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냥냥이와 댕댕이>
# 궁지에 몰린
“ 다 모이니까 좋네. 건배. “
남준이 캔맥을 들고 손을 중간으로 뻗어왔다. 모두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짠-!
모두가 하나같이 입꼬리를 귀에 걸고 맥주를 과하게 들이켰다. 즐거운 술자리의 첫잔이 그렇듯.
윤기가 빠진 절반짜리 환영식 이후 쉐하에서 처음 열리는 완전체 술자리였다.
지난번에는 전부 싫은 티가 역력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는데, 오늘은 호석과 윤기가 모두 있으니 한결 편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여주는 빨리 이 시간이 끝나길 바랐다. 왜냐면 오늘은.
“ 형, 형. 오늘 소개팅 어땠어요. “
윤기의 ‘첫’소개팅 기념 술자리였으니까.
윤기가 맥주를 마시자마자 옆에 있던 태형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왔다. 잔뜩 설레하는 표정으로 윤기를 바라보는 태형의 얼굴에서는 순진함과 무구함이 느껴졌다. 물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여주는 태형이 윤기에게 묻기 전에 힐끔 저를 쳐다보는 걸 느꼈다. 다른 하메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태형이 묻자마자 제 표정을 살피기 위해서 아닌 척 시선을 힐끔거렸다. 여주는 맥주 한 입 마셨을 뿐이었지만 벌써부터 속이 울렁거렸다. 이 자리는 윤기의 첫 소개팅 기념을 가장한, 여주가 윤기에 대한 미련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조용하게 제 얼굴에 꽂히는 시선들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지민과 태형 사이에 껴있는 윤기는 부담스러운 듯 헛기침을 했다.
“ 뭐. 그냥저냥. “
에이, 뭐에요오- 김샌 듯 태형이 윤기의 팔을 쳤다. 윤기는 개의치 않는 듯 다시 맥주를 마셨다. 여주의 속이 타들어갔다. 겉으로 보기에 윤기는 매우 무심해보였지만 여주는 알 수 있었다. 심드렁해보이는 윤기의 얼굴이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 빼지 말고 말해봐. 솔직히 어땠어. “
이번엔 남준이 물어왔다. 차분하게 묻는 말투에 다정함이 섞여있었다.
“ ...괜찮았어요. “
“ 어떻게. “
“ 생각보다 털털한데 말이 잘 통하더라구요. “
윤기의 얼굴이 한 차례 더 상기됐다. 그 모습에 다른 하메들은 뺌~~하며 주접을 떨었지만 여주는 잔뜩 굳어지는 표정을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윤기의 입에서 나오는 이성에 대한 칭찬은 오래된 친구인 여주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몇 번인가 호석에 대한 칭찬을 한 적은 있었지만 원체 사람에 대해 호감을 쉽사리 가지는 애가 아니었다. 오래된 제 사람에게만 곁을 내주는 윤기였기에 여주는 소개팅을 보내고도 절반정도는 안심하고 있었다. 윤기는 처음보는 상대에게 호감을 가질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여주의 맞은 편에 앉은 윤기는, 제 예상을 한참 벗어난 모습이었다.
소개팅 상대를 떠올리는 윤기의 눈에 온기가 가득했다. 마치 첫 눈에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 예뻐요? “
지민이 그렇게 묻곤 여주쪽을 노골적으로 쳐다봤다. 들으라는 듯.
“ ...어. “
애석하게도 윤기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대답했다.
여주는 순간 쏟아지는 하메들의 시선에 굳은 표정을 들킬 것 같아 손에 들고 있던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쏟아지는 맥주가 마치 사약같았다. 아니, 차라리 그랬다면 이 광경을 보지 않아도 될 텐데. 여주는 속이 쓰렸다.
“ 천천히 마셔. “
여주의 곁에 있던 호석이 물을 챙겨줬다. 여주는 그 시선을 피했다.
윤기를 그렇게 보내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있던 여주는 호석의 부름에도 단 한 번도 나와보지 않았다. 공연히 모든 화가 호석에게 쏟아졌다. 이 상황까지 만든게 마치 호석같아서. 정작 미련하게 군 건 자신이었는데도.
여주는 호석이 건넨 물컵을 밀고 옆에 있던 소주병을 땄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는 걸 알았지만, 도저히 맥주만으로는 못버틸 것 같았다.
“ 갑자기 웬 소주냐. 소주 약하면서. “
“ ...내 맴. “
맞은 편에 앉은 윤기가 간섭을 해왔지만 여주는 고집스레 소주를 제 유리컵에 따랐다. 손톱만한 소주잔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속상함이었다. 모든 하메가 경악스러운 얼굴로 여주를 쳐다봤다.
“ 여주가 술이 센가 보네. 글라스에 마시는 사람 오랜만에 본다. “
남준이 작게 웃으면서 여주에게 건배를 권했다.
여주는 그 반듯한 얼굴을 보며 유리컵을 들고, 짠, 기분 좋은 척 건배했다.
“ 누나. 원샷? “
한 모금만 들이키려던 순간 태형이 도발하듯 물어왔다. 저 부레옥잠같은 애새ㄲ1...
그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지만 무력한 여주는 그저 원샷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태형은 저 순진한 얼굴을 하고 영악하기 그지 없었다. 대놓고 비수를 꽂는 지민보다 더 얄미웠다. 여주는 모든 하메들의 시선을 받아내며 꿋꿋이 유리컵에 채운 소주를 입 안으로 털어넣었다.
알코올냄새와 기분나쁜 달달함이 목구멍을 가득 채웠다. 안주도 제대로 먹기 전부터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 무리하지말고. “
호석이 제 손에 든 유리컵을 빼앗곤 그대로 소주잔을 쥐어줬다. 사이 마주한 호석의 눈이 염려로 가득했다. 모두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는 가운데 호석만 그런 눈으로 저를 쳐다봤다. 그게 어딘가 쿡쿡 쑤셔서 여주는 속이 울렁거렸다.
*
이쯤되면, 여주는 확신할 수 있었다.
“ 다음에 만날 땐 뭐 준비하죠. “
“ 어디서 만나게. “
“ 걔 학교 근처. “
“ 그럼 거기 근처 맛집 찾아 놓고. 아 거기 내가 아는데 있어. 지난번에 친구랑 다녀왔는데, “
윤기의 질문에 남준이 아이를 가르치듯 세세한 것까지 일러주고 있었다.
다들 술이 잔뜩 들어가서 널부러진 지 오래였지만 윤기는 반쯤 눈이 풀린 남준을 붙들고 궁금한 걸 전부 묻고 있었다. 애프터 신청은 어떻게 하느냐, 데이트는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뭘 준비해야 하느냐.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전부.
윤기는 오늘 소개팅한 상대에게 반해도 단단히 반한 것 같았다.
술이 들어가면 말이 많아지고 본심까지 튀어나오는 윤기였기에 여주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남준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며 상기되는 윤기의 얼굴이 낯설어서, 심장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저와 사귈 때도 저런 얼굴을 한 적이 있었나. 공연히 그런 생각까지 드니 우울했다.
“ 누나. 뭔 일 있어요? 표정이 안좋아요. “
이제 다 술에 뻗어서 굳이 표정을 감추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던 찰나 태형이 엎드린 채 고개만 들고 그렇게 물어왔다. 태형의 느닷없는 물음에 모든 시선이 여주의 얼굴에 꽂혔다.
남준을 향해있던 윤기의 시선까지.
여주는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어서 어색하게 웃었다. 평소처럼 표정을 감추기에는 술이 너무 들어간 상태였다.
“ 무슨 소리야. 나 지금 기분 되게 좋아. “
“ 꼭 실연당한 사람같아서요. “
적당히 하라는 늬앙스로 어거지로 웃음을 지어줬는데, 되돌아오는 태형의 말은 여주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자기가 싫다곤 해도, 이 상황에 몰아가고 싶다곤 해도. 이건 너무 악질이었다. 태형은 다시 무구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악의가 없는 듯이.
다른 하메들 또한 모르는 듯 보고 있었지만 여주는 느꼈다. 다음 이어질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사이 느껴지는 윤기의 시선이 유난히 따가웠다.
여주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나한테 왜 이러냐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그렇게 못되게 구는 거냐고.
“ 아니, 난... “
거기까지 말하다가, 도저히 이을 수가 없었다. 제 스스로 눈물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억울하고, 서러워서 목 끝까지 울분이 차올랐다. 하지만 이 곳에는 제 편이 없었다. 궁지에 몰린 제 손을 잡고 나가줄 사람은 없었다.
“ 야, 태형아. 아이스크림 안땡기냐. “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던 찰나, 지민의 부탁에 물을 떠온 호석이 태형에게 물었다.
여주에게 쏠린 시선이 호석으로 분산됐다. 여주에게 시선을 떼지 않는 태형이 대답을 않고 있자 지민이 먼저 호석에게 말했다.
" 어, 저 붕어싸만코. "
" 오케. "
" ...겁나 뜬금없네요 형. "
" 그르게. 취했나보다 더운 거 보니까.
" ... "
"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사올게. "
태형의 미심쩍은 시선이 호석으로 향했다. 하지만 호석은 개의치 않는 듯 빙긋 웃더니 여주쪽으로 가서 손을 잡았다.
“ 같이 사러갈까 여주야. “
식탁 아래서 덜덜 떨고 있는 그 손을 잡고, 호석은 단단한 눈빛 속에 여주를 담았다.
*(브금필수)*
# 열대야
한여름에 들어선 밤은 유난히 공기가 두터웠다. 아스팔트 바닥에서 미지근한 온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하늘은 저렇게 맑은데, 바람 한 점이 없었다.
새벽이었지만 열대야 속 잠들지 못한 빛들이 유난히 반짝였다. 여주의 눈에 그 빛이 아른거렸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잘 참고 있지만 누군가 툭 건들면 당장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쉐하에서 나온 이후 단 한 번도 놓지 않은 호석의 손이 뜨거워서 더 그런 것 같았다.
제 손을 잡고 한 걸음 앞서 나가는 호석의 왼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 봉지가 유난히 컸다.
애들이 좋아한다며 종류별로 두개씩은 사는 바람에 아이스크림값만 23000원이 나왔다.
그 와중에도 다정할 건 또 뭐야, 호석의 돈으로 산 아이스크림을 그 놈들이 먹는다는 생각에 여주는 짜증이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분이 삭지 않았다. 특히 김태형. 어린놈의 자식이 못된 것만 배워서, 사람을 궁지에 모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왜 화를 내지 못했는지 여주는 스스로 자책했다.
하긴, 매번 이러긴 했었나. 여주는 잊고 있었던 고3 막바지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윤기와 둘이 함께 하던 평온하고 안온했던 지난 학창시절에 반해, 호석과 함께하는 1년은 너무나도 다이나믹한 일의 연속이었다. 학교-집이 전부였던 여주의 세계는 호석이 이끄는 곳마다 하나 둘 씩 넓어졌다. 호석의 손에 이끌려 처음 갔던 스케이트장, 친하지 않은 다른 반 애들과의 노래방, 카페, 학교 근처 분식집. 어느덧 여주는 호석의 생활반경 속에 스며든 것 같았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하지만 9월 모의평가 이후 본격적인 입시시즌이 되자 호석 또한 개인적인 시간이 길어졌고 여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때즈음 같은 반 아이들의 은근한 괴롭힘이 시작됐다. 알고는 있었다. 모든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인 호석이 지나치게 자신을 챙기고, 그걸 탐탁치 않아하는 무리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하지만 열아홉이나 되서 어린 애들처럼 유치하게 괴롭힐 줄이야.
여주의 사물함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쓰레기가 들어있었다. 처음엔 휴지, 종이같은 걸로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사용한 생리대까지 붙어있었다. 수업시간에는 곤란한 질문에 여주의 이름이 불렸고 이동수업 중 교실이 바뀌면 매번 이상한 교실로 알려주기 일쑤였다. 아이들은 영악했다. 열아홉이었기에 유치했지만 악랄했고, 똑똑했다. 여주는 졸업까지 그 지긋지긋한 괴롭힘에 시달려야 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목소리 내지 못한 채.
여주는 알았다. 이걸 문제 삼기 시작하면 곤란해질 것은 호석의 몫이란 걸. 여주는 호석에게 그런 짐까지 짊어지게 하고 싶진 않았다. 자신은 호석에게 있어 많고 많은 친구들 중 하나일 뿐일테니까.
그래도 몇 달 남지 않은 고등학교였기에 여주는 잘 참아냈다. 대학을 가면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주는 아까 마주한 태형의 얼굴에서 그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궁지에 몰아놓고 곤란해하는 모습을 즐기는 그 얼굴.
그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었다. 호석이 제 손을 잡고 나와주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 자리에서 펑펑 울고 말았을 것이다.
“ 아직도 화났어? “
앞서 걷던 호석이 집을 코 앞에 두고 멈춰섰다.
가로등 아래서 고개를 돌린 호석의 얼굴에 음영이 졌다. 그 덕에 호석의 얼굴이 조금 흐릿하게 눈에 담겼다.
“ 조금. “
“ 나한테도? “
호석의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사이 공기가 한층 더 두터워진 것 같았다. 더운 것도 같고.
" 조금. "
" ...나 미워? "
꼭 쥔 손에 힘이 느껴졌다.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서러움에 잊고 있었던 윤기의 얼굴이 여주의 머릿 속에 둥실 떠올랐다.
처음 만난 여자애를 칭찬하던,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남준에게 묻던, 단단히 사랑에 빠진 눈빛의, 처음보는 윤기의 얼굴.
오늘 소개팅을 가지말라고 했더라면 굳이 보지 않아도 될 것들이었다. 호석보다 더 빨리 말했더라면. 바보처럼 굴지만 않았더라면.
하지만 이렇게 만든 게 자신임을 알면서도 여주는 호석을 탓하고 싶었다. 역정이란 걸 알면서도, 제 화를 쏟고 싶었다. 눈물나게 다정한 정호석한테.
" 어. 미워. 진짜 미워. "
" ... "
" 너때문이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
기어코 눈물이 터졌다. 쉼없이 머릿 속을 침범해오는 윤기의 처음보는 얼굴들이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눈 앞의 호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또렷해졌다를 반복했다. 그 속에 보인 호석의 얼굴에 아픔이 느껴졌다. 여주는 그 이유를 헤아릴 수 없었다.
호석은 무언갈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닫고 그대로 여주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과일향과 함께 술냄새가 섞여왔다.
호석의 품이 지나치게 따뜻해서 여주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언제나 자신에게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 혼자 울분에 차서 역정을 부려도 가만히 받아주는 사람.
하지만 호석은 제 편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을 아끼기에 상처 하나 내지 않으려 하지만, 그럼에도 윤기를 더 아끼는 사람. 여주의 사랑이 윤기에게 아픔이 될까봐 염려하는 사람.
쉐어하우스에서 여주의 사랑은 딱 그 정도의 것이었다. 이다지도 아픈 제 심정은 아무도 걱정해주지 않았다.
일렁이는 열대야 속에서, 여주는 그게 제일 서글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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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브금 너무 좋지 않나요 여러분...???완조니...저거 들으면서 쓰니까 진짜 열대야같고...
정호석 있는 거 같고...흑흑...
여튼 오늘도 후리하게 썼으니 엉성한 맛 그대로 즐겨주세요!
오늘은 분량이 조금 적어요! 그래도 재미있게 읽어주셨길 바랍니당 :->
암호닉은 다음부터 받아볼까 합니다!
여러분,,,어남() 누굴 선택하시려나요!ㅋㅋㅋㅋㅋ
빠른시일내에 4화로 찾아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