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다원하다 이야기 셋. 첫날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새 학기가 시작된 지도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학년이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시간이 점점 더 빨리 흐른다더니 그 말이 맞는 듯했다. 첫날에는 어색했던 반 아이들도 어느새 조금은 편해진 느낌이었다. 오늘은 하다가 정기 검진이 있는 날이라 혼자 등교를 하는 중이었다. 그때 조금 앞에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승철아!” 긴가민가했지만 반가운 마음에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랬더니 깜짝 놀라 뒤돌아 보는 승철이. 나를 보더니 더 놀라는 얼굴이다. “어..? 아름? 왜 혼자가? 하다는?” “오늘 하다 정기 검진 있어서. 근데 되게 오랜만이네.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못 봤다 그치?” ’나는 너 맨날 봤는데…’ “응? 뭐라고?” 승철이가 분명 뭐라고 중얼거렸던 것 같은데 차가 지나가는 바람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 뭐라고 한 거지? 별 얘기 아니라는 그의 말에 넘기고는 그동안의 안부에 대해 물었다. 말 놓자고 말한 그날 이후로 처음 보는 거였다 중간중간 하다를 보러 갔던 터라, 자주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하다에게 갈 때면 항상 반에 승철이가 없었다. 그렇게 서로의 안부를 묻고서 조용히 침묵이 흘렀다. 슬쩍 승철이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나한테 할 말이 있는 듯,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안절부절한 모습이었다. 몇 분을 그러고 있길래, 결국 내가 먼저 멈춰 서서 그를 불렀다. “승철아.” “어?!” 놀라기는. 거의 뭐 개복치급이었다. 누가 봐도 그의 모습은 나에게 뭔가 말하고 싶어 보였다. 하다 말을 들어보면 유도할 때는 그렇게 무서운 애가 따로 없다던데 지금 모습은 그런 그의 모습이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 모습과는 절대 안 어울릴 것만 같은 조합이었다. “줘.” “뭐, 뭘?!” “휴대폰. 내 번호 줄게.” “어?!!” “너, 지금 나한테 번호 달라고 하고 싶은 거잖아. 너 다 티 나.” 사실 살짝 찔러본 건데 맞았나 보다. 그의 표정에서 내 말이 맞았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증명해주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첫인상이랑 다르네. 조금 귀엽네. “아… 그러면 혹시 줄 수 있어?” “번호 정도야 당연히 줄 수 있지. 애들한테 물어보지.” “네 번혼데 애들한테 어떻게 물어봐. 너한테 물어봐야지.” 애들 말대로 역시 저 아이는 생각보다도 더 괜찮은 아이였나 보다. 내 번호를 한 자 한 자 찍어주고 휴대폰을 돌려주려는데, 그 순간 내 옆을 오토바이가 쌩하고 지나갔다. 승철이의 반사 신경으로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나를 잡아 준 그의 손을 무심히 내치고 말았다. “아…! 미안해. 내가 너무 놀라가지고. 진짜 미안해.” 떨려오는 손을 주머니에 욱여넣고 급하게 그 자리를 떴다. 요즘 아무 일 없이 잘 지냈는데 그래서 내가 그만 간과하고 말았나 보다. 그렇게 승철이를 혼자 내버려 두고서 학교로 왔는데 내가 그의 손을 내쳤을 때 그 아이가 상처받은 표정을 하고 있던 그 모습이 하루 종일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조퇴를 하고 말았다. “아름아, 힘들면 선생님한테 바로 연락하고. 일단 집에 가서 쉬어. 딴 데 가지 말고 딴 생각 하지 말고 집에 가서 푹 자. 알았지?”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집에 도착하자마자 교복도 갈아입지 못한 채 쓰러지듯이 침대에 누웠다. 그러다 갑자기 그날의 기억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조금은 잊어진 줄 알았는데, 잊으려고 하면 조금은 잊힐 줄 알았는데 결국 나는 아직 그날 그때에 머물러 있었다. 급하게 화장실로 가서 샤워기를 틀었다. 그대로 욕조에 주저앉아 계속해서 물을 맞았다. 난 아무런 잘못을 한 게 없는데, 왜 대체 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른 채 한참을 물을 맞고 있었을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한아름! 너 거기 있어?! 문 좀 열어봐. 아름아!” 하다랑 정한이었다. 나도 너희처럼 그렇게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는 걸까. 조용히 평범하게 살고 싶은 건데, 내가 원하는 게 너무 많은 걸까. 난 진짜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간질거리는 연애도 하고, 애들이랑 학교에서 추억도 쌓고. 나에게는 그마저도 너무 큰 소망이었나 보다. 계속해서 문을 열지 않자, 결국 정한이가 문 고리를 부순 것 같았다. “아름아… 하다야, 네가 들어가. 나 수건이랑 가지고 올게.” “아름아, 제발…” 샤워기 밑에 쭈구려 앉아 푹 젖은 채 몸을 떨고 있던 나를 발견한 정한이는 차마 자신이 올 수는 없었는지 하다를 들여보냈다. 그런 모습을 본 하다는 결국 주저앉은 채 나를 안고서 펑펑 울었다. “내가 미안해, 내가 미안해. 아름아… 아름아 내가 너무 미안해.” 그날에도 지금도 하다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네가 왜 미안해, 하다야. 넌 아무 잘못이 없는데. “하다야, 나 더러워. 난 더러운 존재야. 그러니까 저리로 가. 내 옆에 있으면 너도 더러워져.” 내 말에 하다는 자기가 쓰러질 듯이 펑펑 울고 있었다. 수건과 옷가지를 들고 온 정한이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가오지도 못한 채 그렇게 문밖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1년이 지났는데도 마치 자신들의 잘못인 양, 저렇게 마음 아파하며 미안해하는 그들의 모습을 난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사라져야 하는 것일까. 그곳에 가면 모두가 편해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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