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주 씨, 안녕하세요. 저는 저승사자 이동혁이라고 해요. 염라대왕님의 명을 받아 모시러 왔어요.”
“이보세요.”
내가 여기 버젓이 살아있는데, 남의 병실에 들어와서 염라니 저승이니 얻다 대고 개소리야? 그는 묵묵히 내 말을 경청하다가 대꾸했다. 보통 이럴 때면 울며불며 살려달라, 데려가지 마라 애원하는 게 정상 아닌가? 이렇게 당돌한 망인은 또 처음이네.
“2020년 3월 28일. 오전 8시 20분. 집 앞 횡단보도에서 뺑소니 택시 차량에 치였고, 10분 뒤 구급차로 이송 중 과다출혈로 사망. 여기 서류 보니까 갈비뼈도 몇 개 부러졌던데 많이 아프셨겠어요?”
“그래, 네 말대로 뺑소니 사고 난 것도 맞고, 갈비뼈 부러진 것도 맞아. 그래서 지금 병원 침대에 누워있잖아. 여기 링거 안 보여?”
“네, 아주 잘 보이는데요. 그대로 한 번 일어나보시겠어요?”
욱신거리는 갈비뼈를 만지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제 뒤돌아보세요. 아, 이 푸두같이 생긴 게 저승사자놀이에 푹 빠졌구나. 나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 저승사자야. 이제 됐... 어? 난 분명히 일어났는데 침대에 누워있는 건 나, 이여주였다.
“이게 뭐야?”
“방금 말씀드렸잖아요. 나는 저승 사자고, 사망하신 이여주 씨 데리러 왔다고요. 그리고, 내가 몇 살인 줄 알고 자꾸 반말이에요?”
* * *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요?”
“염라대왕님께.”
근데 염라대왕이 병원 옥상에 계셔? 거기 가서 뭐 하는 건데? 나는 진짜 죽은 거 맞아? 이것저것 묻고 싶은 건 많았으나, 푸두 저승사자가 무서워서 입을 다물었다.
올해로 스무 살이 됐으니까 캠퍼스 커플도 해보고 싶었고, 친구들이랑 밤새도록 술도 마셔보고 싶었는데 모두 물거품이 됐다. 일단 그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서러운데, 혼자 남겨질 엄마를 생각하니 참고 있던 눈물이 쏟아졌다.
“갑자기 왜 울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재밌게 살면서, 엄마한테 효도했을 텐데. 고작 차 한 번 치였다고 죽었다는 게 너무 속상해요.”
“그럼 살아있을 때 진작하지 그랬어요.”
사람들은 왜 죽기 전에, 아니면 죽고 나서 후회를 하는 걸까요.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이런 노래가 나오는 거 아니겠어요? 근데 이제 와서 뭐 어쩌겠습니까, 이미 죽은 몸인걸. 다시 태어나길 바라야죠. 그리고, 이여주 씨. 아직 완전히 죽은 건 아니에요. 염라대왕님께 가면 살아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눈물 닦고 내 손 잡아 봐요.
...아까 반말 좀 했다고 엄청 정색하더니 의외로 다정한 구석이 있네? 그나저나 손은 또 왜 이렇게 따뜻한 거야. 사람 기분 이상해지게.
옥상 문을 열면, 사후 세계가 열리고 염라대왕님이 보일 거예요. 여주 씨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반말하지 말고, 예의 갖춰서 인사하시면 돼요. 그리고 너무 무서워하지 마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요. 그럼 파이팅!
***
***
“안녕하십니까.”
동혁이와 함께 머리를 조아렸다. 염라대왕은 인터넷이나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무서운 노친네인 줄 알았더니, 그냥 평범한 남자였다. 염라대왕이 내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꽃향기 실린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갑자기 찾아가서 많이 놀라고 힘들었을 텐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아, 염라대왕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저 갈비뼈가 부러져서 그런데 앉아서 들어도 될까요? 숨 쉴 때마다 아파서요.”
예의 갖추라니까요? 동혁이가 팔꿈치로 나를 툭 쳤다. 아니, 그럼 아픈 걸 어떡하라고? 참으면서 들어요? 염라대왕이 빙긋 웃었다. 동혁아, 난 괜찮으니까 잠깐 나가서 편히 쉬고 있어라. 내 금방 이야기 나누고 갈 테니. 네, 알겠어요. 동혁이는 한숨과 함께 땅 밑으로 꺼졌다. ...헐.
***
염라대왕이 손가락을 튕기자 잔잔한 클래식 음악과 함께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손을 뻗었는데 비가 닿아도 젖지 않는다. 이건 뭐... 계속해서 꿈보다 더 꿈같은 일이 눈앞에 펼쳐진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여주 씨, 당신이 부활할 수 있는 시간은 127일입니다. 그 안에 우리가 시킨 일을 무사히 해결하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고, 실패한다면 극락에 가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면, 사람들의 꿈을 이루어 주는 것인데 자세한 건 당신과 함께할 저승사자들이 안내해 줄 겁니다. 참고로, 127일 동안 정해진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부활하기 어려워집니다.
첫 번째, 거짓말하지 말 것. 두 번째, 누군가의 운명에 간섭하거나 거스르지 말 것.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합니다. 죽지 말 것. 만약, 여주 씨가 부활 기간 중 사망하게 되면 두 번 다시 기회는 없습니다. 언제나 신중한 태도로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이해하셨습니까?”
“그냥 궁금해서 여쭤보는 건데, 이거 혹시 꿈이에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아니오. 둘 중 하나로 대답하면 되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뭔 소리야. 이건 또. 아무튼, 결론은 누군가의 꿈을 이루어주돼, 거짓말 안 하고, 운명에 간섭 안 하고, 죽지 않는 세 가지 규칙만 지키면 된다는 거네?
일단 알겠어요. 뭐부터 하면 돼요? 염라대왕이 다가와 손가락에 옥색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 이건 부적과 같은 역할이니 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승까지 함께할 저승사자가 오면 떠나십시오. 그럼, 건투를 빌겠습니다.