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석이 대못상자 안으로 끌려들어가 흠씬 흔들거리고 세상의 빛을 보았을 때, 나무판자 사이로 스몄던 피와 흰 옷깃에 번졌던 시뻘겋던 것들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하지만 그의 육체는 여전히 차가웠고 깊은 파동이 이르렀다. 세상에 온전한 것들은 있을까? 그것들이 영원불변으로 지속되어 길이길이 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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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을 벌레들이 갉아먹어 썩어 들어 갈지라도,"
"..."
"너는 안돼, 민석아."
"루한.."
"너는 살아, 민석아,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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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아름 안아봤자 결국 시린 것들 뿐이야. 결국 그것들은 나 또한 차갑게 만들어 버리겠지. 이 역겨운 세상에 동정이란 것은 없어. 김민석, 그건 그 자식 역시 마찬가지야."
민석이 종대에게 무어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오늘은 왠지 루한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보게 되면 또 다시 눈물짓고, 또다시 동정받는 신세가 될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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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죽을거예요."
"민석아,"
"당신을 죽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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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석의 입에서 상당한 양의 피가 뿜어져 나왔다. 비로소 민석은 무릎을 꿇었고, 이내 바닥으로 완전히 엎어졌다. 침울한 광경이었다. 애초부터 이것은 지옥에서의 발악이었을까, 끝없는 궤도에서의 어리석게나마 작은 발자국이었을까.
루한이 차마 추락하는 민석을 보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젖혔고, 눈을 꾹 감았다. 루한은 이상했다. 몸이 왼쪽으로 쏠리는가 싶더니 완전히 중심을 잃고 떨어졌다. 루한의 오른쪽 귀는 찢어진 듯 했다. 더욱이 이상했던 것은 루한은 웃고있었다. 저만치서 희미하게 눈을 뜨고 있는 민석을 보고서 그는 활짝 웃어보였다. 루한이 민석이 있는 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몸짓은 어쩐지 투박했고, 느릿했다. 하지만 결코 멈추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하얀 순사의 제복을 보고는 그를 발로 걷어차고 몽둥이로 두들겨댔지만 그런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전진하고 있었다. 민석의 두 눈이 완전히 감기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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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아, 내가 왔어."
"...."
"민석아, 눈떠봐. 분명 아까까지만, 아까까지만해도, 민석아, 아,안돼, 민석아."
사람들은 민석을 흔드는 루한을 계속해서 구타했다. 루한의 두볼은 금세 축축해졌고 피와섞여 흙먼지 속으로 흩날렸다. '시간'이라는 것. 평등하지만 불평등한 것. 공정하지만 불공정한 것. 진실되지만 모순되기도 한 것. 루한이 조금만 빨리 도착했더라면. 민석이 오늘은 조금 늦게 집을 나섰더라면. 차라리, 둘이 만나지 않았었더라면. 둘은 서로 다른 시간의 어딘가에서 웃어보일 수 있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