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반갑다. 이게 얼마 만이야.
나야 늘 바빠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는데, 네 소식 듣고 세월이 흘렀구나 싶더라. 중소기업이라고 해도 갖출 건 다 있어서 이젠 키워가는 맛에 일하는 거지 뭐. 너도 대학 졸업하고 원하는 곳 들어갔다면서. 사실 애들 통해서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땐 일자리 구하느라 축하 파티도 못 갔다. 전화도 안 해서 네가 엄청 서운했다며. 중학교 때부터 붙어 다닌 단짝이 커서 머리만 굵어졌다고 배 아파하는 거냐고 우스갯소리 하던데 그거 절대 믿지 마. 나는 완전 반대였다는 거 네가 제일 잘 알겠지만.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묻는 건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생각하다가, 형식적인 첫 질문을 넌 항상 좋아했으니까. 지겹게 매일 보는 학교에서 아침마다 졸린 눈으로 밥은 먹고 왔는지, 잠은 잘 잤는지 묻던 네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 안 먹었어, 이따 매점 가자. 매일 물어도 같은 대답을 한 번도 시원찮은 표정으로 받은 적 없던 넌 항상 늘 그래왔듯이 무던한 얼굴로 토끼 동전 지갑에서 오백 원짜리, 백 원짜리를 샜잖아. 쉬는 시간은 십분 밖에 없는데 욕심은 많아서 아이스크림 손에 하나씩 끼고 4층 교실 올라갈 때까지 깨물어 먹는 게 신기해서 찍은 사진 아직도 갖고 있는데 보여주면 네가 싫어하려나.
넌 아직도 사진 찍는 거 좋아하나 모르겠다. 지난주에 시곗줄 교환하러 백화점 갔다가 카메라 매장 보고 문득 네 생각이 나더라구. 학교 다닐 때는 구식 폴라로이드에 사백만, 오백만 화소로 꾸역꾸역 저장한 사진들 수업 시간에 몰래 들여다보고 그랬잖아. 언제는 재수 없게 걸려서 과학이 뺏던 일 기억나? 네가 찍은 거냐고, 한 장만 더 찍어줄 수 있냐고 너한테 부탁하던 광경이 너무 웃겨서 잠도 다 깨고. 네가 살풍경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찍었잖아. 쓸쓸하고 적막한 풍경이 꼭 우리 허한 마음 같다고 흐르는 시간에 말을 흐릴 때, 나는 그 ‘우리’에 다정함과 공허함과 왠지 모를 애틋함이 밀려와서 네가 날 볼 때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어.
……나는 그게, 그러니까 널 보던 얼굴을 무심히 돌렸던 그날 말야. 난 잠도 못 자고 네 생각만 했었어. 나도 모르게 네가 불편해졌고, 답장도 시큰둥해지고, 밥은 잘 먹었는지 잠은 잘 잤냐는 질문에도 화장실이 급하다면서 굳이 복도를 돌아 음악실 옆으로 숨고. 어느 날 참다가 터졌는지 무슨 일이냐고 화를 내는 너한테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 내가 느끼는 감정을 말해버리면 우린 더 서먹해질 거고 어느 순간 틀어져 버리면 영영 못 보게 되는 건 아닐까 생각되더라고.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겨울 방학 동안 연락 한 번도 안 한 건 순전히 나 때문이야. 네가 싫어서, 미워서, 어느 날 한 살 많은 남자 친구가 생겨서, 인스타에 놀이공원, 야경, 전등 축제, 내가 아닌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 감정을 정리하고 싶어서, 정말 그 이유 때문이었어. 나는 정말 널 아끼고 싶었고 불같은 마음이 되려 화를 입힐까 졸업식까지 내내 널 피해 다녔고.
똥꾸야 얼렁 와, 마음대로 붙인 별명을 부르면서 팔을 잡았던 네가, 어쩌면 나한테 과분할지도 모른다고 끝내 결정 내리면서.
야, 이미 다 지나간 시간에 추억 팔이 하는 거야. 안 그래도 팍팍한 인생에 이런 기억쯤은 곱씹어도 되잖아. 졸업식 날 네가 준 만년필도 아직 가지고 있는데 좀 봐줘라. 그걸로 결재할 때 사인도 한다니까. 펜대에 박힌 이름은 낡긴 했지만 어디 깨지진 않아서 간간히 촉만 갈아주면 새 거야. 나한테는 그게…… 그러니까 그게, 소중함 비슷한 뭐 그렇다는 얘기지.
아니 근데 넌 왜 결혼식 전날 이런 비디오는 만들게 해서 사람 귀찮게 하냐. 스크린에 성장 과정, 연애 스토리나 올리면 되지 친구들 팔아서 뭐 하게. 벼락치기는 학생 때만 허용된다구요. 내 영상 넣을 거면 맨 마지막에 장식해서 사람들이 나만 주목할 수 있게 만들어라. 그럼 축의금은 더 생각해 본다. 네 토끼 지갑 동전보다 더 많이 넣을 거거든. 매점에서 아이스크림 다 털어먹고도 남을 만큼.
많이 먹고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서, 누구든 부러워할 만큼 예쁘게 살아. 형식적인 축하 말고 정말로.
왜냐하면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너를, 느리지만 여전히, 많이…… 그리고 또 많이…….
[녹화가 종료되었습니다]
- “……이번 건 보내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