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 함께 1년을 이끌어 갈 인물들을 색출하던 명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무국장을 할 사람이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에 총학에서 1년간 일하고 싶다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연락을 해달라고 했지만, 그 연락은 좀 해선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국장 자리를 맡으려면 적어도 3,4학년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제 공부하기 바쁘다고 했다. 소파에 앉아 두 다리를 일사분란하게 떨었다. 한 달하고 보름만 지나면 회장 선거 시즌이었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구성원을 모아야 했다.
대체 누구를 시키나. 평소 따사로운 햇볕이 잘 드는 제 과방을 좋아하던 명수였지만, 오늘만큼은 제 심기를 건드리는 요소가 되고 있었다. 아직 구성원을 다 모으지 못한 자신을 비웃는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날씨는 말을 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회장을 맡고 있는 선배의 말을 들어보니, 구성원은 일주일 만에 다 모았다고 했다.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그간 학교생활을 어떻게 해왔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그 말을 듣고 학교에 있는 행사란 행사는 전부 참여하며 인맥을 넓혔지만, 그건 순전히 제 착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여했던 행사들을 하나씩 손꼽아 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여름방학 때 다녀왔던 농촌봉사활동이 제 레이더망에 걸렸다. 왜 그 생각을 못하고 있었을까 하는 질책이 제게 날아들었다. 농활에 갔을 때, 유독 튀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제 과에서 학년 대표를 맡고 있다고 했던 이성열이 떠올랐다. 제 조원도 아닌 사람을 챙기지를 않나. 이 조, 저 조를 다니며 제 의견을 나타냈다. 처음에는 왈가닥인 성격이 신기해 지켜봤지만, 짧은 3박 4일 동안 성열과 지내며 그 외의 본성을 보며 더욱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한지도 어느 덧 한 달이 지나있었다. 성열이 사무국장 자리에 앉으면 어떤 모습일지 잠시 동안 생각을 해봤다. 성열의 과 학회장에게 들은 바로는 항상 칭얼거리지만, 일을 맡으면 확실하게 처리를 한다고 했으니 한 번씩 힘들다고 할 때마다 달래어 주기만 하면 될 것 갔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거절을 하면 어떡하나 하고 잠시 걱정했지만, 당사자가 싫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불도저 같은 성격으로 밀어붙인다면 자신을 당해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조금씩 천천히 너에게 W.클레오 확신이 들자마자 성열이 있는 과의 학회장에게 바로 연락을 했다. 다짜고짜 성열을 소개 시켜달라는 말에 왜 그러냐는 물음이 날아들었지만 그에 대한 답은 하지 않았다. 그저 불도저 같은 제 성격대로 밀어붙이자, 혀를 차던 학회장의 입에서 알았다는 대답이 떨어졌다. 그리고 지금 시간이 되겠냐는 그 말에 지금 당장 가겠다는 말을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여태까지 끙끙 거리며 골머리를 앓았던 것에 대한 보상인 듯,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인문대 건물에서 자연대 건물까지 가려면 꽤나 많은 거리를 걸어야했지만, 그 거리가 자신을 막는 장애물이 되지는 못했다.
자연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공기가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경사란 경사는 죄다 지나 맨 꼭대기에 있는 자연대 건물 앞에 도착했다. 가을이 찾아왔음에도 채 가시지 않은 더위 때문에 이마에는 송골송골 맺힌 땀이 가득했다. 대충 땀을 닦아내고 손 부채질을 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맨 꼭대기에 있는 건물에 식겁했건만, 성열이 있는 과는 맨 꼭대기 층에 위치해 있었다. 이렇게 맨 위에만 있다 보면 산소가 부족하겠다는 다소 영양가 없는 생각을 했다. “ 어, 왔냐? ” “ 응. 성열씨는 어디 있어? ” “ 실험이라서 실험실. 성열씨라니. 말 놓는 사이 아니었어? ” “ 무슨 소리야. 안면만 텄는데. ”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학회장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친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을 텐데. 볼을 긁적이며 조금 전 전화로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었지만, 접점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넘겨짚은 자신이 잘못이지. 파리 한 마리도 날아다니지 않는 조용한 복도를 여기 저기 둘러봤다. 인문대와는 다르게 억압된 분위기가 없잖아 있어 오스스 돋는 소름에 팔을 쓸어내렸다. 성열이 어디에 있냐고 물으려던 찰나, 복도 끝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실험 가운을 입고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뛰어다니는 폼이 꽤나 우스웠다. 설마 저기 정신 놓은 사람들 중 성열이 있겠나 하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였다. 복도 끝을 멍하게 보고 있는 명수의 팔을 툭 친 학회장이 입을 뗐다.
“ 저기 성열이 있네. ”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자, 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느꼈던 것인지 손을 들어 성열을 가리켰다. 손에 기다란 병을 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모습에 꽤 당황스러웠다. 성열의 성격에 실험실에 진득하게 붙어서 실험을 하면서 보고서를 쓴다는 상상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자유로운 분위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학회장도 그런 성열과 제 과 후배들의 모습이 웃겼던 것인지, 혀를 끌끌 차며 명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복도 끝으로 다가가면 갈수록, 소란스러움은 더해져만 갔다. 그렇게 시끄럽게 하던 와중에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장난을 멈추고 다들 실험실 안으로 들어갔다. 냄비처럼 끓었다가 물을 부은 것처럼 금방 식어버리는 모습이 가히 신기했다. 자신의 과와는 다르게 꽤나 역동적인 성열의 과가 생소하면서도 재미있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실험실에 도착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는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문에 붙어 서서 실험실 안을 힐끔 쳐다봤다. 실험 시간이라서 그런지, 다들 흰색의 실험 가운을 입고 실험 하는 모습이 꽤나 진지해 보여 제 표정이 다 굳어져 갔다. 실험실을 쭉 훑어보다 자신을 보고 있는 성열과 눈이 마주쳤다.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눈을 피할까 하고 생각했지만, 뚫어져라 쳐다봐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한 번, 그리고 제게 뭐라고 하는 학회장을 한 번. 번갈아가며 쳐다보던 성열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제 손에 들고 있던 시약병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다가왔다. “ 무슨 일이세요? ” “ 반가워요. 우리 오랜만이죠. ” “ 아, 네. 오랜만이긴 하네요. ”
아무리 싹싹하고, 낯가림이 없는 성열이라고 해도 명수와 이야기를 할 때면 어색함에 몸부림을 쳤었다. 다행히도 몸부림을 치는 기간은 3박 4일 농활기간 뿐이었지만. 그렇게 어색해하던 명수가 제 앞에 있는 것이 심히 이상했다. 어떠한 접점을 가지지 않은 자신을 왜 부른 것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명수가 성열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 행동에 화들짝 놀란 성열이 명수를 쳐다봤다.
“ 사무국장 할 생각 있죠. ”
명수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짓던 성열이 고개를 끄덕이려고 하다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하마터면 하겠다고 대답을 할 뻔 했다. 너무나 당연하게 말을 하는 탓에 넘어갈 뻔 했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학기가 지나, 내년이 되면 4학년이 되니 학교에서 하는 행사는 모두 신경을 끄고 취업에만 매달릴 생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 같았으면 잠시 생각을 하다 하겠다고 했겠지만, 지금은 신중히 생각을 해도 하겠다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1년간 자신이 학교에 시달리는 모습밖에 그려지지 않았다. 방학 때도 제 시간을 갖지 못하고 회사에 출근하듯 학교에 나와 해가 질 때까지 잡혀서 학교 일만 붙들고 있어야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생활은 올 한 해로도 충분히 했다. 학교에 있는 행사란 행사는 전부 뛰어다녀야 했고,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받아야했기 때문에 학생회는 치가 떨렸다.
“ 왜요? 왜 싫을까. ” “ 저 공부하려구요. 죄송해요. 다른 사람 찾아 보셔야 겠…. ” “ 싫은데요. ”
알았다고 갈 줄만 알았던 명수에게서 부정의 대답이 들려오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당사자가 하기 싫다고 하면 몇 번 더 설득하다 물러나는 게 정석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했다. 언제부터 그 정석이 변질된 것인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제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명수의 곧은 눈을 보며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꽤나 피곤해질 것 같단 느낌이 제 온몸을 휘감았다.
* * * 제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그 다음 날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자신의 분신이라도 되는 것 마냥 자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행차하는 탓에 곤란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첫 날은 그냥 그러려니 했다. 3학년 쯤 되면 수업이 없는 날이 하루 정도는 있었기 때문에 그 날이 오늘인가 했다. 여름에 농활 갔던 아이들과 어느 정도 안면을 텄던 명수였기에 명수와 인사를 하는 애들도 여럿 있었다. 자신들과는 너무 정반대의 전공을 배우는 사람이 와서 청강을 듣는 것도 신기했고, 학교에 몇 없는 얼굴이라 더 신기했는지 명수를 향해 비난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이런 게 머리에 들어와? ” “ 들어오니까 듣고 있죠. ” “ 너도 참 괴물이다. 이런 걸 다 배우고. ”
자신도 모르는 새에 말까지 편하게 놓은 명수는 자신이 필기를 할 때마다 그에 대해 토를 하나씩 달았다. 대단하다는 둥, 이런 게 풀어지냐는 둥, 따분하지 않느냐는 둥. 열 손가락으로 꼽지도 못할 만큼 다양한 질문을 해왔었다. 밥을 먹으러 가는 곳도 따라다니고, 도서관 갈 때도, 간부 회의를 할 때도 제 옆을 굳건히 지켰다. 그리고 잊을 만하면 사무국장 해 볼 생각 없느냐는 질문을 했다.
그렇게 명수가 자신의 수업을 며칠 간 줄기차게 따라오는 걸 보고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학점을 포기한 학포자가 아닌 가하고.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연달아서 제 수업을 포기하고, 필요도 없는 과에 와서 청강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꾀어내고 싶다고 하더라도 제 밥그릇은 자신이 챙겨야했다. 그 생각에 한참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 성열의 옆에 앉아 필기해놓은 걸 구경하던 명수가 성열의 팔을 툭툭 쳤다. 왜 치냐는 눈빛의 성열에게 교수님을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 “ 왜 필기 안 하냐고. ” “ 아…. ” “ 아는 무슨. 그리고 거기가 아니고, 여긴데. ”
칠판에 쓰여 있는 것을 그대로 베껴 쓰려고 하자, 성열의 손을 치운 명수가 페이지를 넘겨 제 손가락으로 짚어줬다. 도움이 될 때도 있구나 하고, 잠시 생각하다 더 이상 수업을 놓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수업에 집중하기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제 책의 귀퉁이에 뭐라고 글을 쓰는 명수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며, 할 말이 무엇인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이내 헛웃음을 터트렸다. 언제 넘어올 거냐는 그 말에.
그리고 사건은 오늘 제대로 터졌다. 실험 수업은 대개 둥글게 지나가지만, 딱 한 교수님만은 그러지 않으셨다. 무언가를 외우는 것보다, 실험을 임할 때의 마음가짐을. 그 마음가짐을 보고 난 뒤엔 실험치가 아닌, 여러 전문가들이 내어놓은 수치와 얼마나 비슷한 가를 보는 탓에 이번 시간만큼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다. 실험하는 인원이 많으면 정신도 없고, 실험은 혼자 하는 것이지 둘 이상이 하는 것이 아니라며 1인 1조를 고집하셨다. 실험조교가 주고 간 용지에는 오늘 자신이 해야 할 실험의 방법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실험 기구를 눈대중으로 스캔을 하고, 어떤 시약을 먼저 제조할 것인지 순서를 정하고 있었다. “ 내가 이거 찾아올까? ” “ 뭐가 뭔 줄은 알아요? ” “ 못 할 건 또 뭐야. 나 고등학교 다닐 때 실험해봤어. ”
기세등등한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용지를 명수에게 건넸다. 여기에 적힌 것 다 찾아오라는 말을 하며, 자신은 테이블 위에 놓인 시약을 줄지어 세웠다. 본격적으로 시약을 만들어보려고 실험 기구를 기다리고 있다 명수가 가져온 것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가져온 것 중에서 맞는 거라곤 비커뿐이었다. 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숨을 푹 내뱉으며 명수의 몸을 옆으로 살짝 밀고는 다시 기구를 챙겨 제 자리로 돌아왔다.
“ 나 뭐 하면 돼? ” “ 시켜주면 다 해요? ” “ 응. 다 잘 할 수 있는데. ” “ 그럼, 선배 과로 좀 가세요. 왜 여기서 이래. ”
귀찮음이 뚝뚝 묻어나는 어투로 손을 휘휘 저었지만, 뚝심이 강한 명수는 고개를 살살 저었다. 무엇이든 하겠다는 그 모습에 박수를 쳐주며, 손에 쥐어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제 실험 결과는 안 봐도 뻔했다. 점수를 둥글게 주는 교수님이 아니었기에, 제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명수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자신을 계속 무시하고 묵묵히 제 할 짓만 하고 있는 성열을 가만히 보던 명수가 슬며시 웃으며 시약이 담긴 플라스크를 집어 들었다. 플라스크를 손에 쥐고 성열을 힐끔 쳐다보자, 실험 때 쓰일 시약을 만드느라 꽤 정신이 없어보였다. 실험에 필요한 것은 얼추 다 준비되었다고 생각한 명수는 아까 용지에 적힌 실험 방법을 상기하며, 제 앞에 놓인 비커에 시약을 콸콸 들이부었다.
성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나와야하는 수치에는 못 미쳐도 한참 못 미치는 수치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간이라도 많으면 시약을 새로이 만들어서 실험을 다시 했겠지만,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힐끔 본 성열의 얼굴엔 절망이 가득했다. 시간은커녕 수치만 적어내기에도 빡빡했다. 명수는 낯빛이 좋지 못한 성열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답지 않은 위로를 건넸다. 제 등을 두드리는 명수의 손길을 가만히 받고 있던 성열의 머릿속은 실타래가 엉킨 것 마냥 복잡했다. 배배 꼬여있었다. 대체 총학이 뭐기에 자신을 이토록 힘들게 하는 것인지. 홧김에 동의를 하기엔, 1년간 시달리고 있는 제 모습이 오버랩 되어서 차마 그러지도 못했다. 한숨을 내쉬던 성열이 명수의 손을 뿌리쳤다. 갑작스런 성열의 행동에 놀란 명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제 앞에 놓인 플라스크를 쥐며 말했다. “ 지금 이 시간 이후로 나 따라오면 이거 먹일 거예요. ” “ 그게 뭔데? ” “ 옆에서 보고도 몰라요? 똥물 시료잖아요! 이거 먹으면 뱃속에 대장균이 득실득실 해져서, 결국엔 죽을 걸요! ”
이 정도면 제 옆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더러운 물을 자신에게 먹일 정도로 총학생회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걸 알아줬으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제 바람에 불과한 듯, 그것만 마시면 되냐는 눈을 하고 있는 명수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이젠 아주 제 손에 들린 플라스크를 빼내어가려는 손길에 뺏기지 않으려고 힘을 세게 줬다. 그렇게 잠시 힘 싸움을 하다, 이내 지친 성열이 울상을 지으며 입을 뗐다.
“ 많은 일을 안 시킨다고 장담해요! 그럼 사무차장 정도는 해줄게요. ” “ 차장은 있어. 넌 무조건 국장. ” “ 싫어요, 그건! 이것저것 다 시키려고 그러죠? 그럼 나 안할래요. 이거 원 샷 하고 죽던지 말던 지. ”
고개를 세차게 젓는 성열을 보며 실히 처음으로 한숨을 내쉰 명수가 성열의 머리를 토닥였다. 토닥인다는 표현보단 때린다는 표현이 맞았지만. 배려 없는 투박스러운 그 손으로 제 머리를 건드리는 명수를 흘겨봤다. 자신보다 키가 조금 작은 명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생각에 쾌감이 들려던 찰나였다. 제 손에 들린 플라스크를 뺏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명수가 조용히 제게 속삭였다.
“ 일 많이 안 시킬 테니까 국장 하자. 일은 차장한테 다 넘기고. ”
말이야 그렇게 하지. 국장이 되면 어떻게 자기도 하지 않는 일을 차장에게 넘길 수 있나 하고 생각했다. 차장 혼자 낑낑대고 일을 하는 걸 보면, 마음이 좋지 않아서 또 옆에 가 돕고 있을 제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정말 할 생각은 없었지만, 제 수업을 들으러 가지 않고 자신만을 졸졸 따라다니며 설득하는 모습이 대단하기도 했고 어쨌든 일을 많이 시키지 않겠다는 그 말을 기억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는 대답했다. 할게요. 제 말을 들었으면서도 못 들은 척 다시 묻는 명수의 배에 주먹을 꽂자, 제 배를 감싸며 엄살을 부리던 명수가 숙였던 허리를 펴고는 제게 손을 내밀었다. 숙였던 고개를 들고, 고개를 갸웃해 보이자 시익 웃은 명수가 말했다.
“ 악수하자고. 1년 동안 잘 부탁할게. ”
얼떨결에 명수와 악수를 나눴지만, 자신이 잊은 한 가지가 있었다. 회장 행세를 하고 다니는 명수지만, 회장 선거를 하지 않았기에 그가 회장이 될 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조금 전 악수를 건넨 김명수가 조금 우스워졌다.
* * * “ 나 회장 됐는데 어떡할래? ” “ 뭘 어떡해요. 보좌하는 거지 뭐. ” “ 그럼 네가 부회장 하는 거? ” “ 아, 진짜 또 뭐래! 비켜요. 할 거 많이 줘서 바빠 죽겠는데. ”
구시렁거리며 제 몸을 툭툭 치는 성열의 머리를 꾹꾹 눌렀다. 파드득 거리는 모습이 웃겨 한껏 웃다 두툼한 서류뭉치에 맞을 뻔 하고는 조용히 길을 비켜줬다. 성열은 숨이 죽은 제 머리를 툭툭 털어내며 총학실로 향했다. 소름 돋게도 엄청 난 표차로 명수가 회장에 당선되었다. 압도적인 결과여서 상대 후보들도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축하한다는 말을 하며 물러났지만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이렇게 능글맞고, 능글맞고, 능글맞은 사람을 왜 이렇게 뽑아 준 것인지. 명수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성열은 명수가 아닌 다른 후보에게 한 표를 던졌다. 명수가 당선만 되지 않으면 조용한 4학년 생활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하지만 결과는 명수가 회장이 되는 것으로 막을 내렸고, 제 자리에 올려놓은 서류 뭉치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 안 시킨다면서 죄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저마다 제 앞을 지나면서 한 마디씩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뭔가를 하고 있다고. 회장이 누군지, 국장이 누군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으며 울고 싶어졌다. 확 밖으로 집어던져 버릴까 하고 생각을 하던 와중에 양 손에 간식을 잔뜩 든 명수가 총학실로 들어 왔다. 그 모습에 명수를 반기는 척 하며, 명수의 두 손에 들린 간식에 열광했다. 하나 둘씩 가운데에 놓인 원 테이블로 모여 들고 있었지만, 성열만은 제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 성열아. 너 안 먹어? ” “ 누나. 이거 봐요. 나 이거 언제 다 하고 가. ” “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던데, 너 그러다 코피 터져. ” “ 배고프면 먹을 게요. ”
자신은 걱정하지 말고 먹으라고 하는 성열을 안쓰럽다는 듯 쳐다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명수에게로 옮겨갔다. 미안하다는 표정도 하나 없이 간식을 챙기고 있는 모습에 다들 혀를 찼다. 저러다가 쓰러질 지도 모른다고, 성열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속삭였지만 명수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간식을 챙기기 바빴다. 제 품 가득 빵과 쿠키를 안고, 양손에 커피를 쥔 명수가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총학 사람들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신들이 잊고 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시집살이 시키듯 부려먹는 성열을 가장 많이 챙기는 사람도 명수라는 걸 깜빡 하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배를 채우는 것이 조금 미안했지만, 성열을 챙기러 명수가 성열에게 갔으니 신경을 꺼도 되겠다고 생각을 하며 누가 뺏어먹으러 오는 것처럼 열심히 입속으로 빵과 쿠키를 쑤셔 넣었다.
제 앞에 놓여 진 커피에 고개를 들자, 제 손에 커피를 들고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명수가 있었다. 그리 반갑지 않은 모습이라 커피를 옆으로 보내고 다시 고개를 숙이려고 했지만, 제 옆에 자리를 트고 앉는 명수 덕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 왜요. ” “ 응? 뭐가. ” “ 뭐 부탁하러 왔어요? ”
말은 하지 않고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 물었지만, 당사자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이렇게 반응을 할 테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몇 개월을 봤으면서도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 명수가 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 왜요? ” “ 넌 왜요 밖에 모르냐. ” “ 모를 행동을 하니까 묻죠! 내가 뭐 달리 묻나? ” “ 그냥 좀 따라와. ”
성열의 손에 제 커피를 쥐어주고, 제 품에 간식을 안고는 제 자리로 갔다. 자리를 끌어 제 옆에 앉혔다. 왜 이러는 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성열을 향해 커피를 내밀었다. 그에 커피를 받아들려고 했지만, 고개를 저은 명수가 다시 커피를 내밀었다. 어쩌란 것인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다, 한숨을 푹 내쉬며 빨대를 입에 물었다. 성열이 한 모금 쭉 빨아들이자 만족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빵 봉지를 뜯어 성열의 입에 물렸다.
“ 먹고 해. 진짜 쓰러진다? ” “ 병 주고 약 줘요? ” “ 그렇게 보여? 그럼 그런가 보네. ”
빵 하나를 다 먹어 치우는 동안 목 메일까봐 성열의 입가에 커피를 대주고, 빵 하나를 다 해치우면 쿠키를 제 손에 쥐어주며 명수의 책상 위에 소복하게 쌓여있던 간식이 줄어들 때까지 성열은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 * * 말만 방학이었지, 방학 기간을 학교에 죄다 바치고 정신을 차리니 개강이었다. 개강하자마자 들이닥친 시험을 치고, 마지막 패스를 위해 홀로 실험실을 지키고 있는 와중에도 머릿속에서 잡다한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특히나 오늘 하는 실험은 황산이 들어가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큰일이 날 수 있는 실험이었다. 계속해서 외출하려는 정신 줄을 붙잡고, 여태까지 외운 대로 실험 방법에 따라 차근차근히 순서를 밟아갔다.
황산이 담긴 시약병을 위아래로 천천히 흔들며 섞던 와중에 조용한 실험실 내에 큰 진동소리가 울렸다. 그에 깜짝 놀란 성열이 제 손에 쥐고 있던 시약병을 놓쳤다. 놀랐지만 파편과 용액이 제 몸에 다 튀면 안 된다는 생각에 후다닥 몸을 뒤로 뺐지만, 사방에 퍼트려지는 유리조각과 용액을 피할 수는 없었다. 큼지막한 유리는 떨어진 바닥 밑에 있었지만, 자잘한 유리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니한 말로 제 몸에 박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실험의 특성상 긴 바지와 실험 가운까지 걸치고 있는 상태였기에 용액이 튄 것 말고는 다친 곳이 없어 보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희석해서 사용한 황산이지만, 옷에 구멍 하나 정도는 거뜬히 나겠다는 생각에 어깨가 절로 푹 꺼졌다. 그렇게 바닥에 떨어진 잔해들을 치우고 있을 때, 끊어진 줄로만 알았던 전화가 다시 한 번 울렸다. 조금 전 놀람을 한 번 맛 봤음에도 불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 성열이 성질을 버럭 내며, 빗자루를 내려놓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 왜 전화했어요? ” 「 얼른 총학실로 와. 」 “ 무슨 일인데요. 큰일이라도 났어요? ” 「 응. 엄청난 일이니까, 얼른 와. 」
총학생회실이 불에 홀라당 타기라도 한 것 마냥 진지한 그 목소리에 성열이 숨을 죽였다. 아니면 자신이 여태까지 처리했던 일들에 문제가 생긴 것인가 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상상이란 상상은 전부 다 했다. 대답을 하지 않고 고요한 숨소리만 내뱉고 있는 성열이 답답했던 것인지, 짜증이 섞인 명수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 옷 좀 갈아입고 갈게요. 실험 중이어서…. 알았어요. 네. ”
옷 갈아입을 시간도 없다고, 그대로 오라는 말에 실험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아마도 지금 총학생회실에 가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무슨 사건이 터지지 않았어도 그 안에 들어가면 발을 빼기가 힘들었다. 어딜 가냐고 꼬치꼬치 캐묻지를 않나,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따라나서지를 않나. 그럴 바엔 속 편하게 그 안에 있는 것이 나았다. 늦었다고 한 소리 들을 것을 각오하고, 자신이 깨트린 시약병과 그 잔해를 치웠다. 얼추 자신이 들어왔을 때와 비슷하게 정리된 것을 보고 문단속까지 철저히 하고는 실험 가운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느라 턱 끝까지 찬 숨을 힘겹게 내뱉었다. 허리를 굽혀 어느 정도 숨을 고른 뒤에 총학생회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제 옷차림에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둘러봐도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고, 자신 혼자만 진지한 듯 했다. 그리고 곧이어 제 머릿속으로 한 생각이 스쳤다. 이렇게 또 낚였다고. 자신을 다급하게 호출한 당사자는 제 자리에 앉아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에 어이가 없기도 하고, 아무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온 몸에 힘이 풀려 군소리 없이 명수의 옆에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웬일로 아무 말 하지 않고 제 옆에 앉은 성열이 신기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성열의 입가에 빨대를 갖다 댔다. 제 입술에 와 닿는 빨대 끝의 뾰족함에 정신을 차렸다. 그에 명수가 건네 준 커피를 받아들며 물었다. “ 뭐예요? ” “ 뭐가? 커피 마시라고. ” “ 이거 마시라고 나 여기까지 불렀어요? ” “ 응. 왜 문제 있어? ”
자신은 떳떳하다는 듯, 당연하게 대답을 하는 명수 때문에 골치가 아파왔다. 커피를 쪽쪽 빨아들이며, 제 옷차림을 유심히 살피는 명수를 가만히 쳐다봤다. 실험 가운을 입은 모습을 한 두 번 본 것도 아닌데, 신기해하는 모습에 아이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찬바람이 가시지 않은 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온 명수의 센스에 새삼 감탄하며, 커피가 바닥을 보이고 있을 때였다.
“ 어?! ”
그 소리에 명수를 쳐다보자, 구멍이 난 제 가운에 손가락을 넣고 빙빙 돌리고 있었다. 멀쩡하던 가운에 구멍이 난 걸 보며, 인상을 찌푸리던 성열이 아까 제 옷에 튀었던 황산을 생각해냈다. 빨래를 하고 나면 구멍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이미 구멍이 나 자신을 반기고 있는 그 모습에 괜히 씁쓸해 졌다. 그렇지 않아도 쓸데없는 곳에 돈 들이게 생겼다고 투덜거리고 있는데, 구멍을 더 늘이려고 하는 것인지 손가락을 넣고 빙빙 돌리던 명수가 말했다.
“ 하나 사줄까. 가난해? ” “ 그런 거 아니거든요! ”
악의 없는 말이라지만, 순간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누굴 거지 취급하나. 뭐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성열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해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본 명수가 이내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빼고는 주름을 펴듯, 가운을 탁탁 두드렸다. 그리고는 성열의 어깨를 주무르며 상했을 지도 모를 성열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온갖 노력을 했다.
“ 어쩌다가 구멍이 났어? 이렇게 대왕만 하게. ” “ 그건 선배가 넓혔잖아요. 그리고 이건 아까 실험하다가 시약이 튀어서 그런 거예요. ”
실험을 하다보면 실험 가운에 구멍이 나는 건 종종 있는 일이라고 들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다 성열의 가운에 튀었던 시약 이름을 듣자마자 낯빛이 변했다. 자신의 옷에 튄 것 마냥 인상을 찌푸리고, 아무 말 없이 계속 해서 고개만 저었다. 또 뭐에 심사가 뒤틀린 것인가 하고 이어질 명수의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 위험하니까 그런 거 하지 마. ”
제 걱정을 하는 것이니 웬만하면 다 들어주려고 했지만, 이어지는 명수의 말에는 고개를 저었다. 과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걸 하지 말라는 건 어느 나라 심보인 것인지, 꽤나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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