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흔한 클리셰 2
w. 랑데부
1.
첫 번째 생,
성조 박성진
가는 소낙비와 긴 태양의 해로운 영향으로 진조 2년, 극심한 가뭄과 함께 민심은 기어이 바닥에 달았다. 왕권의 균열과 나라의 몰락 속 때를 노린 우의정 무관직들의 옥죄는 바르지 못한 비문의 상소들이 한 가택을 모두 채우고도 남아돈다는 풍문까지 떠돌기 시작했다. 진조 5년, 처서(處暑) 여름이 지나는 길목 새 단비가 억세게 쏟아져 내리며 징한 가뭄은 결말을 종지었다. 또한 왕실은 동시에 새 태양을 세상에 내보였다. 가뭄을 종짓고 왕실의 추락한 권위를 곧추 세울 진조의 정실 부인 장씨의 사내아이였다.
***
“세자 저하 또 어디로 발걸음을 붙이시려 합니까”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오찬을 들고 곧장 학문에 드신다 들었으나 그곳은 장서각으로 드시는 방향이 아니오라 드리는 이야기입니다"
“속이 그리 좋지 않아 궐 내를 돌아보려 한다, 이또한 막고 설 터 내 혼자 걷겠다”
(※홍문관, 내 장서각: 조선시대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
성진은 속을 따끔하게 언질하는 정내관의 면전에 최대한 근엄한 모습을 유지하며 답했다.
올해로 스물 넷이었다. 양방향으로 벌어진 어깨와 우뚝 선 큰 키는 건장한 사내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완전히 모습을 잠재우지 못한 청년의 활개를 가끔 주체하지 못하는 성진이었다. 매마른 땅에 비옥한 양분을 안고 태어났다하여 세자는 극진한 손길 안에 자라났다. 그의 그림자 뒤를 쫓는 시녀 수는 열 댓명에 달했고 내시의 수 역시 서너명이었다. 성진은 잠시 뒤를 돌아보고 짙은 숨을 뱉었다. 이 나라를 안고 자라는 것은 그만큼의 무게를 견디어 살아내는 것이었다. 성진은 향원정으로 향하는 길을 끝내 돌려 홍문관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미 나라를 짊어지고 견디어 살아가는 앞선 아비의 총애를 저버리겠는가. 탈선을 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기다리거라”
“…세자 저하 그건 법도에 어긋나,”
“도망가려는 것이 아니다. 장서각 내에도 보는 이들이 있지 않느냐”
성진은 갑갑한 마음을 짧게나마 뱉어냈다. 세자를 오랫동안 모신 장관 내시는 뒤를 따르는 이들의 길을 막고 허리를 숙였다.
장서각 내로 발을 들인 것은 세자 즉위 후 처음이었다. 성진은 방대하게 열을 이룬 서재를 보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매번 무술연습이 끝을 보이면 도망갈 궁리를 하는 것은 더 이상 신물이 났다. 그는 좀 더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아 졸려”
그때였다. 그가 서적을 골라내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그의 넓은 시야 안으로 두 개의 신발이 굴러갔다.
“하필 축시의 근무라니. 짜증나게”
이어 붉은 도포가 굴러간 신을 풀썩 날아 덮였다. 궐 안에서 간이 큰 사내가 분명했다. 세상, 이 궐을 제 집 안방마냥 사용하는 이가 있다니. 간을 배 밖에 내놓고 다니는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의 인기척은 없었다. 성진은 퍽 당당한 사내의 얼굴이 궁금했다. 그는 빠르게 눈도장을 찍었던 서적을 골라 흔적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부를 써내리기 위해 허릴 숙이자 금새 턱을 괴고 졸음에 이기지 못해 잠든 사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적 한 권은 나흘, 두 권은 일주일이오. 석자 이름 적은 후 여기 도장을 찍고 나가시면 돼오”
그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자동 응답기마냥 반복된 문장을 구술한 뒤 아예 책상 위로 엎드려버렸다. 성진은 마냥 어이가 없었다. 감히 세자 앞에서 보이는 태도라니, 명줄을 뒷꽁무니 쫓는 그림자마냥 내놓고 다닌다는 말인가. 처음으로 겪는 무례함이었다. 성진은 이 담대한 사내의 면식을 새기기 위해 좀 더 가까히 다가갔다. 사내의 피부라고 단정 짓기에 극히 곱고 뽀얀 피부였다. 자연스럽게 오른 홍조는 지난 밤참으로 올라온 복숭아 두 알을 연상케했다. 유독 혈색이 몰린 두 입술은 뱉어지는 숨결에 간지럼이라도 타듯 오물거리길 반복했다. 곱상한 사내의 얼굴은 꽤나 담대한 성격을 가진 세자의 입을 다물게 하였다. 그는 최대한 숨을 죽여 붓을 들었다. 그리고 이어 빌린 서적을 기록하는 장부엔 강인한 필체 석자의 물기가 말라 가고 있었다.
서적 넉권
세자 朴晟鎭(박성진)
***
“오늘은 무엇을 배웠느냐”
“근정전에 앉아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영의정과 소통을 갖는 모습을 관찰 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의 고충을 듣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생각하였습니다”
“왜 그리 생각하였느냐”
“지나친 언사이오나, 목구멍이 포도청인 이들로 자욱한 관찰이었습니다. 들려오는 백성들의 굶주림은 단 십분의 일도 구술하지 않고 양반들의 고충들만 긴히 늘어뜨리오니 소통이 아닌 눈을 감는 법을 배우는 것만 같았습니다”
진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균열을 메우지 못한 왕권은 여전히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갖고 있었다. 그의 노력으로 세워지지 못하는 왕권은 왕의 무능력함을 증명해보이는 꼴이 되어버렸고 진조는 성진의 조근한 이야기에 깊은 한숨을 뱉어낼 수 밖에 없었다.
“이제는 나의 무능력한 정치가 너의 눈에도 보이는구나”
“아바마마의 잘못이 아닙니다”
성진은 선뜻 고개를 저었다. 수심이 안개와 같이 짙게 진 아비의 얼굴을 본 성진은 좀처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젠 그의 차례였다. 곧 진조가 성진에게 왕위를 물리고 물러선 뒤 그가 걸을 길이었다. 정치의 길을, 이 나라의 실정을 그저 컴컴한 까막눈과 다름이 없어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강녕전의 위로 새 한 마리가 날아 들었다. 온전한 날개를 갖지 못한 듯 어수룩한 날개짓으로 강녕전의 지붕으로 날아든 새는 이내 시린 바닥으로 추락했다. 망가진 날개의 죽음이 아니며 날선 촉이 관통한 채 말이다. 두 사람 중 그 누구의 미래인지 밝힐 새 없이 새의 사체는 자취를 감추고, 유독 밝은 달이 기울고 있었다.
“아, …아아”
한 시간째 원예 판서댁 담장을 넘어 꺽꺽대는 신음이 흘러내렸다. 원판의 하나뿐인 막내 딸 ㅇㅇ였다. 어릴 적부터 정을 안고 태어나 애정(愛)흐르는 아이였다. 길을 지나며 괴롭힘에 시달리는 이를 끝내 보지 못하고 제 몸뚱아리에 곱절이 되는 아이와 잦은 다툼을 일으켰다. 그에 더해 한 달 간 받은 코 묻은 돈을 모아 장에 나갈 쯤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이를 찾아 다니곤 했다. 입에 풀칠은 커녕 곯은 배를 부여잡고 빗물로 연명하는 이들에게 주먹만한 손으로 밥 한 덩이, 엽전 하나라도 쥐어주어야 집에 돌아오곤 했다. 장차 큰 인물로 자라나 나아간 일을 맡는 것이 ㅇㅇ의 노력이자 바램이었다. 이 나라의 실정을 알리고 싶었다. 가뭄은 끝났으나 여전히 배를 굶고 이미 수명이 끊어진 어미의 젖을 빨아대는 갓난아이, 까막눈으로 보란듯한 대가(大家)에 억울히 땅을 빼앗기는 실정을 말이다. 총명한 두뇌로 일찍히 시험을 통과하였으나 계집이라는 이유로 궐 안으로 한 발자국도 나들 수 없는 것이 그녀의 실정이었다. 결국 그녀는 실정을 넘나드는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궐 내 가장 인적이 드문 홍문관 야간 보직. 삼 년 째 병상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오라비 대신 자리를 꿰찬 것이었다. 관모를 눌러쓰고 손을 덮는 관복으로 꽁꽁 싸맨 뒤 등진 모습은 덜 자란 소년과 착각을 줄 정도였으니, 그녀는 그렇게 삼 년을 연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궐 내, 홍문관의 턱을 넘는 이가 몇이나 되는가. 지혜와 새로운 지식을 품어낼 걸음이 몇이나 되느냔 말이다. 그러나 이곳의 책을 모두 읽고 입에 욀 지경인 그녀는 항상 꿍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보직의 변경은 조밀한 입에 한 번 올리지 못한 채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불만으로 탑이 되어가고 있었다.
명월이었다. 원예 판서댁 역시 대문을 활짝 열어두었고 정겨운 아이들의 노랫말과 농민들의 대찬 풍악소리를 집 안으로 들였다. 그러나 감히 ‘세자’라니. 아니 세자 저하라니. ㅇㅇ는 당장 저 대문을 통과해 포졸들에 파묻혀 자신의 목을 쳐지지 않은 사실에 균열이 간 안도를 취했다. 이 나라를 이을 세자를 알아뵙지 못한 죄, 궐 내 품행의 기반인 신발과 도포를 훌렁 벗어던진 죄, 재직에 힘을 쓰기는커녕 농땡이만 꽤어난 죄. 일일 따져보지 않아도 이미 ㅇㅇ는 나라에서 지워질 목숨이나 다름 없었다.
“한 끼도 들지 않았잖아. 조금이라도 먹자, 응?”
“…아냐. 됐어, 먹을 자격도 없어”
등신 바보천지도 이런 천지가 없으리. ㅇㅇ는 베갯잎에 제 머리를 쿵쿵 찧으며 과오를 죽어나도록 반성했다. 그러나 저의 잘못을 혹여 입에 올렸다간 아무리 귀한 원판의 막내 딸이라하여도 당장 발가벗겨 쫒겨날 터였다. 그의 오라비 원은 ㅇㅇ의 등을 쓸어주었다. ㅇㅇ가 태생부터 총명하였다면, 그의 오라비 원은 속이 깊고 퍽 성숙한 뽐새를 어린 나이 갖추었다. ㅇㅇ의 사고를 덮어주고 엄중한 원판의 꾸지람 앞 뒤로 그녀를 감추어주었다. 또한 ㅇㅇ와 똑닮은 얼굴은 해를 거듭해 자라날수록 격있는 외모로 혼삿길에 문을 두들기는 계집들만 원판의 집을 두 바퀴 둘러 쌓고도 남아 기다린다는 소문꺼정 돌 정도였다. ㅇㅇ는 원의 손길에 쿵쿵 이마를 찧어대던 행동을 멈추었다. 둘은 모든 비밀을 나눈 혈육이었다. 원은 문 밖으로 지나는 인적을 살피고 문꼬리를 당겨 잠구었다.
“이제 이야기 해주련?”
“절대, 절대로 말하지 마십시오. 오라버니”
원은 아름다운 미소를 자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영문으로 세상 천지 당돌한 이 아이를 움츠리게 하였는가, 원은 ㅇㅇ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세자저하께서 다녀갔습니다”
행실이 아주 엉망이었던 저를 보고 말입니다. ㅇㅇ는 조그만 양손에 얼굴을 부비며 뭉개지는 발음으로 전부 구술하였다. 그녀는 상심과 두려움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저는 오늘 내일 죽은 목숨입니다. 매일 마주했던 민들레 홀씨마냥 훅 날아가버릴 거란 말입니다”
원은 ㅇㅇ의 머리칼을 부드러운 손으로 쓸며 입을 열었다.
“나흘이나 지난 일이야. 분명 세자 저하는 이해하신게다”
“…정말입니까?”
“나 역시 직접 세자 저하를 뵙지는 못하였으나 굉장히 바르고 올곧은 성품을 가지고 자랐다고 속히 들었거든”
ㅇㅇ는 그제야 조그만 손 틈 새로 원을 바라볼 수 있었다. 참았던 숨을 단번에 안도가 속속 섞어들여 내쉬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세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만나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걱정 말거라, ㅇㅇ야”
“정말로 소리 한 절 없이 끌려가 죽음을 맏이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원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은 3년 간의 병치례를 털어내고 상의원에서 왕족의 면복을 손 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원판 대감은 그가 곧 즉위할 세자의 밑으로 들어가길 바랐으나 견고한 그의 뜻을 끝내 꺽어낼 수 없었다.
ㅇㅇ가 비운 장서각의 시간은 성진이 채워가고 있었다. 그만 두지 않았다는 말을 수어번 확인 했으나 어찌 단 한 번도 눈에 들지 않는 것인가. 고운 뺨과 평온하게 감긴 두 눈, 그리고 길게 미끄럼이 타내려오듯 내려온 속눈썹. 계집의 일터였다면 혹, 오해를 살 뻔할 정도로 고왔다. 성진은 오찬 들고 꾸준히 홍문관의 턱을 넘었다. 녹음이 기울어 붉고 노오란 색색의 옷으로 들춰 갈아입기 시작한 날이었다. 근정전의 회의는 곱게 갈아입은 옷을 보일 새 없이 뒤늦은 밤까지 시간을 끌었다.
“세자저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회의록 전문을 기술하는 행위 하나까지 살펴 보곤 성진은 자리에서 급히 일어섰다. 품행을 지켜 걸어야 했으나 조급한 발걸음을 날카로운 댓바람과 함께 가로막은 건 후궁 소의였다.
“서적을 가져다 놓으려 가는 중이었습니다. 침소에 들기 전 가져다 놓으려니 비켜주시겠습니까”
“그러지요”
옆으로 발걸음을 물러선 소의는 예를 갖추어 성진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녀와 함께 불어온 날카로운 댓바람은 끝내 성진을 쫓았다.
댓바람을 떨쳐낸 후 성진은 숨을 내뱉었다. 소의의 기(氣)는 성진이 징하게 떨쳐내고 싶은 기운이었다. 언제나 중전을 내치고 아비의 곁을 꿰차고야 말겠다는, 또한 언제나 세자의 자리를 갈취 하기 위해 낮밤 가릴 것 없이 여러 하관들의 편을 찍는 일조차 그는 알고 있었다.
“저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인은 잠시 후 교대가 있어 물러가야 하온데 내관을 들여 보내겠습니다”
“아니다. 나 역시 곧 나갈 터이니 아무도 들여 보내지 말게”
오늘 역시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성진은 실망한 기색을 애써 숨긴 채 서양의 서적을 꽂아둔 서재로 발걸음을 돌렸다. 여전히 퍽 어려운 서적들이었다. 그러나 세자로써 모든 지혜와 지식을 갖추어 다스리는 것이 세자로써의 '예’(禮)라 생각을 두었기에 조용히 서적을 꺼내 펼쳤다.
“다신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닐세. 나 역시 오랜 시간 푹 쉴 수 있으니 죄송할 필요 없네. 그럼 수고 하세”
“예, 알겠습니다”
그때였다. 성진이 기다린 목소리의 주인이 맹랑하고 똑부러지는 목소리가 종종 대는 걸음과 함께 다가왔다. 성진은 들고 있던 서적으로 슬그머니 얼굴을 가렸다. 저 자신이 모습을 숨겨야 할 이유란 없었다. 그러나 성진은 그 사내를 기억하며 옥죄는 설레임과 같은 감정이 수반 되며 얼굴에 열이 번지는 것이 못내 쑥쓰러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구 있소?”
무엇을 위해 얼굴을 가렸는가. ㅇㅇ는 작은 인기척마저 금방 알아채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왜 말이 없어? 그녀는 입술을 쭉 내밀곤 미약한 숨소리가 들리우는 곳으로 허리를 이리저리 숙였다.
“…히익”
아주 끝으로 다가서자 좀처럼 답이 없는 인기척의 근원지가 눈에 들어왔다. 짜증스러운 눈으로 이리저리 살피던 ㅇㅇ는 마침내 찾아낸 상대의 그림자에게 한 마디 크게 할 요량으로 홱 고개를 처들었다.
“……좆됐다”
“헙,”
ㅇㅇ는 급하게 입을 턱 막았다.
웬지 모르게 익숙한 색, 웬지 모르게 익숙한 용의 문양, 남색을 띈 곤룡포. 그리곤 마주한 아주 검고 깊은 눈동자의 시선. ㅇㅇ는 찰나의 스친 제정신과 함께 급히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에 납짝 엎드렸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하. 그러니까, 어, 어 그러니까…”
성진은 여직 얼굴을 다 보이지 않았으나 작게 튀어나오는 미소를 애써 숨기지 않았다. 과연 이 사내, 아니 이 아이가 한 달 전 저를 향해 맹랑하게 말을 꺼낸 아이가 정녕 맞다는 말인가.
“내가, 다가가도 되겠느냐”
“…예?”
ㅇㅇ는 뜬금없는 성진의 물음에 습관적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 아아. 이미 늦었다. 두 번이나 세자의 용안을 감히 허락 한 줄 없이 올려다 보다니. ㅇㅇ는 고개를 푹 숙이다 마룻바닥에 이마를 쿵 찧고나서야 이마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 아 예”
천천히 곤룡포의 천이 스치고 묵직한 걸음이 다가왔다. 그러나 작은 숨소리가 전부일뿐 모든 것은 그대로 정지된 마냥 적막이 장서각을 채울 뿐이었다. 견뎌낼 수 없는 이 적막을 견뎌내야 했다. 폭 숙인 시야 안으로 검은 신이 보임에 눈을 질끈 감고 먼저 조밀한 입을 열었다.
“아,아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자는 좌의정 김원형의 자식 ㅇㅇㅇ라 하옵니다”
“고개를 들어라”
ㅇㅇ는 당장 장서각을 빠져 나와 방향의 길을 잡기도 전에 달려나가고 싶었다. 이리 죽음을 맏이하는 것일까. 원의 말과는 다르게 무뚝뚝하고 매우 낮은 목소리는 ㅇㅇ를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들어라”
성진은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았다. 아이의 얼굴이 보고팠다. 감히 세자가 무릎을 꿇어 앉자 ㅇㅇ는 바르작거리며 급한 마음에 다시 이마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아?”
그러나 이번의 추락은 차가운 마룻바닥이 아닌 뜨끈한 손바닥이었다.
“들어도 된다”
여전히 무뚝뚝한 목소리였으나 ㅇㅇ의 이마를 받아낸 손은 열이 퍽 올라 뜨겁게 그에게 체온을 옮겼다. 그제서야 ㅇㅇ는 바들거리는 몸을 주체할 새 없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책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세자, 그 역시 천천히 책을 내려 ㅇㅇ의 두 눈과 마주했다.
“나를 본 적이 있느냐”
ㅇㅇ는 조밀한 입술을 우물거릴뿐이었다. 그의 상상의 세자와 너무도 달랐다. 서적에서 본 도깨비처럼 험악하긴커녕, 무뚝뚝한 목소리였으나 세자의 근엄을 차린 사내에 가까운 맑은 청년이었으니.
“나를 본 적이 있느냐 물었다”
“아뢰옵기 황송,”
“빼고”
“…예?”
“그냥 말해 보거라”
ㅇㅇ는 성진의 말에 입을 우물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정녕 나를 본 적이 없느냐”
ㅇㅇ는 성진을 마주한 순간을 곱씹었다. 아무리 이리 총명한 머리를 굴리어 보아도 성진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ㅇㅇ는 둥그런 눈으로 성진의 뜻을 감히 읽으려 했으나 깊은 눈동자에서 금방 시선을 뗄 뿐이었다.
“너를 본 적이 있다”
“어쩌면 그건 온전히 나의 기억일지도 모르는 일일테니,”
“그래서 너를 기다렸다”
이곳에서. 성진은 ㅇㅇ를 바라보며 한 글자씩 그녀에게 전했다. 물론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 같은 귀가 느껴졌으나 성진은 꽤나 오랫동안 ㅇㅇ를 기다려왔기에 진심을 거침없이 뱉어냈다.
대체 왜 저를 기다렸는가. ㅇㅇ는 금방이라도 툭 튀어나와 굴러갈것만 같은 눈동자로 대신해 물었다. 왜 저를 기다리셨습니까? 성진은 몸을 일으켰다. 물음에 답 대신 몸을 일으킴에 ㅇㅇ는 흠칫 다시 허리를 숙였다.
“일어나거라”
ㅇㅇ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생각보다 큰 세자의 앞에서 조용히 시선을 올려다 보았다. 성진은 쥐고 있던 책을 ㅇㅇ에게 건넸다.
“내일 해시에 다시 너를 찾아올 것이다”
“……”
“어디로 다시 가지 말고 나를 기다리고 있거라”
"그때는 네 모습 그대로"
“이곳에서”
궐 내 성진은 항상 올곧은 모습이었으나 그가 흔히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 날 ㅇㅇ는 궐 내 가장 처음으로 세자의 잔잔한 미소를 마주했다.
2.
첫째, 세자는 남색이 아니다. 둘째, 세자가 기다린 것은 저가 맞으며, 셋째 저 역시 세자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새벽 근무는 축시에서 인시로 넘어가는 경계에 끝을 본다. 찬기가 잎새마다 대롱대롱 달려 이슬을 맺었다. 오늘 역시 인시가 되서야 관복을 벗어던진 ㅇㅇ는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뱉어냈다. 원이 새로 맞춘 도포는 두 손을 다 덮고도 한참 끌렸다. 하여튼, 오라버니 옷 몇 벌 같이 입는 것 가지고 뭐라고 그러더니 기어코 한 품 더 크게 지어왔고만. 그녀는 질질 끌리는 도포를 여미며 졸음을 잔뜩 단 채 장서각의 문을 닫았다.
"...사시 다시 개방 하니 이따 오ㅅ,"
"눈 뜨거라. 눈"
잠이 한달음에 달아다는 목소리였다. 빈 틈 없이 감기던 눈꺼풀을 밀어올린 목소리의 근원은 세자 성진이었다. ㅇㅇ는 고개를 번뜩 처들었다. 크게 뜨인 눈동자에 온전히 성진이 담겼다. 그는 대부분 전날 미리 언질을 두고 그녀를 찾곤 했었다. 이리 갑작스레 발길이 닿은 것은 또 처음이었다. 아니, 어찌 찾아오셨습니까. 성진은 별 말 없이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가 물러서자 송내관은 들고 두툼한 두루마기를 ㅇㅇ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어서 들어가거라"
"...그럼 서적은,"
"내일 보자꾸나"
가는 길 찬기가 거슬려 온 발걸음이었다. 엊저녁부터 찾을 때마다 기침을 달고 다니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도 어른대니 원,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ㅇㅇ는 여부 없이 두루마기를 꼭 동여 맸다. 나라 건너 온 비단은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아니 세자에게 닿을 천이라 다름 수가 있는 것인가. 여간 보드라운 것이 아니었다. 잠시 그 보드라운 감촉에 취해 눈을 순순히 감자 대번 ㅇㅇ의 머리통을 두들기는 것이었다.
"아!"
"그만 꾸물대고 속히 저택으로 돌아가시라고 세자 저하께서 전하셨습니다"
성진 뒤를 지키던 송내관이었다. 이미 저만치 멀어져 뒷짐을 진 채 저를 바라보는 성진이 보였다. 그렇다고 다 큰 처녀 머릿 통을 두들길 것은 뭐란 말입니까. ㅇㅇ는 차마 입술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한 속마음을 입 안에 넣고 굴렸다.
성진은 조그만 발로 종종 대며 궐 나무 계단 밑으로 자취를 감출 때까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고요한 새벽 공기와 더불어 ㅇㅇ의 발자욱까지 떠난 궐 안에서 가만히 머물러 있던 성진이 입을 열었다.
"송내관"
"예, 세자 저하"
저 아이가 잘 돌아갔는지 확인해주시오.
그의 부탁에 송내관의 주름진 눈이 살포시 휘어졌다. 어렸을 적부터 남 손 한 번 타지 않고 뭐든 저 혼자 아등바등 이뤄내던 세자의 부탁이라.
강단을 잃은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강단 대신 묘한 부드러움이 베어든 어투였다. 송내관은 조용히 허리를 숙이고 두어 발짝 떨어져 섰다. 그제야 세자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만, 늦은 잠이야 이루어야겠다. 송내관은 못내 끌어내리지 못한 어렴풋한 세자의 미소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뒤를 이따랐다.
*
실로 오랜만이란 말이다!
잔뜩 들뜬 목소리가 장터에 한무더기 더 얹어졌다. 한 달 여간 장서각과 집만을 오가며 틀어막힌 숨통이 단번에 뚫리는 기분이었다. 기품은 집 안 구석에 집어 던진 지 오래다. 설빔으로 단 한 번 걸쳐 봤던 제비꽃색 치마를 둘러 입고 하얀 저고리를 꽤어 입었다. 간밤 오라버니가 청에서 들여온 조끼까지 쟁여 입은 ㅇㅇ는 거침없이 당혜를 신은 채 달리기 시작했다.
이 고운 머릿결 한 번 어디 내놓지 못하고 뚤뚤 말아 관모 안에 집어 넣고 다니는 처녀의 마음을 누가 아실런지.
ㅇㅇ는 곱디 고운 제 머리칼을 매만지며 빠르게 장터를 헤집기 시작했다. 속히 집으로 돌아가라는 성진의 말은 방금 전 엿과 함께 바꿔 먹은 지 오래였다. 이 개기월식을 얼마나 기다렸단 말인가. 하도 빠른 걸음에 제 뒷꽁무니를 놓친 명선의 사색이 된 얼굴을 보고 더욱 인파 속으로 숨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이! 거 조심 좀 하시오!"
"어? 어어. 이봐요! 야!"
명선의 눈에 띌라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던 차였다. 개기월식 좌판을 채우던 상인의 발에 북 찢어나간 치마조각이 장터에 처참하게 나귕굴었다.
..하씨, 저거 들여온지 얼마 안 됐는데.
사내대장부 뺨 올려부치고도 남을 성격에 찢어먹은 치마로 원예 판서댁 담을 세 바퀴는 돈다는 말에 증명만 한 셈이다. ㅇㅇ는 흙먼지를 잔뜩 먹고 나뒹구는 조각을 따라 걸었다. 한 치 앞에서 헛도는 조각은 자꾸만 다른 이들의 다리를 감싸고 날아가기만 했다.
"어? 어디 갔지?"
방금까지 여기에 있었는데?
방금까지 ㅇㅇ의 두 눈에서 헛 손질 당하던 천조각이었다. 눈 깜짝 할 새에 사라진 조각에 갈곳을 잃고 허우적거리던 시선은 어느 사내의 손에 걸쳐졌다.
"이봐요. 그거 내 ㄲ,"
"이거면 되겠구나"
...저하?
성진은 앞 뒤 상황에 굳이 말을 붙이지 않았다. 단지 제 품에서 꺼낸 손수건과 이미 모래알로 얼룩진 천조각을 비교해 본 뒤 제 손수건을 ㅇㅇ에게 내밀 뿐이었다.
궐에서 대체 어떻게 나오신 겁니까?
백성들이 알아 보기라도 하면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저하도 개기월식으로 보러 나오신 겁니까?
뒤를 따라오며 조잘조잘 묻는 ㅇㅇ가 싫지가 않은지 성진은 고요한 미소만 품었다. 꽤나 걸음만 옮기던 차, 목석같이 굳어지는 성진의 등짝에 쿵, 얼굴을 부딪히고야 나서 ㅇㅇ의 질문이 그칠 수 있었다. 성진의 시선엔 수많은 생각이 교차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해와 달이 교차하듯이. 그때 빛을 어둠이 품듯, 성진의 눈 속 담긴 생각도 확실히 읽어내긴 어려웠다.
"제가 사드리겠습니다!"
"뭐?"
"몇 냥이오?"
ㅇㅇ는 해맑은 미소로 엽전을 꺼내 건넸다.
이, 뭐라구 하더라. 여튼 이걸로 하늘을 보면 좀 더 가까이 보인다고 저도 들었습니다.
"세자 저.. 아니, 가지십시오!"
성진은 제 품 안에 안긴 물건과 ㅇㅇ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치마 값이라며 베시시 웃는 아이에게 조금 더 시선이 오래 머문 것은 우리만 아는 비밀 중 하나였다.
명선을 따돌린 뒤 한없이 가벼워진 걸음으로 ㅇㅇ는 성진을 따랐다. 궐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을 것 같은 성진은 생각보다 많은 길을 알고 있었고, 지금 가는 곳 역시 ㅇㅇ에겐 초행인 곳이었다. 꽤 높은 언덕배기까지 오르는 동안 성진은 숨 한 번 차치 않는 지 차근 차근 걸음을 옮겼다.
"어찌 길 한 번 헤매질 않습니까?"
"너처럼 틈만 나면 정신줄을 놓고 걷지 않으니 당연한 지사 아니겠느냐"
"치,"
나무 한 그루 덩그러니 뿌리 내린 언덕이었다. 이틀 간 내리 내린 눈이 소복히 쌓인 나무 한 그루에 등을 기댄 성진과 반대편에 ㅇㅇ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런 곳은 또 어찌 알았담. ㅇㅇ는 차갑게 언 눈을 한 주먹 쥐어 보았다. 눈은 손에 피었던 온기와 함께 금방 사그라 들었다. 들려오는 소리라곤 가끔 부는 바람이 전부인 언덕에 기대어 있으니 덮힌 치마도 따뜻해 잠이 솔솔 내리기 시작했다.
차츰 어둠이 내린 마을에 등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가까이 서 별이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이 아름다운 모습에 취한 것인지 ㅇㅇ는 영 말이 없었다. 결국 성진은 반대편에 기댄 ㅇㅇ를 향해 몸을 틀었다.
"ㅇㅇ야"
"ㅇㅇ..."
곧 개기월식이 시작될텐데.
어느새 ㅇㅇ는 새근 새근 작은 숨을 쉬었다 뱉으며 잠이 들어 있었다. 깨워야 하는가. 성진은 못내 고민했다. 깨우지 않았다간 기다렸던 개기월식을 보지 못한 것에 나흘이고 열흘이고 입에 달고 살 것이 분명한데,
"#$@$%%!"
언덕 위로 아이들의 시끄러운 담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성진은 최대한 숨을 죽여 몸을 일으켰다. 도포에 묻은 잔눈을 털어내지도 못한 채 속히 걸음을 옮겼다.
"이리 와 보거라"
저 밑에 옥춘당이며 호박엿을 잔뜩 매단 장수가 지나가던데, 이 정도면 되겠느냐?
각자 엽전 두어개씩 짤랑대며 언덕배기를 단숨에 내려가는 모습을 성진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혹여 선잠을 깨우진 않았는지, 성진은 다시 나무로 돌아가는 길 내내 멀리서 보이는 ㅇㅇ를 살폈다. 다행히 감긴 눈꺼풀이 올라오지 않은 것을 보니 잠에서 깬 것 같지는 않았다. 성진은 조용히 도포에 묻은 눈을 툭툭 털어내며 ㅇㅇ의 옆에 자리를 마련해 나무에 기대었다.
"...우응"
때마침 개기월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천천히 둥근 달이 자취를 감추던 찰나 툭, 성진의 어깨 위로 동그란 ㅇㅇ의 고개가 떨어졌다.
지난 번 ㅇㅇ가 읽던 서책에서 이런 문장을 얼핏 본 것도 같았다. '그 순간 시간의 흐름이 우뚝 멎고, 마치 두 사람만 남겨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성진은 그 문장을 떠올렸다. 그 말도 안 되는 문장이, 철 없는 유생들이나 몰래 읽곤 한다는 그 책의 장면이 순간 이해가 가는 것만 같았다.
완전히 그림자가 달을 잡아 먹고 그 짧은 사이에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꽤 거센 눈발이었다. 그 누구보다 시간의 순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세자였다. 그리고 그 시간의 순리를 뛰어 넘어 시간의 틈과 비틀어진 편법의 비밀까지 속속히 알고 있는 세자였으나 그는 이 순간이 꽤 오랜 시간 멈추었다가 가길 바라고 있었다.
3.
※헤어화
‘말을 알아듣는 꽃’으로 미인(美人)을 뜻함.
ㅇㅇ는 성진의 행동을 눈치껏 살피었다. 약속대로 자시가 되자 성진은 내관 둘을 동행한 채, 장서각은 혼자 몸을 들였다. 특별한 행동은 않았지만 그는 퍽 불편한 공간의 숨을 쉬어야만했다.
“왜 그리 보는 것이냐”
“…아뢰,”
“두어라. 그냥 내게 이야기해도 된다 하지 않았느냐”
세자의 앞에서 책장이 그냥 넘어갈 수가 있겠는가. 또한 서적에 집중한 성진의 얼굴에 자꾸만 시선이 따라가는 것을 저 역시 성진의 물음에 알아채곤 했다. 사냥꾼을 당장 마주한 토끼마냥 화들짝 어깨를 들썩이는 행위에 성진은 서적에 시선을 두었지만 잔잔한 미소를 못내 지울 수 없었다.
“내일 다시 올 테니 기다리거라”
“…저기 저하”
ㅇㅇ는 조밀한 입술을 떼어 성진을 붙잡았다. 장서각을 나서려던 그는 그대로 돌아 ㅇㅇ를 내려다 보았다. ㅇㅇ는 그의 눈동자와 마주하자마자 건네려던 말을 꿀떡 삼키어 버렸다. 성진은 뒷짐을 진 채 ㅇㅇ의 이야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지난 달 심었던 달맞이꽃의 향이 아득한 밤, 계절의 풍향을 따라 흘러 두 사람의 앞을 맴돌았다.
“할 이야기가 무엇이더냐”
성진은 잔잔한 미소를 지우지 않고 되물었다. 어릴 적 냇가물을 담아놓은냥 맑고 둥그런 눈을 바라보고 있는 것 또한 좋았으나 ㅇㅇ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의 궁금증이 성진을 자꾸 재촉했다.
“..에, 헤 엣취!”
세자에게 답은커녕 재채기라니. ㅇㅇ는 금방 입을 턱 막고 고개를 조아렸다. 매번 죽을 위기에 제가 직접 뛰어드니, 팽팽한 명줄을 단축시키는 것은 ㅇㅇ였다. ㅇㅇ는 질끈 감았던 눈을 미세하게 떠 성진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하도록 하자”
“예?”
“장서각의 책을 모두 읽었다 하였지?”
“…예”
불쑥 성진은 입을 턱 막았던 ㅇㅇ의 손을 잡아 천천히 내렸다. 그의 체온은 계절의 바람으로 찼으나 깊은 눈동자는 ㅇㅇ를 바라보았다.
“너보다 장서각을 더 잘 아는 이가 없겠구나”
성진은 여태 잔잔한 미소를 품곤 횡설수설 말이 꼬이는 ㅇㅇ의 손을 꼭 쥐었다.
“나에게 글을 가르쳐주거라”
“…예?”
“나에게,”
“이 나라를 가르쳐 줄 수 있겠느냐”
ㅇㅇ는 그에게 잡힌 손에서 축축한 땀이 베이는 것을 느꼈다. 성진이 아닌 자신의 손에서 말이다. 답을 쉽사리 내놓지 못하는 ㅇㅇ에 성진은 침묵을 곧게 지키다 조금 더 ㅇㅇ에게 허리를 숙여 다가갔다. 콧망울의 거리가 퍽 좁아졌다. 매우 가까운 거리로 다가온 성진은 답을 내놓으라는 눈짓이었다.
“거절하는 것이냐”
“아니, 아니아니 끅, 아닙니다”
“내일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ㅇㅇ는 더 이상 답을 내놓지 못한 채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입술이라도 닿을 거리에 남정네 손 한 번 제대로 잡아본적이야 당연지사 전혀 없는 ㅇㅇ였다. 그녀는 저가 매우 아픈 것이라 생각했다. 세자의 귀까지 들어갈 것마냥 심히 쿵쿵대는 가슴을 병이라 착각했다. 성진은 고개를 마구 끄덕이는 ㅇㅇ를 보곤 그제야 몸을 제대로 곧추섰다.
“기다리거라”
“금방 너에게 올테니”
성진은 천천히 돌아서 장서각을 나섰다. 잠시 장서각의 문 틈으로 들어온 꽃의 향을 맡아내고 취기라도 오른 것이 분명했다. 술을 잘 하지 못하는 ㅇㅇ가 큰 병이 아닐 테면 단단히 취한 것이 분명하다고 고갤 끄덕였다.
먹으로 채색된 하늘에 달지기를 자처하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초승이었으나 그 달을 맞으려 핀 꽃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고 잎을 틔우고 있었다.
*
“다시 가져오너라”
“…마마, 벌써 세 번째 탕약이옵,”
“다시 가져오라 하지 않았느냐”
후궁 소의의 찢어질듯한 호통이 내렸다. 소의의 전각으로 수없는 약방의 신하들이 신을 바로 신을 새도 없이 새 탕약을 달이고 조달함에 여념이 없었다. 회임에 실패한 소의는 거침없이 탕약을 들이켰다. 첫 번째 회임, 소의가 중전의 자리를 옅보았으나 윤종의 사랑은 깊었고 또한 소의의 아이는 여아였다. 단명을 하였으나 그 또한 소의의 손길에 끊긴 명이라는 소문은 궐 내 이미 모두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처참한 사실이었다. 무술에 시선을 굳혔던 세자가 장서각을 들락거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는 첩보를 듣고 소의는 품 안에 지펴두고 있었던 화살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그릇이 창호지를 향해 날아가 이내 귀를 고통스레주는 파열음이 소의의 전각을 뚫고 흩어졌다.
“가봐야겠다”
“예? …예”
파열음을 들은 것은 진조뿐이 아니었다. 성진 역시 몸을 일으켜 장서각을 급히 빠져나갔다. 아비의 명을 노리는 자객의 소행이 분명했다. 성진은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더냐”
“소의마마께서 심히 다치셨다 들었습니다”
“마마께서?”
적막하던 궐 내의 소음이었다. 성진은 먼저 소의의 침소로 향했다.
“마마, 세자이옵니다”
“…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간 침소는 가히 난장판에 가까웠다. 엎어진 탕약과 쥐라도 본 마냥 웅크려 벌벌 떨고 있는 궁녀의 모습 역시 보였다. 성진은 깨진 사기그릇의 조각들을 속히 치우라 이르며 소의의 앞에 자리했다.
“괜찮으신겝니까”
“폐하께선, 듣지 못하였느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여쭙겠습니다”
소의는 피가 툭툭 흐르는 손을 탁상 위 올려두곤 그의 물음의 답을 싸늘한 시선으로 대신하였다. 온 몸을 웅크리고 발발 떨고 있는 궁녀를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아 금방 성진은 갑갑한 숨을 들이쉬었다.
“괜찮은것이냐”
“폐하”
“아바마마”
그때였다, 성진의 뒤로 진조가 모습을 드러내자 소의의 얼굴은 한 떨기 곧 죽어가는 꽃송이처럼 진조에게 몸을 늘어뜨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어의를 불러오겠습니다”
“그래, 세자는 속히 어의를 부르라”
성진은 그 자리에서 일어서 곧장 소의의 전각을 나갔다. 입술을 강하게 깨물어 혈흔이 터진 것을 알았으나 그는 더욱히 입술을 깨물고 걸었다.
소의의 전각으로 어의을 보낸 성진은 침소에서 무술을 배우는 칼자루를 챙겨 들고 문을 박차 나갔다. 당장 무엇이라도 갑갑히 들이쉬기만 할 수 밖에야 없는 이 숨통을 풀어내야만 진정이 될 거 같았다. 소의의 지독한 만행을, 분명 궁녀의 목은 베어나갈 것이었다. 중전의 충신이었다. 적어도 성진은 알고 있었다. 독을 넣은 탕약을 후궁의 입에 올린 죄로 곧장 명줄이 잘려나갈 것이었다. 또한 중전의 짓으로 몰아 진조의 실망을 사기 위한 소의의 짓이 치가 떨려왔다.
“저하”
누군가 저와 부딪혀 그의 앞에서 나동그라졌다. 아무것도 봬지 않는 시선으로 걷다 강하게 몸을 함께 부딪힌 성진은 그제야 정신을 조금이나마 차렸다. 그와 부딪혀 저만치 넘어진 이는 궐을 나가던 ㅇㅇ였다.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던 ㅇㅇ는 세자가 걸어온 길, 그가 서 있는 곳까지 핏길이 따라 어느새 웅덩이가 된 모양을 보고 사색이 되었다.
“세, 세자 저하”
성진의 뒤에 조용히 따르고 서 있던 장내관은 ㅇㅇ에게 고개를 저었으나 그는 ㅇㅇ가 나중서야 깨달아 늦은 찰나가 되어버렸다.
“세자, 세자 저하”
감히 세자의 발목을 쥐었다. 법도에 어긋나는 것을 더해 옥체에 손을 대는 것은 소의가 보았다면 ㅇㅇ 역시 당장의 목이 내쳐지는 것은 당연했을 일이다. 사색이 된 ㅇㅇ가 쥔 발목을 성진이 내려다 보았다. 그제서야 그는 발에 박힌 사기 그릇 조각을 인식해냈다.
“…일어서거라”
“저하 우선 치료를… 아 아니, 제가 금방 어의을 불러오겠습니다”
“됐다. 어서 일어서거라”
“아뢰옵기 황소하오나, 세자 저하 이 자의 말이 옳습니다. 조금이라도 상처가 깊어지시면 옥체가 심히 상해 회복이 더딜 것입니다. 지금 당장 소환을 보내 어의을 불러오겠습니다”
성진은 제 발목을 꼭 쥔 채 올려다보고 있는 ㅇㅇ의 눈망울과 마주하였다. 그의 발을 중심으로 고인 핏물의 웅덩이는 ㅇㅇ의 관복까지 적셔 혈흔이 번지고 있었다. 그는 칼자루를 쥔 손에 들어간 힘을 애써 풀고 신음과 비스무리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 하도록 해라”
장내관 위 뒤를 지키던 한 소환이 급히 동궁을 벗어나 궐 내 의원으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본 ㅇㅇ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여전히 웅덩이는 끝없이 고여들고 있었다.
“지금 무엇하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저하”
ㅇㅇ는 끝끝내 보다 못한 채 다리를 덮은 제 관복을 북 찢었다. 아무리 조각이 박힌 상흔이라지만 과다한 출혈은 세자에게 위급한 상황이었다. 자구 상흔이 어른거리어 그녀는 세자의 신을 조심히 벗겨 낸 후 찢어낸 관복을를 조심히 상흔에 지혈했다.
“죽을 죄를 지었으나 저하, 잠시 의원이 올 때까지만 이렇게 서 있어야 합니다. 그 뒤 끌려가여도 좋습니다. 군말 없이 받들겠나이다”
ㅇㅇ는 황급히 의원들이 동궁으로 들이 닥칠 때까지 성진의 발목을 놓지 못하였다. 금방 의원들에 둘러쌓여 소란이 일어났을쯤 조용히 그는 뒤로 물러서 고개를 숙였다. 단 둘의 실수도 아닌 여럿의 앞에서 세자의 몸에 손을 대었으니, ㅇㅇ는 작은 몸을 움츠렸다.
“그리 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
“가장 오래 저하를 모셨습니다. 하위 궁녀들까지 모두 입을 닫게 주의하겠습니다”
ㅇㅇ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가보셔도 좋습니다. 소환이 제학의 길을 뫼실 것입니다”
ㅇㅇ의 뒤로 금방 소환 하나가 따라 붙었다. 의원들 사이로 잇새를 물은 세자의 모습이 보였다. ㅇㅇ는 좀처럼 편치 못한 마음을 짊어지고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돌아가는 길의 발걸음은 발등 위로 쌀 한 말을 올린마냥 표현을 해보일 수 없는 무게였다. 또한 성진의 일렁이던 깊은 눈동자가 ㅇㅇ의 목을 갑갑하게 꾹 쥐고 좀처럼 놓지를 않았다.
달을 맞이하는 꽃잎이 한 송이의 생명을 더 틔어냈다. 반절짜리 달덩이로 향해가는 방향으로 고개를 든 채 말이다. 그 날 ㅇㅇ는 유독 헤어나올 수 없는 밤을 헤아리며 머릿 속에 자리한 이의 주위를 헤엄쳤다.
*
그 소문 들었나 몰라, 소의마마께서 세자의 즉위식에 맞추어 각지 자객들을 속속히 모으고 있다더군….
성진은 뒤늦은 백주 대낮을 맞으며 몸을 일으켰다. 상흔과 함께 밤새 앓아 누웠으니, 분명 장내관의 뜻으로 세자의 휴식을 받아낸 게 분명했다. 성진은 이미 살점이 찢겨 나간 듯 정신이 어른거리는 고통에 터진 입술을 다시 깨물었다. 어제 정녕 무슨 일이 마지막이었는가, 정신을 잃은 고통 내를 파헤쳐 ㅇㅇ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밤이 깊었다. 궐 내 그는 무엇을 위해 법도를 어기고 저의 상흔을 쥐었을까. 방황하는 눈망울에 맺혔던 이슬이 ㅇㅇ의 어깨를 짓눌렀다.
“장내관 밖에 있는가”
“예, 세자저하”
“ㅇ제학을 불러올 수 있겠는가”
“해가 저문 뒤, 속히 데려오겠습니다”
성진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 대신 소인이 감히 문안 인사를 대신 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하루는 침소에 있으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알겠네. 장내관이 자리를 뜬 후 성진은 조찬의 상을 밀어두고 팔을 뻗어 창을 열었다. 꽃내음이 흘러 들어오지 않았다. 장서각 뒤 심은 꽃내음이 이리 멀리까지 흘러 오기는 말도 되지 않았으나, 그리하여 성진은 더 ㅇㅇ를 그렸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인 제학 ㅇㅇㅇ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는지 여쭙습니다”
태양이 저물어 들기만을 성진은 바랐다. 또한 태양이 저물어들자 그는 생활복으로 환복한 뒤 몸가짐을 가지런히 점검했다. 그리고 석찬을 먹은 후 장내관이 동궁을 떠나기만을 다시 기다렸다. 장내관이 동궁을 뜨자마자 성진은 다과를 준비하라 일렀다. 또한 조금 기운 책들의 배열을 되돌리고 칼자루의 배치까지 꼼꼼히 견주어 보았다. 세자, 한 나라의 곧 왕이 될 몸. 나라를 품을 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세자는 그저 한 눈 반해버린 이의 앞에서 대장부다운 예를 갖추고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한 그저 사내 하나일 뿐이었다.
“들라하라”
성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과상과 뒤따라 ㅇㅇ가 모습을 보였다. 출근을 하자마자 영문도 없이 동궁으로 끌려오다시피 걸음을 옮겨온 ㅇㅇ는 하늘의 색을 그대로 담은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채 도운을 맞아야했다.
“장내관, 밖의 이들을 돌려보낼 수 있겠는가”
“예 저하”
장내관이 성진의 침소를 떠난 후 남은 이들이라곤 세자 성진과 선비의 행색을 하고 있는 ㅇㅇ뿐이었다. ㅇㅇ는 제대로 예를 갖추어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성진의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고개를 들라”
“넌 항상 내가 두 번이나 입에 올리게 하는구나”
여전히 성진의 행동이 어색하기만 한 ㅇㅇ는 그제야 고개를 벌떡 쳐들었다. 눈이 댕그랗게 커져 껌뻑이며 성진을 마주한 ㅇㅇ는 입술을 조밀거렸다.
“상흔은... 괜찮으신 겁니까?”
“걱정 되었느냐”
“아니 어찌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질문을 제대로 물어버린 ㅇㅇ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내 윙윙거리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성진은 그런 그녀가 보기 좋았다. 감정에 솔직하고 기품을 가졌으나 거침이 없는 아이. 성진은 그 누구도 보지 못한 잔잔한 웃음을 입에 올렸다.
“장서각 뒤로 꽃은 많이 피었느냐”
“여직 한 종의 꽃이지만 많은 잎이 올랐습니다”
ㅇㅇ는 성진의 물음에 금방 장서각 뒤 맑은 이슬을 안고 피어오른 꽃을 머릿 속에 그려내며 활기있는 미소로 답했다.
“곧 반달이 떠오를 것을 아는마냥 활짝 피어나고 있습니다, 저하도 보시면,”
“내가 보면?”
ㅇㅇ는 그 아른대는 배경의 상상에 이만 넋을 놓고 많은 이야기를 한번에 구술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그 상상의 끄트머리 꽃을 바라보는 성진의 인영에 화들짝 상상에서 깨어 나왔다. 왜 이 상상의 결말이 세자저하인가? ㅇㅇ는 어리둥절하며 또 다시 깊은 병이 찾아든마냥 쿵쿵거리는 가슴에 금방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저 보시면 분명 좋아하실 거라고…”
ㅇㅇ는 끝내 성진의 일렁이는 눈동자를 피하며 말을 종지었다. 너는 아직 더딘 모양이구나. 성진은 팔을 뻗어 잠시 창을 열었다.
“향이 들어오느냐”
“아뇨, 들어오지 않습니다”
ㅇㅇ가 조밀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답했다. 성진은 그 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창을 다시 잠구어 자리에 앉았다.
“내 너를 왜 이곳으로 불렀는지 아느냐”
“아뢰옵기 죄송한 말이오나 알지 못합니다”
성진은 잔잔한 미소를 다시 한 번 피워냈다.
“꽃을 보고 싶어”
“너를 불렀다”
ㅇㅇ는 제 손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곤 아주 찰나에 성진의 뜻을 알아채고 훅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정말 어딘가 크게 아픈모양이었다, 말을 듣지 않는 진정이 가슴을 마구 흔들었다.
“향이 좋구나”
“…끅,”
ㅇㅇ 역시 새빨갛게 익은 계절의 사과 한 알과 같이 달아오른 얼굴을 느끼어 소매로 얼굴을 반쯤이야 묻었다. 자리를 박차 일어서는 법도를 다시 어긋되는 일을 꾹 참아보았자 쳐보자, 그리하여 애써 세자의 눈동자와 마주했다해보자.
“밤이 깊어가는구나, 장서각까지 데려다 줄 터이니 일어나거라”
성진은 벌벌 뛰는 가슴을 진정할 새 없이 ㅇㅇ를 일으켰다. 자시의 궐 내는 심어둔 연리지의 둥지를 튼 까치의 날개가 부산스레 움직이는 소리를 제외하곤 모두 잠에 든 마냥 조용했다. 세자보다 조금 뒤, 천천히 성진을 감싸는 동풍을 따라 맞으며 종종 걸음으로 걸어나갔다.
“아”
이리도 머리가 어젯밤 오라버니가 감던 실타래처럼 꼬인 것은, 덜썩거리는 가슴을 안고 걷는 것은 아주 처음이었다. 갑자기 멈춰선 성진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부딪힌 ㅇㅇ는 그대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이리 갑자기 가까이 끅,”
폭 가까워진 거리를 적응하기는커녕 어깨를 움츠린 ㅇㅇ에 세자의 미소가 덜컥 터져나왔다.
“꽃이 되어보겠느냐”
고운 입술이 오물거렸다. 헙, 내지 못한 답에 콧망울이 스리슬쩍 닿은 거리에서 성진은 ㅇㅇ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내 퍽 놀라 무한한 끄덕임으로 답했다. 노력하거라. 그 말을 끝으로 성진은 돌아서 천천히 장서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떤 노력이란말인가, 좀처럼 세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ㅇㅇ는 골똘히 총명한 머리를 돌려 곱씹었다.
“세자 저하”
“금방 가겠네”
“그래도,…”
“장내관”
그때였다. 급히 성진을 가로막은 장내관은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일인가. 궁금증에 성진의 등 뒤서 고개를 빼었지만 넓적한 세자의 등이 철저히 그의 고개를 가려내고 있었다.
천천히 돌아오겠네. 성진은 작은 목소리로 장내관을 졸랐다. 상흔이 아물기는커녕 다시 터져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그는 알고 있을 것이었다. 꽃은 소중하게 심어야 하고,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다. 꽃잎 한 장 찢겨나가며는 그는 퇴색의 길로 꺽이는 것이 운명이다. 장내관은 세자의 길을 비켜섰다. 성진은 다시 천천히 장서각을 향해 걷기 시작하였고, 종종 다시 ㅇㅇ는 따라 걸었다. 평상 성진의 걸음보다 아주 느린 배속이었으나 저의 감정 하나 읽어내지 못하고 헤매이는 꽃은, 아는가.
“이를 한 눈에 반했다고 하는 것이라 하더구나”
성진이 재차 ㅇㅇ를 향해 돌아서 말했다. 그녀는 그대로 모든 찰나의 정지와 함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당장 아무것도 없었다.
“꽃이 되어주거라”
“나의”
이를 다정한 시선이라 일컫어야만 했다. 그 누구도 보지 못한 세자의 시선이었다. ㅇㅇ는 차마 딸꾹질조차 막아내지 못하고 그저 그 시선을 받아내며 읽을 뿐이었다.
“명이다”
세자는 미소를 품고 그녀의 콧망울을 손가락으로 톡 두드렸다. 가자. 아마 성진이 다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면 그녀는 영영 그 자리에 발걸음을 붙인 채 옮기지 못하였으리라. 이지러진 달이 올랐다. 그 달은 명월만큼이나 밝아 두 사람의 그림자를 그렸고, 오묘히 겹친 두 사람의 그림자는 꽃에 앉은 나비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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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가...없네요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기다려주신 독자님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