뇌리 깊숙한 곳으로 순식간에 파묻혔다. 황제는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그보다 황후의 의복도 입지 않은 채 시녀하나 대동하지 않고 조용히 빠져나가려는 저를, 왜 끌어안은 것일까. 사고가 정지될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에 황후는 백짓장인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았다. 황실의복과 달리 얄팍한 의복은 허리를 지분거리는 황제의 손길이 여실히 느껴지도록 해주었다.
“아…….”
“짐을 여기 두고 어딜 가려는 것이야.”
정국이 제게 다정했던 적은 없었다. 헌데 왜, 왜 이리 손길에 애정이 묻어나는 것인지. 목소리는 또 왜 이리 떨리는지, 자각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번살이 후 돌아가는 항아의 옷과 비슷하다는 태형의 말이 떠올랐다. 무엇에 취한마냥 몽롱히 떠오르는 가슴이 저 바닥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황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허리에 감긴 정국의 손을 붙잡았다. 자신이 황후인 걸 알게 될 황제가 두려웠다. 지금 같은 태도를 항상 백씨에게 보여준다 생각하니 그 또한 마음이 아팠다.
“황상…,신첩은….”
허나 더 이상 백씨 항아인척을 하며 황제의 품안에 안겨있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 손에 넣는 달콤함이 얼마나 간절한지 다시 한 번 상기되었으나 그 한 자락을 붙잡고자 구차해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황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백야가 아니었다.
“황후입니다.”
갈무리하는 말의 끝자락이 애닳았다. 어깨위로 한숨이 내려앉았다. 실망하신 거야. 실망하신 게 틀림없어. 황후는 눈을 꾹 감았다. 동시에 허리에서 떨어진 손이 어깨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반강제로 돌아선 황후가 눈을 뜨고 정국을 볼 새도 없이, 그토록 간절했던 황제의 품이 힘껏 황후를 끌어안았다. 여기는 황궁의 정문 앞. 온갖 대소신료들이 지나고 있을 인파 가운데 황제인 정국의 행동은 모두의 이목을 사기 충분했다. 정국의 품에 가려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은 그녀가 황후인줄은 꿈에도 모른 채, 저 이가 바로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는 백씨 항아이겠거니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황후는 자신을 밝혔음에도 들이닥치는 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황상.”
“네가 감히.”
다시 한 번 단단히 내려앉는 황제의 음성은 화를 누르는 듯 금방이라도 가시가 돋을 듯했다. 항상 덤덤하고 퉁명스레 제 할 말만 하던 황제였다. 정국의 말에서 처음으로 분노와 적의를 느낀 황후는 다리에 힘이 풀려왔다. 아무리 황후전이 황제의 관심 밖이라도 일언반구도 없이 황궁을 나선 것은 역시 보통 일이 아닌 것인가. 황후는 저를 단단히 지탱하고 있는 정국에 마음대로 주저앉지 조차 못했다.
“대체 누구 손아귀를 벗어나려는 것이지?”
“황상, 신첩은 그냥….”
“말하지 않았나. 짐의 눈에 거슬리지 말라고. 감히 누굴 자극하려고….”
귓전에 닿는 숨이 뜨거웠다. 잡힌 어깨에 제법 악력이 느껴지자 황후는 비로소 정국이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형이 제게 당당히 고백하던 걸 눈앞에서 본 황제였다. 여전히 황제의 마음이 저를 향하고 있다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에겐 당연한 듯 소유욕과 제 것에 대한 욕심이 있다. 아무렴 황제라고 덜할까. 황제의 손아귀에 얌전하게 들어앉아 사랑만을 갈구했던 자신이 처음으로 다른 이의 손에 이끌려 그 손아귀를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게 거슬리는 건 당연했다. 제게 백야의 첩지까지 당당하게 요구했던 황제다. 황후는 처음으로, 연모하는 황제에게 반항을 해보기로 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까지 당장이라도 황제의 뒷목을 끌어안고 백야가 그랬던 것처럼 입 맞추고 제 변함없는 마음을 꺼내 보여주고 싶었다. 허나 황후는 영악한 여인. ‘태형’이라는 제 발로 굴러 들어와 준 기회를 놓치진 않았다.
“황상.”
수동적으로 황제에 손길에만 움직이던 황후가 제 손을 황제의 뒷목에 감았다. 평소였다면 언감생시 정국의 몸에 손끝도 대지 못했을 것이었다. 주변 시선도 그랬거니와 정국이 황후의 손길을 가만히 받아주지도 않았다. 허나 지금 황후는 타인의 눈에 황후가 아니다. 더불어, 자신을 먼저 끌어안은 것도 황제. 황후는 겁날 것이 없었다. 다만, 이것에 제 사랑하는 황제가 조금이라도 동요해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황후가 뒷꿈치를 들어 정국의 품에 단단히 안겼다. 제 손에 휘둘리기만 했던 황후가 자주적으로 응대를 해오자, 정국의 눈이 당황한 듯 잔뜩 커졌다. 황후의 나긋한 손길이 황제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엄한 짓이었지만, 평소와 다르게 정국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신첩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사력을 다 한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정국은 저도 모르게 자신을 끌어안은 황후를 살짝 떼어내어 얼굴을 보고 싶었다. 헌데 황후는 작게 악력을 발휘하며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몸이 바짝 붙은 채 안고 있기를, 정국이 허리를 살짝 숙여 황후의 품에 맞춰주도록, 그 자세를 유지했다.
“신첩도 숨 쉴 공간이 필요하다고.”
“…….”
“황상의 황궁은, 너무도.”
“…….”
“가혹해요.”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잔인하게 울렸다. 정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만약 황후가 봤다면 제게 없는 마음이 더더욱 떠날까 조마조마할 만큼 무너진 얼굴이었다. 허나 지금은 황제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건 보이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뱉을 수 있었던 말들이었다. 사랑하는 당신의 궁이 가혹할 리가. 황후는 덜덜 떨리는 입술을 애써 깨물었다. 백야는 이러지 않겠지. 황제라는 무거운 짊을 지고 가장 높은 자리에 고독하게 앉은 정국을 위로하겠지. 발톱을 세우고 할퀴려는 승냥이 같은 행동은 죽어도 못하겠지. 그러하기에 백야를 연모하시는 것이겠지.
그 생각을 하자, 황후는 다시금 슬퍼졌다.
“황상, 신첩은 별감과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황후.”
“다녀오면 황상의 후궁을 축하라도 하듯 연회가 열리겠군요.”
가시 돋은 말에 정국은 이를 물었다. 허나 이때까지의 긴장과 분노가 무색하게 황후는 바람처럼 제 품을 벗어났다. 아직 제대로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황후는 정국 너머 바닥에 떨어진 제 너울 쪽으로 향했다. 황제의 뒤에 서있던 일행. 그 중에서도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지민이 황후의 너울을 주워 내밀었다. 지민을 알아본 황후가 긴장으로 경직된 입꼬리를 어색하게 들어올렸다.
“고맙구나.”
담홍색 너울을 두른 황후가 그대로 걸어 나갔다. 한자락 바람에도 흔들릴 듯한 뒷모습이 멀어질수록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국은 주먹을 꾹 쥐었다. 정국은 표면적으로 분노나 애틋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집요한 눈으로 황후의 뒷모습을 담던 정국은 이내 바람 빠진 웃음을 뱉어냈다.
“홀렸군. 망할.”
그저 어이없을 수밖에.
皇后
列傳
약 일각 전부터 도성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태형은 잔뜩 풀이 죽은 채 이쪽으로 오고 있는 황후를 발견하곤 반색했다. 너울을 두르고 있음에도 온 몸으로 있는 집 여식임을 드러내는 황후가 기분까지 상해있는 듯하니 더 데리고 다니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황상을 마주쳤다.”
“예?”
사소한 답을 기대하며 건넨 다정한 물음에 황후는 당당히 대답했다. 허나 그 답은 태형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헌데 어찌 나오셨습니까?”
“잘. 걱정 말아라. 황상은 더 이상 날 찾지 않으실 테니.”
겁도 없이, 미움 받을 지도 모르는 일을 저지르고 나왔으니 애초에 무심한 황제가 어찌 나올지 몰랐다. 허나 이왕 황궁을 빠져나온 것, 더 이상 복잡하게 그 생각을 하고 싶진 않았다. 더 물을 수 없게 답하는 황후에 태형은 눈치껏 고개를 끄덕이며 순응했다. 어차피 자신이 대신 황제에게 뭐라 말 할 수 있는 신분도 아닌데다, 황후가 그렇다면 그냥 그런 것이었다. 이젠 취조 대신에 황후의 기분을 풀어 주기로 한다. 애초에 목적이 그것이었으니까.
“자, 그럼 저와 함께 서시(西市)로 가시죠.”
“서시? 그곳이 어딘데?”
“도성 서쪽에 있는 시장입니다.”
도성 지리를 제법 알고 있는 모양인지 태형은 앞장서서 그 ‘서시’로 향했다. 황후도 오늘따라 가벼운 의복을 입어 가뿐한 걸음으로 태형의 뒤를 따랐다. 사가에 있을 때도 잘 하지 못했던 시장이 구경이라, 들뜬 마음은 어느새 아까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린 듯했다.
“자, 이제 호칭정리를 해야 합니다. 저잣거리에서 황후마마더러 황후마마라 불렀다간 미친놈 취급당할 것이 뻔하니….”
태형이 작게 말했다. 하긴. 저 장사치들과 백성들 사이를 순순히 맴도는 남녀가 황후와 별감인 것을 믿을 리도 없고, 안전을 위해서라도 신분을 숨기는 게 필요했다.
“음, 허면….”
“누이?”
“무엄…!”
장난스레 ‘누이’라 부르며 콧잔등이 찡긋거릴 정도로 웃는 태형에 황후는 육성으로 ‘무엄하다’소리가 튀어나왔다. 물론 놀란 태형이 황후의 입을 틀어막는 바람에 완전히 내뱉진 못했지만.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제발 쉿.”
입을 틀어막은 것도 손길이 순순해서 망정이지 무엄하기 그지없는 짓이라, 황후는 눈을 번뜩 떴다.
“네가 오냐오냐 해주었더니 정말이지 미쳤구나.”
“그런 말을 다정하게도 하십니다. 누이 소리는 농담이었습니다.”
“그래. 농담이었던 걸 다행으로 알렴.”
금방 흥분했던 황후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태형의 말마따나 아주 살벌한 소리들을 나긋하게도 한다. 그게 묘하게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잘 어울려 태형은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저더러 웃은 것을 알면 또 무엄하나 할지 모르니까.
“허면 호칭은 마마께서 결정하십시오.”
“음, 나는 황후로만 불려보아서 잘 모르겠구나. 아. 사가에 있을 땐 오라버니께서 아명을 불러주셨다.”
황후의 말에 태형은 의외라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날 때부터 황후로 점지되었다는 고고한 여인이 아명(兒名)이라니. 어릴 때 불리던 이름조차 고귀하려나. 태형이 노골적으로 궁금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에 잠시 어린시절을 회상하는 듯 생각에 잠겼던 황후가 입을 뗐다.
“소소(笑昭).”
“자그마하다는 뜻입니까?”
“밝은 꽃이라는 뜻이니라.”
제 턱 끝까지 올라오는 황후의 키를 훑던 태형이 장난스레 물었다. 소소. 하나도 소소하지 않은 황후에겐 이질적이면서도, 또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폐하께선 그 이름을 아십니까?”
“아니. 아실 리가 있겠느냐. 내겐 관심도 없으신 걸.”
“그럼 황궁에선 그 이름을 불러드리는 이가 제가 처음이겠군요.”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는 태형에 황후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서시 장터가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황후의 두 눈이 휘둥그레 질 정도로 다양한 먹거리와 비단상과 노리개상들이 펼쳐진 장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붐볐다. 황궁과는 또 다른 생기가 흘러넘쳤다.
“…소소.”
“응?”
그 볼거리에 눈이 팔린 황후는 이미 호칭을 어릴 적 아명으로 정정한 것인지, 조용히 소소라고 되뇌는 태형에 무의식적으로 답했다. 태형은 잠시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다정한 아명과 그에 바로 대답하는 황후라니. 믿기지가 않는 상황이라서였다. 허나 생각보다 기분이 좋다. 마치 제가 황후에게 특별한 사람이라도 된 듯해서.
“나, 저게 먹고 싶다.”
그런 황후가 손을 뻗어 가리킨 것은 달콤한 꿀이 흐르는 경단이었다. 누이 소리 했다가 육시당할 번 한 것치곤 아주 어린 누이같이 군다.
“입에 많이 달 텐데요.”
“응. 그래 보이는구나.”
저 차분한 얼굴로 너울을 두른 채, 아이 같은 말을 하는 황후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태형은 황후를 데리고 경단을 파는 가게 앞으로 갔다. 오늘은 뭘 원하든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 작정이었다.
“아이고, 잘 어울리는 부부시구만. 경단 세 개에 한 냥입니다.”
경단가게 주인은 젊은 사내였는데, 역시 장사치라 그런지 사교성 좋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물론 그게 약간의 착오를 담고 있는 말이었지만.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보고 겪어 온 태형은 웃으며 넘겼지만, 아무래도 구중궁궐 안에 있던 황후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부부라니? 어딜 봐서 이 자와 내가 부부지?”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서 대뜸 경단가게 장수를 쏘아붙이니 말이다. 저와 부부로 보인다는 말이 저렇게 기분 나쁜 일인가? 태형이 얼떨떨한 얼굴로 황후를 바라봤다.
“아아, 죄송합니다. 저는 부부인줄 알고….”
경단가게 장수가 비로소 민망해하며 사과하자 황후는 새침한 얼굴을 획 돌린다. 허나 여전히 태형은 집요한 눈길로 황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 보느냐?”
“신과 이런 오해를 받는 게 그리도 기분 나쁘십니까?”
“아니 뭐, 네가 아니라 누구와도 오해를 받으면 풀어야지.”
“황제라 해도?”
“그건….”
새초롬히 대꾸하던 황후가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잠시 어버버하다가 이내 뭘 그런걸 묻냐는 눈길로 태형을 본다. 애초에 황제와 자신은 부부가 맞다. 헌데 무슨 오해야. 황후의 그런 눈빛을 읽은 태형은 고개를 저으며 장사치에게 돈을 건넸다.
“세 개만 주십시오.”
“네에.”
뭐야. 싱겁게. 장수가 경단에 꿀을 바르고 잔돈을 바꿔줄 때까지 태형은 황후를 쳐다보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아 맞다. 이 자는 나를 사모한다 하였지. 설마 제 말에 토라진 건가? 황후의 예상이 맞기라도 한 듯 무덤덤하게 경단을 전해 받은 태형은 그 중 하나를 황후에게 내밀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되려 황후가 눈치를 보게 만든다. 먼저 말을 걸까. 생각하던 황후는 이내 자신이 왜 그래야 하지라는 생각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둘 사이엔 아무 대화 없이 경단 가게를 나섰다. 황후가 경단 꼬치를 그대로 입에 가져가려는데, 태형이 아프지 않게 황후의 팔을 잡아 돌려세운 다음 눈을 맞췄다.
“소소.”
“…뭐?”
“지금 그대는 황후가 아니라, 소소에요. 저도 별감이 아니라 사내이고.”
어렸을 때만 불리던 친밀한 이름이 태형의 입에서 나오자 괜히 쑥스러웠다. 자존심 상하게도 말이다.
“그래도 난 황후인데….”
“허나 여긴 황궁이 아니잖아요.”
아까는 굳어있던 얼굴을 다시 피며 웃는다. 태형의 웃음에 멍해진 황후가 넋을 놓고 있는 동안, 태형은 황후가 들고 있던 경단꼬치를 먼저 베어 물어 먹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얼굴이 경단을 하나 쏙 빼 먹고 멀어지자 황후는 눈을 껌뻑껌뻑 거렸다.
“허, 네가 지금 날 놀리는 구나.”
황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하며 저도 경단을 물어 먹었다. 그러자 달큰한 꿀맛이 입안을 번져간다. 머리를 맴도는 온갖 생각이 사라질 만큼 달아서 황후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태형은 그런 황후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웃으시니 보기 좋습니다.”
“그래. 나도 웃는 게 좋은데 황궁엔 웃을 일이 별로 없구나.”
“허면 함께 자주 나와야겠습니다.”
황후는 경단을 우물우물 씹으며 꼬박꼬박 답을 했다.
“아니, 이번에 들어가면 자주 나오진 못할 것이다. 백씨가 재인첩지를 받을 거거든. 본격적으로 백씨를 상대하려면 황궁을 자주 비워선 안 된다.”
경단을 먹던 황후가 이를 바득 갈며 말했다. 지금쯤이면 백야에게 첩지를 내렸으려나. 다시 생각하니 열이 받지만 당장은 달콤한 것이 입안에 있으니 잊기로 했다. 허나 황후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을 들은 태형은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 소문의 황후라면 백야가 고분고분 후궁첩지를 받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찌 허락하셨습니까? 후궁첩지.”
“그게 다 너를 황후전 별감으로 들이기 위해서였느니라. 허니 내게 감사히 생각해야 할 것이야.”
황후의 자랑스런 말투에 태형은 더 뜻밖이라는 얼굴이 되어 멈춰서 황후를 바라봤다. 반 장난식으로 요구한 황후전 별감자리를 그리 큰 건과 맞바꾼 줄은 몰랐다. 그래서 대명전에서 나올 때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막상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왜, 너무 감동하였느냐?”
“소소.”
“…….”
“고마워요.”
생색내는 투로 말하긴 했지만 막상 태형이 진중하게 눈을 맞추며 말하자 황후는 얼떨떨했다. 아니 뭐…. 황제가 먼저 후궁첩지를 논하기에 홧김에 별감자리를 얻어낸 것이었는데 이리 진심으로 고마워하니 괜히 민망하지 않은가. 여하튼 이상한 작자다 정말.
“아니 뭐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허면 폐하께 첫 후궁이 생기는 건가요.”
다시 걷기 시작한 태형이 넌지시 질문했다.
“아니, 황상께는 후궁이 둘 더 있느니라. 황궁 안에 거처가 없어서 그렇지.”
아, 그러고 보니. 저번 번살이 걱정에 대명전 별감들과 얘기할 때 후궁전도 괜찮을 거란 김 별감의 말이 떠올랐다.
“순빈과 연재인. 전 주제국 황제의 딸과 개국공신 왕려의 고명딸이지.”
“헌데 왜 가만히 두셨습니까?”
“뭐?”
“소소 당신이 연모하는 사람의 후궁이잖아요. 패망한 주제국의 공주와 이미 죽은 왕려의 딸이라면, 대승상이 아비이신 당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첩지를 거둘 수 있었을 텐데요.”
태형은 만약 자신이었다면 그리 했을 거라는 어투로 말했다. 황후는 다 먹은 경단꼬치를 태형에게 내밀며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후궁들도 폐하의 관심을 얻지 못하긴 마찬가지거든. 다만 순빈… 그 독한 것이 거슬리긴 한다만, 내게 위협도 되지 않은 아이들을 내쳐봤자 황후전이 악독하다는 소문 하나 더 얻기밖에 하겠니.”
황후의 말은 나름 설득력 있었다. 무정한 황제는 둘 뿐이었던 후궁들에게조차 마음을 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헌데 백야는 달라.”
“…….”
“그 아이는 황상의 마음을 얻었잖니. 난 곧 죽어도 얻을 수 있는 황상의 연모를 저 혼자 가졌단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 아이를 황상의 곁에서 떼어내려는 것이지.”
경단을 다 먹어서 그런가 황후의 발음은 더 이상 뭉개지지 않았다. 그 또렷하고 흔들리지 않는 말이 가슴 아파 태형은 애써 모른척했다. 그러면서 고개를 돌리자 또다른 구경거리가 태형의 시선을 붙잡았다.
“어, 저 인형극을 보시겠습니까?”
“인형극?”
“예. 서시에선 일정 기간마다 인형극이 열리는데, 저게 서시의 명물입니다.”
눈앞에 사람들이 북적이며 몰려있는 것이 보였다. 인형극이라. 황궁연회에서도 볼 수 없던 새로운 것이 황후의 흥미를 이끌었다. 잠깐의 시간을 고민하던 황후가 이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태형이 황후의 손을 잡아 끌었다. 태형은 한참을 생각한 후에 대담하게 저지른 행동이었지만 황후는 약간의 당황도 하지 않고 평온하게 태형의 손에 이끌려 갔다.
“자자, 궁녀와 황제의 치명적인 사랑 이야기! 한 분당 한 냥 내 주십시오.”
연극꾼의 구수한 말에 다들 한냥씩을 든 손을 내밀고 난리들이다. 그 가운데 제법 좋은 자리를 잡은 태형이 이젠 거의 풀릴 듯 허술하게 매어진 황후의 너울 풀어 바닥에 깔았다. 역시 귀하게 자란 황후라 아무데나 막 앉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역시나 황후는 잠깐 꺼리는 기색을 보이다가 너울을 깔아주는 태형의 정성에 마지못해 앉았다.
“벌써 다리가 저리는 구나. 재미없기만 해봐. 저 장사치를 요절 낼 테니.”
황후는 고고한 얼굴로 살벌하게도 말했다. 태형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황후는 심드렁하게 인형극을 주시했지만, 극이 시작되자 그 두 눈이 반짝였다.
“때는 호랑이 담배 필 시절! 태평성대를 이루는 한 나라에 고독한 황제가 있었으니. 한 날 입궁한 궁녀들이 황제께 인사를 올렸다.”
작지만 제법 정교한 용포를 차려입은 인형이 나왔다. 저게 폐하라고? 황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전혀 황제의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 인형을 물끄러미 보았다.
“황제폐하. 인사드리옵니다! 그 때, 황제의 눈길을 끈 궁녀 하나가 있었는데….”
여느 사랑극이 그렇듯 궁녀 하나가 황제의 눈에 들어 온갖 고난을 헤쳐 사랑을 이루는 이야기였다. 모두가 그 꿈같은 이야기를 보며 감동과 상상의 나래에 빠져있을 때, 아주 불편한 듯한 시선으로 그걸 바라보던 황후가 갑자기 태형의 귀에 바짝 붙었다. 극에 집중하고 있던 태형이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뻈다. 허나 황후는 집요하게 따라와 귓가에 속삭였다.
“아니, 저 궁녀인형이 저렇게 못생겼는데 어떻게 황상의 눈길을 끈단 말이냐? 백야도 저리 생기지는 않았느니라.”
“소소. 이건 인형극이지 않습니까.”
하다못해 인형에 질투하는 것인지, 잔뜩 샘이 난 목소리가 어이없고 웃겼다.
“근데 너, 왜 귓속말을 하는데도 날 소소라 부르지? 제대로 무례하기로 작정한 모양이구나.”
황후의 예리한 말에 태형은 모르쇠로 일관하며 앞에서 펼쳐지는 인형극을 보고 있었다. 황후는 잠시 새초롬한 시선을 던지다가 이내 다시 인형극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때에, 황제의 어머니인 태후께서 서거하시는데!”
“…….”
“슬픔에 빠진 황제, 홀로 고독하게 울고 있으니. 그때 궁녀 들어와 황제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하는 구나!”
황제 인형이 어깨를 떨며 우는 시늉을 한다. 그러자 황후가 박색이라 욕했던 궁녀 인형이 다가와 황제의 등을 토닥인다. 허. 옆에서 황후가 헛웃음을 쳤다. 또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거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아 가만히 인형극을 보려하던 태형은 그녀가 연속으로 다시 헛웃음을 뱉으며 한숨을 쉬며 물었다.
“또 왜그러십니까?”
“저 자들이 멀쩡히 살아계시는 태후마마를 고인으로 만드는 구나. 저것이 얼마나 중죄인지 모른다더냐?”
“이것은 인형극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허구입니다.”
“게다가 감히 궁녀주제에 황제의 몸에 손을 대? 무례하구나. 대체 저건 어느나라 이야기길래 이리도 법도가 없단 말이냐.”
황후의 지적이 너무도 현실적이고 단호해서 태형은 눈을 꾹 감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황후를 데리고 인형극을 즐기는 건 물 건너 간 듯 싶었다. 하는 수 없어진 태형이 황후의 손을 잡고 인파들 사이에서 나왔다.
“정말 저리도 맥락 없는 극은 처음 보았다.”
“그렇게 치면 세상에 볼 것은 없습니다.”
“아, 오래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아프고 목이 마르구나.”
고작 황궁을 거닐 거나 태후 전에 문후 가는 것 이외에는 모두 황후전에 기대있던 황후는 오랜만에 몸을 많이 움직이자 온 곳이 쑤셨다. 아깐 아무데나 못 앉는 듯 굴더니 나무 맡에 주저앉은 황후에 태형은 작게 웃음 지었다.
“제가 마실 것을 사올 테니, 여기 잠깐 앉아 계십시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얼른 사오라며 손을 휘휘 젓는 황후에 태형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눈을 맞췄다.
“제발 여기 얌전히 계십시오.”
“그래. 누가 들으면 내가 문제나 일으키고 다니는 줄 알겠구나.”
긍정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은 태형이 일어났다. 약간 미련이 남은 눈으로 황후를 바라보던 태형은 금세 다녀올 것을 약속한 후 마실 것을 파는 장터로 다시 들어갔다.
“아, 다리야.”
한참 만에 그늘에 앉으니 다리가 아팠다. 이제야 시중 들어주던 도미와 궁녀들의 소중함을 깨달은 황후는 궁에 돌아가면 그들에게 더 잘해주기로 다짐했다. 이제 마실 것만 좀 먹고 다시 들어가야겠다. 황제에게 나름대로 단호한 말을 하고 나오긴 했지만, 황후는 내심 황제가 신경 쓰였다. 찾지 않으실 걸 알지만, 황후전을 지키고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너울을 팔에 걸친 채 쉬고 있던 황후는 누구가가 다가옴에 반갑게 고개를 들었다. 당연히 태형이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헌데 눈앞에 선 것은, 생전 처음 보는 약간은 험악하게 생긴 한 사내였다. 황후의 고운 미간이 찡그러진다.
“무엇이냐?”
“낭자, 혼자 왔소?”
저 능글능글한 웃음이며, 무례하게도 자신을 더러 낭자라 칭하는 불한당은 도미에게 들었던 ‘시정잡배’인 모양이다. 여인혼자 사람 많은 장터 복판에 앉아 있으니 작업이라도 걸어볼까 하고 다가온 것이겠지. 허나 상대를 잘못 골랐다.
“혼자 오지도 않았고, 혼자 왔다 해도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지?”
황후의 단호한 말에도 사내는 얼굴에 맴도는 유들유들한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저 저 귀여운 여인이 튕기는 것이겠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제법 튕기는 구려. 여기 이렇게 주저앉아 있지 말고 나와 한 잔하러 가시는 것이 어떻소?”
“싫은데?”
황후는 단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답했다. 어렸을 때부터 고고하게 자라온 여인의 당당함이 온 몸으로 드러났다. 그러자 사내의 우락부락한 얼굴이 찰나의 순간 일그러졌다가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아이고, 이리 어여쁜 여인이 튕기기까지 하니 금상첨화구려. 그러지 말고 나와 함께 가는 것이 어떻소? 머리를 올리지 않은 것이,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듯한데…”
사내가 능글맞게 웃으며 다가오려 했다. 허나 황후는 질겁하며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어, 잠깐!”
“…….”
“다가오지 마라. 오 보 이상 떨어져라.”
그 뻔뻔하고 마치 명령하는 듯한 어조에 사내는 잠시 혼동하여 정말 오 보 떨어지려는 듯 뒷걸음쳤다. 허나 금방 상황을 깨닫고는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이 계집이 보자보자 하니까. 어디서 명령질이냐!”
사내가 소리치며 다시 다가오려 발길을 움직였다.
“어허, 무엄하다. 떨어지지 못할까.”
다른 여인이라면 두려움에 떨어 소리쳤겠지만 황후는 상황을 자각하지 못한 것인지 뻔뻔하게 명령했다. 사내는 기가 찬다는 얼굴을 했다.
“오 보 밖으로 물러나거든 내 아무 죄도 묻지 않겠다. 당장 장터 앞에서 육시당하고 싶지 않으면 운 좋은 줄 알고 물러가라.”
“허이고. 네깟 게 뭔 수로 나를 육시한단 말이냐? 제법 귀한 집에서 자란 듯 한데, 네가 뭘 모르는 구나. 여기 널 도와줄 사람은 없다.”
사내의 말이 사실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장터의 수많은 사람들은 제 갈 길을 가느라 바빴다. 사내의 흉악하게 생긴 외양하며 이 상황자체가 황후를 두려움에 집어넣기에 충분했지만, 황후는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너도 뭘 모르는 구나. 한 발짝만 더 다가왔다간 아무도 널 도와주진 못할 것이다.”
끝까지 뻔뻔한 태도에 제대로 열이 받은 듯한 사내가 습관적으로 손을 치켜들며 황후에게 달려들었다.
“어허.”
사내와 자신 사이 거리가 한 보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황후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정말 그 커다란 손이 황후의 얼굴을 덥칠 쯔음이었다.
“부인.”
상상치도 못한 호칭에 사내와 황후의 시선이 모두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했다. 단 한순간도 동요하지 않던 황후의 예쁜 두 눈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 팽창되었다. 황상…. 황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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