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어제 헤어졌어요.”
여자는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흘린다. 블라우스 소매로 자꾸 눈가를 닦아대니 마스카에 번진 눈물이 판다처럼 돼버렸다. 영호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여자가 고마워서 그런 건지, 취해서 그런 건지 고개를 까딱하고는 받은 손수건으로 코를 푼다. 그거 코 풀라고 준 거 아닙니다. 영호가 인상을 찡그렸다.
여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나 너무 슬퍼서 죽을 거 같아요. 엉엉 울며 테이블에 엎드렸다. 일주일 전 그 새끼 생일이었거든요. 서프라이즈 파티해 주려고 그 전날 집에 몰래 찾아갔는데 웬 남자랑 침대에서…. 그러더니 사실 자기가 게이라는 거 있죠. 영호는 소주 하나를 더 까면서 말했다. 그것참 안됐네요. 근데 저 아세요?
“개새끼야.”
“네?”
“아, 아, 죄송해요. 그쪽 말구요.”
진짜 보면 볼수록 더 진상이네. 영호는 손목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덧 새벽 두 시가 다 되가는데 여자는 스마트폰 화면 속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를 보며 아직도 눈물, 콧물을 질질 짜고 있다. 그쪽 술버릇이 고약해서 게이라고 거짓말 한 건 아닌가? 영호는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고 대신 남은 소주를 들이켰다.
“핸드폰 좀 줘봐요.”
“여기요.”
“비밀 번호는요?”
“몰라. 몰라.”
손을 휘휘 저으며 영호가 찢어놓은 오징어를 질겅거리는 정체 모를 여자. 그냥 버리고 갈까. 영호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첫 번째 플랜, 200m 앞 경찰서로 데리고 간다. 협조적으로 잘 걸어가 줄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만난 지 10분 정도 된 그녀를 위해 자조치종을 설명한다. 두 번째 플랜, 여자의 핸드폰 비밀번호를 알아내서 누군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초면에 스킨십은 사절이지만, 영호는 여자의 손을 잡았다. 스마트폰의 잠금 해제와 동시에 전화 버튼을 눌렀다. 게새끼. 라고 저장해 놓고는 무슨 전화를 스무 번씩이나 하냐. 근데 한 번도 안 받은 걸 보니 게새끼는 패스.
엄마라고 저장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자취 중이고 가족들은 모두 지방에 살아서 서울에 갈 수 없단다. 친구들의 이름을 몇 명 불러주는데 전화번호부에 저장되어 있지를 않다. 남자친구한테 뒤통수 거하게 맞고, 마땅히 연락해 술 마실 친구는 없고, 때마침 편의점 앞에서 혼자 술 마시는 내가 있었고.
안 읽은 메시지 일곱 개. 죄다 대출 광고, 스팸 문자들이다. 마땅히 알아낼 게 없다고 생각하던 찰나,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김여주 님, A 그룹 영업지원부 최종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영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10분 뒤 검은 정장을 입은 또 다른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와 영호는 여주를 부축해 차에 태웠다.
“이 분 어디로 모실까요. 사장님?”
“P 오피스텔 710호. 나는 볼 일이 있어서 따로 가겠습니다.”
“도착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자동차 창문이 올라가고, 여자를 태운 차가 출발했다. 영호는 머릿속으로 여자의 이름을 곱씹었다. 내일 술 깨고 봅시다, 김여주 씨.
* * * * *
오전 6시. 알람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머리는 깨질듯이 아프고, 속은 더럽게 울렁거린다. 어제 회사 끝나고 근처 식당에서 탕 하나를 시킨 다음, 혼자 소주 두 병을 마셨다. 거기까진 정확하게 기억이 나는데, 그리고 멀쩡히 집에 왔던가? 여주는 스마트폰을 집어든다. 그리고 비명을 질렀다.
부재중 전화. 엄마 (10), 언니 (6), 읽지 않은 문자 메시지 (35). 발신자 목록. 게세끼 (20). 나 진짜 미쳤구나? 여주는 자신의 뺨을 몇 번이나 두드렸다. 일단 생존 신고를 위해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채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은 엄마가 소리를 빽 지른다. 야! 김여주! 너 미쳤어?
“안 미쳤고요, 무사히 집에 잘 왔어요. 어제는 내가 너무 취해서…….”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너 회사 잘리게 생겼어!”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여주는 자초지종을 다 듣고 전화를 끊었다. 나 미친 거 맞고, 밤새 그런 일이 있었구나. 기지개를 쭉 펴고 이불을 정리했다. 그리고 커튼을 열자 환한 빛이 쏟아진다. 베란다를 열고 그 앞에 섰다. 콧구멍 가득 차가운 아침 공기를 들이켠다. 음, 그러니까. 나 이제 죽으면 되는 거지?
출근까지 약 두 시간 정도 남았다. 여주는 헛개수 하나를 따 마시고, 서둘러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만약 사장님이 날 해고한다면, 아무 변명하지 않고 제 발로 나가리라. 그 생각 하나로 오피스텔을 나섰다. 전철을 타고 회사에 가까워질수록 여주는 사실 초조해졌다.
이제 돈 좀 벌어서 부모님께 효도하자고 한 게 엊그제 같은데, 되돌릴 수 없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그래서 생각을 바꾼다. 첫 번째, 잘못을 인정하고 싹싹 빈다. 두 번째, 대역죄인이 되어 사과한다. 세 번째, 제발 해고만은 안 된다고 사장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늘어진다.
“대리님, 안녕하세요. 팀장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 여주 씨. 사장님이 출근했으면 바로 오시래요.”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께 뭐 잘못했어? 웬만하면 따로 안 부르는 분인데.”
여주는 대답 대신 억지로 안면 근육을 당겨 웃어 보인다. 손에 헛개수 하나를 챙겨 엘리베이터를 탔다. 회사 한가운데 폭탄이 떨어진다거나, 영화처럼 백두산이 폭발한다거나, 그런 일은... 당연히 없겠지?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영업지원팀 김여주입니다.”
영호는 하던 일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오늘 새벽 그 진상, 아니 김여주씨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인사를 하고 있다. 여주 씨, 여기 앉아요. 영호가 소파를 가리키자 여주는 냉큼 자리에 앉고 테이블 위에 헛개수를 올려놓는다.
“커피 좋아합니까?”
“아뇨, 사장님. 어제는 제가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영호가 커피 머신 작동 버튼을 누르며 물었다. 원두 갈리는 소리인지, 내 멘탈이 갈리는 소리인지. 여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신 머리를 꾸벅이며 사과를 했다. 그래도 제발 해고만은 하지 말아 주세요. 모기만한 목소리로 웅얼거리자 영호가 대답했다.
“이해합니다.”
새벽에 여주를 그렇게 보내고, 영호는 화가 많이 났다. 출근하자마자 바로 징계를 내려야겠다고 생각했을 만큼. 근데 다시 생각해 보니 어느 정도 여주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서울로 상경한지 얼마 안 돼서 외로울 텐데, 그나마 유일하게 믿고 있었던 남자친구는 사실 게이였으니까. 나라도 맨정신에 살기 힘들었을 것 같다. 그래서, 이해한다는 말은 진심이다.
“영업지원팀은 앞으로 회식 자리가 잦을 텐데 그럴 때마다 이런 식이면 곤란합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원래 진짜, 진짜 그런 사람 아닙니다.”
영호는 커피 대신 따뜻한 녹차 한 잔을 건넨다. 그리고 대화를 몇 마디 나눠보니 여주는 영호의 생각보다 꽤 괜찮은 직원이었다. 오늘부터 진행할 프로젝트의 방향과 목표에 대하여 제법 진지한 얼굴로 브리핑을 하는 모습이 아까 그토록 만취했던 여주랑 같은 사람 맞나 싶었다.
어느덧 시계는 오전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때마침 사무실 전화 벨이 울리고, 영호는 볼일이 생겨 급히 나가야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가 쇼핑백을 하나 꺼내 여주에게 내밀었다.
“선물입니다.”
작은 쇼핑백이 제법 무겁다. 뭔진 모르겠지만 선물이라고 하니 여주는 일단 다시 한번 영호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영호는 손인사와 함께 먼저 가보겠다며 사무실을 나섰다. 여주는 쇼핑백 속 물건을 확인하고 영호의 책상에서 포스트잇 한 장을 뜯어 메모를 남긴다. '발열 최강! 24시간 지속 핫팩' 잘 쓰겠습니다. 사장님.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부터 문자가 왔다. ‘여주 씨, 서영호입니다. 오늘 저녁에 술 한 잔 어때요?’ 여주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오늘은 진짜 진상 안 부릴게요. 저녁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