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냥냥이와 댕댕이>
# 마치...개같은
" 야아, 어디까지 가는데. "
고작 여명 사러 나와서는 벌써 10분째 직진 중이었다. 슬리퍼가 자꾸 벗겨지는 통에 주춤대는데도 제 손목을 잡은 호석의 발걸음이 꽤나 다급했다.
근처 편의점은 지난 지 오래였다. 결국 지친 여주가 호석에게 말했다.
여주의 부름에 호석이 멈춰서서, 시선을 마주했다. 여주가 잔뜩 짜증난 얼굴로 호석을 바라봤다.
" 씨유 방금 지나쳤거든. "
" 아. "
깨듯 호석의 눈동자가 선명해졌다.
" 아니. 민윤기랑 있는 거 방해하는 건 알겠는데 굳이 이렇게 멀리까지 와야되냐. "
" ... "
" 너는 씻고 나와서 멀끔한데 나 지금 꼬라지 좀 봐. 완전 거지왕초임. "
" 예쁘기만 한데 뭘. "
호석이 숨도 안쉬고 대답을 건넸다. 얘는 립서비스 전공인가. 뭐가 이렇게 숨쉬듯 자연스러워. 여주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 웩. "
" 그것도 귀엽네. "
" ...왜 이래 소름돋게. "
" 너랑 나오니까 좋아서 그러지. "
" 어? "
" 이왕 방해한 거 나랑 동네 한 바퀴 돌고 들어가자. "
호석이 빙긋 웃었다.
때마침 호석의 위에 떠있는 해가 반짝이며 여주의 뇌리를 갈랐다. 눈이 부셔서 으,하고 눈을 감았다가 뜨니 햇빛을 가득 머금은 호석의 얼굴이 빛나듯 태양처럼 제 눈 앞에 걸려있었다.
여주는 눈을 찡그렸다. 반쯤 감은 눈 사이에 호석의 모습이 사진처럼 담겼다. 이 모습은 마치...
" 개같다. "
여주가 확신에 찬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개? "
방긋 웃고 있던 호석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나쁜 뜻이야? 호석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 아니. 꼭 주인만 보면 댕댕거리는 개같잖아. "
" 어? "
" 너 방금 햇빛 받은 게 딱...날씨 좋은 날에 주인이랑 같이 산책하는 개같았음. "
진지하게 끄덕이는 여주를 보던 호석이 크게 웃었다.
드립이 먹혀들었군. 여주는 흐뭇하게 그 모습을 지켜봤다.
" 넌 진짜 이상한 애야. "
호석이 아직 잦아들지 않은 웃음을 삼키면서 여주를 바라봤다.
순간의 햇살이 모두 쏟아진 듯 여주의 얼굴이 유난히 말갛고 환했다. 사랑스럽게도.
주인님이라. 맞는 것도 같았다.
" 그럼 나랑 산책해주는건가, 주인님? "
손.
호석이 제 손바닥을 여주의 얼굴 앞에 내밀었다. 여주는 그 손을 무심하게 잡았다.
뭔가 반대로 바뀐 것 같았지만 별 상관없었다.
이 한여름의 산책길이 지난 열대야 속 묻어둔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내주길 바랐으니까.
# 스킨쉽의 경계
" 지민아 지금 밖에 몇 도임 "
" 삼십팔도. "
" 와...미친... "
" 와. 듭나. "
" 아으, 붙지 마라 좀! "
사람 하나 나가 죽어도 모를 듯한 기록적인 무더위였다.
평소엔 자기 방에 틀어박혀있는 하메들이 쉐어하우스에서 유일하게 에어컨이 있는 거실로 나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래된 에어컨이라서 아무리 18도로 희망온도를 맞춰도 27도에서 떨어지지 않았지만 푹푹 찌는 제 방들보다는 나았다.
4학년인 남준은 거실 식탁에서 이력서를 쓰고 있었고 동갑내기 둘은 작은 쇼파에 딱 붙어서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저럴 때 보면 스무살 뽀시래기들이 맞는데...하지만 여주는 그 외양에 속지 않았다. 이 쉐어하우스에서 제일가는 악마니까. 윤기의 첫 소개팅 기념 술자리 이후 지민은 저를 경계하는 게 줄어들었지만 태형은 여전했다. 틈만 나면 꼽 주고, 무안 주고, 떠보는 말을 서슴치 않았다. 처음에는 그에 상처받아서 혼자 처량맞게 눈물을 훔치곤 했지만 몇 번 반복되니 여주도 그에 무뎌져 넘어갈 수 있는 정도가 됐다.
언젠가 저 새끼 한 대 치고 만다, 여주는 아주 구체적이게 그 계획을 세우는 중이었다.
" 아, 맘에 안드네. "
제 안무영상을 복습 중이던 호석이 탐탁치 않은 듯 말했다.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마치 귀에 속삭이는 것처럼. 여주는 그 숨결이 간지러워서 등줄기가 오싹했다.
" 야. 김태형 딴 거 틀어봐. "
윤기는 제 무릎에 누워 몸을 말고 있었다.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채 말을 하는 윤기의 머리의 진동이 느껴져 허벅지가 간지러웠다. 또 등줄기가 오싹했다.
...?
그나저나 왜 넓은 쇼파에서 이 둘이 굳이굳이 내 양쪽에 딱 붙어 있는 거지?
여주는 문득 어리둥절해졌다. 물론 윤기가 무릎에 누워있는 건 간지러운 걸 넘어서서 심장이 두근댈 정도로 설렜지만, 이 더운 날씨에 굳이...?
어느덧 제 허벅지를 베고 있는 윤기도 더운 듯 이마에 땀이 살짝 맺히기 시작했다. 어깨에 기대고 있는 호석의 머리맡에서도 온기가 후끈후끈 올라왔다.
하지만 그 사이에 껴서 가장 더운 건 여주였다. 가죽 쇼파라서 앉아있는 엉덩이에서도 땀이 차기 시작하는 것 같은데 이것들은 제 머리를 뗄 생각조차 없어보였다.
어우씨, 여주는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윤기에 대한 사랑도 더위에는 이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당장이라도 일어나라며 윤기의 이마를 팍 쳐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제 눈에 담긴 윤기의 동그란 이마가 하얗고 맨들맨들하고 너무 귀여워서 가만 둘 수 밖에 없었다. 무릎에 누워있는 민윤기는 너무 해로워...여주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심장을 쥐어잡았다.
" 아. 이거 재밌는데에. "
" 너는 이 날씨에 저런 걸 보고 싶냐.
윤기가 마뜩찮은 표정으로 가리킨 TV에서는 드넓은 사막 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가는 여행자들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뜨겁게 쬐여오는 태양 아래서 곧 죽을 것처럼 헉헉대며 땀을 흘리는 모습이 보는 저마저 더워지는 것 같았다.
" 왜요, 멋있잖아요. "
" 보는 내가 더 더워. 딴 거 틀어. "
" 이열치열도 모르나...잉, 형 땀나요. "
" 어쩌라고. "
" 땀 나는데 왜 그렇게 여주누나랑 딱 붙어있어요, 더 덥게. "
그 말에 윤기의 대답이 멈췄다. 태형은 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의 침묵 후 윤기가 몸을 일으키며 안그래도 일어날라 그랬어, 무심하게 되받아치곤 방으로 들어갔다.
윤기가 떠난 자리에 드디어 시원한 바람, 아니 27도의 미지근한 바람이 와닿았다. 더이상 윤기의 동그란 이마를 눈치보지 않고 감상할 수 없는 건 유감이었지만, 그래도 좀 상쾌해졌다.
태형이 잘됐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게 얄밉긴 했지만 지금만큼은 봐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누나. 전부터 궁금했는데 왜 호석이형은 무릎베개 안해줘요? "
태형에게 붙어서 뒹굴대던 지민이 여주에게 물었다. 정말 궁금한 얼굴로.
" 어? "
" 아니, 셋 다 엄청 오래된 친구라면서요. 근데 왜 윤기형만 무릎베개 해줘요? "
마땅한 대답을 못찾은 여주가 덩달아 고개를 갸웃했다. 한 번도 따로 생각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사실 윤기에게 마음을 자각하기 전까지 여주에게 스킨쉽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들이었다. 워낙에 어릴 때부터 친구였기에 온 몸을 부딪히며 놀기도 했고, 여태껏 사심이 없었기에 거기에 별다른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다. 그건 호석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깊게 친해지기 시작한 건 고3부터라서 윤기보다 스킨쉽을 덜 했을 뿐, 먼저 호석이 제 손을 잡아와도, 품에 안겨와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냥 강아지 한 마리가 제 품에 안기는 것, 그 정도의 느낌이었달까. 그 강아지가 좀 과하게 크고 유난히 따뜻하긴 했지만.
다른 친구들과는 윤기나 호석 정도의 친분을 나눈 적 없었던 여주였기에 그 경계를 나누는 일은 무의미했다.
그래서 지민의 뜬금없는 질문에 여주는 골똘히 생각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여주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호석이 말했다.
" 얘가 뭐 무릎베개를 꼭 해줘야 되냐. "
" 걍 궁금해서요. 윤기형이랑 누나는 경계가 아예 없는데. 형이랑 누나는 좀 있는 거 같아서. "
지민의 말에 여주가 호석을 바라봤다. 그런가, 우리가?
호석은 제 어깨에서 머리를 떼며 미묘한 얼굴로 시선을 마주했다. 여주는 그게 무슨 표정인 지 알 수 없었다.
" 누나 사심일 수도 있지. "
호석과 눈빛을 주고 받는 사이, 태형이 쎄하게 그런 말을 내뱉었다.
또, 또 시작이다. 여주는 질색했다. 태형은 저런 식으로 작은 꼬투리만 잡으면 무안을 주려고 작정을 한 듯이 몰아갔다.
항상 거기서 윤기는 침묵했고, 여주는 그 침묵을 견딜 수가 없어서 도망가곤 했다.
하지만 또 여기서 우물쭈물했다가는 태형이 자길 더 만만하게 볼 게 뻔했다. 아무리 더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라곤 해도, 여기서 제 편은 없다곤 해도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가고 싶진 않았다.
고등학교 때처럼 바보같이 굴 수는 없었다. 여주는 태형을 빤히 보다가, 호석의 어깨를 잡았다.
어리둥절한 호석이 여주를 바라봤다. 뭐하냐는 눈빛으로.
" 그럼 우리 무릎베개 틀까? "
" ...뭐? "
" 트지 뭐. 우리 사이에 무슨 경계가 있어. "
대장부처럼 여주가 당당하게 호석의 양 어깨를 잡았다. 여주야, 잠깐만. 호석이 놀라서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여주는 강한 힘으로 그 어깨를 눌렀다.
속절없이 호석의 머리통이 무릎에 안착했다. 여주는 의기양양하게 태형을 바라봤다.
" 불알친구들끼리 뭔 사심이니. 태형아. "
예상치 못한 듯 벙쪄있는 태형의 얼굴이 꽤 볼만했다. 태형의 어그로를 막은 여주의 얼굴에서 승리의 기운이 떠올랐다. 호석을 이용하긴 했지만.
여주는 매번 제 무릎의 윤기에게 그랬듯 자연스럽게 손을 올려 호석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윤기와는 전혀 다른 체온이 여주의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그 온기가 지나치게 뜨거워서, 여주의 손이 느려졌다. 여주의 시선이 호석으로 향했다.
" ... "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호석의 얼굴이 유별나게 빨갛게 달아올라있었다. 숨도 조금 거칠어진 것 같은게, 어딘가 이상했다.
여주가 고개를 숙여 호석을 살폈다. 가까워지는 여주의 얼굴에 호석이 훅,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그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었다.
여주가 걱정스럽게 그 땀을 훔치고 호석의 뺨에 손등을 갖다댔다. 뜨거워도 너무 뜨거웠다.
" 호석아 너 괜찮아? "
" ... "
" 너 귀까지 빨개졌어. "
여주가 자연스럽게 달아오른 호석의 귓볼을 매만졌다. 말랑하고 뜨거운 감촉이, 어딘가 여주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제 귓볼을 여주가 만지작거리자 호석이 어깨를 움찔대더니 그 손을 뿌리치고 벌떡 일어났다.
" ...? "
갑작스러운 행동에 여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석을 쳐다봤다. 아니, 거실에 있던 하메 전부가.
제게 쏟아지는 시선을 의식한 호석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저렇게 사람이 익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 ...감긴가보다, 더운 거 보니까. "
되도않는 말을 하며 호석이 주방을 지나쳐 제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의 미지근한 공기가 어색하게 흩트러졌다. 천장을 나도는 모기소리만 위잉,위잉, 하메들의 귀에 꽂혔다.
" ...너넨 경계가 좀 필요하겠다. "
방으로 돌아가던 호석의 얼굴을 주방에서 직면으로 마주했던 남준이 적막을 가르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물음표 가득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여주의 시선을 모른 척한 채 남준은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
큰 갈등에피소드 없이 마냥 달달한 오늘입니다!
오늘은 여주가 의문을 품는 첫 날이 되지 않을까 싶고요ㅎㅎㅎ
앞으로는 여주가 이리저리 굴러가면서,,,어남윤파와 어남석파의 가슴을 후드려패고 다닐 것 같아요
강경 어남윤파 강경어남석파 마음 단단히 먹고 계십쇼!!
오늘도 댓글로 많이 앓아주세요...여러분 관심...넘 짜릿해...최고야...
오늘 분량은 조금 짧은데, 더 채워서 나중에 가져올까 하다가 빨리빨리 보여드리고 싶어서 쓴 대로 가져왔어요.
내일은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아마 업로드가 안될 것 같고, 크리스마스날 새벽?이나 밤쯤에 찾아뵙겠습니당
여러분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암호닉은 또 다음에 기회가 될 때 받을게요!
<암호닉 명단> 최신 4화 기준
연꽃 / 느낌표 / 흩어지게해 / 빙빙 / 티백 / 찰떡쿠키 / 한결 / 청포도 / 사탕 / 토마토 / 김김이 / 어남윤 / 하얀설탕 / 복숭아 / 사삼공 / 만두 / 어남석 / 수박바 / 나물(독자30님) / 고앵이 / 흑슈가 / 참새쨍 / 블루 / 콩이 / 순 / 윤꼬꼬 / 키딩미 / 가든 / 뷰뱌 / 불면증 / 보금자리 / 푸름 / 딸기 / 해결 / 프리지아 / 무럭무럭 / 도리도리 / 유니 / 봄 / 해강 / 율무차 / 토미 / 싱글벙글 / 감자탕 / 서콩이 / 달빛주스 / 새싹이 / 1218 / 나물(독자76님) / 여나 / 예그리나
+ [나물]로 신청해주신 분이 두 분입니다!! 30님과 76님! 해당되시는 분들 댓글로 말해주세용 :-)
+빠진 암호닉이 있다면 댓글로 말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