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마마, 황후께서 납시었습니다.”
황녀는 못 들은 척 이불보를 머리끝까지 잡아당겼다. 밖으로 살풋 삐져나온 흰 손가락이 아무와도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대변했다. 유모는 안타까운 마음에 침대 옆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옅게 주름진 손으로 황녀의 손가락을 감쌌다.
부황께 크게 혼이 났다는 것은 들었지만 그런 것으로 이리 우울해하실 분은 아닌데, 아마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마마. 황후께서 기다리십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주셔야 소인도, 황후 마마께서도 아시지요.”
멈칫하던 황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렇잖아도 몸이 약한 어머니를 바깥에 세워두거나 헛걸음을 하게 할 만큼 모질지 못한 그녀는 곧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들어오시라 말했다. 유모는 곧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묘한 미소로 나인에게 차를 내오라 일렀다.
“공주.”
“... 어마마마.”
“폐하께 전해 들었습니다.”
연녹색 옷을 입은 수수한 차림으로 방에 들어온 황후는 긴 생머리를 그대로 풀어놓은 채 여태 속적삼 차림인 딸을 아픈 눈으로 보았다.
“폐하께서는 공주가 마냥 못 미더워 그러신 게 아닙니다. 요즘 들어 근심이 많으신지라 예민하셔서 그러하니 공주가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는데...”
“하오나,”
“압니다, 우리 공주가 얼마나 속상했을지. 이 어미가 옆에서 지켜보았지 않습니까. 공주는 누구보다 노력했고 지금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바마마께서는 그게 싫으시다 하셨습니다. 어찌 저더러 대신들과 부군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저 가만히만 있으라고 하실 수 있습니까. 모든 이들이 여인의 몸으로 황제가 되려 하니 화가 일어나는 것이라 할지언정 아바마마께서는... 그러시면 안 되잖아요. 그럼 안 되는 거잖아요...”
금세 눈가가 붉어져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공주에 황후는 마른 손을 들어 닦아주었다.
“폐하는 공주가 혹여 자책을 하게 될까, 그것을 염려하시는 겁니다.
... 폐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를 미워해도 되고요. 그러니 그저 무슨 일이 생겨도 공주를 탓하지는 마세요, 응? 제가 아는 공주는 심히 자책할 만한 일은 하지 않으실 분이니.”
“... 어머니는 저를 신뢰하십니까?”
“그럼요. 어미가 딸을 안 믿으면 누구를 믿는답니까?”
황녀가 새끼 강아지마냥 품을 파고들자 황후는 팔을 들어 등을 몇 번이고 쓰다듬어 주었다. 쓰다듬을 받는 황녀가 작은 몸짓 하나만으로도 조금이나마 따뜻한 안정감을 느끼는 것 같아 할 수만 있다면 억겁의 시간일지라도 딸의 곁에 머물며 손길을 주고 싶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꼬리표를 달고서 반평생 믿음을 갈구하고 있는 딸의 눈빛이,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고 무거운 짐을 진 채 나아가야 하는 제 딸의 인생이 가여워 황후가 몰래 눈물을 훔친 것은 황녀는 죽는 날까지 모를 일이었다.
/
설화국에 어김없이 아침이 밝았다.
화씨들이 그리 고대하던 1황자의 즉위식이 몇 시진 지나지 않아 성사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정훈은 전날 미리 줄을 대려는 간신들과의 술자리를 즐기느라 몸을 쉬이 일으키기 힘들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어렵게 일어나 앉자마자 귀비가 찾아왔다는 소리가 들렸다.
“.... 들어오라고 해.”
잔뜩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칼을 털어 젖힌 정훈은 옷도 채 추스르지 않고 어머니를 맞았다.
진한 화장과 그 누구보다도 화려할 성 싶은 차림으로 방에 들어온 귀비의 표정은 태연하고도 얌전했다. 아들이 사람을 베는 것을 눈앞에서 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나 귀비에게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저 역시 직접 칼을 들지 않았다 뿐이지 말 한마디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베어 나갔던가.
아무렴, 황제가 되려면 그 정도의 담력은 지녀야지. 물러 터져서는 하는 일마다 못하겠다고 징징대며 방해하는 것보다야 몇 갑절은 나았다.
물론 말을 잘 듣도록 어르고 달래야 하는 게 일이겠지만 이 설화를 쥐락펴락할 수 있다면야.
귀비는 정훈의 침대에 걸터앉아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쥐고 쓰다듬었다.
“이제 채비를 하셔야지요? 지금 해도 늦습니다.”
“어머니는 왜 그 자리가 탐나십니까.”
“그게 무슨 소립니까?”
갑작스러운 말에 귀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되물었다.
“지금, 어머니가 태후 자리를 탐내고 계시질 않습니까. 이 황실의 가장 어른이 되고자. 그래서 나를 황제로 만들려고 한 것이고. 안 그렇습니까?”
“황자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네요. 나는 내 아들이 잘 되기를 바라서,”
“굳이 따지자면 아들이 아니라 가문이겠지. 멍청한 아들놈이지만 이 정도는 알아야 허수아비 노릇을 잘 해내지 않겠습니까.”
허허실실 웃는 얼굴로 뼈 있는 말을 하는 정훈에 귀비의 얼굴이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아, 그렇다고 너무 걱정은 마십시오. 여기까지 온 이상 나도 뭐라 할 자격은 없으니. 하나만 마음대로 하게 해주면, 하라는 대로 다 해드릴 요량이니까.”
“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녀의 노기 어린 큰 눈이 제 아들을 노려보았다. 좀 전의 태연자약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손까지 바르르 떨며 제 분노를 숨기지 못했다.
감히 네가 나에게 이리 건방지게 군단 말이냐.
“그렇지, 이리 나와야 우리 어머니지. 남들처럼 제대로 된 어머니 노릇을 하면 황제를 키울 수가 없지요, 아무렴.”
“어미에게 조롱일랑 관두고 원하는 것이나 말하세요, 황자.”
힘주어 한자 한자 내뱉는 귀비의 턱에는 분칠한 얼굴 너머로 핏줄마저 내보였다.
“즉위식이 끝나는 대로 유월까지 행차할 생각입니다. 아무리 작고 힘없는 나라라 해도 이웃나라인데 황제가 바뀌었으니 인사는 해야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왜 유월 같은 나라에 직접, ....하. 그래서요.”
“행차가 끝나고 돌아오면 바라시는 대로 국혼을 성사시키세요. 단, 황후는 제가 정합니다. 제가 데려오는 여인이 황후가 될 겁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럼 받아들이시는 걸로 알지요. 여봐라, 귀비를 뫼셔가거라. 볼 일이 다 끝났다 하신다-.”
“이보세요, 황자-!”
귀비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라며 바득바득 소리를 질러댔다. 정훈은 귀찮다는 듯 그대로 제 침소를 나가 욕탕에 물을 받으라 명했다.
“나를 위해서라... 역겨운 소리를 들었으니 귀를 깨끗이 해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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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은 다 준비하셨습니까?”
“예? 이, 이제 곧 나오실 겁니다.”
어린 항아가 정국의 침소를 나오자마자 지민이 그녀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살짝 고개를 숙여 물었다. 갑작스레 다가온 지민에 항아는 얼굴이 잔뜩 붉어져 말까지 더듬었다.
지민 님이 사사로이 우리 같은 항아들에게 말을 거시는 일은 없었는데.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뜬 모양이야.
지민은 오늘따라 더 초조하게 정국을 기다렸다.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어쨌든 눈에 띄는 일을 해서 좋을 것이 없는데. 작게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열린 문 사이로 정국이 푸른색 옷을 입고 나왔다.
“답지 않게 어찌 늦으셨습니까.”
“하나뿐인 형님 즉위식인데, 신경이 좀 쓰여야지.”
싱긋 웃어 보이는 정국에 지민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저런 여유는 대체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좀 본받고 싶네, 진짜.
황궁의 정중앙에 위치한 대명전(*설화의 정전).
웅장한 2층짜리 목조 건물 아래로 흰빛이 도는 높은 계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날씨는 그리 맑지도 비가 내리지도 않았다.
궁은 오래간만에 분주하게 활기를 띠었으나 그것은 속 빈 강정과 같다. 명실상부 최고 외척세력인 화씨의 눈치를 보며 발아래서 최대한 분위기를 맞춰줄 뿐 정훈이 황제가 되는 것을 축하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음이라.
정국의 어머니는 귀비에 비해 그리 강성한 집안의 여식이 아니었기에 견제할 만한 세력이 되지는 못했으며 화씨에 대적할 만한 집안이라면 좌승상 민시흥이 주요 인물인 민가가 유일했다. 다만, 좌승상은 슬하에 여식 하나만을 두었기에 좀처럼 세력을 더 확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삐 움직이는 궁녀들과 악공들, 화려하게 꾸며지는 대명전을 보며 좌승상은 심기가 불편한 듯 코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2 황자는 정녕 이렇게 황위를 내줄 심산인가?
1황자 같은 시정잡배만도 못한 자가 황제가 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차기 황후 역시 화씨 집안의 여식이 될 것이 불 보듯 빤하다는 것이었다. 이리 될까 봐 1황자가 황태자 직위를 받을 뻔한 것도 눈에 불을 켜고 반대한 것이었는데, 끝내 황제가 되다니.
좌승상은 2황자 정국이 황제가 되길 간절히 바랐었다. 야심 가득한 그는, 황자님의 모친은 힘이 없으니 제가 뒷배가 되어드리겠다 잘 구슬려 제 외동딸 휘경과 국혼을 하게 할 요량이었다. 그러면 자신은 황후의 부친이 될 거고, 곧 태사 자리를 차지하고서 조정의 실권을 손아귀에 쥘 수 있을 터였다.
선황을 설득하는 것은 실패했으니 이제는 2 황자를 꾀어낼 차례인가. 매사 무심한 그 자가 반란을 하려고나 할지 그것이 가장 큰 문제이긴 하다만.
그럼에도 민 대감은 다른 대신들처럼 정국이 야망 없는 한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능구렁이처럼 정계에서 살아남은 그는 한눈에 정국이 황제가 될 상이라 생각했다.
몇 년 전, 정국이 황자의 신분으로 제현국과 전투에 나갔을 당시 좌승상은 우연한 기회로 전장에서 막 돌아온 정국과 마주쳤다. 모두가 그를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어린 애송이 취급을 하였으나 그때 좌승상이 마주한 스무 살 정국의 눈빛은 천자의 것이었다. 피가 흩뿌려진 투구를 벗어낸 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등공신이었음이 분명했음에도 거만한 기색 없이 그저 의연하고도 강인해 보였다.
내 눈은 틀린 적이 없었지, 암.
좌승상은 2 황자를 반드시 제 편으로 끌어들이겠다고 마음먹고서 제 수염을 손으로 몇 번 쓸어내렸다.
태양이 황궁 뒷산의 정상 너머로 자리하자 황금빛 용포에 옥으로 빛나는 면류관을 쓴 정훈이 모습을 드러냈다. 악공들의 장엄한 연주가 정훈이 발걸음을 멈춤과 함께 잦아들었다. 화귀비는 황족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꼿꼿이 앉아 미소를 잃지 않고 여느 때처럼 고상한 체를 하고 있었으나 좀 전의 일로 속이 문드러지는 중이었다.
내가 저를 어찌 키웠는데, 감히.
귀비는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화씨가 아닌 계집을 황후로 앉히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입속을 세게 씹었다.
귀비에게서 머지않은 의자에 자리한 정국은 무던하게 즉위식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황자일지라도 황궁의 군대가 아닌, 개인적인 사병은 단 한 명도 들일 수 없다는 엄포에 지민은 대명전 밖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이 지겨운 행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벌써부터 황자님을 황궁의 외부인 취급하는구나.
지민은 자신이 뜰 밖으로 끌려 나가야 했던 수치는 생각도 않고 오직 제가 보필하는 귀한 황자님이 이따위 대우를 받는 것에 통렬한 분노를 느꼈다. 선황은 어찌 마지막까지 제 감정에만 복종하는 자였는지, 어째서 정국에게 단 한 번도 따뜻하질 못했는지 곱씹을수록 그 원망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기분이었다.
핏줄이 나올 만치 주먹을 꼭 쥔 지민의 뒤로 웬 키 큰 사내가 장난스러워 보이는 미소를 띠었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그는 한 걸음쯤 뒤에서 멈춰섰다.
“오랜만일세.”
“웬 놈....., 태형님?”
제게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집중하고 있다 오랜만이라는 낮은 음성과 동시에 몸을 빠르게 돌린 지민의 눈이 커졌다.
“와- 궁에 발걸음 안 한 지 오래되었다고 이제는 웬 놈이라는 건가?”
큰 눈을 가늘게 뜨며 지민을 놀리는 잘생긴 사내, 태형은 선황의 여동생 즉 공주의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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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과 정국에게 유일한 사촌 형제였으며 몇 안 되는 종친으로서 정국 외에 귀비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고 있는 자이기도 했다.
어릴 때는 황자와 친하게 지내도록 하라는 황후의 말에 어머니와 함께 황궁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지만 -그렇다고 황자들과 그리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고 황궁 내 유일하게 정을 준 사람은 지민뿐이었다. 정훈은 그냥 싫고, 정국은 별 반응이 없어 재미가 없다나- 눈치가 빠른 탓에 열세 살 즈음부터는 궁에 좀처럼 발걸음을 하지 않았더랬다.
“폐하의 장례 때도 도통 보이질 않으시더니...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얼굴을 보아하니 잘 지내신 것 같기는 하다만.”
“나야 달 따라가는 나그네나 다름없으니 뭔 근심이 있을까. 자네는 요즘 근심이 많을 듯싶은데.”
지민은 말도 마라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형이 코를 찡그리고 웃으며 지민의 숱 많은 머리를 헝클이듯 쓰다듬어주었다.
“황궁에 오는 거, 숨 막히는 것 같아 싫었는데 그래도 이리 오래된 벗을 보니 좋긴 하네.”
옅게 미소를 짓는 태형의 눈에 순간 그가 겪어야 했던 아픔이 서렸다. 어쩌면 그는 저에게 줄 한 번 대보려는 자들, 귀비와 그 집안의 날선 시선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한 곳에 발붙이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도는 것일지도 몰랐다.
난 그런 거 전혀 관심 없는데도 말이야. 그냥 좀 내버려 뒀으면 좋으련만.
지민에게도 전하지 못한 속마음이 그의 입안을 맴돌았다.
“헌데 안 들어가 보셔도 됩니까.”
“구태여 내가 저기서 자리까지 차지할 필요가 뭐 있나? 방명록에 이름도 남겼겠다, 선물도 무사히 진상했겠다, 게다가 지민, 자네도 이리 만났으니 내 할 일은 다 한 거 같은데. 자네 주인 덕에 자주 보지는 못하겠지만 언제 한 번 술이나 찐-하게 한 잔하지.”
“저랑 술 마시려면 황자님도 같이 있어야 할 텐데요.”
“그럼 오랜만에 황자님이랑 합석도 좋고. 그 재미없는 성정은 그대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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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질 분이었으면 아마 진작 달라지셨겠지요. 곁을 지키면서 단 한 번도 뭔가 다른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지민은 환멸스럽다는 듯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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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축드립니다, 폐하.”
“폐하, 소신이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즉위식이 끝난 밤, 뜰의 중앙에서는 큰 무대 위에서 음악과 함께 무희들의 공연이 끊이질 않았고 정훈이 받는 술잔 또한 끊이지 않았다. 정훈이 황제가 된 마당에 너도나도 화씨와 정훈의 눈에 들고자 함이라.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며 무대를 즐기거나 하늘을 수놓는 폭죽 따위를 구경하는 사람은 몇 없었고 그 몇 없는 사람 중 한 명이 정국이었다. 기다리고 있는 지민을 생각해서 웬만하면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 내일 해가 밝자마자 마련된 사저로 향할 생각이었는데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제발 파할 때까지 자리를 지키시라는 지민과 남준의 당부에 별 흥미도 없는 무희들의 춤을 보면서 시간을 때웠다. 곧 춤에도 관심이 시들해지자 정국은 어울리지 않게 술잔에 꽃잎을 띄워 살짝 흔들면서 어린아이 같은 장난을 했다. 좌승상이 다가온 건 그 때였다.
“황자님. 소신이 황자님께 술 한 잔 올려도 되겠습니까.”
“... 좌승상?”
“허허, 알아봐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내가 좌승상도 못 알아볼까. 그대가 어떤 자인데.”
민시흥은 잠시 숨을 멈췄다.
왜인지 뼈 있는 말을 한 기분인데.
그러나 곧 예쁘게 웃어 보이는 정국에 그는 마음을 놓았다. 그래, 이는 내가 과민한 탓이다. 저 자가 알 턱이 있나.
정국의 미소에 좌승상은 따라서 껄껄 웃어넘겼다.
“헌데 많이 섭섭하시겠습니다. 내일이면 집이었던 이 황궁을 떠나셔야 하니... 하물며 모친인 태후께서도 이곳에 계신데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십니까.”
허허 웃던 좌승상이 짐짓 진심으로 마음이 아프다는 듯 낮게 깔린 목소리로 조근 거렸다.
위험한 발언이었다.
꼬아서 듣는다면 충분히 황자에게 황궁을 떠나지 말라 설득하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 엄연히 황제가 있기에 그렇지 않은 황자는 사저로 가야 함이 법도에 맞는 것임에도.
좌승상의 의도를 꿰뚫고 있던 정국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묘하게 입매를 끌어올렸다. 지금쯤이면 접근할 줄 알았지. 돌아가는 형국을 보고 꽤 안달이 났을 테니.
물기 어린 입술에서는 웃음이 지워지고, 정국은 슬픈 듯 술잔을 들어 눈을 내리깔고서 그 술을 응시했다.
술을 응시한다기보다는 술에 비친 좌승상의 반응을 보고 있는 것이었지만.
“어머니를 홀로 두고 가야 한다 생각하니 이 술조차 쉬이 넘어가질 않네. 가뜩이나 외로움을 지고 계신 분이라.”
“저런...”
“문안 인사를 올리러 황궁에 오는 것도 좀처럼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그렇지요. 허면... 이 황궁을 떠나지 않을 방도가 있다면 따르시겠습니까.”
좌승상이 눈빛이 달라졌다.
아, 이제야 본론인가. 정국은 술잔을 내려놓고 좌승상의 달라진 눈빛을 그대로 마주 보았다.
“황위를 계승 받지 못한 황자가 황궁을 떠나지 않을 방도라... 즉위식에서 반역을 논하다니 꽤 대담한 구석이 있소, 좌승상은.”
“그만큼 황자님을 믿고 충성하고 있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혹여 제가 배반할까 염려하시는 거라면 이 자리에서 반란의 명부에 서명이라도 해드리겠나이다.”
오랜 세월 정계에 몸담았던 노련함인 듯 좌승상이 사람 좋은 미소로 구렁이처럼 넘어가려던 참이었다.
“예? 유월을 말씀이십니까?”
유난히 목청이 좋은 대신 하나가 술이 살짝 들어간 붉은 얼굴로 정훈에게 되물었다.
안 그래도 목소리가 큰 양반이 술이 들어가더니 더 커졌군. 정훈의 자리에서 꽤나 멀리 떨어져 있던 좌승상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정훈이 있는 곳을 올려다보았다. 정국 역시 들은 양인지 술을 한 모금 들이키며 계단 위로 뚫을 듯 집요한 시선을 보냈다.
정훈의 새로운 내관이 음악을 그만두라는 신호를 보내자 이내 주위가 삽시간에 조용해지며 모든 이의 시선이 정훈에게 꽂혔다.
“내 그대들에게 친히 할 말이 있다.”
“하명하십시오, 폐하.”
“내일 미시(*13시~15시)에 짐은 유월로 행차를 할 것이다. 마땅한 채비를 하고 유월에는 나를 맞을 준비를 하라고 전갈을 넣도록 하라.”
정국은 예상 밖의 발언에 입에서 술잔을 떼어냈다. 갑자기 유월이라니. 외교는커녕 제 나라에도 관심 한 톨 없던 위인이. 국경에 직접 갔다고 하더니 거기서 다른 꽃이라도 본 겐가. 직접 다시 발걸음을 할 만큼 놓치고 싶지 않은.
하긴 워낙 이상한 데에 갑작스럽게 꽂히는 사람이니 뭐에 홀렸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래 봤자 별 가치 없는 것이겠지, 늘 그랬듯이. 정국이 신경 쓰이는 건 정훈을 이끈 존재가 무엇인가가 아니었다. 이 모든 게 제 계산에 들어가지 않은 변수라는 것. 그게 가장 거슬렸다. 그러나 심기가 불편해진 정국의 귀에는 또다시 생각지 않았던 소리가 달려들었다. 마치 멱살을 잡아채는 것처럼.
“그리고 2황자 전정국은,”
“나와 동행한다.”
아, 이런.
정말로 계획에 차질이 생기겠는데.
**
“설화국 황제가 예까지 온단 말이냐?”
호석의 보고를 듣던 황녀의 하얀 미간이 좁혀졌다. 설화 황제의 행차라니, 갑자기 무슨...
“무슨 속내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일 중으로는 도착할 성 싶으니 환대를 부탁한다고 전갈을 보냈다 합니다.”
“즉위하자마자 하는 일이 우리나라를 찾는 거라는 게, 좀 의심스럽습니다. 그동안 설화와의 외교에서는 늘 우리가 을이었으니 황제임을 인정받으러 오는 것은 절대 아닐 터인데....”
조금 꺼림칙하다는 석진의 말에 황녀는 역시 비슷한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동안 설화와의 관계는 뭐랄까, 다 잡아 놓은 쥐를 귀찮아서 내버려 두는 고양이? 딱 그 정도였다. 굳이 유월을 침략하지 않아도 설화는 땅덩이도 넓었고 부족함이 없는 나라였으니까. 게다가 유월은 본디 평화로움을 지향했던 지라 구태여 설화에 반항하는 거라곤 한 점 없었으며 교류를 목적으로 조공 책봉 관계를 맺은 지 오래였다.
그런데 갑자기 왜? 막 즉위한 황제의 첫 행보는 모두가 주시하는 부분이다. 그리 중요한 움직임을, 왜 하필 그들의 입장에서는 하등 볼일 없는 유월 행차로 선택한 걸까. 뭔가 거래할 게 생겼나? 그런 건 아마 없을 터인데. 곰곰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석진도 황녀와 비슷한 처지인지 가지런한 눈썹이 비스듬해지도록 눈가를 살풋 찡그렸다.
“혹 적월초에 관한 얘기를 들은 걸까? 선황과 다르게 그 일을 해결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였으면 좋겠는데.”
“그런 거였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황제가 된 1황자라는 사람, 길거리 시정잡배만도 못한 양아치라 들었습니다. 폭군도 그런 폭군이 따로 없다고. 그런 일을 기대할 위인이 못 됩니다.”
“아 맞다. 저번에도 호석이 네가 그리 말해줬었지....”
황녀는 협탁 위에 올려놓은 붉은 꽃을 시무룩하게 쳐다보았다. 그때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던 사내에게 받아 온 그 꽃이었다. 작은 물병에 옮겨 놓고 정성껏 돌보긴 했는데 식물 키우는 데는 별 소질이 없는 모양인지 어째 날이 갈수록 시들어가는 통에 근심이 컸다.
저 꽃이 죽으면 다른 적월초를 구할 때까지는 해독약을 연구하기 힘든데... 태의에게도 짐작 가는 게 없냐고 여러 번 물어보고 약학 서적까지 있는 대로 뒤졌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적월초 밭의 지분은 설화가 9할이 넘게 가지고 있다 하니 설화에서 힘을 합쳐주지 않으면 황녀 혼자만의 힘으로는 무리일 것임이 뻔했다.
이래서 아바마마께서 그 일에서 손 떼라고 하신 거구나. 그래도 나까지 외면한다면 저이들은 누구의 보호를 받는단 말인가. 나는, 나는 아바마마와 달라. 그들을 힘들게 하는 귀족들과도, 황족들과도 다르다. 버려두지 않아, 절대로.
희고 작은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헌데 무려 설화의 황제가 직접 행차하는 건데 아무 준비 없이 괜찮을까요? 끌어도 모레쯤에는 축하 연회가 있어야 하는데 이틀 준비로는 턱없이 부족할 테니...”
호석이 걱정스러운 듯 손가락으로 제 턱을 만지작거렸다.
“하는 수 없지. 마련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준비하는 수밖에. 괜히 외교 문제로 번지면 머리 아프니까.”
“그럼 이번에는... 나 나가도 되는 걸까요?”
손가락을 꼼질거리던 황녀가 기대 반 긴장 반으로 석진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어릴 적보다야 제약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국가적 행사에는 얼굴을 내비치지 못했다. 기껏해야 탄신 축하연 정도에나 참석했으니까. 허나 이번은 설화국 황제가 직접 찾아오는 것이므로 유월의 공주로서 어떻게든 인사는 올려야 했다.
“폐하도 이번에는 허락하실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오, 그럼 타국 사람들 앞에 처음으로 서시는 거 아닙니까!”
호석이 제 일인 양 신나서 특유의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황녀는 조금 수줍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설경(*설화국 수도)에서 미시에 출발했다면 빨라도 내일 유시(*17시~19시)에 도착할 성 싶으니 오늘은 그냥 쉬세요. 제가 연회 전에 마마를 한 번 더 찾아오겠습니다.”
“으응, 그래요.”
유월이 워낙 영토가 작은 나라인데다 설경은 유월과 아주 가까이, 즉 설화의 극남에 위치한 큰 도시였던 덕에 하루하고도 반나절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회 전 황녀를 찾아오겠다고 한 석진은 그 말간 얼굴을 향해 어렴풋이 미소를 띠면서도 왜인지 불안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공주를 못 믿는 건 전혀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잘 해내겠지. 헌데 꼭 누가 제 옷깃을 급하게 부여잡는 것처럼 공주를 이리 노출시켜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그의 머리를 스쳤다.
나만 이 여인을 알고 싶다는 필부의 욕심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큰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외면하고픈 감각. 그는 곧 배시시 웃는 황녀의 웃음으로 찝찝한 감각을 지워내 버렸다. 그냥 요즘 생각이 많은 탓에 피곤해서 그런 거려니 하면서.
敵國의 皇后
정훈과 정국, 웬만한 고위급 대신들과 많은 궁인들까지 떠난 황궁은 지나치리만큼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폭풍전야가 이런 것이려나.
남준은 운혜궁 정자 옆 연못을 천천히 서성이며 곧 터질 폭탄을 안은 잠잠함을 즐겼다. 예상치 못했던 정국의 유월 행으로 거사가 예정보다 늦춰질지 빨라질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나 그는 그다지 조급해하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던 필요한 거의 모든 패를 손에 쥐었으니 길 잃은 것들은 차차 순리대로 돌아가리라. 굳이 마음 졸일 필요야 없을 테지. 다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는데.
“이런, 직학사 아니신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호랑이가 아니라 늙은 능구렁이가 찾아왔군.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만으로 그 소리의 주인을 알아챈 남준은 무표정했던 얼굴에 곧 보조개 핀 웃음을 띠며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나 제게 접근하지 않을까봐 걱정했던 순간이 무색해질 정도로 좌승상은 남준의 예상을 벗어나질 않았다.
“좌승상을 뵙습니다. 어찌 유월에는 가지 않으시고.”
“누군가는 황궁을 지켜야지. 허허.”
“그렇지요. 누가 황궁을 노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니.”
바로 당신 같은 사람 말이야.
뒷말을 속으로 삼킨 남준은 뻔뻔하게 웃고 있는 주름진 낯짝에 환멸을 느꼈다. 황자님께 접근하는 그 속내를 모를 줄 알고. 뭐, 숨기려는 노력 자체를 안 하는 것 같긴 하다만. 어찌 되었든 남준은 하루빨리 저 뱀 같은 노인네와 손을 잡아야 했다. 제 개인적 감정과는 별개로 지금으로서는 필요한 쪽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사실을 무시하고 적개심을 내보일 만큼 남준은 멍청한 패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o:p>〈/o:p>
이미 며칠 전 정국과의 담소에서, 민씨와 손을 잡고 얻게 될 이익과 외면했을 때의 결과를 저울질한 후였던 남준은 넓은 소매 안에서 길고 큰 손을 내밀었다. 이 불편한 동맹은 정국의 명이었고, 제 판단이기도 했다.
“그리고 저는 그게 불꽃이라고 생각하는데... 좌승상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
“곧 화염이 황궁을 잡아먹으려 할 것입니다. 그 전에, 미리 손을 잡아두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화씨들을 저격한 발언이다. 좌승상은 생각보다 적극적인 직학사의 태도에 쾌재를 부르며 손을 맞잡았다. 황자 쪽에서 스스로 움직여주니 수월하다 생각하면서.
“내 생각보다 말이 더 잘 통하는군. 바라던 바일세.”
... 좌승상과 직학사가 한배를 탔다라. 황제도 황자도 없다기에 태후께 인사나 올리러 와봤더니, 꽤 재밌는 구경을 하네.
어제 태후에게 문안 인사를 하지 못했던 태형은 신경이 쓰여 오늘 다시 입궁을 했던 참이었다. 지금은 태후가 된 정국의 어머니는 태형에게 제 아들인 양 따뜻하게 대했고 태형도 그에 대해서 감사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몇 년 만일지라도 얼굴이나 비치는 게 도리겠다 생각하고 와 본 것이었는데, 이런 장면을 맞닥뜨리다니.
태형은 그동안 전국 곳곳을 여행하며 길렀던 솜씨로 눈에 띠지 않고 조용히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 몸을 숨긴 상태였다. 지금 들켰다간 골치 아픈 일에 말려들 것이 뻔했다.
뜻밖에 목격한 밀회에 놀란 마음도 잠시, 태형은 예리한 눈으로 두 사람을 살폈다. 한쪽은 좌승상이고 다른 한 쪽은 멀리서 보아도 정국의 스승이라는 김남준, 그 자가 분명한 듯 보였다. 자신과 먼 친척 사이였지만 이름이나 간단한 외모 묘사만 들어봤지 가까이서 본 적은 없었는데 이리 보니 예사 사내와는 다른 게 티가 났다. 눈에 띄게 훤칠한 모습과 까무잡잡하면서도 반반한 얼굴, 굽힘 없는 견고한 태도에 위압감이 있었다.
2황자의 최측근인 김남준이 민씨와 손을 잡았다는 것은 곧 2황자가 민씨와 힘을 모으겠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곧 저들이 황제와 화씨를 몰아내겠다는 게로군. 〈o:p>〈/o:p>
명석한 머리와 눈치로 빠르게 상황 판단을 내린 태형은 붉은 혀로 입술을 한 번 축인 뒤 한 쪽 입매를 끌어올려 비스듬한 웃음을 지었다.
곧 황궁에 피바람이 불겠구나.
늘 조용히 관망만 하던 태형의 신념에도 바람이 한차례 불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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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백. 유월에 황족, 귀족의 여식들은 정실부인 소생이건 첩의 소생이건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연회에 참석케 하라고 전했느냐.”
“예, 폐하. 말씀하신 대로 최대한 공손히 전했사온데 유월은 작은 나라인지라 큰 행사가 있으면 황족과 귀족들은 모두 참석하는 편이라 하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정훈은 덜컹거리는 호화스러운 마차 안에 거만하게 앉아서는 만족스러운 듯이 제 턱을 쓸었다. 분명 그 여인은 여염집 아낙이 아니었다. 반드시 연회에서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첫 만남에 조금 더 자세히 어느 댁 규수인지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정훈이 그리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본인의 재미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과하게 경계하게 만들어버리면 놓치기 십상이니까. 토끼나 사슴 따위를 사냥할 때도 천천히 다가가 숨통을 잡아채야 하듯이.
되도록 빠른 길로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 넘게 달려온 행렬은 유월의 황궁으로 아주 손쉽게 들어갔다. 유월국 황제가 직접 맞이하지는 않았으나 수많은 궁인들이 성심성의껏 설화에서 온 귀하신 이방인들을 환대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석찬에서 인사를 나누자는 유월국 황제의 제안에 정훈은 별 항의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차피 제 목표는 유월과 잘 지내보려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이 다였으니.
그가 여인을 제외하고 한 가지 더 신경 쓰는 것이 있다면 정국의 행보였다. 사저로 가야 했을 정국을 예까지 동행시킨 것은 제가 없는 설화에 정국을 남겨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고양이에게 어물전을 맡기는 꼴이 아닌가. 물론 제 어머니와 몇 명의 화씨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서 황궁에 눌어붙어 있겠지만 정훈은 속내를 알기 힘든 정국을 심하다 싶이 경계했다.
저놈은 어릴 때부터도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게 무심한 표정으로 유월의 황궁을 보고 있는 정국을 보자니 정훈은 또다시 속이 뒤집히는 기분을 느꼈다.
“내시백!”
“예, 예에. 폐하.”
“여기 궁인들에게 내 처소와 저놈의 처소를 최대한 멀리 마련하고 여기 있을 동안 2황자의 행동을 계속 감시하라 일러라.”
“하오나, 폐하. 타국 사람들에게 어찌 황자님의... 화, 황명을 받잡겠사옵니다.”
정훈의 서슬 퍼런 눈빛에 기가 죽은 내시백은 정국의 눈치를 보며 허리를 숙였다. 제 선임이었던 내관의 머리가 뎅강 날아가 버린 걸 모르지 않았으니 몸을 사릴 수밖에. 저에겐 아직 먹여 살릴 어머니와 누이가 있는걸.
정훈의 짜증 서린 명령이 다 들렸을 텐데도 별 생각 없는 듯 내시백의 조아려진 몸을 내려다보던 정국은 총총걸음으로 다가온 유월 궁녀의 안내를 받아 황궁 제일 안쪽을 향했다. 걸음걸음에는 어떤 망설임도, 불쾌함이 묻은 분노도 없었다. 그냥 모든 일에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다.
무표정으로 정국의 곁에 있던 지민은 시야에서 정훈이 사라지자 작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타국에 와서까지 황자님을 욕보이려고 환장했군. 지민은 언젠가 내가 저 자식 숨통을 끊어놓고 말리라 생각하며 칼집을 세게 쥐었다.
“여기, 황자님께서 지내실 처소입니다.”
“고맙구나.”
빠르게 고개를 숙여 들키지는 않았으나 어린 항아는 제 뺨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어린 항아여도 설화의 황자가 얼마나 높은 신분인지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제게 고맙다는 말을 하다니. 설화인들은 다 거만할 것이라 생각했던 스스로가 바보 같다 느껴질 만큼 정국은 ‘고맙구나’라고 담백하게 말했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얼굴 속 표정은 무심했지만,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워 귓전을 맴돌았다. 그냥 이 분이 황제가 되셨다면 좋았을 것을.
정훈이 알았다면 노발대발하며 죽음을 면치 못했을 생각을 한 항아는 곧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돌아갔다.
“설화의 황궁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구나.”
“유월은 본디 아담하고 평화로운 나라가 아닙니까. 황궁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정국은 상궁과 궁녀들이 급히 달려와 문을 열어주자 궁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는 듯싶더니 문 앞에 덜컥 멈춰 섰다. 가만히 서 있는 정국에 눈치를 보다 살짝 방의 내부를 본 상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급하게 정훈이 묵을 곳과 가장 먼 곳으로 지정한 것인데 이렇게 엉망일 줄이야. 갑작스러운 명령 때문에 아직 채 정리가 안 된 궁은 몇 년은 방치된 상태로 보였다. 감히 설화국 선황의 적장자인 황자님을 이리 푸대접했으니 어떤 벌이 내려질지 엄두도 나지 않았다. 상궁과 궁녀들이 당혹스러워 정국과 지민의 눈치를 살피자 정국은 잠시 가만히 있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잠시 밖에서 황궁 구경이라도 하고 있을 테니 천천히 정리하도록 해라. 피곤하니 되도록 자시(*23시~1시) 전에는 끝내 주면 좋고.”
“예? 아, 예에. 물론입니다, 황자님.”
불호령이 떨어지거나 운이 나쁘면 매라도 맞게 될 줄 알았던 궁녀들은 얼어붙었던 정신을 되찾고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대답을 듣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궁을 나선 정국에 대고 저마다 저런 분은 난생처음 본다며 수다스러워진 탓에 청소는 좀 더뎠지만.
“아무리 설화 황궁과 비할 바 없이 작다지만 여기도 황궁인데 길이라도 잃으시면 어쩌려고 하십니까.”
무턱대고 정해진 숙소를 나와 버린 정국을 따라서 나온 지민이 툴툴거렸다.
“글쎄. 저기, 내 길잡이 해 줄 사람 한 명은 있지 않겠느냐.”
“어디... 아,”
정국의 손끝을 따라간 지민의 눈에 불그스름한 노을 아래로 같은 빛의 등불을 켜고 있는 궁이 맺혔다. 아까 그곳보다는 크고 사람도 많을 것 같은데. 저 정도면 환관 한 명쯤 잠시 빼달라고 해도 양해를 해 주겠군.
“잠시 여기서 기다려 보십시오. 제가 가서 말을, 아잇 증말!”
지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국의 발길은 이미 노을을 담은 궁을 향하고 있었다. 씩씩거리며 심통 난 지민은 안중에도 없는 듯 그는 시원한 걸음걸이로 직진했다. 원래는 이리 적극적으로 황궁 나들이 따위를 할 위인이 아니었으나 정국은 왜인지 저 궁을 꼭 가야 할 것 같았다. 타국 황궁을 처음 와본 것도 아니니 호기심도 아니었고, 먼 곳까지 쉬지 않고 말을 달려서 피곤했으니 기분이 좋아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정말 그냥 단순히 그의 직감이 저 궁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아무도 없는 뒷문을 넘어 꽤나 가까이 다다라서 ‘은청궁’이라 적힌 궁의 현판을 읽을 수 있었을 때쯤에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 하늘이 푸르스름한 먹색으로 오묘한 빛을 띠었다.
숨을 은에 맑을 청이라. 어떤 맑음을 숨겨놓았길래 궁 이름을 저리 지었을까.
“황자님. 이리 서 계실 것이 아니라 누구든 불러내야 하지 않을까요? 남의 침소일지도 모르는데 이리 들어와도 되는 건지...”
현판의 정갈한 글씨에 눈길을 주었던 정국은 곧 주위를 둘러보았다. 궁 뜰에 있어야 할 별감이라든지 하물며 문 앞에 환관들이나 그 흔한 궁녀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설화국 황제가 행차했다 하니 부족한 일손이라도 도우러 간 모양이었다.
하여간 민폐는.
안하무인인 정훈을 떠올리자 정국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이 궁 주인께서는 벌써 주무시는 듯싶구나. 그만 나가야,”
정국이 하던 말을 멈추었다.
뒤에서 누군가 바스락거리는 인기척이 났는데.
작은 산짐승 소리 같기도 한 그것을 지민도 들은 양인지 조용히 칼집에 손을 올렸다. 정국은 제 겉옷의 옷고름을 살짝 풀어 품속에서 단검을 빼들었다. 살수인가. 이리 허술한 놈을 보내다니. 여러모로 실망이네.
또다시 누군가 작게 숨을 참는 소리가 났다. 그냥 뒤가 아니라 살짝 위. 여기서 위라면.
“누구냐.”
뒤돌아선 정국의 칼끝이 가리키는 곳은 은청궁 뜰의 큰 벚나무 위였다.
“여자...?”
당황한 지민이 제가 잘못 본 줄 알고 눈을 가늘게 떴으나 바뀌는 건 없었다.
분명 여잔데. 것도 흰 비단옷까지 입은.
“누구이관대 주인 없는 궁에서 월담을 시도하는 것이지?”
바람이 슬며시 불어와 흰 옷자락이 날리는 채로 굵은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있는 여자, 그러니까 황녀는 몹시 당황해서 월담도 아니거니와 이 궁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정국과 지민의 손에 쥐어진 달빛을 담은 칼날만 보일 뿐.
저 사람은 누구길래 내 처소에 들어와서 칼을 들이미는 거야, 무섭게.
“그, 그 칼부터 좀 치워 주십시오.”
“내가 그대를 어찌 믿고.”
“저는 이렇게 두 손 다 나무를 잡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애초에 이 궁은 제가,”
“공주 마마!”
공주?
왼쪽에서 들리는 젊은 사내의 목소리에 정국이 옆을 보았다. 달려오고 있는 호석을 본 황녀는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몸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나무에서 내려가야 하는데 다리가 후들거려서 내려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높이도 더 높게 느껴진다. 올라올 땐 어떻게 올라왔던 거람.
“공주 마마께 이 무슨 무엄한,”
굳은 얼굴로 지민과 정국을 훑어보던 호석은 말을 멈췄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저 자는...
호석이 멈칫하는 사이 정국이 조용히 단도를 집어넣자 지민 역시 도로 검을 거두었다. 두 사람 다 황녀가 위험한 인물은 아니라고 판단했던 탓이다. 그나저나 숨겨둔 맑음이 비밀에 싸인 공주였다라... 그건 좀 흥미로운 일이었다.
“공주이신 줄 모르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오늘 막 설화에서 도착했던지라.”
호석이 곧 정신을 차리고 황녀를 안아 내렸고 작은 두 발이 땅에 닿자마자 지민이 한 쪽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여 그 인사를 받은 황녀는 그대로 멀뚱히 서 있는 헌헌장부에게 눈길을 주었다.
“설화국의 황자님을 뵙습니다.”
??
이 사람이 황자라고?
지민과 마찬가지로 무릎을 굽힌 호석을 보는 동그란 눈에 물음표가 가득 찼다. 어쩐지, 풍채와 기운이 남다르긴 했지만...
“내 얼굴은 어찌 아는 것이지.”
“2년 전, 제현국과 있었던 인헌강 전투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 아.
정국은 기억났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2년 전의 전투는 유월이 적은 군사나마 설화에 지원했던 전투였고, 호석은 그 지원부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호석이를 위험천만한 곳에 보낼 수는 없다며 공주가 울고불고 난리였던 전쟁이기도 했다. 전투를 직접 경험해 보고 싶다고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열심히 설득했지만 들을 생각도 않는 공주 때문에, 그녀가 울다 지쳐 잠든 틈을 타 출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호석은 슬며시 웃음이 지어졌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왔던 날, 눈물 범벅된 얼굴로 안겨 놓고서는 진정이 되고 나니 엄청 화를 냈었지. 사랑받는 기분도 들고, 좋았는데.
“미안하게 됐네. 내가 병사들 얼굴은 일일이 기억하지 못해서. 누구였는진 모르겠군.”
“황자님께서는 황자궁 나인들의 얼굴도 여태 모르십니다. 이해하십시오.”
“풉.”
자신은 모르는 대화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공주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해해달라며 담담히 말하는 지민의 말투도, 적당한 환멸과 체념이 섞인 표정도 너무 웃겨서 저도 모르게 터져 버렸다. 사실, 공주는 말로만 들은 2 황자를 막연히 무서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전투에서 선봉장인 무시무시한 전쟁 영웅이라 들어서였다. 당연히 피도 눈물도 없는 전쟁귀에 우락부락한 사내일거라 생각했다만... 지금 보니 몸은 좀 탄탄해 보여도 얼굴은 웬만한 여인보다 예쁘고 눈이 맑았다. 가장 측근인 호위 무사의 무시에도 무덤덤하게 눈만 깜빡거리는 걸 보니 성격도 무던한 편인 것 같... 응? 언제부터 날 보고 있었던 거지?
“내가 나인들 얼굴을 못 외우는 게 그렇게 웃깁니까, 공주.”
“아...그게,”
‘공주’ 라는 말에 강조를 두듯 낮은 목소리를 낸 정국은 안절부절못하는 공주를 감흥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진지하게 책망하려는 뜻은 없었다. 그냥, 지민은 늘 저랬으니 별로 괘씸하지도 않았다만 초면인 공주가 웃는 게 묘하게 얄미웠달까.
“공주께선 제가 영 탐탁지 않으신가 봅니다. 나무 위에서 노리시질 않나, 면 전에서 비웃으시질 않나.”
성격 무던한 것 같다는 말 취소다. 공주는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고 있었고 울고 싶었다. 설화국 황자한테 찍히다니 제대로 망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나저나 나무 위에서 노린 것도 아니었고 웃은 건 저 호위 무사가 웃겨서 웃은 건데, 정말이지 이리 억울할 데가 있나. 그래도 해명은... 해야겠지.
“ㄱ,그것이..! 그게... 우선 저는 황자님을 노린 게 아닙니다...”
“아니면?”
잔뜩 시무룩해져서는 웅얼웅얼 대는 공주에 정국은 고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이건 호석이나 지민도 궁금한 바였는지 세 사내의 시선이 모두 공주의 삐죽대는 입술로 향했다.
“설화에서 행렬이 왔다는데 아바마마께서 저는 내일 있을 연회에나 잠깐 참석하라 명하시는 바람에... 헌데 타국 사람들이 이리 많이 오는 것이 처음이라 궁금해서...”
“공주 신분으로, 타국의 행렬이 궁금해서 나무에 올랐다?”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이 섞인 물음에 할 말이 없는 황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잠깐 호석이가 다른 데 다녀오는 사이에 빨리 보고 바로 내려올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 생각지도 않았던 공주는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은 호석의 눈치만 볼 따름이었다.
“아아, 그리고 비웃은 것도 아닙니다. 황자님의 호위 무사가 웃겨서 웃은 것인데... 진짜에요,믿어주세요. 기분이 나쁘셨다면 송구합니다...”
공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했는지 어느새 뽀얗던 눈가가 붉어져 울망울망했다.
아, 장난이 너무 심했나. 궁에 갇혀 살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순진할 거라곤 예상 못했던 정국은 지금 본인이 도리어 곤혹스러웠다. 여인의 울음에는 면역이 없단 말이다. 옆에 서 있는 호석은 공주가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서 이를 어째야 하나 싶었다. 저 얼굴 다음에는 필시 눈물이 떨어질,
“흐으, 그르니까 주기지 마세여 킁...”
그럼 그렇지. 제 예상대로 착실히 진행된 울음에 호석은 한숨을 쉬었고 지민은 이 상황이 마냥 웃겨서 이를 꽉 물었다. 공주의 목소리는 얕은 울음에 묻혀 발음도 정확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국은, 살면서 지금이 가장 곤란했다.
나 못 해 본 것뚜 너무 많은데...! 이제 스무살잉데...! 아직 고백도 못 했는데 이렇게 주글 수는 없다구요 엉엉.
얼마나 억울했으면 울먹거리면서도 뱁새 부리 같은 입은 쉬질 않았다. 귀엽지만 어이없었다. 아니, 내가 왈패도 아니고 어디 산적도 아닌데 남의 나라 공주를 무턱대고 죽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대체 나에 대해 무슨 얘기를 들었길래...
뭐 일단 그건 나중에 묻기로 하고, 우선은 공주를 달래는 게 먼저일 것 같아 정국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 왜, 왜 울고 그럽니까. 울지 마요. 내가 잘못했어요.”
“크흥... 안 주기실 거예여..?”
“안 죽여요. 손 하나 안 델 거니까 울지 마요.”
다정한 말투에 그제야 안심이 된 건지 몇 번 숨을 몰아쉬더니 하얀 손이 얼굴에 낭자한 눈물을 훔쳐냈다.
“뭐, 저도 잘못했고 황자님께서도 함부로 궁에 들어오신 거는 맞으니까... 피차 잘못한 걸로 하지요.”
좀 전까지 죽이지 말라면서 울더니 이제는 또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주제에 새침하게 피차 잘못한 것으로 하잔다. 진짜 이상한 여자야.
정국은 피식 입매가 올라가더니 살풋 눈을 감고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잘잘못은 모르겠고 그냥 울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 정말 당혹스러웠으니까.
“그럼 오해도 풀리셨으니 저흰 이만.”
괜히 공주에게 겁을 줘 울려버린 게 조금 심기에 거슬렸던지 호석은 공주를 데리고 들어가려 했다. 그걸 막은 건 지민이었다.
“저희가 허락 없이 침소에 들어온 건 죄송하지만 그건 황자님의 처소가 여태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서입니다. 도저히 안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요.”
“?”
“그래서 황자님이 밖에서 계속 기다리셔야 하는데, 제대로 화해하실 겸 그 사이에 궁 구경이라도 시켜주시지요. 공주께서, 직접.”
지민이 싱긋 웃어 보이자 호석의 표정은 더 굳어졌다. 얼굴에 ‘그걸 왜 우리 공주님이 하셔야 하냐’라는 글씨가 적혀 있는 것 같았다. 정국, 호석, 그리고 말을 꺼낸 지민까지도 그녀가 거절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공주는 말을 듣자마자 당당하게 앞장을 섰다. 정국이 길을 잃은 게 – 사실 길을 잃은 건 아니었지만 공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 유월 측 궁인들이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탓이니 제가 만회해 보겠다는 깜찍한 생각이었다.
“따라오시지요.”
눈물 자국이 선연한 얼굴로 내뱉는 도도한 말투는 이질적이고, 동시에 사랑스러웠다.
공주가 궐내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라는 궁정 호수에 가는 동안 말을 하는 건 공주 하나였다. 종종 지민이 대꾸를 해주기도 했으나 공주 혼자 쫑알거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겁먹어서 울기까지 했던 주제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니 뒤늦게 신이 나기라도 한 건지 해맑고 친근하게 조잘댄다. 호석은 좀처럼 신경이 쓰였다. 저는 익숙해서 오히려 저 짹짹거림을 듣는 게 즐겁지만 정국이 영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였다. 공주 마마, 저 사람 지금 하나도 안 듣고 있는 것 같은데요...
무료한 얼굴로 간혹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하는 정국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다는 것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예쁘지 않습니까?”
좋아하는 곳이라더니 자랑하고 싶었는지 ‘예쁘다고 해줘!’ 라는 말이 두 눈에 몽글몽글 맺혀있었다. 다다른 호수는 밤하늘을 온통 담을 듯이 넓고 깊었으며 마침 떠 있는 보름달의 반영이 흰빛으로 반짝였다.
“여기 오면 그래도 마음이 조금 개운해집니다. 덜 답답한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러네요.”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것 같던 정국은 이번엔 제법 진지하게 대답했다. 맑고 커다란 눈동자 안에는 황녀의 눈에 비친 것과 똑같은 달이 담겼다. 고매한 야경을 쓰다듬는 따뜻한 눈빛은 황녀의 시선을 옭아맸다. 소문은 역시 그냥 일개 소문일 뿐인 걸까. 저렇게 다정한 눈을 하는 이가 소문처럼 무섭고 날 선 사람일 수는 없었다.
피의 군주,
괴물,
전쟁귀,
감정이 결여된 자.
그런 수식어들은 저 사람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소문만 듣고 지레 무섭게 생각했던 것이 떠올라 괜히 미안한 마음마저 들 정도였다.
사람은 참으로 간사해. 아까는 그리도 무서웠던 상대가 금세 이리 편하게 느껴지니 말이야. 정국이 다리 위에서 내뱉는 상쾌한 숨과 따뜻한 시선이 제가 이곳을 찾을 때마다 내뿜었던 그것과 같아서, 공주는 동질감을 느꼈다. 저 사람도 궁에 사는 사람이니 제가 느끼는 감정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포함된 동질감이었다.
잠시 정자에 앉아 쉬기로 한 네 사람은 시답잖은 대화를 했다. 주로 요즈음의 관심사를 공유했는데, 특히 공주는 너무도 투명했다. 오늘 공주를 처음 본 정국과 지민도 공주의 주 관심사가 백성들의 안위, 그리고 ‘도련님’이라 불리는 자라는 걸 알아챌 정도였다. 올바른 왕도에 대한 말을 할 때는 눈을 반짝였고, 어쩌다 ‘도련님’ 얘기를 하게 되면 말간 얼굴에 붉은빛이 돌았다. 공주는 원래도 절로 눈이 가는 미인이었지만 제가 사랑하는 것들을 말할 때는 더 아름다웠다. 정국은 무의식적으로 그녀가 말갛다고 생각했다. 뽀얀 얼굴도, 붉어진 뺨도,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도, 저를 보는 눈도, 황궁 여인답지 않은 순한 품성도, 모두 말갰다. 〈o:p>〈/o:p>
황궁의 화려함, 아니면 전쟁터의 황폐한 잿빛. 이 두 가지만 알고 살았던 정국의 이분적 세계에 물밀 듯이 들어오는 청량함은 낯설었다. 파도가 머물다 남겨놓는 조개껍데기처럼, 정국의 머리에는 문득 아까 보았던 현판의 글씨가 떠올랐다. 뭔가 알게 됐다는 듯 붉은 입술이 예쁘게 말려 올라간다.
맞네,
숨겨놓은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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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황자가 유월국 공주와 밀회를 했다는 말이더냐.”
“아, 아니요.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 보였습니다.”
“야밤에 밀회도 아닌데 타국의 공주와 만남을 가졌다.... 그 편이 더 의심스럽구나. 네 생각은 어떠하냐.”
“예?”
“네가 보기엔 황자와 공주가 어떤 사이처럼 보였느냔 말이다. 직접 봤으니 더 잘 알겠지.”
값비싼 금장 노리개를 제 허리춤에 예쁘게 단 나인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고민했다. 그녀는 몇 시진 전, 정훈의 내관으로부터 정국을 감시할 것을 사주받아 네 사람의 밤 산책을 끈질기게 눈으로 좇았더랬다.
황제가 웃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저 웃는 혀가 곧 저를 베는 칼날이 될 수도 목을 옥죄는 올가미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나인은 잘 알았기에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나인 자신의 혀에서도 떨림이 느껴졌다.
황제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가. 여기서 살아나가려면 그것뿐인데. 나는 감당도 못할 일을 왜 하겠다고 해서는! 차라리 내시백이 찾아왔을 때 핑계를 대고 거절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제 허리에서 반짝이는 노리개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저것을 포기할 수 있는가.
글쎄.
대답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나인은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감고 어렵게 목소리를 짜내 대답했다.
“그것이... 처음 대면하시는 것 같기는 했지만 곧 같이 호수에 가신 것으로 봐서는 나쁜 사이 같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호위 무사도 함께 몇 마디 대화하시는 게 오히려 좋은 사이에 가까워 보였사온데....”
두려움에 말끝을 흐리는 나인을 호선을 그리듯 휘어진 눈으로 보던 정훈은 침대에서 일어나 나인이 엎드린 바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걸음으로 느껴지는 진동에 나인은 한껏 몸을 더 움츠렸다. 정훈은 곧 쭈그려 앉아 바닥을 보고 떨고 있는 나인의 턱을 한 손으로 거칠게 잡아챘다. 차마 황제와 눈을 마주할 수 없어 연거푸 고개를 숙이려는 그녀를 정훈은 강한 힘으로 끌어당겼다. 마주친 정훈의 눈은 아주 재밌는 것을 찾았다는 듯 번뜩였다.
“원한다면 네년 허리춤에 있는 노리개 따위보다 더한 것도 줄 수 있다. 그러니 앞으로 계속 내 눈과 귀가 되도록 해라.”
“...”
“그리고, 내가 원할 때 원하는 말을 하는 입도 되어야 할 것이다.”
느릿하게 귀에 대고 소곤거리는 그의 음성이 소름 끼치도록 부드럽게 나인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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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욤 오랜만이에여...ㅎㅎ 연재 간격이 아주 극악이었쥬..? 못난 쓰니는 할 말이 업슴니다...
생각보다 수정할 부분이 장난이 아니어가지구 좀 오래걸린 것도 있고, 사실 제가 종강을 진짜 늦게 했거든여... 비루한 변명이지만 어쨌든 그랬다구여...네...
아 그리고 내용을 구상하다보니 너무 무거울 것 같기도 하고 제가 쓰다가 기빨릴 것 같아가지고(그렇다고 막 느와르 수준의 그런 피폐함은 아니에여 그냥 쓰니가 개복치인 겁니다 조직물 쓰시는 분들 아이 존경 유)
초반에라도 좀 가벼운 분위기를 내보고 싶어서 짤도 좀 넣어보고 했어요
아! 그리고 또 여쭤보고 싶은게 제가 분량이 너무 많은가여..? 조절을 못하겠숴여...항상 노트북으로 쓰다보니 긴 걸 못 느끼는데 모바일로 보니까 좀 심하더라구여.. 여러분 읽다가 중간에 지겨워서 끄시진 않을까 걱정될 수준이었음... 일단 조절하려고 노력은 해보겠는데 장담은 못하겠슴니다..허헣
그럼 다들 크리스마스 잘 보내쉐여!!!햅삐 크리쓰마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